Q. 예전 전래동화에 보면 '고려장'이라는 문화가 나오는데. 고려장은 언제부터 생겨났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장 풍습이 있던 고구려 때 박정승은 노모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그가 눈물로 절을 올리자 노모는 '네가 길을 잃을까봐 나뭇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두었다' 고 말합니다.박정승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하는 노모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몰래 국법을 어기고 노모를 모셔와 봉양을 합니다.그 무렵 중국 수(隋)나라 사신이 똑같이 생긴 말 두 마리를 끌고와 어느쪽이 어미이고 어느쪽이 새끼인지를 알아내라는 문제를 내며,못맞히면 조공을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박정승에게 노모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말을 굶긴 다음 여물을 주렴, 먼저 먹는 놈이 새끼란다."고구려가 이 문제를 풀자 중국은 또 다시 두번째 문제를 냈는데 그건 네모난 나무토막의 위아래를 가려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노모는"나무란 물을 밑에서부터 빨아올린다. 그러므로 물에 뜨는 쪽이 위쪽이란다."고구려가 기어이 이 문제를 풀자 약이 오를때로 오른 수나라는 또 어려운 문제를 제시했는데 그건 재(灰)로 새끼를 한다발 꼬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당시 나라에서 아무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는데박정승의 노모가 하는 말이,"얘야, 그것두 모르느냐? 새끼 한다발을 꼬아 불에 태우면 그게 재로 꼬아 만든 새끼가 아니냐?"중국에서는 모두 이 어려운 문제들을 풀자 “동방의 지혜있는 민족이다.”라며 다시는 깔보지 않았다 합니다.그리고 당시 수나라 황제 수 문제(文帝)는“이 나라(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 고 당부합니다.그런데도 이 말을 어기고 아들인 수 양제(煬帝)가 두 번이나 침범해와 113만명이 넘는 대군(大軍)으로도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에게 대패하고는 나라가 망해 버립니다.그 다음에 들어선 나라가 당(唐)나라인데 또 정신을 못차리고 고구려를 침범하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깨지고 당시 황제인 당 태종(太宗)은 화살에 눈이 맞아 애꾸가 된채로 죽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모의 현명함이 세번이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왕을 감동시켜 이후 고려장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그리스의 격언에, '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삶의 경륜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 주는 말입니다.가정과 마찬가지로 국가나 사회에도 지혜로운 노인이 필요합 니다.노인이 되면 기억력도 떨어지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집착하는 경향도 있습니다.그 대신 나이는 기억력을 빼앗은 자리에 통찰력이 자리 잡습니다.노인의 지혜와 경험을 활용하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는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웃어른을 공경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함은 누구나가 노인이 되기 때문입니다."천재가 경륜(徑輪)을 이기지 못하고경륜이 연륜(年輪)을 이기지 못한다."
Q. 중종반정의 구체적은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오사화 때만 해도 훈구파는 비교적 단일한 정치세력으로 연산군과 결탁하여 사림파를 몰아내었다.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씀씀이가 커지고 국가재정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정운영은 정상적으로 했고, 백성들의 삶도 아직 성종때와는 별 차이가 없었다.훈구파는 신수근, 임사홍 등을 중심으로 하는 궁중파와 유자광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부중파로 나뉘었다. 갑자사화 때 훈구파는 물론 사림파도 대거 화를 입었다. 그러나 연산군과 혈연 등으로 맺어진 궁중파는 소수였고 부중파가 다수였다. 궁중파인 신수근과 임사홍은 왕에게 아부하며 빌붙어 그의 은총을 믿고 많은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폭군에 빌붙으면서 전횡을 일삼는 궁중파는 극소수였고 사림파는 물론이고 훈구파의 다수인 부중파는 폭군인 연산군에게 등을 돌렸다.연산군은 사치와 사냥을 일삼고 유희에 빠지며 국정에 태만하고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사치성 사업에 따른 세금과 공납 증가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급속히 도탄에 빠졌다. 거디다 툭하면 숙청하는 등 반정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신료들은 본인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제일 중요한 문제는 연산군의 사치와 폭정으로 얼룩진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려면 반정에 가담해야 했다. 중종반정이 발생하자 상당수의 부궁파들이 슬쩍 반정에 가담했다.연산군일기를 보면 중종반정 며칠 전 연산군이 후궁들과 놀다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전비와 장녹수에게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하고 물건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연산군 본인도 반정이 일어나리라 미리 예측하였다.이조참판이었던 성희안은 풍자시로 간언했다가 한번에 종9품 부사용으로 좌천되자 박원종을 끌어들여 반정을 모의했다.박원종의 거사 동기를 "누이인 월산대군[13] 부인 박씨(승평부대부인)가 연산군한테 겁탈당했기 때문"이라고 아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연산군은 박씨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는 박원종을 보내 간호하게 했는데, 만약 정말로 간통 내지는 강간이 있었다면, 연산군이 일부러 그 사람의 남동생을 보내 간호를 시킬 리가 만무하다. 박씨가 임신 당하여 수치심에 자살했단 이야기도 근거는 없다. 이 임신 이야기의 근거도 연산군일기를 쓴 사관이 실록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소문이 있었다'라고 언급한 수준이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박씨에게 세자의 보육을 맡기고 곡식이나 포목과 같은 물품을 자주 하사하는 등 박씨에게 상당한 호감을 나타낸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백모로 많이 존대하는 수준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당시 사망당시 박씨의 나이는 51세에, 자신의 직손이 아닐지라도 이미 손자를 세명(파림군 이주, 계림군 이유. 전성부정 이리)이나 두고 있던 할머니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과연 박씨가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었을지조차 불확실하다.박원종이 중종반정에 참여한 실제 이유는, 연산군과의 알력 때문이었다. 당시 박원종은 연산군에게 유일하게 바른 말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박원종의 집안도 상당한 명문가였다. 박원종의 증조할아버지인 박석명은 태종 시절 총애를 받았던 문신이었고, 박원종의 할머니 심씨는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여동생이었다. 아버지 박중선은 세조의 눈에 띄어 세조-성종 연간간 병조의 사무를 처리한 권력자였다. 사실상 당시 가장 유력한 외척 중 한 명이 박원종이었던 것. 위에 나온 박씨에 대한 호감도 박원종의 총애로 이어졌다. 박원종이 연산군에게 간언을 해도, 연산군은 약간의 불평을 했을 뿐 그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벼슬을 올려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점점 날이 갈수록 폭정이 심해지고 패악을 부리게 되며, 연산군이 박원종 본인을 포함한 임금과 우호적인 관계자들까지 건드려 협박을 가하고 짜증을 내기 시작해, 박원종을 포함한 신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우려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고로 위협을 느끼게 된 박원종이 '이대로 계속 버티다가는 죽을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먼저 선수를 쳤다고 해석하는 게 더 옳다.반정에 부중파가 다수 참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지지했으므로 반정 이후 소수의 궁중파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훈구파가 그대로 정권을 잡았다. 이는 부중파였으며 연산군 시대 중신이었던 유자광이 반정 1등 공신이 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신수근과 동생인 신수겸과 신수영, 그리고 임사홍은 거사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제거당했다. 사람을 각자의 집에 보낸 다음 궁에서 부른다는 핑계로 꾀어내 전부 참살했다.반정 3공신인 류순정, 성희안이 김종직의 직계이므로 사림 역시 자리를 차지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혈연이나 학연관계에서 딱 떨어지는 개념이 아니다. 사림이 훈구가 되고, 훈구의 자제가 사림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광조인데, 5대조가 조선 개국공신 중 한 명인 훈구 공신 조온이다.[14]의외로 반정 당시 연산군은 도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결과를 받아 들였다. 궁을 장악한 반정 세력이 옥새를 요구하자 “내 죄가 중하여 이리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여라.”라며 순순히 내주었고, .교동에 유배될 때도 띠를 두르지 않은 점잖은 차림새로 나와 "내가 죄가 큰데 상(중종)의 덕을 입어 무사히 간다."라며 가마에 올랐다고 실록에 나와 있다. 이 전후에도 연산군이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저항한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