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미국의 구매관리자지수가 중요한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제조업 부문 구매관리자의 의향을 묻는 리서치를 통해 측정합니다. 앞으로 6개월을 내다보고,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구매관리자가 더 많은 원재자를 구매할 의향이 있다면, 수치가 높아지겠죠.수치상 50을 넘으면, 경기가 좋아질 것을 예측하게 되고,50 미만인 경우, 경기가 위축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구매관리자지수는 경기 선행 지표이므로, 투자자들에게는 아주 영향력이 큰 발표입니다.투자자는 현재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투자하기때문에, 이미 투자자들의 투자성향이 예상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예상치보다 높게 나오는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투자하게 되겠지요.우리나라는 미국 경기선행지수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때문에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었죠.채찍효과 이론에서 미국이 채찍의 손잡이, 우리나라는 채찍의 끝이라고 생각해 왔기때문인데요.채찍 손잡이가 조금만 흔들려도, 끝은 아주 크게 요동치기때문이죠.그러나 많은 변화가 있었고, 우리나라가 더 이상 채찍 끝이 아니라는 투자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어쨌든 경기선행지수 중 구매관리자지수는 투자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투자공식의 하나입니다.
Q. 세종대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왜 한글을 만들었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의 아버지는 태종 이방원인데요.태종은 이제를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이었던 이도를 왕세자로 임명합니다.이유는 충녕대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즐겨하고, 정치를 알고, 의견을 잘 제안했다고 하네요.태종은 이도에게 임금 자리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세종대왕을 도왔다고 합니다.태종은 개국공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해 두었고, 세종대왕은 상왕 아래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스트레스도 엄청 났을 텐데, 그래서인지 음악에 아주 능했다고 하는군요.세종대왕은 한글창제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악의 기틀을 마련하셨는데요.박연을 기용해 아악을 정리하셨고, 정간보(음의 시가 표기법) 편찬, 중국산 편경의 국산화, 악서 찬정, 여민락, 보태평, 정대업 같은 음악 제정이 제위기간에 완성되었습니다.세종대왕은 절대음감을 가지고 계셔서 궁중 악사의 연주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실 정도였다고 하네요.장영실을 기용해 천체를 살피는 기구와 농사기술도 개발하셨죠.도량형을 통일하여 널리 동일하게 사용하게 했고,농사직설, 대마도정벌, 4군6진, 집현전, 고려사 편찬, 법전 편찬, 해시계 양부일구 제작, 물시계, 자격루 발명, 총통, 신기전, 자격루 개발, 칠정산 편찬까지 뭐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네요.훈민정음의 필요성은 집현전의 학문적 분위기에 더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데요.훈민정음 해례본은 이를 잘 드러내 주는데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고, 모음은 천지인을 본떠 만들었다고 밝혀놓았는데요.자음이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으니, 과학적이고,모음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천, 지, 인을 본떠서 기본자 '∙', 'ㅡ', 'ㅣ'를 만들었다고 하니 철학적입니다.기본자를 한 번 합성하여 초출자를, 두 번 합성하여 재출자를 만들었다네요.하늘과 사람, 하늘과 땅의 조화를 의미하는 조합들이랍니다. 'ㅏ'는 사람과 하늘의 조화, 'ㅗ'는 하늘과 땅의 조화 뭐 그런 의미를 담았다는 것이지요.이런 음가와 구강의 모양을 과학적으로 본떠는 것은 세종대왕의 절대음감도 한글 창제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어쨌든 세종대왕의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애민사상이었을 것이고,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효과적으로 삶에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언어 문제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효행록, 삼강행실도(그림으로 교육적 자료를 배포) 등의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언문의 필요를 더 크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한자와 그림으로 그려서라도 백성들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라셨고,집현전이 확대되면서, 지혜가 있고 총명한 이들을 발탁하셨는데,이들의 학문적 노력에서도 소리 글자인 언문이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진 것 같습니다.결국 훈민정음, 한글창제는 한자로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다 담아내지 못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닌가?또,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너무 지나쳐서 창제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과연 신하들이 모두 반대했을까?제 생각에는 최만리와 정창손의 반대 상소 역시 충심이었다고 생각됩니다.그리고 반대하는 신하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도 생각합니다.이미 태종께서 개국공신들을 제거하시고, 새시대를 열 수 있는 신하들을 조정에 발탁하셨기때문에, 세종의 업적을 도운 신하들이 훨씬 많았지 않았을까요?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32년 재위기간에 저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Q. 금리인상의 스텝의 종류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전문가입니다.금리가 %(퍼센트, 1/100)로만 결정하게 되면 그 폭이 너무나 큽니다.만약 1조원에 대한 연금리 1%라고 하면, 연 100억의 이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죠.0.1%마저도 연 10억의 차이가 발생합니다.그렇기때문에 금리를 말할 때, 한 단계 더 낮은 BP(Basis Point)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요.소숫점 아래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25BP가 최소 금리 변동분인데요.이걸 베이비스텝(Baby Step)이라고 합니다.25BP는 0.25%라는 의미이죠.그 다음은 0.5%인 50BP인데 , 소숫점을 제거하고 나니 의미가 좀 크게 다가오죠?이게 빅스텝(Big Step)입니다.이게 무슨 빅스텝이 되겠습니까?그러나 미국 연준은 1년안에 몇 번이나 금리인상을 할 수 있을까요?8번 정도 가능한데, 빅스텝으로 8번이면, 4%, 400bp입니다. 이제 좀 빅스텝다워보이나요?그런데 2022년 FOMC(Federal Open Market Committee, 연방공개시장위원회)는 0.75%, 75BP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4번의 자이언트스텝을 밟았죠.미국 경제가 미중경제전쟁, 팬데믹, 우크라이나전쟁, 방산업침체, 세계평화(전쟁 수익 감소),미국채(공공연히 채무불이행도 언급했고, 연방 예산도 통과되기 어려운 진통을 겪었습니다),경기침체, 소비자물가상승, 부동산경기침체 등 종합적인 경제위기에 직면했습니다.자이언트스텝은 1994년 이후 28년만에 밟았는데, 그것도 4번 연속으로 밟았으니, 위기감이 커질 수 밖에 없죠.
Q.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는지금의 전등사, 처음 지을 때 이름은 진종사삼국시대인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이 지금의 자리에 진종사眞宗寺를 창건했고, 고려 충렬왕 때 송나라에서 가져온 대장경을 보관하게 하고,옥등(玉燈)을 시주해, 전등사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정족산에 위치해 숱한 전란에도 건재할 수 있었나 봅니다.
Q. 베토벤은 청각장애인 맞은가요? 노래를 어떻게 들을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베토벤이 청각장애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청력을 상실했는 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존재하네요.미국 오하이오주 켄트주립대 음악학 교수인 시어도어 알브레히트는 베토벤이 왼쪽 귀는 들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군요.베토벤은 1827년 세상을 떠났고,1824년에 교향곡 제9번의 초연 때 뿐만 아니라, 1826년 3월 현악4중주 제13번 내림나장조(작품 130)를 마지막으로 지휘했을 때까지 완전히 귀가 안 들린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네요.대부분 그의 말년에는 청각이 전혀 기능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기때문에,그런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베토벤이 청각을 잃기 전에 이미 많은 작품을 작곡했기때문에,귀가 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던 동기라고 주장하죠.1798년쯤 귀에 이상을 느꼈던 것으로 보이고,1801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3년 전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어'라고 처음으로 고백했고,이듬해에는 '세련된 대화도 불가능하다. 마치 사라진 사람처럼 따로 살아야 해. 다른 사람보다 더 정확해야 하는 이 감각의 결함을 인정할 수 없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청각이 그의 대화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게 합니다.그리고 '대화책'이란 것을 들고 다니면서 글로 써서 대화를 했는데, 이런 그의 행동도 청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그러나 알브레히트는 1798년 청력을 잃기 시작한 베토벤은 1818년부터 이 '대화 책'을 들고 다녔고,베토벤의 대화 책 중 1823년 작성된 한 장에는 베토벤이 자신의 청력 감퇴에 대한 한 낯선 사람의 충고를, '목욕과 시골 공기는 많은 것을 향상시킬 수 있다. 너무 일찍 기계 장치(나팔형 보청기)를 사용하지 마라. 그것들의 사용을 자제하는 방식으로 나는 상당히 내 왼쪽 귀를 보존해왔다'고 적었는데, 베토벤이 '가능하면, 글을 통한 대화가 더 낫고 청각은 예비가 될 것'이라고도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 베토벤이 여전히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다고 주장하네요.청력을 서서히 잃어가면서 베토벤이 느낀 충격과 이로 인해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더욱 작곡에 몰입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청각장애가 베토벤이 죽기 전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의 장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청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