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서울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많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양도성은 유네스코에 등재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한양도성은 유네스코 등재기준의 항목에 부합하는 것들이 있습니다.오랜시간동안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지역 내에서 일어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계획 또는 조경 디자인의 발전에 있어 인간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보여주는 것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명의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가 되어야 할 것인류역사의 중요한 단계들을 예증하는 건조물의 유형, 건축적 또는 기술적 총체, 경관의 탁월한 사례여야 할 것사건이나 살아있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뛰어난 보편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되어야 할 것 입니다.한양도성의 주요 가치로는 평양성과 개경도성의 연장선상에서 독창적인 한국식 도성 형식을 갖추며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가 결합된 포곡식 성곽, 그 내부에 궁궐, 종묘, 사직, 행정시설, 시장 시설 및 주거지를 포함하고 있는 대규모의 도유 산성입니다.또, 축조 장시 조선시대 도성 형식의 문루와 성곽의 원형이 잘 남아있고, 현존하는 세계수도의 성곽유산 중 전체 길이가 18.627km로 규모가 가장 크며 현재 10.8km의 구간이 원형 또는 복원된 상태로보존되며, 각 시기별로 축조 형태와 수리기술의 역사적 증거가 기록과 함께 실물과 유적으로 남아있습니다.한반도의 지형 체계를 고려해 입지가 결정됐는데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석재로 축조된 성곽의 안쪽에 판축층을 조성하는 등 지형과 일체화된 축조 기술을 보여주며, 성곽은 자연적인 지세를 따라 지형을 잘 활용해 축조되어 내사산의 굴곡과 도성의 안팎이 함께 조망되는 역사도시경관을 보여줍니다.전국 각 지역 백성들의 공역으로 성곽을 축조해 구간마다 담당 장인의 실명이 새겨져있고 조선왕조 오백년동안 문루와 성곽을 주제로 집필한 문학작품도 도성풍경을 묘사한 회화작품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Q. 추사 김정희의 서체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는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는데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습니다. 더 소급해 안, 위시대의 여러 예서체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바탕으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졸박청고한 추사체 입니다.졸박청고는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함을 말합니다.글씨 자체의 예술성과 독창성 면에서 추사 김정희가 독보적인데 제사때 쓰이는 병풍 등을 보면 추사체로 쓰여진 병풍이 많습니다.
Q. 향수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유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향수는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화장품 중 나라로 약 5천년전부터 종교적 의식 및 교감을 이루는데 사용되었던 것이 시초입니다.기록으로 남은 시기 기준으로 최초라 할수 있는 향수는 고대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고체형태가 선호되며 , 이집트 신전 벽면에 이집트 문자로 각종 제조법과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형태의 변천으로는 향수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고체인 인센스, 사쉐가있었고 인센스 이후 오일 향수를 거쳐 오늘날 형태의 알코올 형수가 자리잡았습니다.1656년 루이 14세가 gantier-parfumeur의 길드를 유럽 최초로 인정하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며 중세 유럽풍 향수의 발상지는 남프랑스의 그라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사용되는 재료 역시 그곳을 기준으로 두며, 아시아의 향이나 각종 이국적인 재료도 사용했습니다.오늘날 알콜이 들어간 최초 향수는 1709년 근세시대 독일 쾰른에서 요한 마리아 파리나에 의해 발명되었고, 19세기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향수 회사가 설립, 19세기 후반 화학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함에 따라 합성 향료가 등장합니다.이로 인해 천연 향료의 향기를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입수하기 쉬운 몇가지 합성 향료를 조합해 극도로 유사한 향기를 재현했습니다.
Q. 1948년 제주 4.3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삼일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한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희생당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이에 3월5일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민, 관 합동 총파업이 단행되는데 이 파업에는 3월 13일까지 166개 기관단체의 4만 1211명이 참여, 미 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지목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으며 본토에서는 응원경찰을 대거 파견하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단원들까지 제주에 들어와 곳곳을 장악합니다. 이들은 파업 주도 세력 등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 고문한 뒤 이 가운데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 , 이로인해 총파업은 3월 18일 종식되나 미군정은 제주도 군정장관 등 고위관리들을 극우 성향의 인물들도 교체해 나가는 등 강경책을 지속합니다.그러자 분노한 도민들은 국우파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 미군 축출과 경찰 타도 등을 외치기 시작했고 이에 미군정은 1947년 8월 15일을 기해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 이를 치하기 위해 도민들과 도민 지도자들은 한라산으로 모여들게 됩니다.당시 미국은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정, 이에 좌파 세력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면서 전국적으로 2.7투쟁을 전개, 미 군정은 당시 반미 감정이 높았던 제주도민에 대해 집중적인 공세를 가합니다. 1948년 4월 3일 자정 무장항쟁이 시작되는데 제주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약 350여명은 도내 20여개의 경찰지서 중 11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합니다.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 개편을 단행, 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해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된 인민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이에 위협을 느낀 미군정은 9연대에 진압작전 출동을 명령하는 등 병력을 증강, 부산 등 타 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명의 경찰을 파견, 제 9연대장인 김익렬에게 강경 진압을 명령하나 김익렬이 이를 거부하자 유격대와 협상을 명령, 그 결과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해 72시간 내 전투 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으나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은 평화협상을 거부한 것은 물론 방화사건 등 제주도 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련의 사건들을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조작했고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물어 김익렬을 해임,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해 강경 작전을 준비합니다.유격대와 제주도민들은 5.10총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고 그 결과 제주도 북제주군 갑구, 북제주군 을구 등 2개 선거구과 과반수 투표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되었고 이때 전국 투표율이 94.9%였으나 제주도 전체 투표율은 62.8%에 그칩니다.이를 미군정은 이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해하는 불순 세력의 음모로 판단, 6.23재선거를 시도하나 이마저도 실패,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나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군 작전지휘권은 미군에 귀속되어있었고 수도관구경찰청 소속 경찰관 800명이 제주로 파견되었습니다.그해 10월 11일 정부는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 해안에서 5km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 이때부터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 그해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은 물론 소개령에 의해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습니다.제주 4.3사건 희생자 대부분은 이 초토화작전이 전개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 까지 약 5개월동안 발생했습니다.1949년 3월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선무공작이 전개되며 한라산에 피힌해 있던 1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하산이 시작되었고 당시 하산한 이들의 대부분은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이었는데 여성만 51%에 달했습니다.그러나 이 방침은 지켜지지 않았고 토벌대는 하산민 가운데 유격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색출 작업을 벌여 1660명을 군법회의에 회부, 이 군법회의는 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도 밟지 않았고 판결문도 없는 상태에서 사형, 무기형, 징역 15년 형 등 중형을 선고, 이때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제주비행장에서 총살, 나머지 형을 받은 사람들은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어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습니다.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이승만 정부가 전쟁 직후 전국의 형무소 수감자와 예비검속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학살을 벌였고 이때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4.3 수형자들은 정치범이란 이유로 불법 처형되었으며 제주도 내 4개 경찰서에 구금된 예비검속자들도 대거 학살되었습니다.이후 1952년 제주도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해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며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만에 끝이 납니다.
Q. 조선시대 때 노비도 양반이 될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비가 상민으로 면천하는 방법 중 국가의 기득권을 위협할 만한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활약하는 방법, 나라에 큰 돈을 기부하는 방법이있었으나 그런 사건은 일생에 여러번 있는 것이 아니였으므로 현실적으로 노비가 면천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또 속오군에 지원하는 방법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신설된 속오군은 병농일치제에 따라 평상시에는 농사와 무예훈련을 하다, 유사시 소집되어 국가 방어에 동원되는 체제로 부자 2대에 걸쳐 평생동안 군대에 복무해야 양인으로 면천종량될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