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구려 태조왕의 생애와 업적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의 제6대 왕으로, 이름은 궁, 아명은 어수. 모본왕의 뒤를 이어 7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 동안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동해와 살수까지 국경을 확장했다. 태조왕대의 영토 확장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로 인해 고구려는 이후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계루부의 왕위계승이 확립되었다.
Q. 고려시대 있었던 노비안검법에 대해 궁금한게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수많은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거나(사성정책), 혼인을 통해 자신의 사돈으로 만드는 등 적극적인 호족 포섭 정책을 통해 후삼국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게 딱 통일된 그 때까지만 좋았다는 것. 29명의 부인들에게서 25명이라는 많은 수의 아들을 두었던 만큼 당장 왕건 본인의 말년 무렵부터 후계 구도를 놓고 호족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고, 태조의 적장자였음에도 상대적으로 세가 약했던 외가 탓에 간신히 태조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혜종은 왕규의 난에서 보듯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급급하다가 요절하고 만다.혜종의 뒤를 이은 정종 역시 호족들의 기득권을 뒤흔들기 위하여 북벌을 기치로 내걸어 서경 천도를 시도했지만 급사 크리.그렇지만 정종의 뒤를 이은 동생 광종 역시 포기하지 않고 호족들을 억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그리고 이러한 시도 중 하나로 등장한게 바로 노비안검법.이 당시 호족은 후삼국끼리 싸우는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로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당시 관념상 노비는 당연히 재산으로,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으로 자리잡았고, 이는 필시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눌러야 할 것들이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광종이 내건 명분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였다. 이를 통해 호족의 세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양인 계층으로 포섭된 해방 노비들은 세금을 내게 됐으므로 그야말로 일석이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