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몽골의 고려 내정간섭 기관인 다루가치를 폐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다루가치는 '진압한다'는 뜻의 daru에 명사어미 gha와 '사람'을 가리키는 chi를 붙여서 '진압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이다.몽골족은 정복지에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통치했다. 고려에도 몽골이 침입한 초기부터 배치되었다. 처음 배치된 것은 제1차 몽골침입이 있었던 1231년(고종 18)이다. 몽골의 총지휘관인 살리타이가 철군하면서 서경(지금의 평양) 등 북계(지금의 평안도)에 배치하였다.〈원사 元史〉 고려전에 의하면, 이때 72명의 다루가치가 40여 개 성에 배치되었는데 이듬해 모두 고려인에게 사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다루가치가 배치된 성이 실제로는 14개였고 다루가치의 수도 훨씬 적었을 것으로 보며, 모두 살해되었다는 것도 당시 상황으로 믿기 어렵다고 한다. 이때 배치된 다루가치는 북계의 각 성(城)에 따로 두어졌던 것 같다.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이 결정되고 난 다음부터 몽골은 고려 왕경에 고려국사 전체에 간여하는 다루가치를 파견했다. 1270년(원종 11) 다루가치는 부(副)다루가치와 함께 파견된 이래 일정한 임기를 두고 계속 파견되었다. 이들은 원나라가 고려를 통제하고 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였다. 따라서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내정간섭을 했으며, 고려에 나와 있는 원나라 관원과 고려인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기도 했고, 원나라에 죄를 지은 고려인을 처단하기도 했다. 1278년(충렬왕 4)에 폐지되었다.
Q. 니탕개의 난이 무슨 사건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선조 16년(1583년) 1월 ~ 7월에 걸처 함경도 북부의 6진에서 벌어진 여진족의 변란을 일컫는다.이 당시 여진족 세력은 최대 3만명[2]에 달하는 무장 세력으로 조선 영토를 침공해 왔는데, 이는 임진왜란 직전 조선이 직면한 최대 규모의 전란이였으며, 조선은 이 이후 문제로 거론된 여러 방위 체제를 재검토하여 진관 체제에서 제승방략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조선은 세종 시기의 북방 개척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함경도 쪽 방위에 신경을 써 왔다. 4군 6진 중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4군을 폐한 이후에도(폐사군) 두만강 유역의 6진의 방위에 있어서는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김종서가 집필한 제승방략에 따르면 6진에는 봉수대가 총 82개, 수호처(순찰지)가 94곳, 후망(육상의 고정 관측 지점) 2, 해망(해상의 고정 관측 지점) 11개 등 극히 치밀한 방위 체계가 짜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이곳에 대한 방어 의지가 강경하였음을 뜻한다.그러나 문제는 당시 조선이 함경북도 일대의 지리적 특성과 부족한 인구로 인해 여타 지역처럼 단일한 진과 관만으로 자체 방어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진관 체제를 구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제로 제승방략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수호처가 매우 많고 해당 지역에서 순찰 도중 외침 발견시 즉각적으로 전투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함경도 북부의 인적 자원에 비해 방어할 지역이 매우 넓어 모든 요해처에 방위 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해당 지역의 토착병들은 지속적인 전투 대비로 인해 여타 지역에 비해 확실히 그 질적 수준에서 우위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해당 지역에서는 "남쪽 지방의 훈련된 군졸보다 우리 동네 여자들이 이곳 수비를 더 잘할 것"[3]이라는 식의 호언장담이 나돌았다는데, 이는 그만큼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전투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높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Q. 고구려 시대의 진대법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봄부터 가을까지 곡식을 대여하였다가 수확을 한 겨울에 갚게 하는 제도이다. 진은 흉년에 기아민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대는 봄에 미곡을 대여하였다가 가을에 추수 뒤 회수한다는 뜻이므로, 진대는 흉년이나 춘궁기에 농민에게 양곡을 대여 하는 것을 말한다.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펴나가던 중 194년(고국천왕 16)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크게 상하여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미곡을 나누어 준 기록이 있다. 같은 해 10월 고국천왕이 질양(質陽)에 사냥을 나갔다가 길 옆에 앉아 우는 자를 만났다. 그 연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신은 매우 가난하여 늘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부양하여 모셔왔는데 올해는 곡식이 자라지 않아 품팔이할 곳이 없어, 한 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어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국천왕은 왕인 자신의 잘못을 탓하고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또한 관리들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자립할 수 없는 자들를 널리 찾아 구제하게 하였다.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곡(官穀)을 풀어 가구(家口)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를 두어 곡식을 진휼 대여하케 하고, 겨울인 10월에 갚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