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전국을 통일했다는데 그전에는 통일국가가 아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천황은 나중에 생겼고 당시에는 쇼군들이 있었습니다.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일본을 다스리고 있었어요.후계자 때문에 고민한 아시카가 요시마사1449년부터 1473년까지 쇼군으로서 일본을 다스렸다. 정치보다는 문화 예술에 관심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요시마사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어요. 그 때문에 요시마사는 동생 요시미를 쇼군의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으로 정했어요. 그리고 관령(쇼군을 보좌하는 직책)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후견인으로 정했지요.그런데 이를 어떻게 할까요? 뜻밖에도 이듬해 요시마사의 부인 히노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를 낳았어요.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이 쇼군이 되길 원했지요. 그래서 야마나 소젠을 후견인으로 삼아 호소카와 가쓰모토에 맞섰어요. 후계자가 되면, 엄청난 땅과 지휘권을 갖게 되기 때문에 서로 한 발도 양보할 수 없었답니다.결국 이 후계자의 문제를 놓고, 양쪽은 무려 11년 동안이나 여러 지방의 지배자인 슈고 다이묘들과 무사들을 끌어들여 치열하게 싸웠어요. 쇼군 요시마사가 전쟁을 멈추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이 일을 두고 ‘오닌의 난’이라고 불러요.결국 1477년이 되어서야 난리가 수그러들었어요.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교토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어요. 사찰은 물론이고, 천황과 귀족들의 집이 불탔고, 문화재까지 부서졌어요. 뿐만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와 쇼군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지요. 슈고 다이묘들은 전투를 끝내고 각자의 지방으로 돌아갔지만, 더 이상 쇼군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오닌의 난 이후에는 쇼군보다 땅 많고 힘센 사람이 최고가 되었어요. 여러 세력이 저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어서는 전국 시대가 막을 연 거예요.아랫사람이 윗사람의 힘을 무시하는 일은 지방에서도 일어났어요. 여러 싸움을 거치면서 스스로 힘을 키운 지방의 세력들은 슈고 다이묘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세력으로 커 나가기 시작했어요. 이들을 센고쿠 다이묘라 부르지요.“누구의 땅이든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센고쿠 다이묘들은 그렇게 외치며 땅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였어요. 서로 뭉쳤다가 배신하기를 반복했지요.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땅을 두고 싸움을 벌였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센고쿠 다이묘들은 땅과 농민을 손아귀에 넣고 경제력을 키워 나갔어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고, 불안한 날들이 계속 이어졌어요.그러던 1543년, 포르투갈의 배 한 척이 폭풍우를 만나 일본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까지 떠내려 왔어요. 이때, 이 지역의 영주 다네가시마 토키타카는 서양 사람이 가지고 있던 총을 사들였어요. 그리고 가까운 부하들에게 총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했어요.총은 전국에 퍼져 나갔어요. 이즈음에는 한참 센고쿠 다이묘들이 서로 다투고 있던 때라 앞다투어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려 했지요. 이 때문에 기마병 중심의 싸움은 점차 줄어들고, 성의 구조도 총알을 막기 위한 모양으로 바뀌어 갔어요.그런데 유독 총을 잘 이해하고 직접 만들어 내는 데 일찍부터 열을 올린 센고쿠 다이묘가 있었어요. 그는 총을 많이 만들고 조총 부대까지 실제 전투에 나서게 했어요. 옛날 방식의 전투를 단숨에 바꾸어 버린 거예요. 그는 오다 노부나가였어요.노부나가는 원래 오하리국 남쪽에 있는 기요스 성의 성주였어요. 그곳은 교통의 중심지였고, 농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땅이었어요. 훗날 노부나가가 재빨리 조총 부대를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지리적 여건이 한몫을 했지요.미쓰히데를 혼내는 노부나가미쓰히데가 배신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뿐이다. 배신한 이유가 노부나가에게 무시당한 원한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결단력이 빠르고 과감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당시의 센고쿠 다이묘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주 컸어요. 노부나가는 7년 동안 준비하여 전국의 중심지인 교토에 재빠르게 먼저 들어갔어요.그러고는 자신과 반대편에 선 적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지요. 1570년 에치젠의 아사쿠라 씨, 오미의 아사이 씨를 굴복시키고,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를 무찔렀어요. 바로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조총 부대를 앞세워 승리를 거두었어요.“기병이 공격해 오는 쪽에 장애물을 만들고 그 뒤에 조총 부대를 두어라!”이에 약 3천 명의 조총 부대가 당시 최강이라고 알려진 가쓰요리의 기병대를 단숨에 무찔렀어요.이어 1580년에는 10년 동안 승부가 나지 않던 정적 겐뇨와의 싸움에서도 항복을 받으며 끝을 냈어요. 그럼으로써 사실상 일본 중앙부의 절반 이상을 손안에 넣었지요. 이제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전국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는 듯했어요.그러던 1582년,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카마쓰 성에서 모리씨와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도움을 청해 왔어요. 이때 노부나가는 급히 달려가 다카마쓰 성에서 멀지 않은 혼노지까지 갔어요.그런데 며칠 후 새벽, 자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 중의 하나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공격해 왔어요. 뜻밖의 배신에 놀란 노부나가는 온 힘을 다해 싸웠지만, 준비를 하지 않고 있던 터라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지요. 마침내 오다 노부나가는 패배를 인정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오다 노부나가가 꿈꾸던 전국 통일은 뒤이어 등장한 히데요시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답니다.
Q. 크리스마스와 산타와의 관계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입니다. 전세계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유명 인사가 산타클로스이며 산타클로스 모자는 크리스마스를 기리는 사람들이 쓰는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이슬람 근본주의 시절 사우디아라비아가 크리스마스는 금지해도 산타클로스는 제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봐도 산타클로스의 상징성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아체, 탈레반 치하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에서는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가 금지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알음알음 산타클로스에 대해 알고 산타클로스는 전세계 사람들이 공유하는 유명인사입니다. 하지만 국가별로 산타클로스의 형태가 다릅니다. 정확히 말하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인물이 다릅니다.산타클로스 원형그 전에 산타클로스 원형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산타클로스의 원형은 로마 제국 시절 성 니콜라우스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낼 돈이 없자 성 니콜라우스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집 기둥으로 딸을 위한 금덩이를 선물을 전해준 이야기가 전해져 지금의 산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 덕분에 세 딸은 시집을 갈 수 있었고 이 헌신이 나중에 밝혀져 성 니콜라우스는 성인으로 존경받았으며 서로 귀중한 선물을 주는 문화가 탄생했습니다. 이것이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 선물 문화로 전해져 옵니다.그리스: 성 대 바실레이오스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는 특이하게 성 대 바실레이오스를 크리스마스 날 선물을 주는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성 대 바실레이오스는 로마제국 종교 분열 위기 속에 이를 해결하고자 한 성인으로 동시에 약자들을 위한 사회 봉헌활동도 활발히 해 모두에게 존경받던 성인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는 성 대 바실레이오스를 크리스마스 날 내려와 약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성인으로 생각하며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아기예수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독일 남부에서는 크리스마스 날 아기 예수 혹은 천사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준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기립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천사 장식을 달고 집이나 교회에 아기 예수와 천사 장식을 달아 봉헌합니다.산타클로스그 외의 가톨릭, 개신교 국가들은 성 니콜라우스를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는 성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부터 성 니콜라우스 이미지는 교황처럼 큰 교회 모자를 쓰고 교황 옷차림을 한 성인 성 니콜라우스가 노새 등에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담아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이미지였습니다. 독일 북부와 폴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 이 이미지가 전달되었고 식민지 개척시대에 그 이미지가 아메리카 국가들로 퍼졌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성 니콜라우스 이미지를 변화했습니다.코카콜라 회사는 브랜드 마케팅 주제로 성 니콜라우스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성 니콜라우스를 산타클로스라고 불렀고 코카콜라 회사는 코카콜라를 마케팅하기 위해 교황 옷차림인 산타클로스 옷차림부터 바꿨습니다. 코카콜라는 산타클로스를 동네 푸근한 할아버지로 묘사하며 산타클로스를 새롭게 재해석했고 코카콜라와 산타클로스를 동시에 브랜드 마케팅했습니다. 이 마케팅이 잘 먹혔고 지금 산타클로스 이미지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만든 이미지입니다.또한 1939년 미국에서 루돌프 사슴 동화가 나오자 동화 내용처럼 산타클로스가 루돌프 사슴 썰매를 끄는 이야기가 새롭게 창작되며 노새를 끄는 성 니콜라우스 이야기에서 루돌프 사슴썰매를 타는 산타클로스 이야기로 이미지가 굳혀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산타클로스 이미지는 미국이 창조한 이미지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세계로 퍼졌고 지금 전세계 크리스마스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Q. 노량해전이 왜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전투입니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하였다가 휴전 협상 조건이 서로 맞지 않아 결렬, 1597년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도독 유정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해상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사망하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주둔 일본군의 수뇌부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 왜교성 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시게토라, 남해에 주둔 중이던 소 요시토시 등은 고니시 군을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에 매복시켰다.이튿날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수적 우세로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지만 오히려 퇴로가 막힌 관음포로 유인당해 일본 측이 포위공격을 당하게 된다.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는 기회를 잡고 탈출을 시도했고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했고,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다. 단 한명의 조선수군도 동요되어서는 아니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초계군수 이언량 흥양현감 고득장 등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 군과 함께 일단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였으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Q. 나라를 팔아 자신의 이득을 취한 이완용은 본래 어떤 사람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구한말의 관료이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일본 제국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했고,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자 몇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4년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친일파로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후대에도 친일파, 매국노의 대명사격으로 일컬어지곤 한다.[12]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이가 완용'. '이씨 가문의 완용'이란 뜻이다. 사실 이완용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쓰던 동시대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한국명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부정적 평가첫째, 일본과 러시아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놓고 이리저리 애썼던 것만은 사실이나, 그에게 있어 독립이란 '근대적 국민 국가'로서의 독립보다는 왕실 보존 및 안위 문제로서의 '독립'이란 의미였다. 그 예로 미국을 끌어들이려 온갖 수를 다썼지만, 정작 미국을 본받아야 했던 보통교육, 참정권, 공화정, 노비 철폐 등은 전혀 도외시했고, 근대적 의회 정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국가로서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조건인 근대 헌법 제정등에 전혀 한 일이 없다. 특히 이완용 등 수구파들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내놓은 대한국 국제라는 것은 왕권의 전통적 절대성만을 강조한 내용으로, 국민 모두를 아우를 지지와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둘째, 근대 개혁을 정부 주도로 하려했음에도 그 동력이 될 국가 예산이나 국가 재산 및 세수 확보에도 한 일이 없다. 수백년간 면세를 누려온 양반들, 특히 온갖 혜택을 독점한 문벌 세도가들이라든지, 왕실 종친들에게 사사로이 주었던 국가 전매 사업등, 근대화에 방해가 되는 사회 구조를 놔두고 이완용 등 수구파들이 한 짓은 각종 이권을 열강들에게 헐값에 넘기는 일 뿐이었다. 여기서 받은 얼마간의 돈은 왕실 재정과 일부 정부 요인들에게 도움은 됐을지언정, 이권을 넘겨 열강들이 마구 국부를 유출해가는 통에 정부 재정과 국민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져 갔다.게다가 일본에 나라를 판 후 대가로 불어난 그의 재산은 현재 추산 수조원에 달했고 가진 땅만 1억 3천만 평이 넘었어도, 을사조약 체결 직전 변명처럼 떠들었던 '나라가 다시 부강해지면 그 때가서 국권을 되찾으면 된다'는 말을 실현하기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었고, 후배들과 역사에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했다.셋째, 그의 리더십으로는 대한제국 정부 내각 내에서조차 합의를 이끌지 못하고 정적(政敵)들만 자꾸 생겼다. 이완용이 젊은 시절 주미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수십년간 그를 지켜봐왔던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주의자 아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완용은 초창기 독립협회의 의장이었다. 독립협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우습지만 일본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윤치호 일기 내용 중에서-이완용의 조카 김명수가 이완용 사후 1주년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저술한 책 《일당기사》또한, 이완용의 조카이자 이완용의 비서직으로 있던 김명수가 이완용을 기리기 위해 1927년 《일당기사(一堂紀事)》를 펴냈는데, 《일당기사》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가치관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다.나는 20세 때에 한학(漢學)을 숭상하고 산림학(山林學)에 종사했으나 존도숭유(尊道崇儒)의 풍이 퇴색하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되어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여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구미(歐美)로 갔다. 최초에는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그가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의 칼을 맞고 입원중, 자신을 간호하던 맏며느리 임건구와 간통을 하여 장남 이승구가 자살하였고, 며느리는 이완용이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패륜적 성추문 마저 기록돼 있다.그런데 친일파 문제를 연구해온 윤덕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에 따르면, 이완용이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러 아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사실이다. 윤덕한 연구원에 따르면,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 며느리와의 불륜설도 잘못된 사실이다. 친일파이자 매국노인 이완용을 배척한 민중들의 감정이 담긴 이야기일 뿐, 술과 이성을 멀리하고 서예와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이완용의 손자이자, 자식없이 죽은 큰아들(이승구)을 대신하여 장손으로 입적한 자인 이병길도 친일파였다.이완용이 죽은 뒤, 일제 후작 작위와 전재산을 상속 받은 병길은 조선귀족회 이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넷째, 아래의 이른바 '긍정적 평가'의 이면엔 과연 무엇을 위한 타협이었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존재한다. 나라가 없이 왕실이 무슨 소용이며 대다수 양반들 역시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구차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고, 더욱이 일제에 착취당하며 곧 강제징용 및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학대당하게 될 백성들의 삶은 애당초 친일파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완용은 현재까지도 한국인 사이에서 매국노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으며, 그 이름은 중국에까지 알려지기도 했다.긍정적 평가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같은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1945년 해방이후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15 한데 이어,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15 일 뿐이다.'라며 이완용이 모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단순히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을사조약 때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내놓았던 일부 양심 인사들, 또한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과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특히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각종 이권 요구를 막아낸 이완용을 서재필은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 자 논설을 통해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이완용과 동시에 과거에 급제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부인과 젖먹이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미국으로 도망가 갖은 고생을 다했었고, 당연히 수구파의 좌장격인 이완용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 터였음에도 칭찬한 것이다. 물론 이완용이 이후,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하는 개화파 계열 독립협회원들을 공격하고 이내 협회내 모든 간부직에서 자진 사퇴하자 둘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수구파들을 대동하여 친일 개화파들과 짬짜미해 임금과 백성을 속이고 일본에 나라를 팔자 서재필은 더 큰 증오와 멸시를 보내게 된다.
Q.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생애는 어떻게 될까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프랑크푸르트암마인 출생.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로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자연연구가이고, 바이마르 공국(公國)의 재상으로도 활약하였다. 아버지는 법률가이며 제실고문관(帝室顧問官)으로서 엄격한 성격이었으며, 시장(市長)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하고 상냥하여 아들의 좋은 이해자였다. 7년전쟁(1756∼1763) 때에는 프랑스에 점령되어 평화롭고 부유했던 괴테의 집도 프랑스 민정장관(民政長官)의 숙사(宿舍)가 되고,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계획 역시 중단되었으나, 괴테는 자유롭게 프랑스의 문화에 접할 기회를 얻었으며, 15세 때 그레트헨과의 첫사랑을 경험하였다.1765년에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다가, 1768년 각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생활을 하였다. 그 무렵에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鍊金術)에 관심을 갖게 되고, 어머니의 친구인 크레텐베르크의 감화로 경건파(敬虔派)의 신앙에 접근하였다. 그녀는 후일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의 모델이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머무르면서 J.G.헤르더를 알게 되어 종래의 로코코 취미의 문학관은 철저히 분쇄당하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 감정의 순수성에 시의 본질을 구하려는 노력이 《들장미》의 가작(佳作)을 낳게 하였다.이 무렵 근처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牧歌的)인 사랑을 하였고 약혼까지 하였으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 후 회한(悔恨)과 마음의 부담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 겪은 내적 체험이 훗날 그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 1771년 변호사가 되어 고향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고, 1772년에는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 때 샬로테 부프와의 비련(悲戀)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을 썼는데, 이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고, 독일적 개성해방(個性解放)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질풍노도)’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다.1775년에 바이마르 공국의 젊은 대공(大公)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로 가서 여러 공직에 앉게 되고 재상이 되어 10년 남짓 국정(國政)에 참여하였다. 이 동안 그는 정치적으로 치적(治積)을 쌓는 한편,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하여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1784년, 동물에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던 간악골(間顎骨)을 발견하여(죽기 1년 전에 학회에서 인정되었음) 비교해부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무렵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여, 부인으로부터 인간적 및 예술적 완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1786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부인과의 애정관계는 끝을 맺었다.이탈리아에서는 수업하는 화가로서의 생활을 보내면서 1,000매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렸으며, 희곡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 Iphigenie auf Tauris》(1787) 《에흐몬트 Egmont》(1787) 등을 써서 슈타인 부인에게 바쳤다. 이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괴테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고전주의에의 지향(志向)을 결정한 시기로서 중요하다.1788년에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조화업(造花業)을 하는 가난한 집안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동거하면서(정식 결혼은 l806년),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그는 시인과 궁정인의 갈등을 그린 희곡 《타소 Torquato Tasso》(1789)와, 관능의 기쁨을 노래한 《로마 애가(哀歌)》(1790)를 발표하였다. 과학논문 《식물변태론(植物變態論)》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1791년에는 궁정극장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 때부터 고전주의 연극활동이 시작되었다.한편, 1789년 이후의 프랑스 혁명의 격동은 바이마르 공국도 휩쓸게 되어, 1792년에 괴테는 아우구스트 대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하였다. 1794년부터 그는 J.C.F.von 실러가 기획한 잡지 《호렌 Horen》에 협력하여 굳은 우정을 맺었다. 이념의 사람 실러와 실재(實在:자연)의 사람 괴테와의 이 우정은 l805년에 실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10년 남짓한 시기에 괴테는 실러의 깊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 Faust》의 재착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徒弟) 시절 Wilhelm Meisters Lehrjahre》(1796)의 완성,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1797)의 발표 등, ‘현재에서의 완성을 지향하는’ 독일 고전주의는 여기서 확립되었다.1797년에는 실러의 《시신연감(詩神年鑑)》에 공동작의 단시(短詩) 《쿠세니엔(손님에게 드리는 선물)》 414편을 발표하여 문단을 풍자하였다. 또한 문단의 물의(物議)를 외면한 채 이야기체로 쓴 시(詩)를 경작(競作)하여, 1797년은 ‘발라드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1805년 실러의 죽음과 더불어 괴테는 만년기(晩年期)를 맞이하였다. 만년의 괴테의 문학활동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세계문학’의 제창(提唱)과 그 실천이었다. 괴테는 그 무렵에 이미 유럽 문학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치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나아가서 신대륙인 미국의 문학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각 국민문학의 교류를 꾀하고, 젊은 세대를 위한 세계문학적 시야를 넓혔던 것이다.만년의 문학작품으로서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ters Wanderjahre》(1829)와 《파우스트》의 완성이 최고봉을 이룬다. 전자(前者)는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묘사한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後者)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이다. 《파우스트》는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 최대걸작의 하나이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였던 괴테는 만년에도 세 차례의 연애를 체험하였다.그 하나는 미나 헤르츨리프와의 사랑으로서, 이 소녀를 모델로 하여 소설 《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1809)을 썼다. 또 하나는 아내 불피우스가 죽은 뒤에 알게 된 빌레머 부인과의 사랑으로,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시집(西東詩集) Westöstlicher Divan》(19)이 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괴테는 마리엔바더로 피서여행을 갔다가 74세의 노령으로 19세의 처녀 우를리케 폰 레베초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사랑은 거절되었으나, 그 연모의 정이 시집 《마리엔바더의 비가》(1823)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만년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기행 Italienische Reise》(1829)과 자서전인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1833) 등이 있다.또한 그의 광학(光學) 연구의 결정인 《색채론 Zur Farbenlehre》이 1810년에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뉴턴의 이론에 대한 잘못된 비판이 들어 있어 순학문적인 견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나, 탁월한 관찰과 견해가 많이 보이고 있다. 괴테는 문학작품이나 자연연구에 있어서, 신(神)과 세계를 하나로 보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세계관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종교관은 범신론적 경향이 뚜렷하지만, 복음서의 윤리에는 깊은 존경을 표시하였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