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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겸 성악가 강경원입니다

지휘자겸 성악가 강경원입니다

강경원 전문가
부산진구남성합창단
Q.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선수가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장기 달고 출전할 수ㅠ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금메달로 일제강점기 억눌려있는 국민의 가슴을 시원하게 터트리는 소식을 전해주신 영웅이죠
Q.  황국 중앙 총상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요약1898년 서울에서 창립된 시전상인(市廛商人)의 단체.시대 근대/개항기설립 1898년성격 경제단체, 상인단체유형 단체해체 1898년 12월설립자 구완희(具完喜)분야 역사/근대사내용전 군수 구완희(具完喜)가 경성의 각 시전상인을 회원으로 하고 전참정 조병식(趙秉式)을 회장, 전참봉 이종래(李種來)를 부회장으로 추대하여 만들었다. 설립 목적은 외국상인의 침투에 대항하여 민족적 권익을 수호하면서 그 속에서 시전상인의 독점적 이익을 수호,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첫째 외국상인의 상행위를 일정지역 내에 제한하고 일본상인·청상인(淸商人) 등 외국상인들로부터 보호되는 한국 시전상인들의 국내 시장영역을 설정하는 것. 둘째 농상공부의 허가인지(許可印紙)를 중앙총상회에서 위탁 관리하여 무명잡세를 일체 혁파하는 것. 셋째 각 항구의 물가의 고저(高低)를 관찰해 조절하는 것. 넷째는 대소 상인을 자본금에 따라 모두 의무적으로 입회하게 해 전국 상업을 통괄하는 일종의 상인협회(商人協會) 또는 상인조합을 설립하는 것이었다.이 상회의 조직체계는 회장 1인, 부회장 1인, 주무(主務) 2인, 서기 4인, 회계 4인, 사무(事務) 30인, 사법(司法) 5인, 경찰(警察) 25인, 검찰(檢察) 5인 등으로 방대하였다. 활동은 위와 같은 상업활동에 그치지 않고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더불어 자유·민권 신장을 위한 운동도 전개하였다.독립협회의 노륙법(孥戮法 : 처자까지 연좌하여 죽이는 법) 및 연좌법 부활저지, 자강개혁내각 수립요구(自强改革內閣樹立要求), 독립협회지도자 17인 석방운동, 독립협회 복설운동(復設運動), 황국협회(皇國協會)와의 투쟁 등 모든 자주민권자강운동(自主民權自强運動)에 적극 참여하고 지원하였다.이러한 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1898년 10월에 독립협회와 함께 외국상인의 침투를 저지하는 상권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2월에 독립협회와 함께 수구파 정부에 의해 탄압, 해산당하여 상권수호운동은 중도에서 좌절하게 되었다.
Q.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님에게도 스승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부따는 출가 후 3명의 스승을 만납니다 고행을 닦는 스승과 명상을 하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붓다는 이들에게 배우다 고행이란 방법으로 수행을 택했습니다. 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업을 걷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로부터 6년동안 고행수도에 들어갑니다. 단식은 기본이고 오물을 먹는 등 몸이 가죽만 남을 정도로 혹독하게 수도하였습니다
Q.  부여의 풍습이 고구려로 계승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는 건국신화 자체가 부여의 것과 완벽히 일치할 정도로 자신들의 정체성이 부여출신임을 숨기지 않았음.(그러나 이와 별개로 부여-고구려는 서로 앙숙관계였음.)백제는 국성부터가 "부여"이며,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기 전까지도 꾸준히 자신들이 부여의 후손임을 대외적으로 표방했음.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만 계승한 것은 아님.실제로 발해 무왕은 자신들이 발해의 풍습을 계승했음 또한 대외적으로 주장했음.고려는 아예 부여를 봉국으로 삼아버렸음.왕자에게 "부여공"이라는 제후 작위와 국명을 봉한 것.즉, 아예 부여가 자기 역사의 일부임을 표방하여 계승의 정통성을 다졌다는 거임.비록 조선이 건국되고, 고조선의 후예를 자처함으로서 부여가 주는 정통성과 상징성이 단절되었지만, 한국사 전반에 엄청난 상징성을 줬던 대단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음.여담으로 부여는 고조선과 동시대에 존재했으며, 고구려에 흡수되기 이전까지 동북아 패권국이었음.
Q.  조선 시대 붕당사에 있어서 동서남북인으로 나누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까
조선시대 탕수육이라는 중국의 새로운 메뉴가 들어오자 많은 신하들은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면서 많은 신하들이 이 탕수육을 어떻게 먹을것인가 논쟁을 벌였고그와중에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어야 한다는 동인과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어야 한다는 서인으로 나뉘게된다.동인은 평소에 거침없이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던 이황과 조식의학풍을 따랐으며서인은 이황과는 다르게 소심하게 탕수육을 찍어먹던이이를 당의 종주로 삼았다.처음에는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던 동인이 대다수였고서인의 세력은 작았다.따라서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게 정답인양 굳어졌는데이 방법을 주장하던 동인도 둘로 나뉘어졌으니온건파로서 소스를 붓기전에 상대에게 붓는다고 동의를 구하는 남인과과격파로서 그냥 포장지를 뜯자마자 바로 소스를 붓는 북인이다.광해군 시기 북인은 남인과 서인을 몰아내고 탕수육을 상대의 동의없이 막 소스를 부어 먹었으며 이는 서인들로 하여금크나큰 분노를 가지게 만든다.그러던 중 식사때 북인은 동의도 없이 소스를 붓다가 탕수육소스가아닌 짬뽕국물을 부어버리는 대사건을 일으켰으며이에 극도로 분노한 서인은 반정을 일으켰고 북인은 축출되며그 이후부터 탕수육에 소스를 동의없이 붓는 행위는패륜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서인반정을 불러일으킨 대참사. 이에 분노한 서인은 북인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된다.서인이 집권하며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게 정석이 된다.하지만 여전히 탕수육은 소스를 부어먹어야 제맛이라는 남인들이 있어 두 당은 열심히 싸웠고 이는 탕수육을 어떻게 먹는것이 옳은가라는예송논쟁으로 더욱더 격화된다.예송논쟁. 탕수육을 한번만 찍어먹는게 예법에 맞는가소스에 푹담궈 세번은 담궈먹어야 예법에 맞는가를 두고 서로격하게 입배틀을 벌였다.당시 집권군주였던 숙종은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걸 좋아하는인현황후와 그냥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버리고 먹는걸 좋아하는장희빈의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며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걸 공인했다가 다시 소스에 찍어먹는걸공인하는등 갈팡질팡한다.그러한 와중에 서인과 남인의 갈등은 점점 극으로 치닫게 된다.그와중에 정권을 잡은 서인은 조금만 담그고 먹는 노론과오랫동안 푹담그고 먹는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노론은 탕수육을 그렇게 푹 담궈서 찍어먹으면 애시당초 소스를부어먹는것과 뭐가 다른가라며 소론을 공격했고소론은 소스를 부어먹는것도 그렇게 나쁘지않다면서남인에게 우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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