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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기태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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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전문가
보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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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타이타닉호의 건조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RMS 타이타닉호는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이 운영한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입니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첫 항해 중에 1912년 4월 15일 빙산과 부딪쳐 침몰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1514명이 사망했습니다. RMS 타이타닉호는 벨파스트에 있는 해럴드 앤 울프 사가 1909년 건조를 시작하여 1911년 5월 31일 진수하였습니다.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을 중점에 두고 설계되었습니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서 방수구획이 있었습니다. 방수 격벽은 16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었고 2구역(뱃머리부터 4구역)까지 침몰해도 침몰하지 않고 떠오르지 않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격벽은 제어실에서 원격 조정으로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타이티닉은 가라앉지 않는 배로 소문났습니다. 그러나 방수 격벽은 완전히 밀폐된 구역이 아니고 상부의 주 간판에 구역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로 인해 타이타닉호가 사고가 났을 때 격벽 한계치를 넘어서면서 넘쳐나는 물이 차례대로 침범하게 되었고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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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류 최초 남극점 발견 과정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남극은 지구에서 개발되지 않은 미지의 땅이기도 하고 기회의 땅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얼음층으로 덮여 있는 남극은 그 면적이 미국의 1.4배에 이르고 광대한 땅 곳곳에는 풍부한 광물자원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11년부터 1912년 사이에 있었던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과 영국 탐험가 스콧이 이끄는 양국 탐험대의 도달점 도달을 위한 경쟁입니다. 그 경쟁에서 앞선 아문센은 최초 남극점 탐험의 영예를 얻었지만 영국 스콧팀은 귀환 도중 전원 사망이라는 비운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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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에도 출생 신고를 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요즘처럼 별도의 출생신고제도가 없었습니다. 대신에 호주가 쥐띠 토끼띠 말띠 닭띠의 해에 작성해서 관에 바치는 호구단자에 출생자의 이름을 올리고 이를 근거로 관에 보관중인 호적대장에 이름이 기입되면 그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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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관련 기사를 보고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벨상은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ㆍ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 등이 있습니다. 각 상별 최초 수상자는 물리학상은 빌헬름 콘라트 륀트겐(1901년)이고 화학상은 야코뷔스 헨리퀴스 판트 호프(1901년)이고 생리학ㆍ의학상은 에밀 아돌프 폰 베링(1901년)이고 문학상은 쉴리 프뤼돔(1901년)이고 평화상은 앙리뒤낭/프레데리크 파시(1901년)이며 경제학상은 랑나르 안톤 시틸 프리슈/얀 틴베르헌(1969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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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마도 징벌은 조선의 승리가 맞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만도 정벌은 1차 고려 창왕 때 박위가 출정하여 밀양에 당도하여 왜선 50척을 불태우고 대마도에 당도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고려 포로 100여명을 구출하였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가 기승을 부리자 태조 이성계는 대마도 2차 정벌을 명하고 군을 출병시켰으나 특별한 사료가 없습니다. 대마도 원정을 결정한 태종은 대마도 사신을 함경도로 보내고 왜구와 내통한다고 의심되는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 355명 충청도 203명 강원도에 33명으로 나눠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달했습니다. 3차 정벌은 세종 1년(1419년)에 상왕 태종의 명에 따라 이종무를 대장군으로 하여 출병하여 병선 227척과 병력 17285명이었고 전투식량은 65일분이었습니다. 모조리 도망가고 없자 작은 적선 129척을 빼앗아 20여척을 나두고 모두 불살라버렸으며 1939호를 불살랐고 114명의 목을 베고 21명을 사로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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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를 세운 인물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입니다. 우리나라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서로 진출하려는 지정학적 위치상 교량적 위치에 놓여있다 보니 무려 391회나 되는 외침을 받아 왔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알 수 있는 서적들이 소실되거나 약탈당해 고대사를 연구할 수 없을 뿐더러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어서 더욱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사기나 일본의 서기를 참고할 수밖에 없지만 다 자국의 관점으로 기술되어 있어 우리 고대사를 아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BC1000년경의 유적만 출토된다는 일본 사학자들의 식민사관에 따라 BC2333년의 단군은 신화라고 하였으나 해방 이후 출토된 유적과 유물은 BC2500년경의 것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단군은 신화가 아닌 역사적 실체인 것입니다. 규원사화에 의하면 단군은 1명이 아닌 1대부터 47대까지 존재했던 왕(단은 신단수로 제사장이고 군은 왕으로 제정일치 사회임을 보여줌)의 명칭이라고 봐야 합니다. 제1대 단군왕검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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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 초기에 정도전이 숙청을 당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봉 정도전은 여말선초의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탄생한 신진 사대부들 중 역성혁명파로 절의파인 포은 정몽주와는 달리 개국을 주장하여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의 플랜을 짰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왕권강화를 강조하던 태종 이방원의 눈에는 삼봉 정도전은 신권을 강화하려는 존재라고 여겨져 결국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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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역사는 정확히 누구에 의해서 기록되고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과거의 승정원의 역할을 대통령 비서실에서 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는 대통령 비서실을 중심으로 각 수석들과 연계하여 대통령 기록물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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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시인인 황진이가 지은 시조는 모두 몇 편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활동했던 기생으로 기명은 명월 양반의 서녀라는 설과 맹인의 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신분이 기생이었기 때문에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야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리학적 지식도 뛰어났고 다작으로 수많은 시와 시조 그림을 남겼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거나 대부분 남녀의 애증을 다룬 것으로 저평가 되고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습니다. 등 10여편이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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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임진왜란 발발하고 일본군은 왜 돌아갔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은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쇼 요시모리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에 조공을 바칠 것과 조선 국왕이 직접 환영식에 참석할 것 등을 요구했으나 대마도주는 무리한 요구라고 판단하여 조선통신사 파견만을 조선에 건의합니다. 이에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사신을 보냈으나 히데요시는 제때 만나 주지 않는 등 허세를 부렸고 정명향도를 주장하였습니다. 명나라를 치려니 조선도 협조하라는 것입니다. 이후 정명가도(명을 치려니 길을 터주라는 뜻)였다가 조선왕이 들어주지 않자 정한론으로 바뀌게 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고니시 유기나와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모리 등 3개군으로 나누어 빠른 전개로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으나 이후 명나라군의 참전과 조선의 의병들의 궐기로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명과 일본의 강화조약을 시작됩니다. 명의 신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기나와 간에 강화한 회담 내용은 조선과 명에서는 애초에 지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히데요시의 요구조건은 1.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2.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3.일본과 명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조선 8도 중 4도를 스일본에 이양한다. 5.조선 왕자와 신하를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회군)를 석방한다. 7.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다 등이었습니다. 이후 몇 가지를 덧붙여 강화를 맺고 일본은 물러갔습니다. 이유는 일본 내의 권력다툼이 심해졌고 고니시와 가토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차후 히데요시 죽음 이후에는 서로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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