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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우리나라의 역사 순서를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인문 예술 전문가 이명훈입니다.고대고조선-부여-옥저-동예-삼한(마한-진한-변한)-고구려-백제-신라-가야연맹-탐라국-우산국중세신라-발해-후삼국-고려근세~근대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현대대한민국
Q.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어려웠다는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산지가 70%인 한반도의 지형은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 같은 중장비를 몽땅 버리고 몸만 빠져나오기도 힘들어지므로, 매우 비효율적인 후퇴를 강요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따라서 후퇴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터널이 많아진 21세기 현재에나 어느 정도 가능한 이야기며 지금도 터널 몇개를 막으면 답도 없다. 게다가 한국의 고속도로는 산지와 인구밀집 지역을 피하기 위해 고가도로인 곳이 상당히 많다. 이런 가도에 탱크와 장갑차량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붕괴 위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적 포병이나 공군의 과녁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준비되지 않은 국군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다음 계획(연합 상륙작전)을 구상한다.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에게 북한군의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 계획과 상륙지점을 연구를 지시하고 일본에 주둔한 미 제1기병사단에 상륙훈련을 지시했다. 또한, 7월 4일 상륙작전을 위한 공식 회의를 소집했다. 인천을 통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다는 일명 블루 하츠(Operation Blue Hearts) 작전이었다. 이 작전계획 역시 인천상륙작전으로 7월 22일에 실시하려고 했다. 인천으로 들어와서 교통로의 중심인 서울지역을 장악하면 북한군의 병참선을 끊을 수 있다는 건데, 그때는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르고 게다가 상륙전 준비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블루 하츠 작전은 7월 20일에 공식적으로 폐기된다.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펼쳤을 때 맥아더 장군은 부산 주변 포위선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병력에 많은 제한이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해법으로 폐기했던 블루하츠 작전(Operation Bluehearts)을 바탕으로 다시금 상륙작전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작전명 Operation Chromite로 실행된 인천 상륙작전이다.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당시 UN군 사령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이자 일본 점령 연합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세계 전사(戰史)상 가장 많은 약 50여 회의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상륙작전의 귀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맥아더가 수행한 상륙작전은 '아일랜드 호핑'이라고 불리며, 이는 일본군의 요새 하나하나를 격파하는 것이 아니고 후방으로 상륙을 해서 병참선을 끊고 섬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을 고립시켜 격퇴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휘하 육군과 해병대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맥아더는 적 후방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적을 가두는 방식으로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침략군 전체가 와해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까지의 육상 보급로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이는 곧 인천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최적의 위치임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 점령 사령관 당시 한반도 내 일본군을 몰아내고 무장해제를 시키는 임무를 담당했고, 이를 위해 1945년 9월, 그는 미군을 인천으로 상륙시켜 이를 달성하고 그 자료를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었다. 즉 이미 대군을 인천으로 들여보냈던 경험이 이미 있었기에 상륙작전을 실시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Q.  조선시대의 금화도감은 어떤 방식으로 모집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초에 한양을 건설한 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인접한 가옥과 가옥 사이에 방화장(防火墻)을 쌓고, 요소(要所)마다 우물을 파고 방화기기(防火器機) 등을 설치한 바 있다.1426년(세종 8) 2월에 화적(火賊)의 방화로 큰불이 일어나자, 곧 금화도감을 설치하여 화재의 방지와 개천과 하수구의 수리 및 소통을 담당하게 하고, 화재를 이용한 도적들을 색출하게 하였다. 관원은 제조(提調) 7인, 사(使) 5인, 부사(副使)·판관(判官) 각각 6인을 두었다.금화군은 정식대원이 아닌 군인이나 관청 노비들로 구성된 비상 대기조였습니다. 1467년 세조때가 이르러 멸화군으로 이름이 바뀌고 더욱 전문화된 소방대원의 모습을 갖췄습니다.정원은 50명이고 24시간 상시 대기를 했습니다.
Q.  북한의 김일성은 어떻게 지도자가 됐는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2년 4월 15일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당시 평양과 중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 재학 중이던 1920년대 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 공산당 밑에서 만주 지역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하였으며, 일본의 탄압을 피해 1940년 소련으로 월경해 소련군에 입대했고 1945년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에 돌아왔다.보천보 전투는 본인의 이름을 날린 시초였다. 비록 날렸다는 것이 그의 본모습 이상으로 나이가 지긋한 을지문덕 같은 노련한 장군이 거사를 벌인다고 과대포장되어 김일성에게는 운이 좋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독립 운동 당시 자신을 중국의 '안도 사람'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는 등 진지하게 민족주의를 원했는지는 의문을 가지는 시각도 많다.광복 이후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믿던 소련 군부에 의해 북한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하자 폭력적인 토지개혁으로 갈등을 조장하여 더 공고한 권력을 추구하였다. 6.25 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다수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전쟁범죄를 일으켰으며 이후 8월 종파사건, 갑산파 숙청 사건 등을 통해서 중국과 소련과 연계가 깊었던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여 1972년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채택과 함께 마침내 유일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Q.  촉나라 구부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충성스럽고 덕이 높았으며 전장에서 공을 세워 그 위명이 왕평에 버금갈 정도의 인물이었다 한다.앞에는 왕평과 구부가 있고, 뒤에는 장익과 요화가 있다며 당시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다고 한다.이외에 기록이 없다.촉나라 쪽 기록은 많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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