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신라의 상대등이라는 직책은 어떤것인지?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상대등은 신라시대의 최고 관직입니다.일명 상신이라고도 한다. 531년(법흥왕 18)에 처음 설치되어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400여 년 간 존속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모두 43명의 상대등 기록이 있다.상대등은 대등으로 구성된 귀족회의의 주재자로서 명실공히 신라 귀족을 대표하는 존재였으므로, 진골 중에서도 이찬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가 주로 임명되었다. 신라 금석문에서도 대등의 존재가 보인다. 대등은 사로국 성립 시기부터 있었던 전통적인 특권이 일정하게 보장된 반독립적 세력들이다. 6세기 중반 이후 중앙관부가 설치되면서 많은 대등들이 특정 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정치운영 또는 권력구조에서 그들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일정하게 화백회의라는 귀족회의를 통하여 유지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등들 중 유력한 한 사람이 선임된 것이 상대등이다. 상대등의 상은 대등의 명칭이 생긴 이후 그 보다 높은 관직으로써 상대등이 등장함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상대등의 임무는 종래의 이벌찬의 임무에서 병마사를 제외한 국사를 전담하는 것이었다. 즉 상대등은 이사금 시기 이래의 권력구조상 신라 국왕보다는 낮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세력을 지니고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 즉 이찬들의 상위에 있는 이벌찬의 전통적 지위를 제도적 차원에서 고정시킨 것이었다.중고기에 왕 중심의 집권체제가 성립됨에 따라 기존의 귀족회의체로부터 행정관부의 분리 · 독립에 따른 관등과 관직의 분화가 이루어졌는데, 왕은 종래의 귀족세력을 관료화하여 직책을 위임함으로써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상대등의 설치는 이러한 행정개편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지위가 크게 세 차례 변화를 겪었다. 즉, 귀족연합체제를 주축으로 하던 중고기에는 진골 중에서도 가장 문벌이 좋은 자가 상대등으로 뽑혀 귀족을 통솔했을 뿐만 아니라, 국왕과 더불어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였다. 상대등의 지위는 귀족 내부의 경쟁을 통하여 확보되고, 국왕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즉 상대등은 진골귀족의 대표자로서 국왕에 대한 견제와 동시에 협력하는 존재였다.국왕의 교체와 때를 같이해 상대등이 교체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또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종신직이었다. 그러므로 상대등은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왕위계승 후계자로 추대되는, 또한 스스로 후계자임을 자처할 수 있는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647년(선덕여왕 16) 1월에 상대등 직에 있던 비담이 여왕의 교체를 주장하였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자 반란을 일으킨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654년부터 시작되는 중대의 전제 왕권 체제에서는 정치적 실권자의 위치에서 크게 후퇴하였다.즉, 정치적 실권은 651년(진덕여왕 5)에 설치된 국왕 직속의 최고 관청인 집사부에 넘겨 주고, 다만 행정에 대한 득실을 논하는 비판자의 지위로 약화되었다. 따라서 상대등에 취임하는 자도 종전처럼 반드시 최고 문벌 출신일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임기도 종전의 이른바 1왕대 1상대등제가 반드시 지켜지지는 않았다. 신라에 합병된 금관가야 출신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된 것이라든지, 경덕왕 때 왕의 개혁정치에 불만을 품은 김사인이 재임 중에 물러난 것 등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780년(선덕왕 1) 전제 왕권의 파탄과 더불어 전개되는 하대의 귀족연립체제에서는 다시금 지위가 높아져 중고기와 비슷한 상태로 바뀌었다. 상대등이 국왕과 거취를 같이하게 되었으며, 상대등에 취임하는 자 가운데는 국왕의 근친이 많았다. 이 경우 대개 병부령을 거쳐 상대등이 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는 일이 늘어나는 등 정치 일선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흥덕왕(興德王)이 죽은 뒤 신무왕이 즉위할 때까지(836∼839년) 치열했던 왕위계승쟁탈전에서 상대등이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이런 점에서 볼 때 신라 하대의 상대등은 오히려 중고기에 비해 더욱 강력해진 존재였던 것 같다. 889년(진성여왕 3)의 전국적인 농민반란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상대등 직은 귀족 전체의 단합을 위한 매개체이자 동시에 그 상징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Q. 비담의 난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은 647년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염종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가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등 왕실이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김춘추 ·김유신 등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비담 등 주모자의 구족을 멸하였다.이 반란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신라는 중고기(법흥왕~진덕여왕)에 들어가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사회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선덕여왕 이후는 귀족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와, 가야 멸망 이후 신라의 새로운 김씨로 포섭된 가야왕실의 후손 김유신이 손을 잡고 이러한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다. 이에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귀족은 불만을 표출할 수밖에없었는데, 이것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이 중심이 된 이 난이었다.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가, 이들이 중심이 되어 더욱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에 필요한 여러 시책들이 실시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를 이루던 상대가 막을 내리고, 중대가 시작되면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졌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 등의 왕실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Q. 2.8독립선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사건.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이 주동한 것으로, 대표는 최팔용·윤창석·김도연·이종근·이광수·송계백·김철수·최근우·백관수·김상덕·서춘 등이었다. 이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받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6백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최팔용이 대표로 나가 이광수가 작성한 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고 시작되는 는 한일합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인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 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등을 선언했다.4개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본단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②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판결할 기회를 요구함. ③본단은 만국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이 목적을 달하기 위해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공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 그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명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 위원은 이미 파견된 우리 만족의 위원과 같은 행동을 취함. ④앞의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될 때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이것으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함. 2·8독립선언으로 일본경찰은 주동자 60여 명을 체포, 그중 최팔용·김도연·백관수·윤창석·송계백·서춘·김상덕·이원군 등 9명에 대해 일체의 방청을 금지한 재판을 열고 출판법 위반을 걸어 최팔용·서춘은 1년, 그 외는 9개월에서 3개월까지 금고에 처했다. 이 2·8독립선언은 곧장 국내의 민족지도자·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Q.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인 아소카왕의 업적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쇼카왕은 그의 독자적인 다르마(Darma, 법(法))의 정치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쇼카왕은 인도 동부에서 강력하게 저항했던 칼링가(Kalinga) 지방을 평정하기 위한 전쟁에서 수십만 명이 사망한 참사를 겪은 다음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며 무력에 의한 지배를 포기하고 법과 진리에 따른 정치를 펼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칙령으로 표현된 달마라는 통치의 이념을 큰 암석과 수많은 석주들에 조각하였다. 그 이념은 생명의 존중, 동물에 대한 애정, 부모에 대한 순종 등 인류의 보편적인 도리를 준수하는 것이었다. 이 기념비와 같은 석주들은 인도 서북쪽 아프가니스탄부터 남쪽 데칸지방까지 여러 장소에 세워졌다.아쇼카왕은 B.C. 255년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제정했으며 수도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 현재 Patna시)에서 불전(佛典)을 편집하기 위한 제3결집을 주최하였다. 그 당시 붓다 사망 직후에 만든 팔분사리(八分舍利)탑 중 7개 탑을 개착하여서 그 사리들을 분활해서 각처에 분배하여 수많은 분사리탑(分舍利塔)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것은 인도 중부 지방 산치(Sanchi)에 있는 대스투파이다. 아쇼카왕은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멀리 유럽에 이르기까지 불교 전파에 힘을 썼으며 불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쇼카왕은 불교도가 된 이후에도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인정하면서 타종교에 대한 배려를 하였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