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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겸 성악가 강경원입니다

지휘자겸 성악가 강경원입니다

강경원 전문가
부산진구남성합창단
Q.  고구려 태조왕의 생애와 업적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의 제6대 왕으로, 이름은 궁, 아명은 어수. 모본왕의 뒤를 이어 7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 동안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동해와 살수까지 국경을 확장했다. 태조왕대의 영토 확장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로 인해 고구려는 이후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계루부의 왕위계승이 확립되었다.
Q.  유태인은 왜 많은 사람이 학살당한건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로마 시대 기독교에는 고난과 박해를 받으면서 종교적인 성장을 하였습니다. 로마가 지배함으로 기독교는 세계로 번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생각과는 달리 자기들만의 사상과 종교를 고집하는 종족이었습니다. 유대교 사상은 교리가 기독교와 흡사하였지만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선택받은 민족이라 믿었습니다. 로마로부터 핍박과 전쟁속에서 저항을 하며 유대교 사상을 지켜왔지만 로마제국앞에서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자결하여 오래전부터 학살이 진행되었습니다. 1930년대의 독일에서는 5%도 안되는 유대인들이 가진 재산이 독일 총 재산의 90%를 차지함으로 유럽인들이 유태인들을 추방하는 시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경제적인 힘으로 자구책을 강구해 나갔고, 그들의 모습을 싫어했던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특히나 독일인 중에서 유태인을 싫어했던 사람은 당시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였습니다.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독일뿐만 아니고 유럽에서도 적극 지지를 보여주었는데 프랑스, 영국에서도 박수 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유태인의 학살은 이미 예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기독교인의 증오심들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불살라진 것입니다. 그것은 유럽 전역에 만연한 기독교 국가의 이기심을 대변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로마 제국처럼 강력한 제3의 제국을 꿈꾸던 히틀러는 로마식으로 인사를 하고 로마의 문장과 철 십자가를 앞세우고 유럽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더니 결국은 그 수많은 유태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몰아내어 죽음의 골짜기로 던져 많은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Q.  고려시대 기인제도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때 실시된 제도. 지방 유력자의 자식이 수도에 머물러 있게 한 조치로, 지방 세력 유력자를 인질로 잡은 신라의 상수리 제도의 후신이다. 기인 제도와의 차이점은 상수리 제도는 지방 유력자 본인이 수도에 부임해야 했지만 기인제도는 향리의 가족을 머물게 한 제도라는 점이 다르다.겉으로야 온갖 방법으로 포장했지만 기인제도의 본목적은 지방 세력의 자제들을 사실상의 인질로 붙잡아 둠으로써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고려는 송악 호족인 왕건이 다른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업고 궁예를 몰아내며 만든 나라였기 때문에 호족들의 힘이 무지하게 셌고, 이 때문에 왕건은 정략 결혼을 통해 다른 호족 집안들이랑 전부 사돈을 맺어가며 어떻게든 이들을 통제하려 들었다. 그 결과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가 탄생했다.
Q.  신라 문무왕의 업적은 뭐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문무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한때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의 전면전까지 승리하여 최후의 승자로 남을 수 있게 한 군주. 한 마디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한 지도자로 삼국통일을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공을 막아낸 업적이 있기 때문에 역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태자 시절부터 즉위 후까지 문·무 양면에서 활약해서 왕명도 '문무왕'(文武王)이 되었다. 한마디로 화전양면전술의 달인. 거대한 국력을 가진 세계제국 당나라와의 전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화전양면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문무왕의 뛰어난 지략에 기인한 바가 컸다.
Q.  고려시대 있었던 노비안검법에 대해 궁금한게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수많은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거나(사성정책), 혼인을 통해 자신의 사돈으로 만드는 등 적극적인 호족 포섭 정책을 통해 후삼국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게 딱 통일된 그 때까지만 좋았다는 것. 29명의 부인들에게서 25명이라는 많은 수의 아들을 두었던 만큼 당장 왕건 본인의 말년 무렵부터 후계 구도를 놓고 호족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고, 태조의 적장자였음에도 상대적으로 세가 약했던 외가 탓에 간신히 태조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혜종은 왕규의 난에서 보듯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급급하다가 요절하고 만다.혜종의 뒤를 이은 정종 역시 호족들의 기득권을 뒤흔들기 위하여 북벌을 기치로 내걸어 서경 천도를 시도했지만 급사 크리.그렇지만 정종의 뒤를 이은 동생 광종 역시 포기하지 않고 호족들을 억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그리고 이러한 시도 중 하나로 등장한게 바로 노비안검법.이 당시 호족은 후삼국끼리 싸우는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로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당시 관념상 노비는 당연히 재산으로,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으로 자리잡았고, 이는 필시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눌러야 할 것들이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광종이 내건 명분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였다. 이를 통해 호족의 세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양인 계층으로 포섭된 해방 노비들은 세금을 내게 됐으므로 그야말로 일석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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