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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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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전문가
EBS
Q.  김두환이 정치인 시절에 국회에 똥물을 뿌렸다는데 왜 그런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6년 9월 22일 국회의원 김두한이 국회의사당(現 서울특별시의회 본관)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오물(분뇨)을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정렴 재무부장관, 민복기 법무부장관[1] 등 주요 국무위원들을 향해 뿌린 사건이다.1966년 9월 15일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가 동년 5월 일본에서 사카린의 원료를 밀수해 들여온 사실이 경향신문의 보도로 알려지면서 정재계를 넘어 사회 전체가 뒤집혔다. 이에 국회에서 본회의가 열려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의 상정 및 통과가 진행됐고 관계인들이 모두 소환되어 추궁을 받았다.이때 야당 민중당 등은 물론이고 여당인 민주공화당까지 힘을 합쳐 정부의 모르쇠와 삼성 비호에 대해 비판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인사들은 삼성 비호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여야는 계속 한목소리로 관련자 전원 구속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면서 국회는 들끓어오르고 있었다.정부와 대기업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거센 와중에 국회 질의 마지막 날인 9월 22일 결국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이 일을 저질렀다. 당시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에 휘말렸다가 겨우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독립당은 완전히 와해되어 무소속인 상태였다. 즉, 울분이 쌓일 만큼 쌓여 있던 상태였다.실제로 김두한은 발언 중에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서대문형무소에서 영하 20도의 날씨에 콩밥을 먹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게다가 김두한이라는 인물의 원래 성격 자체가... 그는 이미 1954년에도 자신을 무시한다고 사세청장을 폭행한 것은 물론 잠깐 자유당에 몸담았던 시절에도 같은 당 의원인 장경근에게 손찌검을 한 전과도 있었던 정치계의 유명한 트러블메이커였다.사실 김두한의 태도는 발언 전부터 매우 험악했다고 전해졌다. 이효상 국회의장을 대신해서 사회를 봤던 이상철 국회부의장이 김두한의 발언 순서를 불리하게 조정하자 김두한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당신 이거 한번 부서지는 거 보려고 그래요?" 라면서 협박했고 "그 따위로 당신 하면 좋지 않아! 노인이니까 그냥 두지, 장 부의장같이 유도깨나 쓰면 날릴 테야!" 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장경순은 실제로 유도를 잘 했고 말년에는 유도협회에서 명예 10단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장경순의 나이는 국회부의장치고는 아주 젊은 나이인 44세에 불과했고 김두한보다 나이가 4살 어려서 서로 몸싸움이 났으면 사건이 더 커질 뻔했다. 실제로 사세청장을 폭행한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5] 김두한의 이런 발언들은 매우 심상치 않게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어쨌거나 본회의에서 민주공화당 이만섭, 신민당 김대중의 질의가 끝나자 김두한의 질의가 시작됐는데 일단 김두한은 “교동공립보통학교 3년 동안에 2년을 낙제하고 1년밖에 못 다녀 기초상식이 부족하여 말을 (잘)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김두한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고 당시 국회 본회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김두한은 실제로 정규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깡패 출신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굉장한 달변가로 유명할 정도로 말솜씨가 매우 좋았던 편이었다. 결국 이 때부터 그의 장광설이 시작됐다.
Q.  콩글리시는 일본식 영어에서 영향을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콩글리시가 일본 영향만 받았다기는 어렵습니다.일본식 발음들로 교육이 되던 때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잔존한다는 주장은 어렵습니다.한국식으로 변형된 영어 표현. 일종의 혼성어 내지는 피진 잉글리시로 이해할 수 있다.싱가포르에서 쓰이는 크레올인 싱글리시(Singlish)와는 달리, 콩글리시는 일상생활에서 구어로 쓰이는 경우가 낱말 및 짧은 인사말 등에 한정되어 있다.따라서 콩글리시의 문법적인 특징은 단순히 '오류'에 가깝게 보는 반면, 콩글리시만의 어휘는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한국어에 완전히 융화되었거나 그렇게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유래만 영어일 뿐 영어를 이용해 만들어낸 한국어나 다름없다.정서적 원인은 영어를 구사할 때 한국어를 바로 1:1로 번역하여 말하는 것이 가장 크다. 따라서 문화적 차이로 인해 아예 다르게 형성된 어휘, 문법적 맥락이 모두 무시된다. 가령 ㅋㅋㅋ를 대신해 kkk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웃는 것을 'ㅋ'라고 하니까 'k'가 ㅋ처럼 웃음소리를 나타낸다고 표현한 것이지만, 이를 이해할 수 없는 비한국어권 화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각하면 쿠 클럭스 클랜(KKK)을 의미하는 줄 알고 기겁하게 된다.문법적 예시로, 한국어 '결혼하다'는 '-와 결혼하다'로, 조사 '-와'가 필요하다. 하지만 영어 동사 'marry'는 그 자체로 '-와 결혼하다'를 그대로 지칭하기 때문에 '-와'에 해당하는 성분을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 'marry with'라고 쓰면 콩글리시가 된다. "6시에 보자" 같은 표현도 한국어 '-에'를 in으로, '보다'를 watch에 대응하면 "watch you in 6"라고 하면 될 것 같지만 문법에 맞으려면 "see you at 6"라고 해야 한다.음성학적 원인은 한국어의 발음 체계가 영어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f]와 [z]는 한국어에 없는 발음이기에 각각 ㅍ[p]과 ㅈ[d͡ʑ][4]로 표기하게 된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서 [f]와 [p]를 구분할 줄 알면 다행이지만 표기된 그대로 발음하면 혼동하기 쉽다.그 밖에 한국어에서 자주 쓰이는 억양이 섞인 한국식 영어가 되면 영미 현지인들로서는 알아듣기 힘들다. 이는 한국인이 꽈찌쭈의 어설픈 한국어를 이해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음 문제는 재플리시와 유사하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국어 장단음, 강세 개념이 로마자를 쓰는 영어와는 상당히 달라서, 영어 청자가 듣기에 콩글리시는 모든 음절을 과하게 힘줘서 발음하는 걸로 들릴 수 있다.문법적인 콩글리시의 특성들 중 상당수는 일본식으로 정착한 19세기~20세기의 옛 영국식 영어 문법을 뿌리로 한다.재플리시에서 그대로 넘어오지 않아도, 한국어와 일본어의 유사성 때문에 유사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전치사 of의 전후를 오역하는 등)단어가 콩글리시인 경우는 재플리시 유래일 수도 있고, 상표의 보통명사화 등으로 고유명사가 보통명사가 된 경우도 있다.
Q.  일본의 헤이안시대 소설가 무라사키 시키부는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라사키 시키부(일본어: 紫式部, 973년경 ~ 1014년 및 1025년경)는 헤이안 시대 일본 황실의 궁녀로,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무라사키는 최초의 소설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일본어 소설 《겐지모노가타리》의 작가로도 잘 알려져있다. 겐지 이야기는 1000년에서 1012년 사이에 집필되었다.[1] 무라시키 시키부는 필명이고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1007년 황실 일기에서 언급된 궁녀 후지와라노 교코(藤原香子)로 추정될 뿐이다.헤이안 여성은 전통적으로 행정에서 쓰는 문자인 한문 학습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학자였던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무라사키는 한문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유창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무라사키는 20대 중후반에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남편은 결혼 2년 만에 죽었다. 무라사키가 《겐지모노가타리》의 집필을 시작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결혼 생활 도중이나 과부가 된 직후로 추정된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1005년경 무라사키를 황실로 초빙하여 쇼시 황후의 시녀로 삼았다. 이는 무라사키가 가진 작가로서의 명성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라사키는 시녀로 일하면서도 계속 글을 썼고 작품에 궁정 생활을 담았다. 5~6년 후, 그녀는 은퇴하여 궁궐을 나오고, 쇼시와 함께 비와 호수 지역으로 간다. 무라사키가 사망한 연도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대부분은 1014년까지 살았다는 설에 동의하지만 1031년까지 생존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무라사키는 시집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와 소설 《겐지모노가타리》를 썼다. 겐지 이야기는 완성된 지 10년 만에 지방 곳곳으로 퍼졌다. 《겐지모노가타리》는 한 세기 만에 일본 문학의 고전으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학술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무라사키의 작품은 20세기 초에 번역되었다. 6권 분량의 영어 번역은 1933년에 완역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헤이안 궁정 사회의 정점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이러한 작품의 중요함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13세기부터 일본 화가들이 무라사키 작품의 삽화를 그렸으며 유명한 우키요에의 대가들도 그녀의 작품을 목판에 담았다.
Q.  북한이 공산주의인 이유는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북한은 명목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다당제 공화국이지만, 북한의 이념은 널리 알려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을 왜곡하여 통치 가문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조하고 독재 체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북한의 정치체제적 특성상 옛 공산권국가들과 현재의 중국처럼 당이 국가를 소유하는 형태로 권력구조가 짜여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당을 특정 가문의 수장이 소유함으로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돌아가게 한다. 북한을 통치하는 가문은 전주 김(金)씨성을 가진 자칭 백두가문이며 초대 가주인 김일성으로부터 2023년 현재의 가주인 김정은까지 3대에 이르러 통치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의 지배체제 세습은 전대 지배자의 유훈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전대 가주의 유훈으로서 권력을 계승할 수 있었다.이러한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배는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라는 사상/이념으로 정당화되고 유지된다. 과거 김일성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의 정치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근간으로 했음을 인정했고, 스탈린주의의 질서를 명백하게 따랐으나, 중소분쟁으로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자유롭기위하여 마오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아닌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사상인 주체사상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기조는 김정일에 의하여 더욱 심화되었으며, 북한의 양대이념 중 하나인 선군정치가 발족한 것도 김정일 시기다.오늘날 북한의 권력계층은 조선의 정치인 주체사상과 선군정치가 이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초월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칭 위대한 사상을 김일성-김정일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명시했다. 현재 북한의 헌법은 김일성-김정일주의가 북한의 지도적 사상임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이 사상들이 독자적이라는 말은 거짓이며, 북한의 체제와 이념은 유교(대가없는 충성), 기독교(개인숭배), 스탈린주의를 짬뽕해서 만든 사이비 공산주의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남북히 하나 되지 못한 것은 해방후에 신탁통치에 의해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통치하게 되면서 갈라섰기 때문이다다. 625 전쟁 이후 휴전이 된 이후로 계속 지속되고 있다.
Q.  고대 페르시아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어떤 황제의 치세냐에 따라 다르긴 하나 대체로 노예 소유가 불법이었다. 페르세폴리스의 웅장한 궁전 유적들도 노예들이 아닌 임금노동자들의 손으로 지어졌고 고대인들의 사고에서 노예가 되는 것이 당연했던 정복지 주민, 빚쟁이 등의 계층들도 제국의 보호를 받았고 노예가 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았다.고대 로마나 대항해시대 신대륙 플렌테이션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 쪽도 만만치는 않았다. 중세 때 노예 수요가 중동으로 집중되었다는데 있다. 중동의 노예무역이 매우 알려진 데에는 노예의 출신 및 처우가 매우 다양했다는 것도 한몫한다. 고대 로마와 마찬가지로 노예의 처우도 극과 극을 달렸는데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말을 탈 줄 아는 노예의 경우 도심 2~3층짜리 건물 한 채 수준의 가격이 매겨져서 서민보다 나은 대접을 받은 받았다. 튀르크계 군인 노예의 경우 운이 좋은 경우 합법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흑인 노예의 경우 운이 나쁘면 뙤약볕 아래 모기가 들끓는 늪지대를 개간하는 극한 작업을 맡았다. 현 이라크에 위치했던 압바스 왕조에서 흑인 노예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을 정도다.역사적으로 흑인 노예무역에 열을 올린 사람들 역시 유럽인이 아니라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이었다. 북아프리카 외에도 중근동 역시 인도양을 중심으로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티오피아, 말리 등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와 부족들은 고대시대 때부터 아랍 상인들과 많은 교류를 해왔다. 이는 근대까지 이어졌으며 아랍에 대한 아프리카의 주요 수출품은 상아나 황금 외에도 약탈로 노획한 노예였다.고대 쿠시 왕국이 정기적으로 노예를 상아와 함께 페르시아에 조공으로 바친 것을 최초로 본다. 아랍인들은 흑인들을 열등하게 여기는 경향이 심각한데 18세기 오만 제국의 경우 흑인 노예 20~50명의 시세 가격이 전투용 말 한 마리 가격과 맞먹었다.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를 비롯한 중동 문학에서 흑인은 추악하고 우매하게 묘사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노예들 중 흑인 남성들에 대해서 성욕이 과해 일을 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하여 생식권을 박탈하고 예외없이 거세를 시켜버렸기 때문에 흑인 노예의 자손들은 흑인 여성 노예로부터 태어난 후손들을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고 한다. 아프리카男을 노예로 삼고 거세한 아랍인들한테 카다피가 사과하기도 했다.근세 이란에서 발흥한 사파비 제국의 경우 오스만 제국의 데브시르메 제도를 모방하여 군인 대부분을 캅카스 지역에서 납치한 혹은 투항한 조지아인으로 채웠는데 이는 사파비 제국 초창기 종파 차이 문제로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하여 믿을만한 세력이 이들 노예병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었던 아르메니아인이나 체르케스인, 조지아인을 강제로 이슬람 시아파로 개종시켜 순니파 봉기군들을 진압하도록 활용한 것인데,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요새에서 고립된 노예병들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조지아인 남성이 군인으로 끌려갔다면 조지아인 여성은 술탄의 하렘으로 끌려갔다. 하렘의 후궁을 납치한 기독교인으로 채우는 관습은 사파비 제국의 후신 카자르 왕조로도 이어졌다. 1829년 당시 테헤란의 주 페르시아 러시아 대사관에서 아르메니아인 노예들을 해방하고 구출한 일을 두고 이란인 군중들이 샤한샤를 모욕했다고 여겨 폭동을 일으키고 습격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문인으로도 유명했던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러한 경향은 근대에도 이어지는데 특히 이들 아랍 국가 중 오만 제국은 당시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제국, 다호메이 왕국 과 함께 잔인하고 악랄한 제국주의자 노예 상인으로 유명했다. 오만 제국 치하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과 바가모요, 잔지바르는 세계 최대의 노예 무역항이었다.더욱이 아랍 국가들에서 아랍 흑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은 현재진행형으로 심각하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흑인 국가들은 자기 나라들을 식민지배했던 유럽계 백인 못지않게 아랍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다.특히 차드나 말리, 니제르, 세네갈, 탄자니아, 케냐 등 과거 아랍인들에게 침략, 식민지배를 받았거나 전쟁을 겪었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의 사람들에게 이집트나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같은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그것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아니다. 라고 바로 욕부터 튀어나오거나 나쁘게 여길 정도이다.이집트 남부와 수단에 흑인 아랍인과 모리타니인은 누비아인과 서아프리카 흑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로 모국어로 수용한 경우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이라크, 오만에서는 흑인 노예의 후손도 있으며, 무함마드도 한창 박해를 받았을 때 같이 탄압을 받았던 에티오피아로 신도들을 내보낸 것도 있기도 하다.이슬람권은 세계에서 가장 뒤늦게 노예제를 폐지시킨 지역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여러 국가에서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극단주의자들은 다시 부활시키자고 하고 테러단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나 보코 하람 등은 실제로 노예제를 부활시켰다.그리고 아프리카엔 이슬람이 발흥하기 이전에도 흑인노예 무역루트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평등과 평화를 약속한 종교가 뻔뻔하게 똑같이 악랄한 노예 장사를 했다는 점, 그리고 그게 현대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노예무역과 마찬가지로 정상참작의 여지는 없다.여담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예는 노예치고 후한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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