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채충순의 생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양광도 음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양광도 서원경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훗날 양광도 인주에서 성장한 그는 고려 목종 치세 시절이던 999년 음서로써 천거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는데, 왕이 병석에 눕자 채충순이 유진(劉瑨)·최항(崔沆)과 함께 은대(銀臺)에서 숙직하였다. 하루는 왕이 채충순을 불러 침실로 들어오게 한 후 좌우를 물리치고, “과인은 병이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소. 그런데 바깥에서 왕위를 넘보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경은 알고 있소?” 라고 물었다. 채충순이, “신도 이 소문을 언뜻 들은 적이 있으나 그 실상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왕이 머리맡에 있던 편지를 집어 건네주었는데 그것은 유충정(劉忠正)이 올린 글이었다.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김치양(金致陽)은 외람되게도 왕위를 넘보고서 사람을 시켜 선물을 뿌리며 심복들을 널리 심어놓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자신을 은밀히 도우라고 요구하기에 저는 분명히 깨우쳐준 후 거절하였습니다. 이 일을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다른 편지 한 통도 그에게 건네주었는데,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올린 글이었다.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신은 독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하여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죽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절박하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채충순이 편지를 보고 나서, “형세가 급박하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나의 병이 점점 위독하여 곧 세상을 뜰 것 같은데, 태조의 후손으로는 대량원군만 남아 있소. 경과 최항은 평소 충의를 지닌 신하이니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구원하여 사직을 다른 성(姓)에게 주지 않도록 하시오.” 라고 당부하였다.채충순이 나와서 최항에게 전하자 최항도, “신도 항상 근심하였는데 지금 주상의 뜻이 이와 같으니 사직의 복입니다.”라고 동의하였다. 유충정이 감찰어사(監察御史) 고영기(高英起)를 보내어 채충순과 최항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지금 주상이 병석에 누워 계시고 간악한 무리들이 틈을 엿보므로, 사직이 다른 성씨에게 넘어갈까 두렵습니다. 주상의 병세가 위독해진다면 마땅히 태조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아야 합니다.”채충순 등이 놀란 체하며, “태조의 후손이 어디 계시오?” 하고 반문하자, 고영기가, “대량원군이 바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채충순 등도, “우리들도 이 소문을 들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당연히 하늘이 내린 분부를 따라야 합니다.”라고 호응하였다. 유충정이 다시 고영기를 보내어, “제가 직접 가서 이 일을 의논하고 싶으나 수행원이 많아 다른 사람에게 의심받을까 두려우니 두 분께서 왕림하여 주기 바랍니다.”라고 전하자, 채충순이 최항과, “이것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진실로 종묘사직과 관련된 것이므로 가서 그를 만나야 합니다.”라고 의논한 후 그를 찾아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그 때 대량원군은 삼각산(三角山)의 신혈사(神穴寺)에 있었다. 채충순이 대궐에 들어가 왕에게, “문반과 무반 각 한 사람씩을 뽑아 군교(軍校)를 거느리고 가서 맞이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한 뒤 최항 및 고영기 등과 의논하여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천거하였다. 채충순 등이 다시 의논하여, “군교들이 많아 행군이 더디게 되면 간악한 무리들이 먼저 손을 쓸까 두렵습니다. 십여 명만 보내 지름길로 가서 맞이해 와야만 합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왕이 이를 그렇게 여기고,“차라리 내가 친히 선위(禪位)하고 싶으니 빨리 보내 늦지 말도록 하시오. 만약 나의 병이 나을 경우에는 성종께서 나를 책봉하였던 전례와 같이 일찌감치 후사를 못박아 놓으면 왕위를 넘겨다보는 자들이 없을 것이오. 나에게 아들이 없어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니 이것은 나의 허물이오. 종묘사직의 원대한 계획으로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경들은 각자 정성을 다하시오.”라 하며 마침내 눈물을 흘리니 채충순도 울었다.왕이 채충순을 시켜 대량원군에게 주는 글을 초안하도록 한 뒤 몸소 먹을 갈아주자, 채충순이, “제가 갈아서 쓰겠으니 옥체를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왕은, “마음이 너무 바빠 힘든 것도 알지 못하겠소.”라고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예로부터 국가의 대사는 평소 미리 결정해 두어야 인심이 안정되는 법이다. 내가 병석에 눕자 간악한 무리들이 왕위를 넘겨다보고 있으니 이는 과인이 미리 대비하지 못해 후사를 결정해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은 태조의 적손이니 속히 출발해서 여기로 오도록 하라. 과인이 죽기 전에 얼굴을 마주해 종묘사직을 맡기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만약 내 수명이 더 연장된다면, 경을 동궁(東宮)에 머물게 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겠노라.왕이 또 그 말미에, “길이 험하니 간악한 놈들이 잠복하고 있다가 불의의 변을 일으킬까 두렵다. 부디 조심해 오도록 하라.”고 쓰게 하였다. 당시 합문사인(閤門舍人) 유행간(庾行簡)은 대량원군의 왕위계승을 반대했으므로 왕은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채충순에게, 유행간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렇게 쓴 편지를 황보유의 등에게 주어 신혈사로 가서 대량원군을 맞이해다가 왕으로 옹립하니 이 사람이 현종이다.현종(顯宗)은 채충순을 직중대(直中臺)로 삼았고, 얼마 뒤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吏部侍郞 兼左諫議大夫)로 승진시켰다. 왕이 거란(契丹)을 피해 남쪽으로 갈 때, 채충순이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왕이 광주(廣州)에 머무를 때 수행하던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河拱辰) 등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모두 놀라고 두려워 흩어져 도망하였으나, 오직 채충순과 시랑(侍郞) 충숙(忠肅)·장연우(張延祐)·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만 떠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전임되어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가 되었고,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제양현개국남(濟陽縣開國男)에 책봉되었고, 식읍(食邑) 300호를 받았다.채충순(蔡忠順)이 아뢰기를, “군사(軍士) 중에 부모의 나이가 80세 이상인 사람이 있으면, 군역(軍役)을 면제시켜 부모 곁에서 봉양하게 하고, 문무 관원으로서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이되 다른 형제가 없는 사람은 지방관[外職]에 임명하지 말고, 그의 부모가 병이 나면 200일 휴가를 주어 돌보게 하시옵소서.”라고 건의하자, 왕이 따랐다.1021년(현종 12년)에 검교태위(檢校太尉)·제양현개국자(濟陽縣開國子)·식읍 5백호로 책봉되었고, 보국공신(輔國功臣)으로 칭호를 올려주었다. 얼마 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겸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임명되었으며, 태자 소사(太子少師)로 올랐다.1027년(현종 18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승진했고, 1028년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가 되었는데, 병 때문에 표문을 올려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나, 1036년(정종 2년)에 죽으니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Q. 와인의 이름에 대해 문의드립니다. ( 소비뇽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쇼비뇽은 포도 품종 중에 하나 입니다.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은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유래한 청포도 품종 중 하나이다. 초기 남서 프랑스에서 원주민 포도로 불렸기 때문에 프랑스 단어 sauvage(소바주, 야생)과 blanc(블랑, 흰색)에서 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보고 있다.[1] 유전학적으로는 사바냥(Savagnin)에서 파생되었다. 소비뇽 블랑은 세계적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많은 지역에 심어져 있으며 선명하고 드라이하며 상쾌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 또 디저트 와인으로 유명한 소테른(Sauternes)과 바르삭(Barsac)의 포도로 쓰이기도 한다. 소비뇽 블랑은 프랑스, 칠레, 루마니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미국 워싱턴 및 캘리포니아에서 재배되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신세계 소비뇽 블랑(New World Sauvignon blanc)은 프랑스의 푸이 퓌메(Pouilly-Fumé)처럼 로버트 몬다비가 퓌메 블랑(Fumé Blanc)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기후에 따라 강한 풀잎에서 열대 과일까지 다양하게 풍미가 변한다. 시원한 기후에서는 새콤하고 풀잎의 녹색 향이 잘 느껴지는 포도로 자란다. 녹색 피망이나 쐐기풀과 함께 약간의 열대 과일(패션프루트 등)과 꽃(딱총나무속 등) 향기도 나타난다. 따뜻한 기후에서는 열대 과일 풍미를 더 진하게 만들 수 있지만, 과도한 숙성은 향이 옅어질 위험이 있고 약간의 자몽과 복숭아 나무향만 남게 될 수 있다.와인 전문가들은 프랑스의 루아르 계곡과 뉴질랜드의 쇼비뇽 블랑을 "선명하고 우아하며 신선한(crisp, elegant, and fresh)"라며 높이 평가한다. 차게한 소비뇽 블랑 와인은 초밥, 생선, 치즈(특히 염소젖 치즈) 등과 잘 어울린다.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리슬링과 같이 병 마개가 트위스트 캡으로 된 최초의 고급 와인 중 하나이다. 소비뇽 블랑 품종은 오래 숙성 시키면 완두콩이나 아스파라거스향이 짙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보통 숙성시키지 않고 짧은 기간 안에 마신다. 그러나 보르도의 화이트 와인 중 페삭 레오냥(Pessac-Léognan)이나 그라브(Graves)에서처럼 오크 숙성을 한 소비뇽 블랑은 푸이 퓌메(Pouilly-Fumé)나 상세르(Sancerre)와인처럼 소비뇽 블랑의 숙성 잠재력을 보여주기도 한다.뉴질랜드에서는 매년 5월 첫주 금요일을 국제 소비뇽 블랑의 날(International Sauvignon Blanc Day)로 지정했다.소비뇽 블랑만을 처음 재배한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리버모어 계곡의 크레 스타 블랑카 와이너리(Cresta Blanca Winery)로 소개되었다.소비뇽 블랑 품종은 루아르 계곡과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포도 나무 기원이 서부 프랑스 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진행중인 연구에 따르면 사바냥(Savagnin)의 후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카르미네르(Carmenere) 계열과도 연관이 있다. 18세기 어느 시점부터 보르도에서는 카베르네 프랑과 소비뇽 블랑을 교배하여 까베르네 소비뇽 포도를 기르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소비뇽 베르트(칠레에서 쇼비나제로(Sauvignonasse) 불리는 품종)와 소비뇽 그리에서 핑크색으로 변이된 소비뇽 블랑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곧 필록세라 전염병균이 프랑스 포도밭을 황폐화시켜, 많은 나무들이 칠레로 옮겨졌고, 칠레에서는 지금까지도 당시 보르도에서 19세기에 기르던 품종을 흔히 볼 수 있다. 루아르 계곡의 소비뇽 로제(Sauvignon rosé)는 이름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소비뇽 블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7]소비뇽 블랑만을 처음 재배한 곳은 1880년대 크레스타 블랑카 와이너리(Cresta Blanca Winery)의 창업자인 찰스 웻모어(Charles Wetmore)가 소비뇽 블랑을 캘리포니아로 가져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포도들은 프랑스 샤토디켐 (Château d' Yquem)의 소테른 포도밭에서 가져왔다. 나무는 리버모어 계곡에서 잘 자라, 결국 1968년 로버트 몬다비의 홍보로 캘리포니아에서 퓌메 블랑(Fumé Blanc)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970년대 뉴질랜드에서는 실험적으로 뮬러 트르가우(Müller-Thurgau)와 혼합시킨 나무를 처음 발표하였다.
Q. 탐라국의 건국신화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탐라(耽羅)는 제주도의 옛 명칭이자 그곳에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이다.약 12세기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며, 조선 초기에 완전히 본국에 편입되고 이후 구한말까지 제주도의 이름을 계속해서 '탐라'로 부르다가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라는 이름에 밀려나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탐라국의 주민인 제주 원주민, 즉 탐라인은 탐라국이 있던 당시 육지의 한민족계와 완전히 다른 혈통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한반도에서 공존한 고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도 서로 말이 통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삼한인이라 지칭하는 등 어느 정도 공통의식은 있었으나 서로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는데, 마찬가지로 가야인이나 탐라인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말하자면 본토 사람들과는 고구려-백제 관계와 비슷한 수준인 형제뻘 관계 정도였다. 한국이 현재 단일민족 국가이며 친척국가가 없다 보니[21] 생소할 뿐이지 이런 형제뻘 민족이나 국가 관계는 지금도 세계 각처에 흔해서 이상할 건 없다. 그리고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본토와는 차별되는 문화가 발전해 왔고, 언어적으로도 차이가 났다.원나라때부터 명나라 초기까지는 탐라국에 중국 윈난성과 몽골의 문화가 유입되었으나, 본토에서의 중앙 집권 통치가 굳건해진 조선 왕조때부터 한반도 본토와 같은 목, 군, 현 단위의 행정구역이 설치되고, 관리를 받으면서 점점 한반도 본토와 일체화가 되어 갔다.
Q. 우리나라 군인 의무복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 헌법에 준거하여 만 18세 이상 남성 국민에게 부여되는 의무로, 국방의 의무의 하위 개념이다. 6.25 전쟁 이후인 1951년부터 시행됐다. 창군 당시 바로 징병제를 실시하지 못했던 이유는 당시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징병이 일본군 강제징용과 같은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국민정서상 바로 시행하지 못했다.병역의 의무를 정하는 틀은 법률에 준거하는데, 대한민국은 병역법 제3조 1항[6]이 그것이다. 18세가 된 남성 국민 중 심신과 조건이 일정 수준을 모두 충족하면 현역 대상에 포함되며, 1년 6개월 간 대한민국 육군에 현역병으로 징병되어(입대) 군인으로서 복무하여야 한다. 대한민국 국군에서 징병권을 가지고 있는 군은 육군뿐이다. 따라서 병무청에 의한 병역의무 부과에 따라 징집되면 무조건 현역 육군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복무하게 된다. 그러나 육군 특기병이나 해군, 해병, 공군 모병 과정에 합격하거나, 장교/부사관후보생 과정에 합격하면 육군 징집 영장은 모병과정 합격 통지서로 대체된다.2017년부터 징병검사는 "병역판정검사"로 명칭이 변경됐고, 2016년 11월 30일부로 "제1국민역"은 "병역준비역"으로, "제2국민역"은 "전시근로역"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Q. 강희제의 적장자인 윤잉은 왜 역모를 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강희제는 윤잉에게 기대를 너무 많이 하였는지 윤잉이 날이 갈수록 학식이 높아지자 그 나이에 맞지 않은 과제를 주어 윤잉의 심신을 고단하게 하기도 하였으나, 윤잉은 별다른 불평없이 묵묵히 일을 처리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윤잉을 보고 흡족해하였으나 대다수 만주족 대신들은 윤잉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강희제의 만주족 고유의 전통 타파였는데, 윤잉은 적장자였으나 강희제의 모든 아들중에서의 장자는 아니었다. 정식으로 그는 제2황자였기에 강희제의 서장자이자 윤잉보다 2살 위인 제1황자 윤시와 비견되었으나, 강희제는 오히려 적장자 윤잉에게 윤시보다 더 많은 특권을 내리며 유교의 전통을 따랐다.그러나 당시 만주족 대신들은 문(文) 보다는 무(武)를 더 숭상하였고 전쟁에도 참가한 윤시를 은근히 밀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윤시는 점점 윤잉을 혐오하기 시작하였고, 윤잉 역시 형제들에게 자신을 “황태자 전하”로 부를 것을 요구하며 군신의 예를 강요하였다. 이에 윤시와 윤잉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나머지 형제들 역시 윤잉을 만나기를 꺼렸다. 황자들은 청년기에 들면서 황태자를 자리에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게 되었다.1690년(강희 29년) 강희제의 제1차 가르단 원정 때 윤잉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으나 원정 도중 강희제가 말라리아에 걸리자 제3황자 윤지와 더불어 강희제를 문병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러나 부황을 간병하면서 슬픈 기색을 비치지 않아 노한 강희제는 윤잉을 북경으로 보내고 근신하게 하였다. 그 후 윤잉은 아버지 대신 태묘의 제례를 책임지는 등 아버지의 신임을 회복하고 정무를 맡았다.1695년(강희 34년) 윤잉은 과이가씨를 황태자비로 맞아들였다. 이듬해에 강희제가 다시 가르단을 치러 출정하자 윤잉은 북경에 남아 섭정황태자로서 대리청정을 하였고, 각부와 남서방의 보고도 태자인 윤잉에게 집중되었다. 중요한 일은 대신들이 의논한 후 윤잉에게 보고하였고 윤잉이 처리한 후에 출정 중인 강희제에게 전갈을 보내어 맞게 처리하였는지 자문을 구하였다. 그러나 원정 도중 강희제는 다시 중병에 걸렸고 이번엔 병세가 위중해지자 윤잉에게 황위를 넘기고 자신은 태상황제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강희제는 곧 완쾌하였고 가르단의 군세를 대파하고 개선하자 북경에는 윤잉이 전횡을 하고 궁녀를 간음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이 때부터 강희제는 윤잉을 신임하기보다는 의심하기 시작하며 윤잉을 더욱 닦달하게 되었다.반목과 첫 폐위20대까지 윤청은 똑똑하고 빈틈없이 정무를 처리하였으나 30대 이후부터는 점차 환락과 엽색행각을 즐겨가며 탐욕스러웠다고 한다. 20대까지 이부를 관장하던 윤청은 30대에 접어들자 근무를 나태하게 하는 등 강희제의 분노를 사서 이부의 관장권을 회수당하였다. 그 사이에 장성한 다른 황자들은 강희제의 인정을 받고 각 부처를 통솔하기 시작하자 윤잉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한편, 윤잉의 황태자 자리를 노리던 이복형인 제1황자 윤즈, 제8황자 윤사 등은 적극적으로 윤청을 모함하는 등 강희제와 윤청의 사이를 이간질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황태자인 윤청의 입지가 좁아진 것을 눈치챈 몇몇 대신들은 다른 황자들의 옆에서 윤잉을 비난하며 당파 싸움을 점점 격화시켰다. 이 때부터 강희제는 아들인 윤청의 자질을 의심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윤청이 다음 황제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물어보는 비문(秘文)을 자주 보냈고 관리들은 강희제에게 표문으로서 그 답을 올렸는데 대부분이 윤청은 다음 황위에 앉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올렸다.이 중 윤청의 옆에서 윤청을 지원하던 황태자당(皇太子黨)은 반격할 태세를 갖추고 반윤총 세력과 마찰을 일으켰다. 이 황태자당의 수뇌는 바로 윤청의 외종조부이자 효성인황후의 숙부인 영시위내대신 송오투였다. 그는 겉으로는 윤청을 위하는 척 하였으나, 실제로는 윤청을 이용하고 그가 황위에 오른 후에 더욱 더 큰 권세를 얻기 위해 윤잉을 부추겼다. 1703년(강희 42년), 윤청이 자객을 시켜 강희제를 죽이려 하자 강희제는 이를 부추긴 송오투를 "국사는 논의하지 않고 붕당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구금하고 곧 사사하여 윤청에게 주의를 주었으나, 그래도 윤청이 교만하게 굴고 동궁 소속 관리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동남동녀를 불러모아 동궁에서 엽색행각을 벌이는 등 행실을 고치지 않자 1708년(강희 47년)에 다음과 같은 성지를 내리고 윤잉을 황태자에서 폐위시켜 서인으로 삼았다.“짐이 태조 폐하, 태종 폐하, 세조 폐하의 대업을 이어받은지 48년 째로 신하들과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고 아껴와 천하를 편히 다스리려 하니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황태자 윤잉은 조상들의 유훈을 어기고 짐의 가르침도 따르지 아니하며 점점 사특하고 음란해져 많은 이들의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예전 색액도가 모반을 획책할 때에도 짐은 군신의 정에 흔들렸으나 이내 처형하였다. 그러나 지금 윤잉은 외숙조(색액도)의 복수를 갚는다고 붕당을 결성하고 짐은 오늘 변고를 당해 내일 뜨는 해를 보지 못할까봐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있으니 어찌 열성조의 유업을 계속 이어나가겠는가. 어미를 일찍 여읜 외로움에 그를 아껴주었으나 이러한 불효하고 자애롭지 않은 자에게 황위를 물려줄 수 없으니 이에 오늘 천지와 종묘, 사직에 고하여 윤잉을 황태자에서 폐위하노라.”조칙을 요약하자면, 윤청이 횡음무도하고 내외에서 돈을 끌어모아 대신들을 이용하여 외숙조인 송오투의 원수를 갚는다고 부황을 죽이려 하니, 이러한 폐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처라고 하였다. 하지만, 결국 윤잉의 폐위가 황태자 자리를 둘러싼 황자들간의 다툼을 심화시키며 서로 세력을 넓히며 음모를 꾸몄다. 강희제는 윤청의 감시를 제4황자인 옹군왕 인전에게 일임하였고 인전은 윤잉의 파당 중 중요한 이들을 다시 잡아들여 처형하거나 귀양보냈다.윤청이 폐위됨에 따라 기존 조정의 대신들은 누가 강희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를지를 점치며, 세력있는 황자들의 편에 서서 이러한 분란을 더욱 획책하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조서를 내려 공개적으로 황태자를 새로 세우라는 말을 언급하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라의 적으로 규정해 참수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폐위를 한 일이 윤즈나 윤스의 모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 강희제는 윤청을 죽이겠다고 한 윤즈를 냉궁에 유폐한 뒤, 윤스 역시 작위를 박탈하고 그 집에 연금하여 크게 뉘우치도록 하였다.두 번째 복위와 폐위윤청을 황태자에서 폐위하였으나 오히려 정치적 분란만 격화되자 강희제는 윤청이 실제로 역모를 획책하지 않고 귀신에 홀렸다고 생각하였고 윤청도 나름대로 이전보다는 나이지는 행동을 보이자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비록 기괴한 행동을 하였으나 점차 그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는 이유로 윤청을 복위시키고 윤청의 비 구왈갸씨 역시 황태자비로 재책봉되었다. 그러나 윤청이 이미 부황인 강희제의 후궁과도 동침하였다는 사실, 다시 기방에서 수많은 기생들과 같이 주색잡기에 빠지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계속 벌이고 있어서 강희제를 실망시켰다. 1711년(강희 50년), 강희제는 남순 중 윤청이 일부 대신들과 더불어 강희제를 몰아내고 윤청을 황제에 즉위시키려 한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때 윤잉과 접촉한 대신들은 모두 과거 색액도가 이끌던 황태자당의 잔당으로 보군통령 탁합제(托合齊), 병부상서 겅거이, 형부상서 치슈, 그리고 팔기의 군사를 이끄는 도통과 부도통 등이다.강희제는 윤청이 새로운 사람이 되길 바랐으나 결국 윤청은 돌이킬 수 없는 역모의 주동자가 되었다. 강희제는 즉시 귀경하여 탁합제와 겅거이, 치슈 등을 교사하고 도통 오샨은 유폐된 후 안친왕 요로의 묘소의 능지기로 보냈다. 황제와 황태자가 오랫동안 같이 존재하면서 황태자가 조정에서 제2의 황제로서 황권을 저지할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라고 생각한 강희제는 다시 윤청을 폐할 결심을 굳히고 1712년(강희 51년) 음력 9월 30일, 강희제는 윤청을 잡아들이고 복위한 이래 광증이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인심을 크게 잃으니 이러한 자에게 열성조의 유업을 잇게 할 수 없으니 함안궁(咸安宮)에 가두어 영원히 서인으로 삼겠다는 성지를 내렸다. 이후로는 생전에 황태자를 뽑지 않을 것임을 공언하고 일체의 황태자 책봉에 관한 조정의 공론화를 차단하였다. 더불어 강희제는 만약 이러한 의견이 조정에서 나올 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참형에 처하겠다는 성지를 한번 더 내렸다.이 사건의 폐단으로 청 제국 멸망할 때까지 황태자를 황제의 치세에 책봉하지 않았다. 대신, 황제가 죽은 뒤 황제가 다음 황제에 걸맞은 황자의 이름을 적은 유언장이 만천하에 공개되면 그 황자는 황태자로서 잠시 섭정을 하다가 며칠 뒤 정식으로 황제에 등극하게 된다. 이러한 황제 선출 방법을 바로 저위비건법(儲位秘建法)이라고 부른다.최후10년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로서 자신이 이을 것이라 예상하던 황위는 결국 1722년(강희 61년), 강희제가 붕어하고 그의 뒤를 이어 넷째 아우인 옹친왕 인전(胤禛)이 황위에 오르니 이가 옹정제(雍正帝)이다. 본래 윤청의 밑에서 세를 관망하던 인전은 윤청이 폐위된 후 점진적으로 세력을 구축하여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옹정제는 윤청이 황태자였던 때에 소극적으로 윤청의 파당을 지지하였으나 즉위 후 부황 강희제의 엄명에 따라 윤잉을 풀어주지 않았다. 윤청은 옹정제의 피휘 정책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인청에서 윤청으로 바꾸고 그로부터 얼마 후인 1725년 1월 27일, 음력으로는 1724년(옹정 2년) 12월 17일에 윤청은 십수년 간 연금되어 갇혀 지내던 냉궁 함안궁에서 5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윤청의 사인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아서 자연사설이나 타살설 등으로 설이 나뉘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윤청이 죽은 후, 옹정제는 윤청을 복권시켜주고 윤잉에게 이친왕의 작위를 내리고 시호를 ‘밀’(密)이라 하였는데 밀 자의 뜻은 추박전과(追補前過), 즉 순박하였으나 생전에 과오나 죄가 있다는 뜻이다. 이에 정식 시호는 이밀친왕(理密親王)이다. 그의 무덤은 천진 근처 황화산(黃花山)에 있는 원침(園寢)에 마련되었으며 청일 전쟁, 중일 전쟁, 문화대혁명 때 도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