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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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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존재론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리스어인 onta(존재하는 것)와 logia(學, 論)를 합쳐, 17세기에 고클레니우스(Rudolf Goclenius, 1547~1628 : 독일의 철학자)나 클라우베르크(Johann Clauberg, 1622~1665 : 독인의 철학자)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존재론이란, 존재하는 것을, 그 특수한 형태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서 일반적으로 그 근본적 규정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말하면, 이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철학, 즉 그의 형이상학이 그와 같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위에 기독교의 입장에서 존재론을 말한 대표자이다.근대에 와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초감각적ㆍ비물질적인 구조를 생각하는 것을 형이상학의 일부분으로서 존재론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의미에서는 현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그 근저에 있는 본체에 관한 연구라는 뜻으로 '본체론'이라 불렀다. 이 본체론을 조직화한 인물이 18세기 초의 볼프(Wolff)였다. 이것은 모든 경험적 과학으로부터 단절되어 개념의 추상적인 연역에서 존재의 여러 성질을 도출해 낸다(존재ㆍ가능성과 현실성ㆍ양과 질ㆍ실체와 속성 따위 개념의 사변적 논의). 이 본체론은 칸트에 의하여 이성의 무제한적인 사용에 의한 '독단론'이라고 하여 배척받았는데, 그 후 독일 고전철학은 새로운 형이상학으로서의 존재론을 만들어냈다.이것은 헤겔(G.W.F. Hegel)에 의하여 존재론ㆍ논리학ㆍ인식론을 통일한 형태로 제시되어, 그가 완성시킨 것은 아니지만 존재론이라는 사변적인 철학적 구상에서 탈피하여 세계에 관한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지식과 결부된 철학상의 고찰의 길을 열었다. 이런 경향은 그 이전에도 홉스(T. Hobbes), 스피노자(B. de Spinoza), 로크(J. Locke) 또는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자들이 경험과학에 기초한 학설을 세운 것에서 사변적인 존재론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새로운 존재론이 제창되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가톨릭 철학자들에 의해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을 새로운 형태로 부흥시키려는 시도(☞ 신(新)스콜라주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순수의식의 본질학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론, 그것을 계승한 하이데거의 변증법적 인간존재를 단서로 하여 존재하는 것을 해명하려고 하는 기초 존재론, 또한 신(新)칸트주의에서 출발한 n.하르트만이 인식론의 근저에는 존재론을 필요로 한다고 하여 주창한 비판적 존재론, 그 외에 현상학에서 도출된 사르트르의 존재론 등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존재론같이 경험과학에서 유리된 것을 철학의 특수부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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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은 왜 복덕방이라고 안하고 공인중개사라고 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복덕방은 '부동산 (중개사무소)'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뜻으로 생소한 것이 있네요'인심이 좋은 주인집을 이르는 말' 20세기 초 대도시, 특히 서울과 평양 등에서 부동산중개를 하던 '가쾌'들이 모여 만든 사무실이 바로 복덕방입니다.초기 복덕방은 밑을 여러 갈래로 가른 누런 삼베를 간판으로 했는데누런 삼베는 복이 잘 붙고 오래 갈 수 있다는 뜻이고 밑을 가른건 출입하기 편하라는 의도입니다.당시 주로 노년층이 모여 소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말 그대로 복덕방은, 복(福)과 덕(德)이 있는 곳인 것이죠.​복덕방은 영어로 'real estae agency' 입니다.말 그대로 '부동산 중개소'죠. 본업과 따뜻한 우리네 일상이 뒤엉킨 우리의복덕방과 달리, 서구의 복덕방은 이성과 자본 만이 존재하는 경제행위의 장소인 것입니다.​1970년 대 본격적으로 강남개발이 이루어집니다. 돈과 폭력으로 점철된 것이죠.실제로도 그 정도였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이후 복덕방은 00부동산,00개발로 많이 바뀌는데요1984년 부동산 중개업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복덕방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부동산의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1984년 이후 큰 틀에서의 복덕방 뜻과 인식은 현재까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다만 '복덕방'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입에 오르고 '부동산'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복덕방 문화를 계승했지요​부동산 중개인과 동네 아주머니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MZ세대 중 M세대 해당하는 제게도 익숙하고 여전히 드물지 않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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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에는 청자가 만들어지지 않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니요 조선시대에도 만들었습니다.조선청자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푸른색 자기를 말한다. 조선초기에 비색청자와 상감청자가 일정하게 생산 이용된 것은 최근에야 비로소 알려졌다. 조선청자는 잿빛도는 푸른색이 많기는 하지만 고려청자의 부드러운 푸른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일부 그릇은 고려청자보다 맑고 아름답다. 또한 버들, 물새, 학, 매화, 국화, 물고기, 용, 연꽃, 봉황 등 상감무늬에서도 고려청자의 무늬와 같고 그 구도도 비슷하다.조선청자는 이와 같이 고려청자와 일련의 계승적인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그와 다른 특징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조선청자가 형태에서 맵시 있고 날씬하지는 못하나 듬직하고 소박한 것이며 굽이 낮으면서도 밑이 퍼진 형태는 고려청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제작수법으로 백자의 바탕흙에 청자유약을 바르고 상감을 위주로 하면서 무늬를 낮은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것 등은 고려청자와 차이나는 점이다. 조선청자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구름, 학무늬청자상감귀대’, ‘용무늬청자상감소반’, ‘어룡무늬청자상감병’, ‘국화무늬청자상감향로’, ‘구름돋을무늬청자바리’ 등을 들 수 있다.여러 가지 자료들은 조선자기가 바로 고려자기를 계승한 것이며 특히 조선 전반기의 청자는 곧 고려청자를 계승한 것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고 있다. 그것은 조선 전반기의 가마터들에서 청자기들이 적지 않게 드러난 데서 알 수 있다. 경기도 광주는 조선시대 자기생산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최근에 이 지방에서는 조선초기에 구어낸 순백자, 석간주백자, 청화백자와 함께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들이 드러났다. 광주군 반천리, 도마리, 우산리, 무갑리, 쌍령리, 도수리 등지의 가마터들에서 10여 점의 청자가 알려졌다.청자 가운데는 백자바탕흙 위에 청자유약을 바른 것과 청자바탕흙 위에 청자유약을 바른 것이 있고 그릇모양과 무늬는 고려청자를 닮은 것이 있다. 이것은 조선청자가 고려청자를 계승하면서도 백자가 생산 보급되면서 그 형태와 장식무늬를 본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17세기 초엽에 대전(왕이 거처하는 궁전)에서는 백자를 쓰고 동궁(왕세자가 거처하는 궁전)에서는 청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궁중에서 백자와 함께 청자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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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 박진이란 인물은 어떠한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에 따르면 고려 현종은 몽진 행렬이 50명 남짓이었는데, 활까지 쏘는 도적들을 막아가며 힘겹게 몽진하다가 오늘날 양주시 일대에 해당하는 창화현에 이르른다. 이 곳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향리(아전)가 현종의 도움을 문전박대 및 면전에서 하대, 능욕하고, 강조의 남은 일파가 하공진을 필두로 남하하여 현종을 인질로 삼으려 한다는 거짓정보를 주어 행렬을 더 와해시킴과 동시에 현종과 왕후가 떨어지게 하고, 야간에는 적도들을 풀어 행렬을 급습해가며 살해 시도, 산에 흩어져 숨은 왕의 행렬을 수색해 잡으려 하기까지 했다.이때문에 현종 행렬은 몽진 7일차까지 40km가량밖에 남하하지 못해서, 거란 추격군이 걸어서 수 시간 거리까지 좁혀지기까지 했다. 이때 지채문이 현종을 배신하거나 하공진이 사신으로 거란군 진영에 가서 교섭 명목으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현종 일행은 거란군에게 잡혔을 수도 있었다. 해당 아전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사료에 나오지 않고 있어서 불분명하다.박진이란 인물은 지방 호족으로 기록은 되어 있으나 정확한 일을 알기에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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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왜 유명한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원전 1800년경 서방에서 셈 족인 아무르(아모리)인이 메소포타미아에 침입해 바빌론을 수도로 정하고 전제적인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제6대 왕이 바로 유명한 함무라비(재위 전 1724~1682)이다. 함무라비 왕은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하고, 법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는 교역을 장려하고 운하와 큰 건축물을 지었으며, 농산물 증산에도 힘썼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에서 서쪽 오아시스 지대를 거쳐 지중해 동해안에 이르는 활 모양을 한 농경 지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라 하는 기름진 곳이다.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이 제정되다20세기 중반까지 최초의 성문법으로 일컬어졌던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은 20세기 초 프랑스 학자 드 모르갱에 의해 서부 이란의 페르시아 만 수사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전 282조 중 제196조에는 '만일 사람이 평민의 눈을 상하게 했을 때는 그 사람의 눈도 상해져야 한다', 제200조에는 '만일 사람이 평민의 이를 상하게 했을 때는 그 사람의 이도 상해져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同害) 복수법에 기초한 형벌법으로서, 타인의 눈을 상하게 한 사람은 자기 눈도 상해져야 하고, 부모를 구타한 아들은 그 손목이 잘려져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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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흐의 작품중 내 방에서 본 파리 풍경 그림해석 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수련한다. 그는 브뤼셀의 왕립 미술아카데미에 등록을 해서 자신이 싫어하는 아카데미식 교육을 받기도 했고, 에텐과 헤이그, 누에넨, 안트베르펜 등을 돌면서 여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동생 테오가 미술상을 하며 살고 있는 미술의 성지 파리에 입성을 한다.하지만 아직도 화가 구실을 하지못하는 반 고흐는 테오의 아파트에 얹혀살아야 하는 신세였다. 비교적 성공적인 미술상이었던 테오는 파리 몽마르트르의 르피크 거리에 비교적 번듯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물론 당시의 몽마르트르는 포장도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유명한 물랭 드 갈레트 풍차 주변에 포도밭이 있는 거의 시골같은 곳이긴 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 무렵에는 수많은 화가들이 몽마르트르 지역으로 몰려들었을 만큼 집세가 싼 동네였다. 그리고 거의 평지다시피한 파리에서 유일한 언덕이 있는 곳인 몽마르트르는 파리가 내려다 보이는 좋은 전망을 자랑했다.반 고흐는 테오의 아파트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화실을 만들었으며, 창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경치를 가끔 그림으로 그리곤 했다. 아래 두 그림은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1886년 그림이고, 위의 것은 역시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그림이지만 1887년에 그린 그림이다. 찾아보면 이 시기에 반 고흐가 그린 파리 풍경, 그것도 아파트 창밖을 보면서 그린 그림들이 더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위의 그림과 같은 각도로 그린 1887년 그림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개인 소장이라 좋은 스캔본을 찾지 못해 올려놓지는 않았다.파리가 반 고흐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인상파 그림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에서 인상파를 비롯한 최신 스타일의 미술을 흡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아직 그가 네덜란드 시절의 어두운 팔레트를 버리기 시작했지만, 아직 인상파로의 전환을 완전히 마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그림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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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최초 고갯길인 "하늘재"는 어떤 용도로 이용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요즘에는 트래킹 장소로 각광 받고 있죠월악산 미륵리 3층석탑을 조금 지난 왼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하나 있다. 멀리 황장목(적송)과 떡갈나무, 해송 등의 운치 있는 풍경을 마주하며, 청량한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길이 열리는 이 길은 일명 ‘하늘재’, 길 왼편 아래로 나 있는 도랑은 가뭄 탓에 때때로 말라버린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기암절벽 산봉우리와 길가의 진분홍 물봉선, 짙은 자줏빛의 수리취, 노란 짚 신나물 등의 들꽃들이 여행객들을 반긴다. 얼핏 보면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하늘재(해발 525m)는 이름처럼 높지는 않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고 있는 도 경계로서 미륵리에서 30∼40분(2㎞) 정도 걸어 오르면 곧바로 문경 관음리로 연결된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은 하늘재 고갯마루에 이르러 쭉 뻗은 아스팔트 길로 이어지는데 서쪽으로 문경 대미산(해발 1,115m) 정상이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하늘재 아래의 중원미륵리 사는 신라 말∼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옛 절터로, 당간지주와 회랑 등의 흔적만으로도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찰로는 유일하게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지릅재와 하늘재 사이의 분지인 미륵리에 터를 잡고 있다. 중원미륵리사의 목조건물은 13세기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는 5층 석탑(보물), 석불입상(보물)을 비롯해 석등(지방유형문화재), 3층석탑(지방문화재) 등이 남아있다. 중원미륵리 사는 지난 1977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청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작업을 통해 일연스님이 거처했던 ‘미륵대원’으로 밝혀졌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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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음악 산업의 주요 동향과 미래 예측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음악산업의 경제적 특성 • 미디어산업으로서 음악산업 – 경험재적특성: 위험성이 크고 성공이 불확실 – 수요 안정화전략 추구 – 규모의 경제 추구 – 수직적. 수평적 통합을 통한 소유의 집중 – 해외 진출 등을 통한 시장 확대 – 수익 다변화 추구 • 음악산업의 시장구조 – 소수의 음반사들에의해 시장이 지배되는전형적인 과점시장의 특성 – 메이저 음반사들 간 인수합병을 통해 과점기업의 수는 6개에서 5개로, 그리고 현재는 3개 – Universal Music Group, Sony Music Group, Warner Music Group – 유명 가수들과의 계약을 통해 음반제작의전 과정을 담당하고있으며, 전 세계 유통망을장악함으로써 안정적인수익 확보 음악산업의 구조 • 가수, 작사가, 작곡가 및 프로듀서, 가수 발굴, 트레이닝, 음반 기 획, 녹음,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기획사, 음반을 제작하는 음반 사, 제작된 음반을 유통하는 배급사, 그리고 노래를 틀어주는 방 송사 등 다양한 행위자들로 구성 • 음악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 기획(creation) - 제작(production) - 프로모션(promotion) - 유통(distribution) • 프로모션의 다변화: 공연, 방송 -> 매체의 다양화로 프로모션 창 구역시 다양해짐 ex) 게임, 소셜미디어 등 • 음악 유통은 가장 큰 변화를 겪음 – 아이튠즈, 아마존 등 새로운 중간매개자 등장 – 다운로드, 스트리밍 방식 디지털 기술과 음악산업의 진화 음악생산과 유통에 미친 디지털 기술의 영향 • 재생산 및 유통비용 절감되고 생산효율성 극대화 • 메이저 음반사들의 영향력 약화 • 다양한 로컬 음악의 해외 진출 용이 •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은 불법복제를 확산시켜 음반시장을 위축 • 음반시장의 축소와 디지털 음원 시장의 확대• 음악 소비의 채널 다각화 – 음반 및 디지털 음원시장외에 콘서트, 뮤지션에 대한 기업의 후원, 비디오 게 임이나 텔레비전과 영화, 그리고 온라인 마케팅 등에 음악 활용 • 새로운 유통강자의 부상 – 애플 아이튠즈, 스포티파이(spotify) 소셜미디어와 음악• 인터넷을 통해 뮤지션과 음악회사가 팬들과 직접 소통 • 소셜미디어: 효율적인 마케팅과 홍보의 채널• 소셜음악 서비스 – sns기능과 음악 결합 – 소비자들이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다른 소비자들과 음악 을 공유하고 음악에 대한 정보와 관심을 나누기 원함 • 클라우드 음악서비스 – 음원을 개인의 PC나 스마트폰저장장치에 보관하는 대신 서비스 사업자의 중 앙데이터센터에 저장한 후 인터넷을 통해 다운로드하거나 스트리밍 방식으 로 음악을 듣는 서비스 C세대의 등장과 음악소비의 변화 •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음악은 “디바이스가 없는(deviceless)” 콘텐츠로 변화 • 음악 팬들이 수동적으로 음악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소셜미디어 나 인터넷 활동을 통해 음악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 • 프로슈머(prosumer)와 프로듀저(produser) • 인터넷을 통한 음악팬들의 활동은 뮤지션과의 협업 (collaboration)의 형태일 뿐 아니라, 공동생산적 노동(cocreative labor) • 디지털 시대 음악소비의 참여적 특성은 새로운 C세대의 등장과 밀접한 연관 • C-Generation – C는 ‘연결하다’(connect), ‘소통하다’(communicate), ‘변화시키다’(change)를 의미 – 1990년대 이후에 출생하고 2000년대 들어 성년이 된 사람들 – 디지털기기에매우 친숙하며 평균적으로 하루 6시간 이상 사용 – 스마트폰과컴퓨터를 대부분 소유하고 있으며, 인스턴트 메시지를사용해 소 통하는 한편 페이스북과 유튜브의 충성도가 높은 사용자들 – 대부분의사회적 상호작용은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며 이 공간에서자신의 의 견과 태도를 표명하는데 거리낌이 없음. – 유무선 기기를 통해 인터넷에늘 연결 –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리터러시능력의 향상으로 독자적인 콘텐츠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역량 보유 디지털 시대와 음악의 미래 음악의 소유 VS. 접근 • 역사적으로 음악 산업의 주류 소비 형태는 사용자가 음반이나 CD 등을 구매하여 소유권을 갖는 것 • 디지털 기술 등장 이후에도 이러한 방식은 음원 다운로드의 형태 로 지속 • 브로드밴드와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음악 소비의 형태가 빠르 게 다운로드에서 스트리밍 방식으로 전환 •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의 확산으로 비소유 방식의 음악 소비가 더 욱 증가 • 미래 음악소비는 음악 소유권을 갖는 것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 는 접근권을 구매하는 것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음 뮤지션과 팬의 관계 • 뮤지션과 팬과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지고 관계의 성격 역시 정서 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을 넘어 경제적인 것으로 진화 • 뮤지션과 팬과의 유대는 뮤지션과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정서적 이고 문화적인 것에서 비롯 • 그들의 관계는 훨씬 친밀해지고 일상화되며, 팬들의 역할은 프로 모터와 마케터로 확장 • 공연이 음악 비즈니스의 주력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뮤지션 과 팬들의 친밀한 관계는 경제적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 디지털 기술과 음악산업의 혁신 •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같은 최첨단의 디지털 기술은 음악 음악산업에 지속적인 혁신을 촉진할 것임 • 빅데이터 – 사용자의취향을 고려한 음악 추천 등을 대중화시킬 것 – 특정 음악 일변도의 소비라는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 – 큐레이션(curation) 서비스와결합하면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할 것 • 사물인터넷 – 공간 및 디바이스간 끊김 없는(seamless) 음악 청취를 가능케 함 – 빅데이터기술을 통해 사용자의기분(mood)과라이프 스타일을 고려한 자동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 • 애플의 시리(Siri)나 아마존의 알렉사(Alexa) 같은 음성인식 인 공지능 기술 역시 과거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혁신적인 음악소비 경험을 가능케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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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프랑스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프랑스혁명은 사상혁명으로서 시민혁명의 전형이다. 여기서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계급으로서의 시민혁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혁명의 이념은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왕권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에 의해서 여전히 국왕친정과 신권이론(神權理論)을 받들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을 계속하였다.신권왕정 밑에서는 모든 국민이 단순히 국왕의 신하에 불과하다. 그 위에 소수의 귀족·성직자들만이 별도의 특권신분을 구성하고, 국민의 90%를 차지한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면서 우아하고 무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순은 처음부터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였다.그러한 과정에서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재정궁핍에 빠졌다.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에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臨時地租)’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귀족·성직자들은 국왕을 뒷받침하던 사법관료의 핵심인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하고 고등법원이 가진 법령심사권한을 이용해서 왕정고문부의 재정안(財政案)에 저항하였다.이렇게 왕권 내부에서 투쟁하는 사이에 재정총감 칼론과 그 후임자 브리엔이 실각하고, 1788년 8월에 네케르가 재차 재정총감으로 기용되었다. 네케르는 고등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전국 삼부회를 다음해에 소집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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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구당서와 신당서는 어떤차이가 있는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완성 및 주상(奏上)은 후진 개운(開運) 2년(945) 6월로, 그 이듬해에 후진이 멸망하는 바람에 편찬책임자가 도중에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덕분에 한 인물이 두 개의 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거나 초당(初唐) 시기에 비해 만당(晩唐) 시기에 대한 기술이 다소 빈약하다는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때문에 후세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북송(北宋) 시대에 다시 《당서》(唐書)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신당서》). 그러나 거꾸로 당대 《실록》 등의 1차 사료의 원문들이 고스란히 인용되어 있어, 사료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오히려 《구당서》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한편 발해사의 해석 문제에서 《구당서》와 《신당서》는 각기"발해말갈의 대조영은 고려의 별종이다.""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속민이던 족속인데 성은 대씨였다."라고 기술해,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혹은 속말말갈계 고구려인)이냐 말갈인이냐에 대해 한국 학계와 중국, 일본 학계의 해석이 다르다.참고로 《구당서》에서는 고구려에 대해서 부여의 별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高麗者 出者夫餘地別種也")또한 당시 일본 열도에 대해 (倭國傳)과 (日本國傳) 등 두 열전이 입전되어 있는데,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해 뜨는 변두리에 있으므로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했다. 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아름답지 않음을 꺼려서 일본이라고 고쳤다고도 하고, 일본은 예로부터 소국이었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했다고도 한다.(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고 되어 있다. 또한 《구당서》에는일본국의 남쪽과 서쪽은 큰 바다를 접하고, 동쪽과 북쪽은 큰 산으로 막혀있으며, 큰 산 너머에는 모인(毛人)의 나라가 있다.(西界南界咸至大海東界北界有大山爲限山外即毛人之國)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일본 정치의 중심이 교토임을 고려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산은 오늘날 일본 알프스라 불리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키소 산맥(木曽山脈), 아카이시 산맥(赤石山脈)을 말하는 것이며 그 너머의 모인(毛人)은 아이누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이 기록은 송대 초기의 《태평어람》에도 인용되었는데 이 기록에 대해서는 편찬 과정에서 존재했던 일본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모리 기미유키(森公章)는 일본이라는 국호 성립 이후에 최초의 견당사(遣唐使)가 파견되었던 702년 이후에도 국호 변경 사유를 일본측에서 특별히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했고, 오오바 오사무(大庭脩)는 이를 간단히 편찬 과정에서의 실수라기보다는 과 의 왜국(일본) 관련 기사의 중절된 시간대에는 백강구 전투 및 임신의 난이 있었으며, 당시의 중국측에는 임신의 난에 의해 '왜국'(덴지 덴노의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국'(덴무 덴노의 정권)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했기에 이에 대해 확실하게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이설로써 모두 병기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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