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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예술가들은 다른 여러나라에서도 배고픈 직업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술이라는 영역은 사는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1 2차 산업이 아닌 기초적인 산업군이 아닌 3차 산업으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선택에 따라서 부를 축적하거나 평균적인 삶을 영위할수 있는 기회도 있긴 하지만 확률적으로 적습니다.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수요가 적으니 많은 예술가들이 어려움들을 격고 있겠죠?다른 나라들은 예술가에 대한 인정과 존경이 있어서 많은 지원과 후원이 있는 나라들이 있기도 합니다.그런데 어디까지나 비율의 문제이지 예술가들의 삶이 평균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습니다.저의 주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고민과 '돈을 어떻게 벌어서 뭘 먹고 살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고민이 다른 것이기에전자는 예술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고민이고... 후자는 보통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하며 사는 것이죠그런데 예술가들도 배고프면 다 후자를 생각합니다.사람들이 당장 먹고 잘 곳이 필요하지... 연극, 영화, 미술, 음악 등은 없어도 살 수 있거든요.마지막 질문에 많은 생각이 듭니다.
Q.  조선시대에 남성들은 모두 수염을 길러야만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의 수염은 지위와 권력을 상징 했습니다.신언사판이라 하여중국 당나라 때 관리 등용 시험에서 기준으로 삼았던 네 가지 조건 '신수,말씨,글씨,판단력'수염은 아주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 였습니다.멋과 개성일 뿐만 아니라 양반임을 드러내는 도구였죠.
Q.  ISO 규정에 대한 역사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여러 나라에 있는 표준 제정 단체에서 뽑힌 대표로 이루어진 표준화 기구이다. 1947년에 출범하였으며 국제적으로 두루 쓰는 표준을 만들고 보급한다.영어: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프랑스어: 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normalisation러시아어: Международная организация по стандартизации (Mezhdunarodnaya organizatsiya po standartizatsii)영문 명칭에서 보다시피, 기구의 약칭은 ISO다. 약칭이 특별히 어느 언어를 따른 게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평등한’을 뜻하는 그리스어 ίσος(ísos)를 가져와 ISO를 모든 언어에서 쓰이는 약칭으로 정했다.참고로 북한에서는 이 기구를 '국제규격화기구'라고 부른다. 한국(남한)에서 'standard'의 역어로 널리 쓰이는 '표준'이라는 단어가 북한 문화어에서는 금지어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무근. 북한에서 표준이라는 단어를 딱히 꺼리지는 않는다.# 단지 북한판 KS의 이름이 '국가규격'을 줄인 국규라서 그런 것이다.ISO라는 단어는 흔히 1의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정한 표준들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흔히 표준에 숫자로 된 코드번호가 붙고, 그 앞에 ISO를 표기해 ISO 제정 표준임을 명시하는 방식이다.강제력 없는 비정부 기구로, 전 세계에 많은 회원국을 거느린 집단이다. 비록 강제력은 없지만 워낙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ISO에서 발의된 표준 권고는 대부분 협약을 통해 제도화된다.세계무역기구나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서도 권고 즉시 규정화하는게 보통이다. 유럽연합은 ISO 규정이 나오면 재빨리 유럽의회에서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켜 강행 법규로 만든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자유무역협정에서도 분쟁이 발생할 시 규격 표준은 ISO xxx번을 따른다는 식으로 규범화한다.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스위스 프랑을 사용한다. 특정 국가의 화폐를 쓰는 것은 표준화할 때 특정 국가의 입김이 커지는 효과가 있다며 개발도상국 위주로 거세게 반발하는 중이다. 개도국들은 ISO에서는 특정국 화폐가 아닌 금(Gold)이나 특별인출권(SDR)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표준안은 주로 영어로 작성되고 있으나, ISO가 채택한 공식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다. 다만 프랑스어로는 흔히 번역되는 편이나 러시아어로의 표준 발행은 드문 편. 스페인어나 아랍어 등 비공식언어로도 공식 번역판이 발행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어가 공식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영어판을 번역하여 국내판을 만든다.2022년 9월 제44차 ISO 총회에서 한국의 조성환 현대모비스대표가 우리나라의 ISO활동 이래 처음으로 ISO 회장으로 선출됐다. 기사조성환 대표는 2023년 당선자 신분으로 활동한 뒤 2024~2025 2년간 임기를 수행한다.
Q.  6.25전쟁과정 중 다부동 전투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다부동 전투(多富洞戰鬪)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전투를 벌인 끝에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세를 꺾었다.이후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투입된 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이 지역에서 북한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냄에 따라,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공격의도를 좌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하여야 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에게 있어서는 낙동강 전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하게 해준 결정적인 전투이기도 하였다.
Q.  제주 4.3사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여순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2003년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하고 있다.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고, 미곡정책 등에서의 군정의 정책 실패는 군정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집회 당시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개한 총파업을 초래하였다.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 및 이를 이용한 남로당의 선동으로 분석하였으나, 사후 대응으로는 후자에 비중을 두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여 강경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슬로건으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고, 5·10 선거를 방해하여 무효화시켰다.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였다. 작전 결과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해안 마을에서도 ‘북촌사건’과 같은 불법적인 처형이 이루어졌다. 무장대 역시 마을을 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에 대한 살해를 저질렀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는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54년 9월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이러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위원회에 심의·결정된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다.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희생자 중 20.9%는 여성, 14.5%는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다. 특히 초토화작전 시기(1948.10.11 ~ 1949.3.1.)에 전체 희생자의 67.2%가 발생하였다2003년 발간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사태의 책임에 대해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하고 지도부가 북한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무장대, 4·3 이전부터 도민과 마찰을 일으키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 사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회, 초토화작전을 통해 대부분의 희생을 발생시킨 군 지휘부 및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진압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 사건 발발과 진압과정에 관련된 미군정의 책임을 모두 지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 정치 집단들이 대부분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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