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려에는 오등작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임명되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문종의 동모제(同母弟)인 기(基)가 문종 초에 처음으로 평양공(平壤公)이라는 봉작을 받고 그 뒤 후·백의 봉작을 받은 왕족이 계속해서 기록에 나오고 있다.그러나 기록에서 왕족의 봉작은 종실의 친존자(親尊者)를 공, 그 다음을 후, 소자(疎者)를 백, 유자(幼者)를 사도(司徒)·사공(司空)이라 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자료는 얼른 보면 왕족이 오등봉작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공·후·백만 봉작이고, 사도와 사공은 공·후·백의 봉작을 받은 왕족의 아들에게 주어진 관직일 뿐만 아니라, 자·남을 사용한 예는 보이지 않으므로 왕족은 삼등봉작제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이에 반해 비왕족, 즉 문무백관과 이성제군(異姓諸君)은 공·후·백·자·남의 오등봉작제를 사용하였다. 비왕족에 대한 봉작의 실례가 처음 기록에 보이는 것은 980년(경종 5)에 최지몽(崔知夢)이 동래군후(東萊郡侯)를 받은 것이며, 계속해서 공·후·백·자·남의 봉작을 받은 기록이 나온다. 이로 보아 비왕족에 대한 봉작은 적어도 경종 때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제도적으로 완성된 것은 문종 때로, 국공(國公)은 식읍 3,000호에 정2품으로, 군공(郡公)은 2,000호에 종2품으로, 현후(縣侯)는 식읍 1,000호, 현백(縣伯)은 700호, 개국자(開國子 : 縣子의 잘못인 듯함.)는 500호에 모두 정5품으로, 현남(縣男)은 300호에 종5품으로 하였다.
Q. 부여를 고조선의 후신국가로 볼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조선 준왕이 남하하여 형성된 삼한의 소국들 중에는 벌, 비리, 부루, 불, 부리 등의 지명이 많이 보이는데 여러가지 부여의 어원설 중 우리말 벌, 벌판 그리고 영남 해안 사투리 불 등이 부여의 어원이라는 설이 맞다면 부여-고조선-삼한 간에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