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족 차별 정책은 어떤것이 있어 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문화/종교/인종이 모두 다르며 역사적으로 원한을 쌓아올대로 쌓아온 로힝야족은, 미얀마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아왔다. 이 미얀마인들에는 주류 버마족 뿐만 아니라 버마족과 피터지게 싸워온 소수민족들도 포함된다.보통 카친족이나 샨족 등 다른 미얀마 내 소수민족들은 서로 인접해 있어 이해관계나 원한관계가 있지 않는 한 버마족에 대한 경계 때문에 서로 연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로힝야족만은 이 연대에서도 배제되고 있다.미얀마의 주류 민족인 버마족들 못지 않게 로힝야족을 가장 증오하고 싸움을 펼치는 건 라카인 주의 소수민족인 카미족과 라카인족이다. 라카인족은 라카인 주의 최대 민족이며 카미족과 샨족 또한 상당한 수를 차지한다. 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라카인은 로힝야족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자 가장 많이 정착한 곳으로, 원래 여기 거주하던 소수민족들과 직접적인 갈등을 겪고있는 민족이다. 따라서 라카인 주에서 로힝야족을 박해하고 있다는 뉴스에 등장하는 미얀마인은 버마족뿐만 아니라 라카인족, 카미족, 샨족 등 라카인 주의 소수민족들도 여기에 포함된다.미얀마 중앙정부와 그 중앙정부를 통제하는 미얀마 군부는 2012년 이전에는 사실 로힝야족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라카인 주에는 정부와 군부를 주도하는 버마족이 거의 살지 않는 데다가 원주민인 라카인족과 카미족 등의 반군 활동으로 버마족이 이주를 기피함에 따라 사실상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닿지 않아서 이이제이의 심정으로 방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문제가 극적으로 바뀐 계기는 2012년 발생한 대규모 분쟁 사건이다. 2012년 5월 28일 저녁, 로힝야족 남성 3명이 라카인족 여성 1명을 강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3명의 용의자를 체포하여 이송했으나 문제는 분노한 라카인족이 6월 3일 용의자들이 타고 있다고 착각한 버스를 공격하였고 10명의 로힝야족이 사망했다. 로힝야족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6월 8일 라카인족 마을을 습격하여 집에 불을 지르는 등 폭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 12명 이상의 불교도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로힝야에 대한 아라칸족의 분노는 불타오르기 시작하여, 6월 9일 로힝야 족에 대한 폭동이 시작되었다. 라카인족은 라카인 주 불교계의 지지와 함께 폭동을 진행했고 로힝야족 거주구역을 공격하여 로힝야족 수백여 명이 사망하고 약 20만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했다. 동남아의 상좌부 불교는 그 자체가 권위와 권력있는 종교집단인데다가 절에 정주하면서 시주받는 재산으로 사는 게 일반적인 대승불교와 달리 상좌부 불교는 교리상으로 탁발이 의무화되어 있어 매일 여러 마을과 길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이래서 어두운 뒷골목이나 로힝야족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 근처에 간 승려들이 로힝야족 극단주의자에게 습격당해 참수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공공연하게 처형하는 일도 벌어져 로힝야족 시장에 승려의 목이 1주일간 걸려있었던 적도 있다. 이게 미얀마 전국 방송을 탄 시점에서 미얀마인들과 승려들의 분노는 폭동 직전으로 치달았다.게다가 2014년 로힝야족 분리주의 반군이 하필이면 다에시에 충성 맹세를 하면서 전세계에다 어그로를 끌게 되었고, 안 그래도 골치아픈 문제가 더더욱 심화되었다. 이 극단주의 반군은 조직적으로 승려를 참수하고 불교 신자들이 탄 버스를 습격하여 수십 명씩 살상하였고, 인근 불교도 마을을 공격하여 방화, 살해, 강간을 하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로힝야에 대한 강경한 처분을 주장하는 미얀마 내 강경파에게 명분을 주는 실수를 범한다. 특히 동남아시아는 서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권이 낙후되어 있으며 내전과 정치적 탄압 등으로 자기 민족도 수만 명씩 학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지역이라, 테러는 곧 대규모 보복학살을 부를 것이라는게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문제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미얀마 정부도 경찰인원을 라카인주에 대거 배치하고 상시 감시체제에 들어갔다. 2016년 10월 9일에는 로힝야 무장 반군이 버마 국경 초소를 습격해서 9명의 국경관리인을 죽이고 다수의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다. 10월 11일에는 다시 버마군인 4명이 살해됐다. 이에 대응해 버마 정부는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폈다. 이렇게 민심이 악화된 상태에서 2017년 8월 25일, 대전차 미사일 등 중화기로 무장한 로힝야족 반군인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이 2차례에 걸쳐 경찰 초소를 동시에 수십곳을 공격하여, 1차로 30여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수백명이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미얀마군은 "로힝야 구원군은 중화기를 포함해 중무장한 상태이며 민간인과 군경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을 감행하고 있는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했다. 이 진실게임에서 무장수준에 대해서는 금방 밝혀졌는데 2016년 초 로힝야 구원군이 IS에 충성맹세를 할 때 자신들의 무기와 병력을 자랑하는 동영상을 스스로 뿌렸기 때문이다.이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만 의문이었을 뿐인데, 미얀마는 "이 사건 조사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지하디스트와 자금 무기 등인 것이 밝혀졌다"고 주장하고, "국제구호기구의 일부 직원이 폭발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암모니아 등을 공급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로힝야족 거주구에 모든 국제구호기구의 출입을 금지해버렸다. 이와 같은 강경한 태도로 인해 로힝야족에 대한 긴급구호지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현장의 실태조차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미얀마군의 이 주장은 국제분쟁 전문연구기관인 국제위기그룹 IGC의 보고서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ARSA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로힝야 망명자 위원회의 감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으며 이 단체의 지도자격인 야타 울라는 미얀마에서 태어나지 않은, 파키스탄 카라치의 로힝야 이주자 집안에서 태어난 외국인 지하디스트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전장에서 경험을 쌓은 20명 이상의 다국적 남성이 미얀마로 밀입국하여 2년 넘게 수백명의 로힝야족에게 무기사용법과 사제폭탄의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고도 언급했다.이 사건 이후, 미얀마 정부군은 경찰로 치안을 확보하려는 자세에서 벗어나, 로힝야 거주구역을 군사작전구역으로 선포하고 아예 군대를 진주시켜 반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반군만 건드리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민간인 거주지를 불태우고 로힝야족을 추방하고 있어, 이로 인해 1차로 30만 명, 이후 30만 명이 추가되어 미얀마 내의 로힝야족의 70%가 집을 잃어버리고 방글라데시로 탈출한 상태이다.미얀마군의 진압행위의 명분이 되는 로힝야 반군의 잔혹행위는 미얀마군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고 UN 구호기구의 접근권한이 통제된 탓에 세계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일방적인 주장이라 소개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국제앰네스티가 2018년 5월 22일자로 홈페이지를 통해서 로힝야 구원군이 미얀마 군경초소를 공격한 날 직후에 최소한 힌두교인 99명을 살해한 증거를 찾아서 공개했다고 복수의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로힝야 반군의 힌두교인 학살 사건의 진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2017년 8월 25일 라카인주 북부 마웅토의 힌두교도 집단 거주지인 아 나욱 카 마웅 세이크 마을에 들어가 약탈하고, 눈을 가리고 결박한 힌두교도 53명을 마을 외곽으로 데려가 처형했는데 그 중 14명이 8살 이하의 아동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주변 마을인원 전원을 살해하기 시작했는데 남성은 모두 살해되었고 이슬람으로 개종강요에 동의한 여성 8명과 그들의 아이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미얀마와 방글라데시로 흩어져있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엠네스티는 집단처형되었다고 주장된 장소를 직접 검증하였고 해당 장소에서 처형된지 1년된 시신들을 찾아내고 법의학자의 검증을 거쳐 진실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앰네스티 보고서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그 동안 미얀마군의 군사작전구역 선포에 이은 강경진압으로 UN추산 1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해당지역에 미얀마가 군대를 투입하면서까지 대규모 작전을 벌이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인가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있어왔기 때문이다. 종교를 이유로 미얀마에서 주도권을 쥔 불교도도 아닌 소극적으로 은둔하고 있는 힌두교인을 대규모로 학살한 사건이 밝혀졌기 때문에 해당지역에 미얀마군이 군사작전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워졌다.다만 로힝야 반군은 굉장히 궁핍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로힝야족의 무장은 오랫동안 엄격히 감시되고 있었으므로, 실제 반군 병력은 수백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경찰력으로는 통제가 무리가 있는 숫자이기는 하나 독립 이후 수십 년간 내내 최대 3만여명의 카렌족 반군이나 1만이 넘었던 카친족 반군 등과 전투를 벌이던 미얀마군에 있어서는 그리 많지 않은 숫자이고 카친 주의 경우 99%가 카친족일만큼 여타 반군과의 전투는 적지에서의 작전이지만 라카인주의 부락은 과반이 미얀마군을 지지하는 등 실전경험이 풍부한 미얀마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이 과정에서 현재까지 사망자는 미얀마군이 밝히는 바로는 400명이지만 UN은 천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현재 일어나고 있는 집단적 방화사건의 진행이 국제적 탐사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우선 미얀마군이 로힝야족 부락에 대해 이틀내로 무차별 공격이 있을 것을 통보하고 퇴거를 종용한다. 자기 집과 논밭을 버리고 퇴거하지 않는다면 박격포와 기관총을 동원한 위협사격으로 이들이 황급히 탈출하게 만들어 마을을 비운 뒤 군대를 따르는 일단의 미얀마인들이 로힝야족 부락에 남은 것들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며 남아있는 로힝야인을 죽이거나 강간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아마도 이 행동이 전쟁범죄라는 것을 미얀마군(버마족)도 인지하고 직접 손을 더럽히기보다는 카미족과 아라칸족의 손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로힝야족 부락을 모두 불지른 뒤에 사태가 진정되면 이후에 이러한 전쟁범죄가 미얀마군의 행동임을 부정하고, 방화사건은 반군활동이 활발한 카미족과 아라칸족의 행동이라고 선언해서, 이들에게 죄를 일방적으로 떠넘겨 숙청하여 반항적이고 미얀마의 골칫거리인 라카인 주의 반군세력을 일거에 싹슬이할 속셈으로 보인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 시키지 않았다고 해도 주민을 쫒아내고 인근 적대 부족의 약탈 방화를 묵인하는 시점에서 미얀마 정부와 미얀마군이 책임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런 강제 퇴거에 로힝야족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으며, 끝까지 떠나지 않고 교섭을 시도하거나 저항하는 로힝야족은 분명 사살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빠른 강제 퇴거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지고 온 짐이 무거워 국경에서 강을 건너 방글라데시로 넘어가는 걸 주저하는 로힝야족에 대해 웃으면서 기관총과 박격포로 위협 사격을 가하여 황급히 탈출하게 하는 모습까지 방글라데시군에 의해 목격되었기에 미얀마 정부와 미얀마군이 저지르고 조장했다는것이 드러나면서 이들의 행동에 대해 국제 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Q. 구세군은 언제부터 시작된걸까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65년 영국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가 런던 슬럼가에 창시한 기독교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창립 당시 명칭은 '그리스도교 선교회(Christian Mission)'이다.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의 ‘이웃에게 빵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뜻에 따라 서민층을 상대로 노방(路蒡) 전도를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역사와 확산구세군 운동은 18∼19세기 여러 개신교에서 일어났던 개인주의 신앙을 탈피하는 것 외에도 사회적 약자를 도와 사회구원의 뜻을 실천하자는 복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교육, 가난 구제, 자선사업 등 그리스도 교리를 통해 전 인류적 구원을 이룬다는 목적을 지니고 출발하였다. 1878년에는 '구세군(The Salvation Army)'으로 이름을 바꾸고 점차 군대식 조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회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대상으로 봉사·선교활동을 전개, 서민·빈곤계층을 중심으로 큰 지지를 얻으며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매년 연말에 실시하는 불우이웃돕기 모금운동인 '자선냄비'로 유명한데, 구세군 자선냄비는 189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난파한 배의 생존자를 돕기 위해 시작된 것에서 유래되었다. 자선냄비의 유래구세군 자선냄비는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근교 해안에 배가 좌초되면서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했는데, 한 구세군 여사관이 모금활동 중 쇠솥을 다리에 걸고 거리에 놓고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는 문구로 기금을 모은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 구세군 자선냄비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붉은 세 다리 냄비걸이와 냄비 모양의 모금통, 제복을 입은 구세군 사관의 손종소리로 상징되며 매년 연말의 대표적 모금운동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8년 12월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준섭(조셉 바아) 사관이 서울의 도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특징구세군은 군대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사용하는 용어나 복장이 군대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기본 구성단위는 영문(구세군 교회)과 사회사업시설로 이뤄져 있는데, 구성단위의 책임자는 '사관'으로 호칭한다. 구세군 사관은 다른 개신교의 목사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영문(교회)을 책임진다. 사관이 되기 위해서는 사관학교에서 2년간 훈련을 받은 뒤 5년 과정의 고급 연구과정을 마쳐야 한다.국내의 구세군우리나라에는 1908년 10월 영국인 로버트 호가스(Robert Hoggard, 1861∼1935)와 그의 부인 애니 존스(Annie Johns, 1862∼1941)에 의해 최초로 구세군이 전파되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권 침탈 직전의 국가정치적 위기 상황을 겪고 있었는데, 구세군은 민중계몽, 여성지위 향상 등의 사회개혁 운동과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빈민구호 및 고아원 설립 등의 사회활동을 실시하였고, 1928년에는 빈민구제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실시되고 있던 자선냄비 모금운동을 도입해 자선사업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국제구호 지원 단절 등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재개된 국제구세군의 지원으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빈민·피난민·고아들을 돌보는 등 한국의 전후복구사업에 참여하였다. 현재도 구세군은 다양한 선교 및 사회활동을 펼쳐오고 있는데, 구세군 대한본영은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130에 위치하고 있다.
Q. 12.12사태는 어떠한 이유때문에 발생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79년 12월 12일 전두환ㆍ노태우 등이 주동하고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강제 연행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1979년 10ㆍ26사건을 계기로 하여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한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ㆍ26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고 하여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한다. 이 일련의 사건에 관여한 사람은 9사단장 노태우를 비롯하여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등이다.한편, 정승화 총장의 신변안전에 책임이 있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참석 중이었다.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裁可)없이 진행되었고, 사후 재가를 받기 위하여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에게 강압적으로 정승화 총장 연행의 재가를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이에 맞서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노재현에게 대통령을 설득하도록 한다. 마침내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대부분의 신군부 세력은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다. 즉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고, 그 외에 유병현ㆍ황영시ㆍ김복동ㆍ유학성ㆍ박준병 등은 군의 요직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실시하여 국가권력을 탈취한다. 그 다음날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Q.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는 언제 최초로 만들어졌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나라에 자전거가 맨 처음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인력거와 함께 일본에서 들어온 1890년대라는 설도 있고, 자동차와 함께 들어온 1900년대 초기라는 설도 있다.그러나 그에 따른 여러 일화를 살펴보면 그것이 1900년 이전, 그러니까 민중이 개화라는 말을 아직 피상적으로밖에 실감하지 못할 무렵에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그 일화가 마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황당하기 때문이다.개벽사에서 발간한 대중잡지 월간 에서는 1928년 12월호에서 우리 나라에서 맨 먼저 자전거를 탄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이 기사를 보면 시기나 타당성으로 볼 때 그 인물은 아무래도 송재 서재필일 가능성이 높다.그가 자전거를 들여와 타고 다닌 것은 1895년 개화파의 초청으로 망명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그가 망명한 것은 행동대장으로 참여했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귀국한 해는 반역죄가 사면된 다음 해이다. 22세 때 망명하여 11년 만에 귀국했을 때 그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직업은 의사였다. 그가 미국에서 사용하던 자전거를 가지고 와 타고 다닌 것이다.당시 조선의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교통수단은 말과 나귀 그리고 가마가 전부였다. 또한 인력거가 막 들어왔을 때였다. 좁은 도로는 포장되어 있지 않았고, 굴곡진 곳이 많았으며, 우마와 사람의 통행이 따로 있지도 않았다.그런 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서재필의 모습은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신기하고 경이로운 것이었다.자전거를 처음 본 사람들은 나름대로 명칭을 붙였다. 자행거(自行車)·안경차(眼鏡車)·축지차(縮地車)·쌍륜거(雙輪車)라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전거'라는 명칭은 1903년 가을에 정부에서 관리들의 공무수행을 위해 1백 대를 도입한 이후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서재필의 자전거는 '축지차'로 불렸다고 한다. 먼 거리를 빨리 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데서 나온 명칭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도 만나고 일도 처리하는 그가 한마디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그런 면은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민중은 미국에서 의사가 되어 돌아와 조선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를 이인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정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그를 미국에서 축지법을 배워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하루에도 몇백 리를 가는 미국 축지술의 명수라고 했는데, 그것은 기실 자전거를 타고 분주하게 다니는 서재필의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당시 그가 타고 다녔다는 자전거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에게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좌옹 윤치호가 하와이에서 주문해 가져온 자전거가 공기 타이어 바퀴로 되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타이어 바퀴가 등장한 것은 1886년 영국의 던롭에 의해서였다. 그러니까 한국에 자전거가 도입된 것은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625 이후 자전거가 여행수단으로 주목을 받고 본격적인 생산이 이뤄졌다. 초기에는 매우 비싸긴 했지만, 기술이 발달해 대량생산이 가능했고 자전거가 널리 보급됐다. 기아차의 출발도 자전거 업체에서 시작됐고 삼천리 자전거도 기아와 분리된 초기 자전거 제조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