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일본은 왜 에도막부에서 쇄국정책을 했다가 메이지유신을 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에도막부 시절 일본이 쇄국정책을 시행한 이유는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여 내부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기독교가 빠르게 퍼지는 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막부 권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지방 영주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는 것도 막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외국과의 교역을 극히 제한하고, 일본인의 해외 출입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약 200년 이상 국문을 닫은 상태로 유지했습니다.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벌이자, 더 이상 쇄국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을 이끌고 내항한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막부는 개항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막부의 권위는 급격히 약화되었고, 국내외적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일본은 체제 전환을 모색하게 됩니다.결국 1868년 메이지유신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바뀌고, 신분제를 철폐하며 군대, 산업, 교육 등 전 분야에서 근대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이는 일본이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피하고, 오히려 아시아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쇄국에서 개국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외교 변화가 아니라 일본의 생존과 주권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 선택이었습니다.
Q. 유적지 발굴하는것을 보면 호미로 천천히 파던데 왜 그런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유적지를 발굴할 때 호미와 같은 작은 도구로 천천히 파는 이유는 매우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고고학 발굴 현장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에 형성된 유물과 유적들이 묻혀 있는 장소로, 이들 대부분은 오랜 시간 흙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매우 취약한 상태입니다. 삽이나 포클레인처럼 크고 강한 도구를 사용하면 유물을 손상시키거나 원래의 배치 상태를 훼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물의 위치, 깊이, 주변 토양의 층위 등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시대 구분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이런 정보들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합니다.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주로 호미나 붓, 작은 스푼 등을 사용하여 흙을 조금씩 걷어내며 유물을 찾아냅니다. 이렇게 정밀하게 발굴을 하면 유물의 상태를 최대한 보존할 수 있고, 유물 주변의 미세한 흔적까지도 관찰하여 역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천천히 발굴하는 과정은 단순한 ‘파내기’가 아니라, 과거의 흔적을 읽고 해석하는 중요한 학문적 과정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정밀하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Q. 노르망디 공국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노르망디 공국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style)이었습니다. 특히 11세기부터 12세기 초반에 걸쳐 이 지역에서는 노르만 로마네스크라고 불리는 독특한 양식이 발전하였고, 이는 중세 유럽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대 로마 건축 양식을 계승하여 발전한 것으로, 두꺼운 석벽, 반원형 아치, 기둥과 주랑, 작은 창문 등이 특징입니다. 노르망디에서 발전한 로마네스크 양식은 이러한 전통적 요소 위에 기하학적 단순성과 견고함, 그리고 위엄 있는 외관을 더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양식은 종교적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당대 교회와 수도원의 건축에 널리 적용되었습니다.노르망디 지역에서는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 교회와 라 트리니테교회가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며, 이 두 건물은 정복왕 윌리엄 1세와 그의 왕비 마틸다에 의해 건립된 쌍둥이 수도원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교회들은 반원형 아치 구조와 두꺼운 벽, 질서 있는 기둥 배열로 당시 노르망디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며, 이후 잉글랜드의 교회 건축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Q. 노르망디 출신 성직자들은 중세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노르망디 출신 성직자들은 중세 유럽 교회, 특히 11세기 이후 서방 교회의 개혁과 정치적 변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한 지역의 종교 지도자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구조 개편, 도덕적 개혁, 그리고 왕권과 교권의 관계 정립 등 다양한 방면에서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11세기 중엽, 당시 가톨릭 교회는 성직 매매나 세속 권력의 개입 등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르망디 출신 성직자들은 클뤼니 개혁 운동과 같은 교회 정화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교회의 도덕성과 자율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랑프랑크(Lanfranc)와 앙셀무스(Anselm)는 노르망디 출신으로, 각각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어 잉글랜드 교회 개혁에 앞장섰고,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긴밀히 이어가며 교황권 강화에도 기여하였습니다.또한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후, 노르망디 출신 성직자들이 대거 잉글랜드 교회 내 요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 역할을 넘어서 왕의 정치적 고문으로 활동하며, 왕권과 교회가 협력하는 체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노르망디 출신 성직자들은 정치와 종교를 연결하는 중간자로서도 중요한 위상을 가졌습니다.뿐만 아니라, 노르망디 지역은 중세 초부터 교육과 학문이 활발히 이루어진 곳으로, 그 출신 성직자들 역시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앙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로, 신앙을 이성적으로 해석하려는 철학적 시도를 통해 중세 지식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이와 같이 노르망디 출신 성직자들은 단지 지역 교회를 넘어서 중세 유럽 교회 전반에 걸쳐 개혁과 발전을 이끈 핵심 인물들이었습니다.
Q. 피라미드 지하에는 거대 구조물(기둥)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피라미드 지하에 거대한 구조물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이집트 기자 지역의 대표적인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학설과 추측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조사와 과학적 탐사를 바탕으로 말씀드리자면, 확실히 밝혀진 거대한 지하 구조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실제로 피라미드 내부에는 지하로 연결되는 구조물이 일부 존재합니다. 이 공간은 암반을 파서 만든 방으로, 아직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으며, 정확한 용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곳이 원래 왕의 매장 공간으로 계획되었으나 나중에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의례적 목적을 위한 상징적인 공간일 수 있다고 추정합니다.더불어 최근에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사실들도 일부 밝혀졌습니다. 2017년에는 ‘뮤온 탐사 기술’을 통해 쿠푸왕 피라미드 내부에서 길이 약 30미터 이상의 미지의 공간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이 공간은 지하가 아니라 피라미드의 중심부 위쪽, 대회랑 위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아직 그 용도나 구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발견은 피라미드에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구조물이 더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합니다.결론적으로, 피라미드 지하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하실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공간들이 일부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이 "거대한 지하 구조물"이라는 표현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향후 고고학적 연구와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더 많은 비밀이 밝혀질 가능성은 있으나, 현재까지는 신중한 해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