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작품에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대표 미술 작품으로는 이중섭의 싸우는 소, 흰소, 투계 등이 있으며 김환기의 월광, 영원의 노래, 산월, 무제 등이 있습니다.
Q. 단종 복위운동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문종이 재위 2년 3개월만에 죽고 어린 12세의 왕세자가 즉위하자 이 때부터 조정 안에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됩니다.어린 왕의 보필을 맡은 이는 영의정 황보 인, 좌의정 김종서 등 문종의 고명을 받은 원로대신과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출신의 소장문신이었습니다.그러나 원로대신들은 이미 칠순 고령으로 정치 문제에 왕성한 정력을 경주할수 없었고 소장문신들은 아직 관위가 낮아 국가 대사에 직접 참견할수 없었는데 이때 왕의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이 단종의 심복 대신을 제거하고 정권 찬탈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10월 계유정난을 일으킵니다.이 정변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필하는 황보인, 김종서 등의 대신을 주살, 제거하고 자기의 정권 찬탈의 야망을 달성한 폭력행사로 윤 6월 수양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그러자 과거에 세종, 문종에게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문관은 무관인 유응부, 성승, 박쟁 등과 모의 , 상왕을 복위시킬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Q. 유관순님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이었던 유관순은 만세시위에 참가, 연이어 3월 5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 그 뒤 총독부가 임시휴교령을 내려 이화학당이 폐교하자 3월 8일 열차편으로 천안으로 돌아옵니다.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교회와 청신학교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 천안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 이러한 노력으로 조인원, 김구응 등이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개신교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해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 군중을 모았으며 당일 모인 수천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맹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습니다.1919년 3월 당시 천안군 목천면에서는 이종성 등의 주동으로 3.1운동 만세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되지 못했고,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교회 예배가 끝난 뒤 마을 속장 조인원 , 지역 유지 이백하 등 2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경성의 상황을 설명, 이어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 목천 연기, 청주, 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의 한 사람이 되어 다른 연락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운동 참여를 설득했습니다.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고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힌 유관순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해 범죄를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 이후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습니다.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 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으며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점령을 규탄, 항의하며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했습니다.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 옥안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해 고문을 당했습니다.
Q. 과거에 있었던 동학운동은 어떤 목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운동을 일으킵니다.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해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었고, 이어 1884년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납니다.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납치, 1884년 갑신정변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나 청나라군에 의해 밀려남으로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고 청나라와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됩니다. 민씨 정권에서 청나라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나라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합니다.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과 고동은 친청세력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하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화되며 곳곳에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발생,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