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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장세영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장세영 전문가입니다.

장세영 전문가
강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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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신라의 진덕여왕은 즉위하고 1년간 대리청정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런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내용의 출처가 어딘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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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고려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는 등 왕실의 권위가 상당히 추락해 있었습니다. 또한 이자겸ᆞ척준경 등이 현실적인 이유로 여진족의 금나라에 사대할 것을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이는 고려의 자부심에 타격을 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한편 이자겸이 쫓겨났으나 그의 일당인 척준경은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그리고 이자겸이 쫓아낸 신료들이 서서히 복귀하는 등 매우 혼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인종은 자신을 지지해 줄 세력이 필요했고, 침체된 분위기를 전환할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서경 출신의 정지상을 중심으로 척준경의 탄핵이 이뤄지면서 인종은 그들에게 주목합니다.그리하여 개경이 아닌 서경에 주목하고, 서경 출신 관료들을 우대하기 시작한 것이죠.그러나 서경 출신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국제현실관이나 정치감각도 매우 황당했죠. 그러자 인종은 점점 서경 세력을 멀리하고 개경의 기존 지배층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서경 세력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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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의 연호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거죠?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호는 제왕의 통치기간에 이름을 붙인 것을 의미합니다. 연호의 시작은 중국 한나라의 황제 무제 때입니다. 무제를 기점으로 중국 황제들은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황제가 다스리면서 시도때도 없이 연호를 고치는 일이 잦았습니다. 결국 명나라 때에 일세일원제, 즉 한 황제에 하나의 연호로 원칙을 정하면서 줄곧 지켜지게 됩니다.따라서 연호란 황제국에서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기에 조선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오개혁기에 "개국" 연호를 사용하여 조선의 건국시점인 1392년을 기준으로 연도를 계산하였습니다.이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으로 나라 이름을 고친 뒤 "광무" 연호를 쓰고, 뒤이은 순종이 "융희"를 연호로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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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태조왕건은 부인이 엄청 많앗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일까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많은 사람들이 고려가 일부다처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왕실과 지배층 일부에서나 그랬을 뿐입니다. 엄밀히 말해 고려는 법적으로 일부일처제 국가입니다.태조 왕건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호족들과 연합하고 우호관계를 맺고자 혼인이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가 29명의 부인으로 나타난 것이지요.그러나 왕건이 모든 호족들에게 이와 같이 한 것은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혼인을 피한다든지, 또는 자식을 갖지 않는 등 자신에게 있어 효용 가치가 없는 호족들까지 포용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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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상비군은 어느시대부터 생기게 되었고 어떠한 체제를 갖추었나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의 상비군 제도는 선조 26년인 1593년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시작되었습니다.원래 훈련도감은 왜란을 맞아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임시조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필요에 따라 상설조직으로 변화하였습니다.훈련도감의 병종은 조총수인 포수, 창검을 쓰는 살수, 활을 쏘는 사수의 삼수병 체제로 구성되었습니다. 나중에 여진의 위협이 커지면서 마군이 추가되었습니다.훈련도감이 확대되면서 조직도 변화했습니다. - 도제조 1명(의정 관직이 겸직)- 제조 2명(병조ᆞ호조판서 겸직): 도제조는 훈련대장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대신 지휘를 맡으며, 제조와 함께 훈련도감 운영의 전반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종2품 대장 1명, - 종3품 중군 1명- 정3품 별장 1명- 종4품 천총 2명- 정3품 국별장 3명- 종4품 파총 6명- 종6품 종사관 4명- 종9품 초관 34명이훈련도감의 지휘부를 구성했습니다. 그 외에도 600여 명의 편제 인원들이 있었습니다.훈련대장은 실질적인 지휘권과 도감 장관(將官)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정치적 비중이 상당한 직책이었습니다.병력 편제는 33초를 6사로 묶고, 다시 좌ᆞ우 양부로 조직하여 운영하였습니다. 즉 마병(=사수) 7초(1초 119명) 833명, 포수 20초(1초 122명) 2,440명, 살수 6초(1초 123명) 738명 모두 합하여 33초에 4,011명으로 병력이 구성되었습니다. 훈련도감의 병력은 폐지 때까지 대략 5천 여명을 안팎으로 유지되었습니다.한편, 도감 소속 군인들은 의무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상비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급여가 지급되었습니다.말이 있는 군인의 경우 쌀 10말, 콩 9말을 지급받았으며 말이 없는 경우에는 쌀 9말을 지급받았습니다. 훈련도감에 처음 들어오면 쌀 4말을 받았고, 재주를 시험하여 최대 9말까지 받았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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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초 이자겸의 난이 발생했을 때 내의(의관)였던 최사전이 인종에게 이자겸이 설치는 이유는 척준경을 믿기 때문이라 하여 척준경을 설득하도록 하였습니다.때마침 이자겸의 난 과정에서 인종 밭밑에 활을 쏘고, 궁궐에 불을 지른 책임 소재를 두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졌습니다.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따르면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종놈이 척준경의 종에게 "너의 주인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척준경이 왜 나한테만 뒤집어 씌우냐며 대노했고, 이자겸이 화해를 시도하나 실패하였습니다.따라서 국왕의 존재를 부정하고, 궁궐을 태운 책임의 소재를 둘러싸고 이자겸과 척준경이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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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중방과 교정도감의 차이점은?.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중방은 2군 6위의 상장군 및 대장군이 모여 회의하는 합좌기구입니다. 무신집권기 초반에 중방은 무신 집정들이 국정을 운영할 때 활용되었습니다.그러나 중방이 있었다는 것은 결국 무신집권자 개인이 다른 세력에 견제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정중부가 경대승에게,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제거되는 모습은 그들의 권력기반이 상당히 취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방의 장군들이 이러한 쿠데타를 묵인했기에 정권의 교체가 이뤄졌을 테니까요.반면 교정도감은 무신집권자 개인의 권력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교정도감은 고려 희종 5년인 1209년에 최충헌이 설치한 것으로, 최충헌을 살해하려고 청교역의 역리와 승려들이 모의한 사건이 발각된데서 비롯됩니다.최충헌은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교정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본래 도감은 임시 관청에 붙습니다. 따라서 그 역할이 다하면 사라져야 함에도 교정도감은 무신집권기 끝까지 존속했습니다.즉, 기존에 있던 국가조직이 아닌 별개의 조직을 만들고, 그 기구의 최고직인 교정별감에 취임하여(형식상 왕의 임명을 받지만) 국가의 모든 일을 홀로 좌우한데서 합좌기구인 중방과는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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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정치적 사건인 경신환국은 어떠한 사건 이였나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신환국은 조선 숙종 6년인 1680년 경신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집권 세력인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대신 집권하게 되었습니다.당초 이 사건은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시호를 받아 기념잔치를 벌였는데, 마침 비가 내려 국왕의 허락 없이 유악(기름먹인 천막)을 가져다 쓴 데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유악사건은 실록에 나오지 않고, 조선시대 야사집인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실은 아닌 듯 보입니다.실상 경신환국은 숙종 초기 왕권의 불안정성과 남인의 지나친 독주에 따라 발생한 사건입니다.숙종 초반에는 현종 시기 제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숙종의 외가인 청풍 김씨 등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그 와중에 숙종의 건강이 좋지 않자 유력한 종친들을 중심으로 불순한 움직임이 엿보였습니다. 또한 남인은 군권을 확실히 장악하고자 도체찰사부의 설치를 단행했습니다.이에 서인 측에서 김석주ᆞ김익훈과 같은 훈척 세력들이 남인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고변을 바탕으로 사건을 확대해, 숙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유력한 종친들을 제거하고 남인 대부분을 축출하였습니다. 이것이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하는 경신환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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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명나라가 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에 수도가 무너진이유를 더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명은 내부적으론 이자성의 농민 반란을 진압 중이었고, 대외적으론 청과 대치중이었습니다.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킬 상황이 아니었습니다.더욱이 명나라 수도는 농민반란군의 공격으로 무너졌고, 명의 장수들이 청군에 투항하면서 청군이 중국 내부로 진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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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중국은 성리학이 나온나라인데 왜 정작 중국은 전제군주제 엿을까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학이 전제군주제를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역대 왕조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지 않았을 겁니다.유교는 가족 윤리에서부터 시작해 국가로까지 확장되는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식이 부모에 효를 다하듯이, 백성은 어버이인 임금에게 충성과 효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임금은 자식같은 백성에게 자애로워야 하는 것이고요.이렇듯 자연스레 사회질서를 유지시키고 신분질서를 정당화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유교가 군주제를 지향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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