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은 언제 조성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낙안읍성 조성 경위를 살펴보면 성곽은 조선 태조6년(1397) 낙안출신,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양해공 김민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흙으로 쌓았고, 세종 6년(1424)되던 해부터 석성으로 쌓기 시작했으며, 석성으로 중수된 것은 그로부터 약200년 후인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한 이후라고 합니다. 읍성 전체 모양은 장방형으로, 성곽의 길이는 1,410m이고, 전체면적은 223,108㎥이고,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서로 연결된 문이 있고, 4군데의 치성이 있어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선조들의 우수한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낙안읍성은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 30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총 13점의 문화재 (국가지정 10, 도지정 3)를 보유하고 있으며,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Q. 중국의 공행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1차 아편전쟁(1839~42) 이전 광저우[廣州]에서 서구상인과 무역할 수 있는 특권을 중앙정부로부터 부여받았던 중국상인조합.이러한 상회를 '양행'이라고 불렀고, 이러한 상인을 가리켜 '행상'이라고 했다.17세기 중엽까지 이러한 상인들이 이론적으로는 13개가 있다고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늘 4개를 넘지 못했다. 이 제도는 1740년대에 성립되었다. 이 제도에 의해 광저우에 도착한 모든 외국선박은 행상의 감독을 받아야 했고, 행상은 외국상인들의 관세지불과 예의바른 행실을 보장해야 했다. 광저우가 유일한 대외무역항으로 개방되었을 때(1760), 광저우 행상은 외국인에게 차와 비단을 팔 수 있도록 허가받은 유일한 상인이었다. 비록 행상은 관리들에게 많은 돈을 강제로 바쳐야 했지만, 무평전과 같은 몇몇 상회의 행상들은 많은 재산을 축적하기도 했다.1720~22년 행상은 피로 맹세하면서 집단가격결정제도를 수립했는데, 이는 중국상인조합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 월해관감독(粤海關監督)의 지휘를 받으면서 행상들은 공행을 결성했다(1760). 공행이라는 말은 가격결정을 위한 연합을 의미하지만, 장사할 때 사용되었던 피진 영어(포르투갈어 등이 혼합된 중국의 상업영어)에 의해 코홍(Cohong)이라고 변형되어 상인 일반을 지칭하게 되었다. 행상은 광저우에서 집단적으로 대외무역을 독점했지만, 실제로 개개인의 거래행위에서는 상당히 자유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