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대동여지도는 조선의 경계 정비와 국토 관리에 어떤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지도의 각 첩에는 한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포괄하며 해안선 도서, 산과 하천의 지형, 지방 군현 등이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있습니다.지도의 제 1첩에는 방안표, 범례인 지도표와 지도유설, 경도오부지도 등과 함께 조선의 최북단인 온성, 종성, 경원, 일대의 지도가 수록되어있습니다.각 군현간을 잇는 도로에는 10리마다 방점이 찍혀 있어 군현간 거리 측정이 가능하며 각 군현 안에 영아, 읍치, 성지, 진보, 창고, 목소, 봉수, 능침, 방리, 고현, 고진보, 고산성, 도로 등이 표시되어있습니다.대동여지도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이동하며 장사를 해야 했던 상인들이 많이 사용했습니다.
Q. 일본이 명성왕후를 죽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폐기하고 조선 정부에 친일 내각을 구성합니다.전쟁에서 북양군을 화해시킨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조서의 자주, 독립 및 요동 반도와 타이완섬 할양, 전쟁배상금을 받아내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3개 열강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합니다.그동안 러시아와 우호적인 외교를 해왔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자주 불러 조-러 간의 공조를 논의, 인아거일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이에 따라 친일 내각에 대한 축출을 단행, 일본 공사관 및 일본인 고문단의 지지를 받던 어윤중, 김윤식 등 친일성향의 관료들이 고종과 마찰, 박영효가 주도한 조의연 파면 등에 책임을 물어 축출되었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됩니다.그러자 친일 대신이었던 박영효는 명성황후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 명성황후의 암살을 모의하나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유길준의 내부고발로 인해 실패하자 일본으로 도주합니다.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 혐의로 수배되며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중앙에서 쫓겨나게 되어 일본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며, 망명한 박영효의 말에 따라 일본은 조-러 간의 비밀협약 의혹을 점점 신빙성있게 여기게 됩니다.이에 따라 일본의 향후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 내각과 정계, 육해군부 내에서 갑론을박이 오가는데 이때 유신지사이자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오랜 정적이었던 다니 다테키의 추천을 받아 새로이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가 조-일 외교의 전면에 등장, 배후로 추정되는 일본 당국 관계자들은 미우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 국면을 전환하고자 합니다.
Q. 중세시대의 처형제도는 어떻게 집행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세시대 형벌 집행에서 현대와 달리 방화 및 농작물 절도죄는 중형으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죄의 유무를 판단했는데 오늘날처럼 형사 사법제도나, 경찰이 없었고 지역사회가 법과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어 범죄에 대한 처벌도 기독교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3가지로 불의 시련, 물의 시련, 분쟁의 시련 세가지가 있었으며 자신들을 무죄로 선언해 주실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시련이라는 과정으로 시험에 응했습니다.불의 시련은 용의자가 3미터의 길이의 손에 붕대를 감고 뜨거운 쇠를 들고있어야 했고 3일 후 그들은 법정에 출두해 그 손을 보여주며 죄의 유무를 확인받았는데 만약 상처가 아물 징후를 보이거나 상처가 없으면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또 찬물에서 감사를 받은 사람들은 잠수하기 전 발목과 발을 묶은 상태로 수영을 시작하면 무죄로 간주, 피고인에게 물이 끓는 큰 솥에서 돌을 제거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3일이 지나 그의 손이 낫기 시작했다면 무죄가 되었습니다.사소한 절도는 사회적 낙인에서 신체적 고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범죄로 당시 절도죄는 벌금형이었습니다.그러나 모든 신상을 공개했고, 큰 도둑은 교수형이나 손이나 발을 절단하기도했습니다.방화는 중형으로 다스렸는데, 대체로 사형 중 교수형에 처했습니다반역은 가장 무거운 형이 집행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목을 걸어 나무에 매달았고 죽으면 교수형 나무에서 내린 후 목을 자르고 신체부위를 절단해 각각 먼 곳으로 보내졌습니다.살인 역시 심각한 범죄 중 하나로 판단하여 여성은 목을 매거나 목을 졸라 죽인 다음 화장했습니다.농산물 절도는 중범죄로 손을 자르거나 귀를 잘라 공개적으로 처벌했습니다.
Q. 우리나라의 설날은 왜 신정과 구정으로 나뉘어진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구정은 예전의 정월, 신정은 새로운 정월을 말하며 정월은 음력 기준 한해의 첫 달을 말합니다.이렇게 분류된 것은 달력의 양력, 음력과 관계가 있습니다.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음력을 기준으로 살아왔기때문에 우리 전통적인 설날의 기준은 음력 기준2월에 존재하는 구정입니다.그러나 대한제국시절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양력 문화가 들어오게 됩니다.양력은 일본과 서양이 사용했는데 한국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전통의 음력 설날은 구정, 일본의 문화인 양력 설날은 신정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우리나라의 것을 옛 것으로, 일제 자신들의 것을 새로운 것이라며 폄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Q. 유도에서 -78급,+78급이 있던데 어떻게 분류되는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체급은 스포츠에서 서로 비슷한 체중의 선수끼리 대결하도록 나둬 둔 등급을 말합니다.유도의 체급 구분은 남자의 경우 60kg이하, 66kg이하, 73kg이하, 81kg이하, 90kg이하,100kg이하,+100kg(이상)으로 7개 체급이며 여자는 48kg이하, 52kg이하, 57kg이하, 63kg이하, 70kg이하, 78kg이하, +78kg(이상)으로 구분됩니다.최중량급이 무제한이 아니라 이상 급으로 100kg이상급은 100kg이 넘어야 출전이 가능하든 뜻 입니다.
Q. 야인시대에 오물난동사건에 대해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6년 9월 15일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가 동년 5월 일본에서 사카린의 원료를 밀수해 들여온 사실이 경향신문의 보도로 알려지며 정재계를 넘어 사회 전체가 뒤집혔습니다. 이에 국회에서 본회의가 열려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의 상정 및 통과가 진행되었고 관계인들이 모두 소환되어 추궁을 받았습니다.1966년 5월 발생한 이 사건은 6월 초 벌과금 추징으로 일단락 되나 일단 이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확산,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가져온데는 중앙매스콤과 경쟁 관계에 있던 여타 언론들이 이 사건을 호재로 삼아 연일 대서특필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자극했습니다.본 회의에서 김두한 의원이 국무총리를 비롯한 일부 각료들에게 오물을 투척하는데, 이틀째 속개된 삼성 재벌밀수사건에 관한 대정부 질문에서 김두한 의원은 질문 도중 미리 준비한 오물통을 열어 국무위원 석에 앉아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수 명의 각료들을 향해 던졌습니다.김두한 의원은 밀수 사건을 두둔하는 장관들은 나의 피고들이라며 사카린을 피고인들에게 선사한다는 말과 함께 인분을 국무위원들을 향해 투척, 사건 당일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은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언론 및 학원사업에서 손 뗄 것을 선언했고 그 후 이병철 사장은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만인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Q.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저술했던 배경과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목민심서는 다산이 57세가 되던 해 저술한 책으로 그가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던 중 풀려난 해인 1818년 완성되었습니다.다산 정약용이 지방관의 윤리적 각성과 농민 경제의 발전을 다룬 것으로 강진에 귀양가 있는 동안 저술한 책으로 지방의 관리로서 수령이 백성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뽑아낸 것입니다.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고루 미치기 어려워 수령들이 행정뿐 아니라 사법권도 가지고 있어 그 권한이 막강했습니다.이런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리는 법을 목민심서는 담고있는데 부임하는 일에서 시작해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법,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법,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법, 백성을 사랑하는 것, 아전들을 단속하는 법, 세금, 예절, 군사, 재판,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법, 퇴임하는 일을 기술했습니다.또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농민의 생산과 경제에 초점을 두며 수령 직무 54개조 중 가장 어려운 일을 전정으로 보고 양전에서의 각종 폐해를 지적하며 그 개혁 방안을 전론에서 결정지었습니다.조세 관리에서 농민과 국가의 중간에서 이루어지는 협잡을 제거하자는 방향에서 개혁을 논했습니다.그와 함께 그 시정책의 하나로 공물 제한을 들고 대동법의 모순 확대를 지적, 그는 여러 모순을 제거하는데 제도적 개혁과 법으로의 구속을 기본으로 하지만 국가재정의 정비, 관료들의 절약과 청백 사상에 따른 윤리적 제약과 함께 관리의 합리화에서도 그것을 찾고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