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교황을 선출하는게 콘클라베 라는데, 유래와 선출방식은 어떻게 되나?
콘클라베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입니다. 이는 "cum clave(열쇠와 함께)"에서 유래해 '열쇠로 잠근 방'을 뜻합니다. 이는 추기경들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 모여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13세기부터 제도화되었습니다.교황이 선출되면 추기경들이 바티칸에 소집되어 코늘라베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첫날 미사 후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외부와 차단된채 투표를 시작하여 특정 후보가 2/3 이상 득표해야 교황이 선출됩니다. 이 과정은 오전, 오후 두차례씩 투표를 반복하며, 결정이 나올 때까지 계속됩니다.
Q. 수메르신화 내용에서, 지상의여신인 이난나가 지옥에서 벌거숭이로 상태로 사망한 이유는?
아난나(이슈타르)는 남편 두모지를 구하거나 권력과 지혜의 힘을 얻기 위해 언니 에레쉬키갈이 다르리는 명계(지하 세계)로 내려갔습니다. 명계에 들어가기 위해 아난나는 7개의 문을 통과할 때마다 자신의 옷과 장식품을 하나씩 벗어야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알몸이 디어 에레쉬키갈 앞에 서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힘, 지위, 자아, 권능까지 모두 벗겨져 완전히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이 상태에서 아난나는 언니의 질투와 명계의 규칙으로 심판을 받아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Q. 사도세자 사건은 왜 지금까지도 해석이 엇갈리는건가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사도세자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일어난 사건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는 영조, 혜경궁 홍씨, 정조 등 가족과 공식 기록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또다른 주장은 사도세자가 붕당의 갈등에 따른 희생양이라는 주장입니다. 영조와 노론 세력에 의해 경종의 암살설이 떠도는 상황에서 사도세자가 소론들과 가까이 지내는 등의 행동으로 노론의 집중 견제를 받아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외에도 부자간의 갈등, 즉 세대 차이와 소통 부재 등이 원인이 되어 비극적인 죽음이 뒤따른 것이라고 것입니다.
Q. 한국에 유독 무속인이 많은 이유는 뭘까요?
한국에서 유독 무속이 많은 이유는 무속이 한민족의 가장 오래된 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외래 종교인 불교, 유교, 기독교가 유입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무속은 선사시대부터 민간 신앙으로 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외래 종교가 유입된 이후에도 백성들의 길흉화복, 치병, 점복 등 현실적으로 민중 속에 존재했습니다. 조선시대 이후 억압과 배척에도 불구하고 무속은 개인적, 가족적 문제 해결이라는 현실적 기능을 계속 유지해 왔고, 현대에서도 굿, 점, 치병 드응로 일상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Q. 독립협회의 설립시기와 주요 활동은 무엇인가요?
독립협회는 개화관료와 지식인이 중심인 정동구락부가 1896년 7월 독립문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을 회원으로 가입시키면서 독립협회가 민중중심으로 창립되었습니다.독립협회는 독립신문과 독립협회회보, 토론회, 강연회 등을 통해 민중의 계몽 운동을 바탕으로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다양한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예를 들어 독립협회는 1898년 자주 국권 운동으로 구국운동 상소문, 만민공회를 열어 러시아 등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자유권 보장과 국민주권을 바탕으로 한 참정권 요구 등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박정양 내각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과 함께 관민공동회를 열어 헌의 6조를 황제의 재가를 받게 하였습니다. 특히 중추원 관제를 개편하여 의회를 설치하려 하였습니다.그러나 보수파들이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음모론을 확산시키고,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충돌시키면서 결국 1989년 해산되게 됩니다.
Q. 중세 유럽판금갑옷기사들이 다른 아시아나 중동군사와 싸울때는 왜이리 무기력했나요
중세 유럽의 판금 갑옷 기사들은 이슬람 군사들과 싸울 때 여러 이유로 무기력했습니다. 우선 유럽 기사들은 무거운 판금 갑옷과 중무장 기병 중심의 전투 방식입니다. 반면 이슬람과 아시아 군사들은 기마 궁수, 경무장 기병, 빠른 기동 전술를 활용했습니다. 또한 멀리서 활이나 화살을 공격하며 접근전을 피했습니다. 게다가 오스만, 몽골, 중앙아시아 군대 등은 일찍부터 화승총 대포 등 화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강력한 복합궁 등 원거리 무기를 사용해 근접전에 유리한 판금갑옷을 입은 유럽 기사들이 전투에 불리했습니다. 게다가 아시아, 중동군은 넓은 초원과 사막에서 기동성이 뛰어나 유럽 기사들이 적응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세 유럽의 기사들은 아시아, 중동 병사들과 전투에서 매우 불리하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Q. 십자군 전쟁당시 이슬람 갑옷은 어떤 식이었나요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 군사들의 갑옷은 주로 가죽 갑옷, 러멀레 갑옷, 스케일 아머, 그리고 체인메일을 착용했습니다. 상류층이나 정예병은 철제 러멜러나 체인 메일을 입었지만 일반 병사들은 가족이나 천으로 된 경갑을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더운 중동 기후 때문에 십자군의 무거운 판금 갑옷보다는 기동성에 유리한 가볍고 움직임이 편한 갑옷을 선호했습니다. 이는 빠른 기동에 유리했습니다. 다만 투구는 철제 또는 가족으로 제작되었으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사슬코이프가 사용되었습니다. 방패는 주로 원형 가족 방패가 많습니다. 즉 이슬람 병사들은 유럽 기사들보다 가볍고 다양한 재질의 갑옷을 입었으며, 기동성과 더운 기후에 적합하게 무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