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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장세영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장세영 전문가입니다.

장세영 전문가
강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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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는 현재 부통령제도가 없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는 제1공화국 시기에 부통령 제도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내각제 개헌에 따른 제2공화국의 출범으로 부통령제는 폐지되었습니다.부통령과 국무총리는 전혀 다른 직책입니다. 부통령은 선거로 선출되지만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부통령은 행정집행권이 없으며, 국무회의에서 출석ᆞ발언권이 없습니다. 반면 국무총리는 행정부 2인자로서 국무회의 부의장 역할을 수행합니다. 특별히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국무총리는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므로 더더욱 부통령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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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삼국시대 건국 순서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기원전 57), 고구려(기원전 37), 백제(기원전 18)의 순서로 삼국이 세워졌습니다.신라는 옛 조선의 유민들이 형성하던 사로 6촌의 지배층들이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세웠습니다.고구려는 해모수와 유화의 아들인 주몽이 부여를 빠져나와 졸본에 터를 잡고 그 일대에 있던 "나"집단을 통합하여 세웠습니다.백제는 전승에 따르면 주몽의 아들(또는 양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남하하여 지금의 서울에 기반을 잡고 세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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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광해군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광해군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정통성에 집착했습니다. 즉위 초에 명나라가 광해군을 국왕으로 승인하지 않자 막대한 뇌물을 사신에게 주고 승인을 받았습니다. 또한 왜란의 피해가 아직인데 궁궐을 많이 건축하여 민생을 피폐하게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군용 재정을 궁궐 건축에 돌려 쓰기도 했습니다.또한 영창대군을 의식한 나머지 계축옥사라는 무리수를 두었고, 자신의 생모를 왕후로 높이고 인목왕후는 격하시켜 서궁에 유폐하여 스스로 유교적 가치관과 윤리를 저버린 폐륜아가 되었습니다.더욱이 광해군은 자신을 지지했던 북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북인은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배제하고 제거하여 독단적인 정치 운영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광해군이 각 붕당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광해군 시기에 선혜법이라 하는 대동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방납업자 및 지배층 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탓에 대동법의 확대 시행에 반대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법을 아예 폐지시키려고까지 했습니다.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폐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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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했다는 현덕왕후 이야기가 정사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실록»에는 당연히 그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해당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야사집인 «연려실기술»에 나옵니다.이 얘기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 꿈에 현덕왕후 권씨가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 하였습니다. 세조가 놀라 벌떡 일어나니 세자가 죽었다는 소리가 들립니다.그런데 실제로는 단종 보다 의경세자가 2달 먼저 사망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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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테오도르 1세 황제는 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을까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화한데는 그의 신앙심과 더 이상 이교도 출신 귀족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로마 제국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임을 인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기독교는 탄압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배교자 율리아누스 같은 이교도 황제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일 뿐이었습니다.테오도시우스 1세는 니케아주의를 신봉하는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니케아주의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고 신이 삼위일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한데서 비롯됩니다.아무튼 테오도시우스 1세는 니케아주의를 통한 보편 교회의 확립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의 이단들을 처벌ᆞ추방하였습니다.한편 그는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황제가 시행한 일들에 암브로시우스가 도덕적ᆞ종교적 비판을 가할 때마다 자신을 낮추고 주교의 의견을 존중하였습니다. 황제가 주교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이교 출신의 귀족이나 관료들의 지지가 필요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즉, 황제를 지지하는 또 다른 세력이 형성된 것이지요.황제의 친기독교적 행보는 이교 세력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보편교회의 확립을 방해할 이교도와 이단 세력이 제국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입니다.즉,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기독교 국교화는 그의 개인적인 신앙심과 그를 지지할 새로운 세력의 등장으로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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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함마드의 그림을 보면 얼굴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슬람 측에서 무함마드는 인간이자 예언자입니다. 그의 얼굴을 묘사하면 자칫 신처럼 여겨져 숭배될 수 있기 때문에 표현하지 않거나 가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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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신약성경에서는 11조를 금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글쎄요... 신약에서도 당시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내는 모습이 나옵니다."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누가복음 18:12, 새번역).또 예수는 율법학자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태복음 23:23, 새번역 / 누가복음 11:42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옴)즉 예수는 당시의 엘리트 집단이 율법을 지키면서 율법의 정신은 무시하고 살아감을 비판합니다. 동시에 율법의 내용은 물론, 그 정신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이죠.따라서 신약성서에서 십일조를 폐지하거나 금지하였다는 내용은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드려도 되고, 안 드려도 됩니다. 애초에 헌금에 이름을 붙여 내는 게 이상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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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카노사의 굴욕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카노사의 굴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의 성직서임권 투쟁에서 비롯된 사건입니다.카롤루스 대제가 수립한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면서 바이킹, 이슬람, 마자르족이 침입하여 교회와 수도원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교회는 약탈과 침입에서 살아남기 위해 군대를 지닌 귀족과 가까워져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제후들은 교회의 재산을 빼앗앗고, 성직자들은 제후의 봉신이 되었습니다.한편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황제들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야만 했는데 이때 이용한 것이 성직자입니다. 즉, 성직자를 황제의 봉신으로 삼아 다른 영주들을 견제하고자 하였죠. 더욱이 성직자들은 혼인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죽으면 하사한 영지는 세습되지 않고 황제에게 반환되었습니다.그러나 개혁적 성향을 지닌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의 세속화를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교황은 세속 군주의 성직자 임명을 금지하였습니다.그러자 하인리히 4세는 반발하여 보름스에서 주교들을 소집하고 교황을 거짓 성직자로 규정하며 폐위를 결정했습니다. 교황은 이에 맞서 황제를 파문[가톨릭 교회 공동체에서의 추방]하고 폐위하였습니다.이와 같은 대립은 제국 내의 황제 반대파를 결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황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카노사성에 머물고 있는 교황을 찾아가 눈 덮인 바닥에 맨발로 3일간 서서 교황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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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사나 차례를 지낼때 향이나 촛불을 켜는 이유가 뭘까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옛사람들은 사람이 혼백으로 이뤄진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혼은 정신을, 백은 육신을 말합니다.사람이 죽으면 혼은 승천하여 신명이 되고 백은 땅속에 묻혀 지하로 내려갑니다. 제사 때 분향하는 것은 향을 피워 그 연기로 혼이 오는 길을 표시하는 것입니다.반대로 묘에 술을 붓는 행위는 지하에 있는 백을 불러올리는 행위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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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허준은 어느관직까지 올랐었나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허준은 «선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내의원 수의였습니다. 내의원 수의는 어의 가운데서도 으뜸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직책입니다.본래 허준은 서자 출신인데다 의관이기 때문에 정3품 당하관 직인 내의원 정이 최고 직책입니다. 그러나 선조 23년인 1590년에 광해군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정3품 당상관의 품계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사례는 흔치 않았기에 관료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그 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 3등에 책봉되었고, 양평군의 군호와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습니다. 이 또한 관료들이 지나친 처사라며 들고 일어섰으나 선조는 무시하였습니다.따라서 살아있는 동안 허준이 최고로 높게 받은 품계는 종1품 숭록대부이며, 관직은 내의원 수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광해군이 정1품 익사공신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하였습니다.한편 조선시대 의학서인 «의림촬요»에는 허준이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고 나옵니다만,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서술하였는지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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