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발해의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대조영이라는 인물을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한 초대 왕으로 고왕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에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 출신으로 서술, 반면 신당서에서는 본래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 출신이라 되어있습니다.한국측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신라고기, 제왕운기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구장이라 기록, 신라고기에서 고구려 구장 조영은 성이 대씨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아버지는 걸걸중상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으며 대씨와 태씨 족보에 의하면 대조영의 어머니는 시씨라 전합니다.고구려 멸망 후 옛 고구려 영토에는 당나라가 통제하는 안동도호부가 세워지고 남아있던 고구려 세력 또한 671년 안시성 함락을 끝으로 막을 내리며 이후 대조영 일가는 고구려 영주로 이주, 그 이주의 계기가 강제였는지, 내투였는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각각의 동질성이 강하였던 것으로 보아 이 두 집단은 영주에 예속되어 있을 때부터 집단적으로 당나라에 예속된 일종의 기미주와 같응 양태하에 처해 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696년 영주에서는 당나라의 지나친 억압 정책에 대한 거란의 반란이 일었고 이로인해 생겨난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의 걸사비우는 영주에서의 이탈을 감행, 측천무후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동쪽으로 이동,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이때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죽고 대조영은 남은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의 말갈을 병합해 이끌게 되며, 대조영은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해 승리하고 읍루의 동모산 지린성 부근에서 발해를 건국하며 당의 북진 정책을 위협하던 돌궐과 손을 잡아 대당 견제세력을 구축했습니다.대조영은 705년 당나라와 화친하고 713년 당나라는 명목상 고왕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부도독으로 책봉, 719년 고왕이 붕어한 뒤 그의 아들 무왕이 왕위를 이었습니다.당나라는 발해를 고립시키고자 하나 고왕은 돌궐과 동맹관계를 형성해 고립관계를 벗어나려 했고 이는 발해 세력이 건국 초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해졌음을 의미합니다.700년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 신라와는 나쁜 관계는 아니었으나 친밀한 것도 아니었으며,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은 발해의 왕인 고왕이 신라와 수교를 맺고 싶어 사람을 보냈는데, 효소왕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고왕에게 대아찬 이라는 관작을 하사했다는 기록을 사불허북국거상장, 동사강목에서 확인됩니다.신라와 발해는 당시 몇차례 교류가 있었으나 친선적인 관계로는 발전하지 못했고 이는 양국이 그 무렵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신라와 발해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초반 발해가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양국이 함흥 일대에서 직접 국경을 접하면서부터입니다.
Q. 유관순 열사가 어떤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그녀가 얼마 동안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운동이 시작되었고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로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기어이 전원 참가했습니다.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 일제는 전국 모든 학교들에 강제 휴교령을 내렸고,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천안으로 귀향해 만세운동에 참여, 3.1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합니다.만세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모두 일본 경찰에 살해, 이 과정에서 유관순도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일본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 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습니다.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이라는 중형이 내려지나 이는 법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 복심 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며,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됩니다.
Q. 세종의 아들, 문종은 생을 일찍 마감했다는데 왕으로서 업적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문종은 병법에 관심이 많아 재위 2년동안 병력의 조직과 인원, 군법, 용병술, 군대 휘장과 표시 등 군사에 관한 모든 분야를 총체적으로 적은 오위진법을 펴냈습니다.또 12사 체제의 중앙군사제도를 5사 체제로 바꿔 국왕을 중심으로하는 군사제도를 만들었고, 병석에 누워서도 조선의 발전을 위해 조선의 정치, 제도, 문화를 정리하고자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세자때부터 진법을 다뤘으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병법의 기반을 닦고 군사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동국병감을 편찬토록 했으며 언론을 자유롭게 하고자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 윤대를 허락하는 등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