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예술가들은 다른 여러나라에서도 배고픈 직업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술이라는 영역은 사는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1 2차 산업이 아닌 기초적인 산업군이 아닌 3차 산업으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선택에 따라서 부를 축적하거나 평균적인 삶을 영위할수 있는 기회도 있긴 하지만 확률적으로 적습니다.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수요가 적으니 많은 예술가들이 어려움들을 격고 있겠죠?다른 나라들은 예술가에 대한 인정과 존경이 있어서 많은 지원과 후원이 있는 나라들이 있기도 합니다.그런데 어디까지나 비율의 문제이지 예술가들의 삶이 평균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습니다.저의 주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고민과 '돈을 어떻게 벌어서 뭘 먹고 살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고민이 다른 것이기에전자는 예술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고민이고... 후자는 보통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하며 사는 것이죠그런데 예술가들도 배고프면 다 후자를 생각합니다.사람들이 당장 먹고 잘 곳이 필요하지... 연극, 영화, 미술, 음악 등은 없어도 살 수 있거든요.마지막 질문에 많은 생각이 듭니다.
Q. ISO 규정에 대한 역사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여러 나라에 있는 표준 제정 단체에서 뽑힌 대표로 이루어진 표준화 기구이다. 1947년에 출범하였으며 국제적으로 두루 쓰는 표준을 만들고 보급한다.영어: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프랑스어: 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normalisation러시아어: Международная организация по стандартизации (Mezhdunarodnaya organizatsiya po standartizatsii)영문 명칭에서 보다시피, 기구의 약칭은 ISO다. 약칭이 특별히 어느 언어를 따른 게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평등한’을 뜻하는 그리스어 ίσος(ísos)를 가져와 ISO를 모든 언어에서 쓰이는 약칭으로 정했다.참고로 북한에서는 이 기구를 '국제규격화기구'라고 부른다. 한국(남한)에서 'standard'의 역어로 널리 쓰이는 '표준'이라는 단어가 북한 문화어에서는 금지어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무근. 북한에서 표준이라는 단어를 딱히 꺼리지는 않는다.# 단지 북한판 KS의 이름이 '국가규격'을 줄인 국규라서 그런 것이다.ISO라는 단어는 흔히 1의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정한 표준들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흔히 표준에 숫자로 된 코드번호가 붙고, 그 앞에 ISO를 표기해 ISO 제정 표준임을 명시하는 방식이다.강제력 없는 비정부 기구로, 전 세계에 많은 회원국을 거느린 집단이다. 비록 강제력은 없지만 워낙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ISO에서 발의된 표준 권고는 대부분 협약을 통해 제도화된다.세계무역기구나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서도 권고 즉시 규정화하는게 보통이다. 유럽연합은 ISO 규정이 나오면 재빨리 유럽의회에서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켜 강행 법규로 만든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자유무역협정에서도 분쟁이 발생할 시 규격 표준은 ISO xxx번을 따른다는 식으로 규범화한다.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스위스 프랑을 사용한다. 특정 국가의 화폐를 쓰는 것은 표준화할 때 특정 국가의 입김이 커지는 효과가 있다며 개발도상국 위주로 거세게 반발하는 중이다. 개도국들은 ISO에서는 특정국 화폐가 아닌 금(Gold)이나 특별인출권(SDR)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표준안은 주로 영어로 작성되고 있으나, ISO가 채택한 공식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다. 다만 프랑스어로는 흔히 번역되는 편이나 러시아어로의 표준 발행은 드문 편. 스페인어나 아랍어 등 비공식언어로도 공식 번역판이 발행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어가 공식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영어판을 번역하여 국내판을 만든다.2022년 9월 제44차 ISO 총회에서 한국의 조성환 현대모비스대표가 우리나라의 ISO활동 이래 처음으로 ISO 회장으로 선출됐다. 기사조성환 대표는 2023년 당선자 신분으로 활동한 뒤 2024~2025 2년간 임기를 수행한다.
Q. 제주 4.3사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여순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2003년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하고 있다.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고, 미곡정책 등에서의 군정의 정책 실패는 군정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집회 당시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개한 총파업을 초래하였다.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 및 이를 이용한 남로당의 선동으로 분석하였으나, 사후 대응으로는 후자에 비중을 두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여 강경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슬로건으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고, 5·10 선거를 방해하여 무효화시켰다.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였다. 작전 결과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해안 마을에서도 ‘북촌사건’과 같은 불법적인 처형이 이루어졌다. 무장대 역시 마을을 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에 대한 살해를 저질렀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는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54년 9월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이러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위원회에 심의·결정된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다.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희생자 중 20.9%는 여성, 14.5%는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다. 특히 초토화작전 시기(1948.10.11 ~ 1949.3.1.)에 전체 희생자의 67.2%가 발생하였다2003년 발간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사태의 책임에 대해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하고 지도부가 북한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무장대, 4·3 이전부터 도민과 마찰을 일으키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 사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회, 초토화작전을 통해 대부분의 희생을 발생시킨 군 지휘부 및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진압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 사건 발발과 진압과정에 관련된 미군정의 책임을 모두 지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 정치 집단들이 대부분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Q.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어려웠다는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산지가 70%인 한반도의 지형은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 같은 중장비를 몽땅 버리고 몸만 빠져나오기도 힘들어지므로, 매우 비효율적인 후퇴를 강요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따라서 후퇴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터널이 많아진 21세기 현재에나 어느 정도 가능한 이야기며 지금도 터널 몇개를 막으면 답도 없다. 게다가 한국의 고속도로는 산지와 인구밀집 지역을 피하기 위해 고가도로인 곳이 상당히 많다. 이런 가도에 탱크와 장갑차량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붕괴 위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적 포병이나 공군의 과녁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준비되지 않은 국군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다음 계획(연합 상륙작전)을 구상한다.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에게 북한군의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 계획과 상륙지점을 연구를 지시하고 일본에 주둔한 미 제1기병사단에 상륙훈련을 지시했다. 또한, 7월 4일 상륙작전을 위한 공식 회의를 소집했다. 인천을 통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다는 일명 블루 하츠(Operation Blue Hearts) 작전이었다. 이 작전계획 역시 인천상륙작전으로 7월 22일에 실시하려고 했다. 인천으로 들어와서 교통로의 중심인 서울지역을 장악하면 북한군의 병참선을 끊을 수 있다는 건데, 그때는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르고 게다가 상륙전 준비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블루 하츠 작전은 7월 20일에 공식적으로 폐기된다.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펼쳤을 때 맥아더 장군은 부산 주변 포위선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병력에 많은 제한이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해법으로 폐기했던 블루하츠 작전(Operation Bluehearts)을 바탕으로 다시금 상륙작전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작전명 Operation Chromite로 실행된 인천 상륙작전이다.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당시 UN군 사령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이자 일본 점령 연합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세계 전사(戰史)상 가장 많은 약 50여 회의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상륙작전의 귀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맥아더가 수행한 상륙작전은 '아일랜드 호핑'이라고 불리며, 이는 일본군의 요새 하나하나를 격파하는 것이 아니고 후방으로 상륙을 해서 병참선을 끊고 섬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을 고립시켜 격퇴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휘하 육군과 해병대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맥아더는 적 후방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적을 가두는 방식으로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침략군 전체가 와해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까지의 육상 보급로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이는 곧 인천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최적의 위치임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 점령 사령관 당시 한반도 내 일본군을 몰아내고 무장해제를 시키는 임무를 담당했고, 이를 위해 1945년 9월, 그는 미군을 인천으로 상륙시켜 이를 달성하고 그 자료를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었다. 즉 이미 대군을 인천으로 들여보냈던 경험이 이미 있었기에 상륙작전을 실시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Q. 조선시대의 금화도감은 어떤 방식으로 모집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초에 한양을 건설한 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인접한 가옥과 가옥 사이에 방화장(防火墻)을 쌓고, 요소(要所)마다 우물을 파고 방화기기(防火器機) 등을 설치한 바 있다.1426년(세종 8) 2월에 화적(火賊)의 방화로 큰불이 일어나자, 곧 금화도감을 설치하여 화재의 방지와 개천과 하수구의 수리 및 소통을 담당하게 하고, 화재를 이용한 도적들을 색출하게 하였다. 관원은 제조(提調) 7인, 사(使) 5인, 부사(副使)·판관(判官) 각각 6인을 두었다.금화군은 정식대원이 아닌 군인이나 관청 노비들로 구성된 비상 대기조였습니다. 1467년 세조때가 이르러 멸화군으로 이름이 바뀌고 더욱 전문화된 소방대원의 모습을 갖췄습니다.정원은 50명이고 24시간 상시 대기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