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신문고는 어느 왕때 시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에서 1401년(태종 1년) 대궐 밖 문루에 청원과 상소를 위해 매달았던 북으로 초기에는 등문고(登聞鼓)라고 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에서는 주장관,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신고하여 사헌부에서 이를 해결하도록 하였는데, 이 기관에서 해결이 안 되는 경우에는 신문고를 직접 울리게 했다. 그런데 이 절차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라서 소요시간이 대략 1년은 걸렸다.1. 먼저 자기가 사는 고을의 수령(사또)에게 자기가 당한 억울한 사건에 대해 확인서를 받아야 한다. 보통은 자기 평판 추락을 우려하여 잘 써주지 않았다고 한다.2. 관찰사에게 가서 확인서를 받는다.3. 한양으로 가서 사헌부에서 민원을 제출했다는 확인서를 받는다.4. 신문고를 지키는 영사(令史)에게 확인서를 제출한다.5. 확인증을 수령한 영사가 확인증을 발부한 관리소에 일일이 진짜 확인서를 발부한 것인지 재확인까지 한다.6. 무려 다섯 단계를 거쳐 신문고를 두들기면, 보고가 조정에 들어간다. 그러면 왕이 금부도사를 의금부로 파견해 사정을 듣게 한다.이 제도는 조선에서 백성의 목소리가 임금에게 닿게 하는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었으나 임금은 한 나라의 지존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신문고를 울려 상소하는 데에도 제한이 있었으며 오직 종사(宗社)에 관계된 억울한 사정이나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 누명 및 자기에게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 상소 내용을 접수하여 해결해 주었다. 조금 상세히 말하자면 역모, 살인, 친자확인, 정실구별, 양민 천민 구별에 제한된 것이다. 다만 이 제한사항이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억울함을 조사하라고 왕이 보낸 금부도사들은 사건조사는 고사하고 신문고를 잘못 쳤다는 이유로 곤장이나 쳐주고 오는 일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고 한다.하지만 이와 같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건 해결에 신속성을 얻기 위하여 신문고를 무질서하게 이용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1] 그 후 신문고는 사용 제한이 더 엄격해졌고, 실질적으로는 부민고소금지법 등으로 인해 일반 백성이나 노비, 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에게는 별다른 효용이 없었으며 오직 양반들만 신문고를 울려 댔다. 그러다보니 이미 성종대부터 보다 간편한 격쟁이라는것이 등장하면서 이후로 일반인들은 신문고보다는 격쟁을 이용했다. 물론 이 당시에 격쟁이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신문고의 방법이 까다롭다보니까 임금에게 직접 호소했던 것이다.그 후 연산군 대에 이르러 없어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1771년(영조 47년) 11월에 부활되었으며 병조에서 주관했지만 제대로 된 부활이 아닌 전시행정 모습이라고 현대에 들어 까이기도 한다. 궁궐 안에 설치를 해두었는데 백성들은 궁궐에 출입조차 불가능하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고 무엇보다 영조 자신이 법 개정을 통해 격쟁을 제도화한지라 신문고는 별 쓰임새가 없었고 사실상 순조 이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Q. 김치의 역사와변천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시 형태의 채소절임김치의 기원은 소금에 채소를 절인 원시 채소절임에서 시작된다. 원시 형태의 채소절임은 잉여 작물을 오랜 기간 저장 보존하기 위한 보편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인류가 농경 사회에 진입한 후 신석기~청동기 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채소의 장기 저장을 위한 절임은 추운 겨울이 있는 북위 35~45° 지역에서 형성되는데, 특정 지역에서 기원해 전파되었다기보다 여러 문화권에서 자생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다만, 현재 채소절임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중국 주나라 때의 문헌들이기 때문에 중국이 채소 발효 음식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중 중국 주나라 때(BC 10세기 경)의 민요를 모아 엮은 《시경(詩經)》에 ‘오이를 깎아 저를 만들어 조상께 바쳤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전 생활상을 담고 있는 기록으로 당시 동북아 지역의 원시 채소절임의 재료와 이용 목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중국이 인류 채소 절임문화의 시초라거나 이를 다른 지역에 전파했다는 증거는 아니다.어느 문화권에나 존재하였던 원시 형태 채소절임이 기술과 노하우의 교류나 축적 과정에서 각자 자연 생태, 사회경제적 여건, 민족적 기호에 영향을 받으며 달라지게 되는데, 중국과 한반도 두 문화권이 서로 상이하다는 점이 6세기 전반에 편찬되어 현존 최고(最古)의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서 확인된다. 중국 북위(北魏) 때 산동 지역의 가사협이 집필한 《제민요술》에는 채소를 건조하거나 데치는 전처리 과정을 거치거나 술, 식초 등을 담금원으로 사용하는 절임류의 비중이 높다. 반면, 한반도의 김치는 소금과 장을 이용하고 생채소를 그대로 사용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 책이 편찬된 시기는 한반도의 삼국 시대에 해당되므로, 적어도 삼국 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의 채소절임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삼국 시대 우리나라 삼국 시대 채소 절임음식에 대한 직접적은 근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고고학적 유물을 비롯해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의 기록 등을 통해 발효 음식 문화가 융성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중국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 수록된 〈위지(魏志)〉에 고구려인이 발효 저장 음식을 잘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때 집필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신문왕이 김흠운의 딸을 신부로 맞으면서 보낸 납채, 물, 술, 장, 메주, 젓갈 의 발효 식품이 포함되었다는 내용이 있다.유적으로는 속리산 법주사에 720년에 설치되어 승려들이 김장용으로 사용하던 대형 돌항아리가 있으며, 이외에도 통일신라 시대 창건된 전라도 남원 실상사와 강원도 흥전리에서는 장과 젓갈을 보관하던 곳간인 장고(醬庫)터, 젓갈을 항아리에 담아 운송했던 내용이 기록된 신라 시대 목간 등을 통해 당시 식생활에서 발효 저장 음식이 차지했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또한, 일본의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와 《연희식(延喜式)》에는 소금 및 콩이나 쌀을 원료로 사용하여 만든 채소절임인 ‘수수보리지(須須保利漬)’라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의 내용 '知釀酒人 名仁番 亦名 須須許理 等參渡來也 故是須須許理 釀大御酒以獻'을 근거로 일본에 양조 기술을 도입한 백제인 인번(仁番)이 바로 이 수수보리지 제조법을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근거들은 한반도의 채소절임 문화가 삼국 시대 이미 상당 수준 발달되어 있었고, 주로 소금과 장을 담금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고려 시대우리나라 현전 기록 중 김치 관련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문을 모아 1241년 편찬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다. 이 책에 실린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에 '무를 장에 넣으면 한여름에 좋고, 소금에 절이면 긴 겨울을 버틴다(得醬尤宜三夏食 淸監堪備九冬支)'라는 내용이 있어 당시의 김치 종류와 김장 문화를 알 수 있다. 고려 말 문신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에는 ‘오이로 만든 김치(醬瓜)’, ‘우엉, 파, 무를 한데 섞어 장에 절여 만든 김치(牛蒡蔥蘿蔔幷沈菜醬)’, ‘매콤한 산갓김치(辛辣味 山芥鹽菜)’ 등 보다 다양한 김치류가 나오는데, 역시 소금과 장을 담금원으로 젖산 발효를 유도해 은은한 감칠맛이 나는 김치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 초기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 〈순채포유작(廵菜圃有作)〉에도 미나리, 자소, 생강, 마늘, 파, 여뀌 등의 양념을 넣은 김치 용례가 나오는데, 이는 이색의 ‘우엉, 파, 무를 한데 섞어 장에 절여 만든 김치(牛蒡蔥蘿蔔幷沈菜醬)’와 함께 향신 양념을 이용한 김치 제조법이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임을 알려 주는 단서이다.한편, 중국과 확연하게 차이나는 독특한 채소절임 문화 중 하나가 물김치이다. 〈가포육영〉의 ‘소금에 절인 무김치’는 짠지형와 동치미형 두 가지 모두를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 초기 조리서에 다양한 형태의 동치미류 제조법이 여러 종류 수록되어 있어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는 물김치 식용 문화가 발달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색의 기록에 나오는 산갓김치도 코를 톡쏘는 특유의 매콤한 맛이 나는 국물 김치 형태의 별미 김치로 고려 시대에 이미 재료의 특성에 따라 여러 형태의 물김치 제조법이 발달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조선 시대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김치의 원형이 완성된 시기는 조선 시대이다. 세 가지 재료의 유입 단계에 따라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형태와 맛을 지닌 음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첫째, 김치가 다른 문화권의 채소절임과 결정적인 차별점은 동물성 발효 식품인 젓갈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삼국 시대부터 이미 젓갈 문화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젓갈과 채소를 버무려 먹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선 시대이다. 젓갈을 ‘섞었다’는 의미로 섞박지라고 불렀는데 주로 오이, 무, 동아 등의 채소와 버무려 만들었다.젓갈이 들어간 김치를 만드는 방법은 1600년대 이전 조리서인 《주초침저방(酒醋沉菹方)》에 〈감동저(甘動菹)〉라는 항목으로 처음 등장한다. '감동'이란 보라색을 띠는 작은 새우로, ‘곤쟁이’, ‘자하’ 등의 별칭으로도 불렸다. 감동저는 이 감동으로 만든 젓갈(감동젓, 곤쟁이젓)을 절인 오이에 버무려 만들었다. 젓갈은 매우 귀한 식재료였기 때문에 이 감동저(곤쟁이젓섞박지)는 접대 및 선물용으로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이 접할 수 있는 김치는 아니었다. 아주 고급 음식으로 중국 사신 접대나 귀한 선물용으로 활용되었던 기록이 1400~1500년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여러 문집에 남아 있어 젓갈 김치의 역사는 조선 초기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둘째, 신대륙이 원산지인 고추가 조선 후기에 유입된 이후 김치의 원료로 사용되면서 김치의 색과 맛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매혹적인 붉은 색으로 식욕을 자극하였고, 고추의 매운맛과 방부 작용은 소금의 사용량을 줄여도 유산균 발효가 잘 일어나도록 도왔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젓갈 유통도 활발해져 김치에 젓갈을 사용하는 제조법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는데, 마침 고추는 젓갈의 비린내를 줄여주는 역할도 했다.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김치의 이상 발효를 막기 위해 사용되어 오던 분디(제피, 산초라고도 함), 여뀌, 정가(형개), 자소 등의 재료가 점차 고추로 대체되었다. 고추를 넣은 후 김치 맛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어 김치에 고추 사용이 적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외국에서 유입되어 생소했던 고추는 가난한 승려들이나 먹던 값싼 식재료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피폐한 삶을 살던 양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질 수 있었다. 셋째, 오늘날 김치의 대명사로 여기는 통배추김치 제조법이 완성된다. 배추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땅에서는 재배가 잘 되지 않는 귀한 식재료라 일상적인 반찬으로 활용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김치의 재료는 오이, 가지, 무, 동아가 주를 이루었다. 1800년 전후로 조선 땅에서 배추가 재배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한양의 권세가나 왕실에 납품되던 용도에 한정되었고, 전국적으로 재배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1800년대 중엽 이후 이파리가 많이 달린 결구성 배추 재배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젓갈과 갖은 향신 양념을 함께 버무린 섞박지형 양념소를 배춧잎 사이사이에 넣는 형태의 김치가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8~19세기 상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계층이 형성되면서, 김치도 화려해져 각종 해산물과 여러 가지 종류의 젓갈, 고기나 해산물 육수까지 더해진 김치 제조법도 널리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