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에도 치과 치료가 존재하였었나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네, 조선시대에도 충치 질환을 치료하였습니다.《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을 보면 치아에 통증이 있을 때 치료하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1. 치아가 삭아 구멍난 곳을 약으로 메꿈- 오늘날의 아말감과 유사2. 치통이 있는 곳에 약물을 붙이는 경우3. 치아를 닦는 경우4. 잇몸을 지지는 경우5. 뜨거운 것을 입에 머금고 있다 식으면 뱉는 경우등의 치료법이 있었습니다.위의 치료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기가 지날수록 치아 질환의 치료에서, 치아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참고]- 장영희, 2010, 《과 의 치료질환 인식에 대한 비교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Q.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의 배경은먼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기 전, 조선은 일본의 간섭 아래 갑오개혁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이때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승리하였고 조약으로 요동반도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나친 중국 진출에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세 나라가 함께 문제를 삼았습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합니다.이 일로 일본의 활동에 브레이크가 걸렸고, 조선에서도 그 영향력이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조선은 러시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왕후 민씨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만났으며, 내각도 모두 친러 세력으로 교체되었습니다.일본은 상황을 반전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친러정책의 중심 역할을 하는 왕비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을미사변이 발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