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신문고는 어느 왕때 시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에서 1401년(태종 1년) 대궐 밖 문루에 청원과 상소를 위해 매달았던 북으로 초기에는 등문고(登聞鼓)라고 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에서는 주장관,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신고하여 사헌부에서 이를 해결하도록 하였는데, 이 기관에서 해결이 안 되는 경우에는 신문고를 직접 울리게 했다. 그런데 이 절차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라서 소요시간이 대략 1년은 걸렸다.1. 먼저 자기가 사는 고을의 수령(사또)에게 자기가 당한 억울한 사건에 대해 확인서를 받아야 한다. 보통은 자기 평판 추락을 우려하여 잘 써주지 않았다고 한다.2. 관찰사에게 가서 확인서를 받는다.3. 한양으로 가서 사헌부에서 민원을 제출했다는 확인서를 받는다.4. 신문고를 지키는 영사(令史)에게 확인서를 제출한다.5. 확인증을 수령한 영사가 확인증을 발부한 관리소에 일일이 진짜 확인서를 발부한 것인지 재확인까지 한다.6. 무려 다섯 단계를 거쳐 신문고를 두들기면, 보고가 조정에 들어간다. 그러면 왕이 금부도사를 의금부로 파견해 사정을 듣게 한다.이 제도는 조선에서 백성의 목소리가 임금에게 닿게 하는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었으나 임금은 한 나라의 지존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신문고를 울려 상소하는 데에도 제한이 있었으며 오직 종사(宗社)에 관계된 억울한 사정이나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 누명 및 자기에게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 상소 내용을 접수하여 해결해 주었다. 조금 상세히 말하자면 역모, 살인, 친자확인, 정실구별, 양민 천민 구별에 제한된 것이다. 다만 이 제한사항이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억울함을 조사하라고 왕이 보낸 금부도사들은 사건조사는 고사하고 신문고를 잘못 쳤다는 이유로 곤장이나 쳐주고 오는 일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고 한다.하지만 이와 같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건 해결에 신속성을 얻기 위하여 신문고를 무질서하게 이용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1] 그 후 신문고는 사용 제한이 더 엄격해졌고, 실질적으로는 부민고소금지법 등으로 인해 일반 백성이나 노비, 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에게는 별다른 효용이 없었으며 오직 양반들만 신문고를 울려 댔다. 그러다보니 이미 성종대부터 보다 간편한 격쟁이라는것이 등장하면서 이후로 일반인들은 신문고보다는 격쟁을 이용했다. 물론 이 당시에 격쟁이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신문고의 방법이 까다롭다보니까 임금에게 직접 호소했던 것이다.그 후 연산군 대에 이르러 없어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1771년(영조 47년) 11월에 부활되었으며 병조에서 주관했지만 제대로 된 부활이 아닌 전시행정 모습이라고 현대에 들어 까이기도 한다. 궁궐 안에 설치를 해두었는데 백성들은 궁궐에 출입조차 불가능하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고 무엇보다 영조 자신이 법 개정을 통해 격쟁을 제도화한지라 신문고는 별 쓰임새가 없었고 사실상 순조 이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Q. 김치의 역사와변천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시 형태의 채소절임김치의 기원은 소금에 채소를 절인 원시 채소절임에서 시작된다. 원시 형태의 채소절임은 잉여 작물을 오랜 기간 저장 보존하기 위한 보편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인류가 농경 사회에 진입한 후 신석기~청동기 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채소의 장기 저장을 위한 절임은 추운 겨울이 있는 북위 35~45° 지역에서 형성되는데, 특정 지역에서 기원해 전파되었다기보다 여러 문화권에서 자생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다만, 현재 채소절임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중국 주나라 때의 문헌들이기 때문에 중국이 채소 발효 음식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중 중국 주나라 때(BC 10세기 경)의 민요를 모아 엮은 《시경(詩經)》에 ‘오이를 깎아 저를 만들어 조상께 바쳤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전 생활상을 담고 있는 기록으로 당시 동북아 지역의 원시 채소절임의 재료와 이용 목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중국이 인류 채소 절임문화의 시초라거나 이를 다른 지역에 전파했다는 증거는 아니다.어느 문화권에나 존재하였던 원시 형태 채소절임이 기술과 노하우의 교류나 축적 과정에서 각자 자연 생태, 사회경제적 여건, 민족적 기호에 영향을 받으며 달라지게 되는데, 중국과 한반도 두 문화권이 서로 상이하다는 점이 6세기 전반에 편찬되어 현존 최고(最古)의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서 확인된다. 중국 북위(北魏) 때 산동 지역의 가사협이 집필한 《제민요술》에는 채소를 건조하거나 데치는 전처리 과정을 거치거나 술, 식초 등을 담금원으로 사용하는 절임류의 비중이 높다. 반면, 한반도의 김치는 소금과 장을 이용하고 생채소를 그대로 사용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 책이 편찬된 시기는 한반도의 삼국 시대에 해당되므로, 적어도 삼국 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의 채소절임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삼국 시대 우리나라 삼국 시대 채소 절임음식에 대한 직접적은 근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고고학적 유물을 비롯해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의 기록 등을 통해 발효 음식 문화가 융성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중국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 수록된 〈위지(魏志)〉에 고구려인이 발효 저장 음식을 잘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때 집필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신문왕이 김흠운의 딸을 신부로 맞으면서 보낸 납채, 물, 술, 장, 메주, 젓갈 의 발효 식품이 포함되었다는 내용이 있다.유적으로는 속리산 법주사에 720년에 설치되어 승려들이 김장용으로 사용하던 대형 돌항아리가 있으며, 이외에도 통일신라 시대 창건된 전라도 남원 실상사와 강원도 흥전리에서는 장과 젓갈을 보관하던 곳간인 장고(醬庫)터, 젓갈을 항아리에 담아 운송했던 내용이 기록된 신라 시대 목간 등을 통해 당시 식생활에서 발효 저장 음식이 차지했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또한, 일본의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와 《연희식(延喜式)》에는 소금 및 콩이나 쌀을 원료로 사용하여 만든 채소절임인 ‘수수보리지(須須保利漬)’라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의 내용 '知釀酒人 名仁番 亦名 須須許理 等參渡來也 故是須須許理 釀大御酒以獻'을 근거로 일본에 양조 기술을 도입한 백제인 인번(仁番)이 바로 이 수수보리지 제조법을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근거들은 한반도의 채소절임 문화가 삼국 시대 이미 상당 수준 발달되어 있었고, 주로 소금과 장을 담금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고려 시대우리나라 현전 기록 중 김치 관련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문을 모아 1241년 편찬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다. 이 책에 실린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에 '무를 장에 넣으면 한여름에 좋고, 소금에 절이면 긴 겨울을 버틴다(得醬尤宜三夏食 淸監堪備九冬支)'라는 내용이 있어 당시의 김치 종류와 김장 문화를 알 수 있다. 고려 말 문신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에는 ‘오이로 만든 김치(醬瓜)’, ‘우엉, 파, 무를 한데 섞어 장에 절여 만든 김치(牛蒡蔥蘿蔔幷沈菜醬)’, ‘매콤한 산갓김치(辛辣味 山芥鹽菜)’ 등 보다 다양한 김치류가 나오는데, 역시 소금과 장을 담금원으로 젖산 발효를 유도해 은은한 감칠맛이 나는 김치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 초기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 〈순채포유작(廵菜圃有作)〉에도 미나리, 자소, 생강, 마늘, 파, 여뀌 등의 양념을 넣은 김치 용례가 나오는데, 이는 이색의 ‘우엉, 파, 무를 한데 섞어 장에 절여 만든 김치(牛蒡蔥蘿蔔幷沈菜醬)’와 함께 향신 양념을 이용한 김치 제조법이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임을 알려 주는 단서이다.한편, 중국과 확연하게 차이나는 독특한 채소절임 문화 중 하나가 물김치이다. 〈가포육영〉의 ‘소금에 절인 무김치’는 짠지형와 동치미형 두 가지 모두를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 초기 조리서에 다양한 형태의 동치미류 제조법이 여러 종류 수록되어 있어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는 물김치 식용 문화가 발달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색의 기록에 나오는 산갓김치도 코를 톡쏘는 특유의 매콤한 맛이 나는 국물 김치 형태의 별미 김치로 고려 시대에 이미 재료의 특성에 따라 여러 형태의 물김치 제조법이 발달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조선 시대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김치의 원형이 완성된 시기는 조선 시대이다. 세 가지 재료의 유입 단계에 따라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형태와 맛을 지닌 음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첫째, 김치가 다른 문화권의 채소절임과 결정적인 차별점은 동물성 발효 식품인 젓갈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삼국 시대부터 이미 젓갈 문화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젓갈과 채소를 버무려 먹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선 시대이다. 젓갈을 ‘섞었다’는 의미로 섞박지라고 불렀는데 주로 오이, 무, 동아 등의 채소와 버무려 만들었다.젓갈이 들어간 김치를 만드는 방법은 1600년대 이전 조리서인 《주초침저방(酒醋沉菹方)》에 〈감동저(甘動菹)〉라는 항목으로 처음 등장한다. '감동'이란 보라색을 띠는 작은 새우로, ‘곤쟁이’, ‘자하’ 등의 별칭으로도 불렸다. 감동저는 이 감동으로 만든 젓갈(감동젓, 곤쟁이젓)을 절인 오이에 버무려 만들었다. 젓갈은 매우 귀한 식재료였기 때문에 이 감동저(곤쟁이젓섞박지)는 접대 및 선물용으로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이 접할 수 있는 김치는 아니었다. 아주 고급 음식으로 중국 사신 접대나 귀한 선물용으로 활용되었던 기록이 1400~1500년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여러 문집에 남아 있어 젓갈 김치의 역사는 조선 초기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둘째, 신대륙이 원산지인 고추가 조선 후기에 유입된 이후 김치의 원료로 사용되면서 김치의 색과 맛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매혹적인 붉은 색으로 식욕을 자극하였고, 고추의 매운맛과 방부 작용은 소금의 사용량을 줄여도 유산균 발효가 잘 일어나도록 도왔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젓갈 유통도 활발해져 김치에 젓갈을 사용하는 제조법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는데, 마침 고추는 젓갈의 비린내를 줄여주는 역할도 했다.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김치의 이상 발효를 막기 위해 사용되어 오던 분디(제피, 산초라고도 함), 여뀌, 정가(형개), 자소 등의 재료가 점차 고추로 대체되었다. 고추를 넣은 후 김치 맛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어 김치에 고추 사용이 적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외국에서 유입되어 생소했던 고추는 가난한 승려들이나 먹던 값싼 식재료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피폐한 삶을 살던 양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질 수 있었다. 셋째, 오늘날 김치의 대명사로 여기는 통배추김치 제조법이 완성된다. 배추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땅에서는 재배가 잘 되지 않는 귀한 식재료라 일상적인 반찬으로 활용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김치의 재료는 오이, 가지, 무, 동아가 주를 이루었다. 1800년 전후로 조선 땅에서 배추가 재배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한양의 권세가나 왕실에 납품되던 용도에 한정되었고, 전국적으로 재배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1800년대 중엽 이후 이파리가 많이 달린 결구성 배추 재배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젓갈과 갖은 향신 양념을 함께 버무린 섞박지형 양념소를 배춧잎 사이사이에 넣는 형태의 김치가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8~19세기 상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계층이 형성되면서, 김치도 화려해져 각종 해산물과 여러 가지 종류의 젓갈, 고기나 해산물 육수까지 더해진 김치 제조법도 널리 퍼졌다.
Q. 일본 전국시대의 성(오사카성 등)은 방어하기에 굉장히 효율적인 구조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사카 성의 당당한 주탑은 16세기의 원래 건물을 20세기에 복원한 것이며, 이 또한 21세기에 들어 한 차례 보수된 것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사카 성은 여러 차례의 변모를 겪었으며, 이는 건축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오사카 성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도요토미 오사카 성과 도쿠가와 오사카 성이 그것이다.1583년, 봉건 군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옛 이시야마 호간사가 서 있던 부지에 권력의 상징으로 오사카 성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 성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을 모델로 삼았지만, 보다 더 웅장한 규모에 금으로 덮여 번쩍였다. 이 성은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원정을 나가는 데에 본거지 역할을 했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일으켜 1603년 쇼군 정치를 열었다.도쿠가와가 이끄는 세력은 오사카에서 '오사카 포위 공격'이라 알려진 일련의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했고, 도요토미 가문과 그 성을 멸망시켜 버렸다. 1620년 제2대 도쿠가와 쇼군 히데타다 하에서 오사카 성의 재건축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먼젓번 건물의 화려함을 능가했다. 그러나 새로 쌓은 주 탑은 1665년 벼락을 맞았고, 1931년 복원 작업이 이루어질 때까지 성은 탑이 없는 채였다. 현재의 돌로 된 성벽은 쇼군 시대의 것으로, 쇼군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가장 정교한 건축 기법을 보여 준다.
Q. 원불교는 어떠한 종교인지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주의 근본원리인 일원상(一圓相, 즉 O의 모양)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종교로,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하여 낙원세계를 실현시키려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다. 교조 중빈은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우주와 인생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가득찬 의문을 한학(漢學)공부로는 풀 수가 없었으므로, 범인(凡人)보다는 높은 차원의 경지에 있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의심의 해답을 얻고자 산상기도와 도사(道士)를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같은 그의 구도정신은 결국 그를 외부로부터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독자적 수도 고행에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어떤 일정한 수행법을 택하지도 못한 채 망아(忘我)의 침잠(沈潛)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다.5년여의 침잠 끝에 1916년 4월 28일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깨어난 그에게는 우주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는데, 그 질서를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불생 불멸(不生不滅)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천명하였다. 그 후 그는 유(儒) ·불(佛) ·선(仙) 3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서 등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금강경(金剛經)》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일치함을 깨닫고 근본 진리를 밝히는 데는 불법(佛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석가를 선각자로 존숭하는 동시에 불교와의 인연을 스스로 정하였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펴기 위하여서는 종래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 불교 ·새 교단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동시에 그는 새 교단 창립과 새 세상 구제(救濟)의 대책을 법어(法語)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수신(修身)의 요법(要法), 제가(齊家)의 요법, 강자 약자(强者弱者)의 진화상(進化上)의 요법, 지도인(指導人)으로서 준비할 점 등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개교(開敎)의 기치 아래 최초의 법어로써 1916년 새 교단을 열 의사를 표명하자, 마을사람들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40여 명이 모였다.그는 이 가운데서 8명을 선발하고 후에 정산(鼎山) 송규(宋奎:후에 一代宗法師)를 맞아 도합 9명을 새 교단 창립의 첫 제자로 삼았다. 원불교에서는 이 해를 원기(圓紀) 1년으로 삼고 있다. 그는 불교의 현대화·생활화를 주장하면서 신앙의 대상을 불상(佛像)이 아닌 법신불(法身佛)의 일원상(一圓相)으로 삼고, 시주(施主)·동냥 등을 폐지하는 대신에 각자가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며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이른바 ‘생활불교’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저축조합의 조직을 필두로, 1918년에는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2만 6,000평의 논을 조성하고, 그후 엿공장·과수원·농축장·양잠·한약방 등 생산적인 경영을 하여 새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였다.한편 1919년에는 9명의 제자와 함께 대기도(大祈禱)를 시작하여 3개월 후 최종 기도에서 ‘백지혈인(白指血印)의 법인성사(法認聖事)’라는 기적(奇蹟)을 낳고, 여기에서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여 신성(信誠)·단결(團結)·공심(公心)을 더욱 굳건히 하였는데, 이것이 곧 교단 창립의 얼이 되었다. 1924년, 마침내 서중안(徐中安) 등이 발기인이 되어 전라북도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설하고 중빈을 총재로 추대하였다.1938년에는 《불교정전(佛敎正典)》을 간행하여 기본원리인 일원상의 진리를 포명(布明)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탄압이 계속되어 겨우 교단을 유지해나갔다. 1943년 교주가 죽자 송규가 종법사(宗法師)가 되어 교통(敎統)을 계승하고, 광복 후 1947년에는 교명을 원불교로 개칭하는 한편, 교육·자선(慈善)·교화(敎化)의 3대 실천목표를 세워 포교에 힘쓰다가, 1962년 규가 죽자 김대거(金大擧)가 2대 종법사에 취임하였다.원불교는 법신불 일원상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는데, 일원상의 신앙은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목표로, 어느 곳 어느 때나 신앙심을 지키어 천지(天地)·부모·동포·법률의 4은(四恩)에 보답하는 것을 불공으로 삼고, 자력양성(自力養成)·지자본위(智者本位)·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공도자 숭배(公導者崇拜)의 4요(四要)를 실천함으로써 복락의 길을 닦자는 것이다. 일원상의 수행이념은 무시선(無時禪)·무처선(無處禪)을 표준으로 하여, 언제 어디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신수양·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의 3학(學)을 수행하여 신(信)·분(忿)·의(疑)·성(誠)의 ‘진행 4조(進行四條:추진할 4가지)’로써 불신(不信)·탐욕·나(懶)·우(愚)의 ‘사연 4조(捨捐四條:버려야 할 4가지)’를 제거하는 8조의 실행에 의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법신불 일원상을 대상으로 신앙하고 수행하는 정각정행(正覺正行)·지은보은(知恩報恩)·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을 4대 강령으로 삼고 있다.원불교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중앙총부(中央總部)에서 교단을 총괄운영하고 지방에 교구(敎區)와 교당(敎堂)을 두고 있으며, 그 운영기구로서 종법사(宗法師)를 중심으로 수위단회(首位團會)·중앙교의회(中央敎議會)·교정위원회(敎政委員會) 및 교정원(敎政院)과 감찰원 등이 있다. 교당에는 교무(敎務)와 교도가 있는데, 교도는 10인을 1단으로 하는 10인 1단 교화단(敎化團)을 조직하는 것이 특색이다. 각종 연구소 외에 교육기관으로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영산원불교대학교(靈山圓佛敎大學校) 등의 종합대학, 전문대학 1개교, 중·고등학교 6개교, 선원(禪院) 3개처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당별로 설치한 유치원·유아원과 양로원·보육원·수양원 등 자선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문화사업으로 경전의 출판과 《원광(圓光)》 《원불교신문》 등 정기간행물도 간행하고 있다.
Q. 사극에서 신하들이 몽진이라는 말을 하던데 어떤 뜻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몽진은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현종이 전라북도 완주군 지역을 거쳐 나주로 피난간 사건입니다.거란군은 1010년(현종 1) 11월 1일에 장군 소응(蕭凝)을 보내 고려를 공격하겠다는 사실을 알리고, 1010년 11월 16일에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공격하면서 2차 침입을 감행했다. 이 때문에 현종은 1010년 12월 28일에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바탕으로 날자별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011년(현종 2) 1월 1일에 거란군이 개경[현 개성시]에 들어왔으며, 현종은 광주(廣州)[현 경기도 광주시]에 묵었다. 1011년 1월 3일에 현종은 광주를 출발해 비뇌역(鼻腦驛)에 묵었다. 1011년 1월 5일에 양성현(陽城縣)[현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일대]과 사산현(蛇山縣)[현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 일대]을 거쳐, 천안부[현 충청남도 천안시]에 이르렀다. 1011년 1월 7일에 공주[현 충청남도 공주시]를 거쳐, 저녁에 파산역(巴山驛)에서 쉬었다가, 여양현(礪陽縣)[현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일대]에서 머물렀다. 1011년 1월 8일에 삼례역을 거쳐 장곡역(長谷驛)[현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 앵곡]에 묵었다.1011년 1월 11일에 거란군이 개경에서 물러났다. 1011년 1월 12일 인의현(仁義縣)[현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백산리 일대]을 지나 수다역(水多驛)[현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에 묵었다. 1011년 1월 13일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현 전라남도 나주시]에 들어갔다. 1011년 1월 16일 거란병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1011년 1월 21일 현종이 가마를 돌려 복룡역(伏龍驛)[현 광주광역시 복룡역]에 묵었다. 1011년 1월 24일 고부군(古阜郡)[현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 묵었다. 1011년 1월 25일 금구현(金溝縣)[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일대]에 묵었다. 1011년 1월 26일에 현종 일행은 전주[현 전라북도 전주시]에 도착해 7일 동안 머물렀다.1011년 1월 29일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1011년 2월 3일 전주를 출발해 여양현에 묵었다. 1011년 2월 4일 공주에 도착해 6일 동안 머물면서 김은부(金殷傅)의 큰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1011년 2월 13일에 청주[현 충청북도 청주시]에 머물렀다. 1011년 2월 16일에 청주를 출발해 1011년 2월 23일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수창궁(壽昌宮)에 들어갔다.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을 당하면서 현종이 나주로 몽진하게 되었다.1010년(현종 1) 12월 28일에 피난길에 오른 현종 일행은 1011년(현종 2) 1월 7일에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일대에 있었던 여양현에서 묵었다. 다음날인 1011년 1월 8일에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 있던 삼례역을 거쳐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에 있던 장곡역에서 묵었다. 현종 일행이 삼례역에 도착하자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평상복[野服]을 입고 어가(御駕)를 맞이했다. 이때 박섬(朴暹)이 “전주는 옛 백제 땅이므로 성조 역시 이곳을 싫어하셨습니다. 행차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현종도 이를 받아들여 전주로 가지 않고 곧장 장곡역(長谷驛)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이날 밤에 현종이 장곡역에 머무르고 있을 때 조용겸은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즙(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함께 장곡역으로 갔다. 이때 현종을 호위하던 지채문(智蔡文)이 유승건을 불러 안으로 들여 조영겸을 데려오도록 했으나 유승건은 도망쳤다. 다시 양협(良叶)에게 조용겸과 이재를 불러오게 하자 주변의 장수들이 조용겸 등을 죽이고자 했으나 지채문이 만류하고 제지했다. 그리고 조용겸과 이재 등을 시켜 대명궁주(大明宮主)의 말을 끌고 가게 했다가, 곧 전주로 돌려보냈다. 당시 거란군은 개경에 있었으며, 1011년 1월 11일에야 개경을 떠나 퇴각했다. 1011년 1월 13일에 나주에 도착한 현종 일행은 1011년 1월 16일에 거란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1011년 1월 21일에 나주를 출발해서 1011년 1월 26일에 전주에 도착해 7일 동안 머물다가 1011년 1월 2월 23일에 개경에 도착했다.1011년 8월 2일에 조용겸(趙容謙)·유승건(柳僧虔)·이재(李載)·최즙(崔檝)·최성의(崔成義)·임탁(林卓) 등은 현종의 몽진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유배를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