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세종대왕님은 한글창제 외에도 업적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대왕은 한글 뿐 아니라 집현전을 설치해 많은 인재를 양성,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 방대한 편찬 사업을 했습니다. 또 농업과 과학기술 발전, 의약 기술발전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Q. 추석에 할수있는 민속놀이는 어떤것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추석 민속놀이에는 강강술래, 줄다리기, 가마싸움, 소놀이, 거북놀이, 소싸움, 닭싸움 같은 놀이를했습니다.
Q. 지정천에 대한 인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일제 강점기 조선의 군인이자 항일 운동가, 국회의원, 무임소장관, 본관은 충주, 구한말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하지만 1909년 8월 통감부의 압력으로 군부의 폐지와 함께 무관학교도 폐교 처분을 받게 되며 이때 일본 측은 재학 중인 1, 2학년 생도 50여명을 일본의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보내기 위해 위탁합니다.유학 도중 합병이 되자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과로 편입되었고, 1914년 26기생으로 졸업, 1919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되며 1930년 7월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에 취임, 1933년 후반 김구세력과 합류하나 1934년 지정천은 탈당, 신한독립당을 창설해 나가게 됩니다.1940년 충칭으로 옮긴 임시정부를 따라 이동, 그 해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46년 4월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자 이승만의 권고에 따라 1946년 9월 대동청년단에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해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확대 개편하고 단장에 취임, 이후 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한중협회 회장을 지냈습니다.1948년 1월부터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 임시정부를 사퇴하고 독립촉성국민회에 입당,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으며 8월 15일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위원 겸 무임소 장관에 임명,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해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가 탈당, 민주국민당으로 건너가 민국당 최고위원, 민주국민당 대표 최고위원 등을 지냈습니다.1949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결성 때 대한청년단 최고위원에 추대, 1915년 5월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이후 국회전원위원장,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자유당에 입당해 자유당 원내대표위원, 자유당 중앙당 중앙위원을 지냈습니다.대한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대한구인유가족협회 회장, 대한민국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 등을 지냈으며 1957년 신당동 자택에서 급서했습니다.
Q. 911 메모리얼 파크는 어떤 장소이며, 그 역사와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001년 9월 11일 발생한 9.11 테러로 사망한 2,977명의 희생자와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테러로 사망한 6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구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현장에 지어졌습니다.테러로 붕괴된 두 개의 쌍둥이 건물이 서 있던 자리에 두 개의 풀이 있고 각 풀에는 거대한 구멍과 폭포가 설치되어 풀 외곽에서 안쪽으로 물이 내리는데, 이는 테러로 인해 흘린 유가족들과 미국인의 눈물을 상징합니다.테두리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폭포를 둘러싸고 있으며 희생자들의 이름은 서로 연이있던 희생자들끼리 가까운 곳에 모아져 있으며,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서로 주위에 있고 같은 직장에 출근해 얼굴을 보던 사람들끼리 주위에 배치되어있어 이름을 보는 유가족들이 기억을 되살리도록 했다는 취지이며, 매년 희생자의 생일 때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자리에 꽃을 꽂아둡니다.부지 내에 현장 유품 등이 전시된 메모리얼 뮤지엄이 있고 바로 옆에 새로 지어올린 1WTC , 통칭 프리덤 타워가 있으며 당시 구조 활동을 지원했고 순진학 소방관들의 유품 등이 전시된 트리니티 교회도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사고를 전해들은 각국 사람들의 외마디,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진 희생자의 음성, 어느 생존자가 신고 뛰었던 피묻은 하이힐, 소방관이 구조 당시 입었던 타 들어간 방화복, 건물 붕괴 당시 깔려 반파된 소방차, 남쪽 타워에 충돌했던 두번째 비행기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의 엔진 잔해 등등이 전시되어있습니다.
Q. 위나라 황제, 조조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는 맹적, 아명은 아만 , 길리이며 패국 초현사람으로 후한 헌제때에 승상을 지냈으며 위왕으로 봉해졌습니다.아들인 조비가 위나라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 무황제로 추존되었습니다.조조는 후환 황제때인 155년 태위를 지낸 조숭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조숭은 4대의 황제를 섬겨 환제 때에 비정후로 봉해진 환관 조등의 양자, 배송지는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달며 양자가 되기 전 조숭의 본성은 하후 였고, 따라서 조조와 하후돈이 종형제 관계라는 해석을 남겼습니다.어릴적부터 책을 즐겼으며 여러 분야에도 재능을 드러냈는데, 고대 병법가의 저술을 연구해 손자병법에 주석을 붙인 뒤 위무주손자라는 저술을 남겼으며 시부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두 아들인 조비, 조식과 함께 삼조라 불리기도 합니다. 20세때 174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관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낙양북부위, 돈구현령, 의랑등을 지냈고 184년 황건의 난이 일자 기도위로 임명되어 영천에서 반란군 진압에 공을 세워 제남의 동군태수로 임명되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했습니다.189년 영제가 죽은 뒤,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한 동탁이 조조를 효기교위에 임명, 그러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낙양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합니다.그는 190년 원술, 손견 등과 연합해 동탁 토벌을 주창하며 거병했으며 발해태수 원소가 맹주가 된 반동탁 연합군에서 분무장군의 직위를 맡았습니다.192년 동탁이 살해된 뒤 조조는 연주를 평정해 연주목으로 임명, 195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했을 때 순욱의 건의에 따라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 일로 조조는 건덕장군, 진동장군 등에 임명, 양조부인 조등과 마찬가지로 비정후로 봉해졌습니다.196년 자신의 근거지인 허현에 궁을 지어 헌제를 그곳에 옮기고 조조는 대장군으로 임명, 무평후로 봉해졌습니다.그는 헌제를 자신의 보호아래 둠으로 후한 조정을 장악, 황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세력을 크게 확대할수 있었고 한호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 제도를 정비하고 수많은 인재를 등용해 위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202년 원소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원소의 근거지인 하북지방 공략에 나섰고 207년 중국 북부를 통일, 208년 승상의 지위에 오른 뒤 중국 통일을 위한 남정에 나서 형주를 점령하나, 적벽에서 손권과 유비 연합군에 패해 형주의 일부를 도로 내주었습니다.그 뒤로도 조조는 여러 차례 관중과 한중 지역을 공략, 중국 통일을 시도하나 실패했고 213년 위공으로 봉해졌으며 216년 스스로를 위왕으로 봉하고 황제와 마찬가지의 권력과 위세를 행사, 220년 3월 15일 병으로 낙양에서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