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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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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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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콜로세움은 로마의 경기장으로 언제 지어졌고 어떠한 용도로 사용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로마의 콜로세움은 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80년에 건축이 끝나 100일 축제 기간 동안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개막식을 올렸다. 온천 침전물 대리석으로 건축된 이 커다란 원형 건물은 처음에는 플라비아누스 원형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이곳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드는 5만 명 가량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대결이 끝나면 승자는 패배한 검투사를 죽여야 할지, 혹은 용맹함을 보여 주었으니 살려야 할지에 대한 관중들의 결정–혹은, 황제가 그 자리에 있다면 황제의 결정–을 살폈다. 오늘날 매우 유명한,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제스처를 통해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다. 시합에 들어가는 동물들(사자, 표범, 악어 등)은 극장 아래에 있는 우리에 가두었다가, 로프로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경기장에 풀려났다.중세에 콜로세움은 교회로 쓰였으며, 그 후에는 저명한 두 로마 가문인 프란지파네 가문과 안니발디 가문에 의해 요새로 이용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이 건물은 손상을 입어 지진의 피해를 입거나 강도가 돌을 약탈해 가고,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생긴 현대의 공해에 시달리게 되었으나, 콜로세움은 여전히 잔혹한 여흥을 즐기는 인간의 취향을 반영하는 기념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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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김동리 소설 화랑의 후예가 현대인에게 주는 시사점이 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몰락한 양반을 통해 당시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표현한 작품이며, 김동리의 대표작이다. 현실적인 능력은 없지만 화랑의 후손이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힌 황진사를 통해, 권력과 돈이 없더라도 다른 무엇인가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인간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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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강감찬 장군이 역사에 기록되는 주요 기록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습니다.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고려사절요》 현종 22년, 의 사관 논평앞에서 언급했듯 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북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라며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이다.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다. 즉,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고려사》에는 그에 대해,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라며 칭송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이었다는 소리이다.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이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이 때문에 '한국의 곽자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려시대 당시 60에 가까운 나이까지 장원 급제 이후 고려사에 등장이 없다. 이는 환갑이면 이미 살만큼 살았다는 당시 수명 기준으로 굉장히 늦은 등장인데 이후 현종의 즉위와 함께 출세길이 열리고, 3차에 걸친 고려-거란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말년에도 문하시중의 직위와 후작위를 받으며 개성에 나성 건축을 주도하는 등 활약했다. 이미 생전에 문하시중이라는 최고위 관직, 후작이라는 사실상 왕족과 개국공신을 제외하면 받을 수 있는 최고위 작위, 권력, 인망 등 모든 것을 누렸다. 그러나 일반적인 권신들과 다르게 숙청되지 않고 평안한 말년까지 보냈으며 사후에도 구국의 영웅으로 배향을 받고, 고려 이후에도 강감찬의 평가는 낮아지지 않았으니 한국사에 손꼽히는 인생의 승리자로 평가받는다.또한, 강감찬이 승리로 매듭지은 귀주 대첩 이후 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북송, 요나라와 더불어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 동안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에 이르는,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였다. 강감찬은 고려시대 최고의 군주인 현종을 보필한 왕좌지재의 신하였던 것이다.이렇게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평화가 이어진 시기는 사실 찾아봐도 거의 없는 편인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 거란군을 귀주 대첩으로 크게 물리친 덕택에 요나라는 정복전쟁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고, 북송, 요나라, 고려, 서하 등 4개국 간의 평화 균형 체제는 훗날 금나라가 흥기하여 요나라와 북송을 잡아먹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단순히 구국의 영웅 이상인,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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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 후기 탈춤은 당시 사회상을 어떻게 반영해서 표현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분사회를 풍자하거나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해학적으로 그렸으며 여러종류가 있습니다.​가면을 스고 하는 놀이는 농경 사회 초기부터 있었습니다. 가을 걷이에 감사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거나 굿을 할때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습니다.​삼국시대에는 궁중에서 열리는 연회나 불교행사때 탈춤 공연이 마련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이라는 관청을 두어서 국가행사가 있을때 가면극을 상영했습니다.​그러다 조선후기에 민간에 보급되면서 탈춤을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탈춤을 전문적으로 추는 집단이 생겨났습니다.​탈춤의 내용은 지배층이나 특권층을 풍자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특히 조선후기는 무능하고 부패한 양반 혹은 계율을 어기고 문란한 생활을 하는 파계승을 조롱하고 그릇된 남녀 관계나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을 풍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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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탁구를 의미하는 핑퐁이라는 단어는 영어인가요? 아니면 중국어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핑퐁은 탁구 경기시에서 나는 탁구공 날아가는 소리 핑과 치는 소리 퐁이 합쳐져서 핑퐁이라고 지어졌다고 합니다.1898년 영국 제이스 깁이 만든 상호가 바로 핑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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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라나라애서 말을 할땨는 한자가 많이 썩인 말이 많은데 이유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특히 법률 용어와 의학 용어에는 한자어가 많습니다. 왜 쉬운 우리말을 두고 한자어를 쓰는 걸까요?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너무 친숙해서 외래어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우리나라는 중국, 일본을 포함하여 한자 문화권에 속합니다.삼국시대 한자가 우리나라에 수입된 이후 한자를 사용한 사람은 정치인과 학자였습니다.그렇다면 우리 어휘 체계 중 전문어나 학술어만 한자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왜 기초적인 일상어까지 한자어가 침투했을까요? 어느 학자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일제시대 억지로 수많은 한자어를 만들어 내고 조선에는 원래 토박이말이 없다고 조작한 것입니다.언어는 한 민족의 얼을 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일제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한자어를 무조건 없앨 수도 없습니다. 이미 우리말에 자리 잡아 대신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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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을사오적 후손들은 해방 이후 어떻게 생활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010년 8월 기사_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550811이완용은 사망 직전 지금의 재산으로 환산할 경우 600억 원에 이르는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당시이완용의 재산은 지금의 가치로 200억 원에 이르는 100만원을 갖고 있었는데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대가로 10만원(20억 원),한일병합 조약 체결의 대가로 15만원(30억 원)을 챙겼다.무상으로 빌린 국유지를 제3자에게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수법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이런 재산을 이용해 군산. 김제. 부안 등의 비옥한 논을 집중 매입해일제 초기 이완용이 보유한 토지규모가 여의도의 두 배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이완용은 이 토지를 1915년에서 1917년 사이 일본인 대지주에게 처분해 현금을 보유하면서당시 경성에서 '현금왕'으로 불리며 사채놀이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이완용의 후손으로 부터 환수한 토지는 공시지가로 7,000만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이완용의 증손자 되는 이윤형은 1992년 '조상 땅 찾기' 소송으로서울 서대문구 일대의 땅2,372m(712평 - 당시 시가 30억 원) 되찾은 뒤 팔고 나서 캐나다로 이민했다2010년 1월 기사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113008007을사오적은 숱한 암살 시도에 시달렸고 칼을 맞기도 했지만끈질기게 살아남아 일본강점기 전반에 걸쳐 각종 협약과 합의를 체결하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른다.게다가 이완용과 이근택의 후손들은 국가에 귀속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수십 차례 걸쳐 내 사회적물의를 일으켰다.‘조선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군림했던 이완용의 후손은재산 소송에서 일부 승소해 땅을 되찾았으나주변의 비난에 땅을 팔고 국외로 도피했다.을사오적 가운데 이지용은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고,박제순의 상속자 박부양은 10대의 나이에 일본에서 작위를 받고 당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2005년 11월 기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225314수년전 작고한 이씨 아버지는 이완용의 땅을 되찾겠다며 1990년부터 소송을 낸 장본인이다.이씨는 “아버지가 잘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지나치듯 언급한 뒤 더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반면 부인은 “물질적으로 받은 거 없이 정신적 고통만 물려받아야 하는 게 이치에 맞냐”며“땅도 찾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이씨는 그동안 크고 작은 고통 속에 살아온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그는 “떳떳하지 않지만 지금 와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부인은 남편 가계의 비밀을 언제 알았느냐는 질문에 “오래 전에 알았다”고만 답했고결혼 전에 알았느냐는 물음에는 말끝을 흐렸다.을사조약 당시 군부대신이었던 이근택의 증손자는 전화통화에서“매도당하기 싫다”며 전화 인터뷰조차 피했다.그는 지방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최근 정년 퇴임했다.몇해 전 세상을 떠난 그의 친형은 지방 국립대에서 총장을 지냈다.이씨는 그동안의 인생역정을 질문받고는“어떻게 살긴 어떻게 살아. 대한민국이 보살펴줘서 잘먹고 잘살았다. 괴롭히지 말아달라”며신경질적으로 답했다.취재팀은 권중현,박제순,이지용 등 다른 을사5적의 후손 행적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한 후손의 지인은 “자손들까지 모두 역적으로 붙이는 분위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이근택 후손장남 이상우 : 공주대 총장 역임(1998졸)차남 :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박제순 후손 자 박부양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과 나란히 조선 귀족 모임인 동요회 이사를 지내면서일제 강점기 내내 부귀영화를 누림)손 박승유 : 서울대 음대와 남가주 대학 음대를 졸업 후 강원대 음대 교수 역임.이완용 후손증손 이윤형 : 광복후 은신, 60년대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그 뒤 17년간 캐나다 생활/ 80년대 말,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찾기 소송/ 승소, 수십억원을 챙김)삼손 이병주 : 일본으로 밀항-귀화/ 일본 정부 환대증손 이석형(이병주의 아들) : 1979년, 이완용 부부의 묘(전북 익산군)를 파내 화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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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시대에는 완전무장한 철기병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에도 중장기병은 존재 했습니다. 그 때 시절에 걸맞는 병기를 갖추고 있었죠.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갑옷은 복합적으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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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초기 왕자의난이 발발하게 된 계기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자의 난의 원인은 크게 세자 책봉 문제와 사병 혁파, 요동 정벌 준비 등에서 비롯했다. 더욱이 붙여서 말하자면, 태종 이방원의 관점과 정도전의 관점이 충돌해서 생긴 문제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세자 책봉 문제태조에겐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맞이한 두 명의 정처(正妻)가 있었는데, 첫번째 부인은 그가 무명 장수 시절에 고향에서 맞이한 한씨이며 다른 한 명은 군공으로 입신양명한 그가 개경에서 맞이한 강씨이다.하지만 한씨는 조선개국전 1391년에 이미 사망했으므로 태조는 고려조 왕비를 배출하는 최고 명문 가문이자 당대 제일 권문세가의 딸이었던 강씨의 집안 배경 및 강씨의 두터운 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왕(開國王)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에 태조는 왕으로 등극한 직후, 강씨를 왕비로 책봉하여 정비(正妃)로 삼았으며[1] 그녀의 소생인 어린 두 왕자 중에서 왕세자를 간택하여 막내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한씨가 추존 왕비가 된 것은 그로 1년 후의 일로, 비록 한씨가 먼저 태조에게 출가하긴 하였으나 서열상 한씨는 차비(次妃)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태조 5년(1396년), 현비 강씨가 병으로 서거하자 태조는 강씨를 추모하기 위해 왕후(王后)로 추봉하는데, 이로 인하여 이미 사망한 한씨의 서열은 명목상 후궁이 되었다.절비 한씨 소생으로 1남 방우, 2남 방과(정종), 3남 방의, 4남 방간, 5남 방원(태종), 6남 방연이 있었는데, 특히 5남 이방원은 부왕(父王)의 처우에 대한 불평이 대단하였다. 또한 개국공신으로서 왕세자 이방석의 보도(輔導)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 이하 남은·심효생 등 소수 재신이 국왕과의 정치적 소통을 장악한 상황에서 일반 신료들의 불만이 있었다.군권 분장 정책과 요동 정벌 준비태조는 개국 초부터 공신과 종친들을 절제사로 임명하여 군권을 분할했고, 재위 기간 동안 이를 회수하고자 하였다.[2] 뒤이어 태조의 지원 아래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사병(私兵)을 혁파해 군제(軍制)를 단일화하려 하자, 이방원은 이에 반발하여 조영무, 조온 등 사병을 가진 공신 및 종친들과 결탁했다.경과한양 신도(漢陽新都)의 공역(工役)이 완료된 지 2년 후인 1398년(태조 7) 음력 8월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여러 왕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이방원은 이를 정도전 등이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으로 해석하여,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을 세워 10월 5일(음력 8월 25일) 이방의, 이방간 등 여러 왕자들을 포섭하고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조준, 하륜, 박포, 이지란 등 휘하 부하들을 시켜 군사를 일으켰다.그 뒤 남은의 집을 습격해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했다. 같은 시각에 박위, 유만수, 장지화, 이근, 심효생을 살해하였고(10월 6일, 음력 8월 26일) 변란의 책임을 세자와 정도전 일파에게 전가했다. 또한, 세자 이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 살해하고, 이방석의 동복 형 이방번도 함께 죽여 버렸다. 이 변란으로 세자 이방석이 폐위되니, 다음 세자로 이방원을 만들게 된 것은 정세의 당연한 귀추였다.결과이방원은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며 세자 자리를 굳이 사양하고 둘째 형인 이방과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큰형인 진안대군이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에는 야심이 없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형 이방과에게 차기 제왕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아비를 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써의 책임을 떠맡김과 동시에 훗날을 기약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태조는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그리고 사위 흥안군 이제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한달 뒤인 9월에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정종이다. 이로부터 태조는 상왕(上王)으로 칭하게 되었다. 왕으로 즉위한 정종은 즉시 생모 절비 한씨를 신의왕후로 추존하여 신덕왕후 강씨와 동급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치고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신의왕후를 수비(首妃: 원비)로 교체하여 신덕왕후보다 윗서열로 만들었으며, 이로도 성이 차지 않아 신의왕후를 왕후보다 상급인 왕태후로 격상하였다가, 신덕왕후를 다시 현비로 조정하여 후궁으로 격을 낮추고 신덕왕후의 소생들을 서자로 격하시킨다. 먼 훗날인 현종 때 신덕왕후의 신주가 비로소 태묘(太廟: 종묘)로 옮겨지고 다시 왕후의 예우가 올려지지만, 현종 또한 신의왕후의 혈손이기에 신덕왕후를 신의왕후보다 격을 낮추어 신덕왕후 강씨가 태조의 첩으로 출가하였다가 신의왕후의 사후에 비로소 처로 승격하여 왕비가 된 계비로 조정하였다.정종 2년(1400년)에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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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로마의 문화 가운데 목욕탕을 어떻게 그 시대에 지을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초창기 공화국 시절에는 건실했던 로마인들은 목욕을 별로 좋게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간의 신체를 나약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힘빠지면 일을 못하게 되니까 노예들의 목욕조차 금지하였었다. 그러나 BC2C를 지나면서 상업적인 목욕탕이 늘어났다. 처음 베수비오 근처 스타비아 목욕탕은 화산에서 나오는 천연온천이었다. 그러다가 인공적으로 물을 끓여 열탕이나 온탕으로 썼다. 이때 생긴 열이 구들과 벽을 둘러싼 관을 타고 돌며 방을 입체적으로 덮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땀빼는 열기욕실, 즉 건식사우나다. 물도 끓이고 열도 활용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인 것이다.그 후로 이런 새로운 방식의 로마목욕탕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아그리파가 BC33년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로마에만 무려 170개에 이르렀으니 한집 건너 하나씩 목욕탕이었던 셈이다. 목욕탕 건축에는 신전에서나 볼법했던 최고급자재를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실어왔으며 목욕탕 바닥은 전체가 화려한 모자이크로 뒤덮었다. 로마는 제국으로 팽창하면서 지중해로마문명권에 로마식목욕탕을 전파했다. 이 곳의 로마유적지 어딜 가도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공중목욕탕유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영어로 Bath라는 용어는 원래 로마목욕탕이 있던 영국의 도시이름에서 유래한다.)로마목욕탕은 초기에는 열기식 사우나와 열탕 정도가 전부였다. 다양한 온도의 열기욕실과 탕을 갖춘 것은 네로때부터였다. 이때부터 체육관이 목욕탕에 추가되었으며 110년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는 네로의 목욕탕을 능가하는 호화로운 목욕탕이 출현하여 정원, 도서관, 산책로, 수영장이 부속건물로 자리잡았으며 100년뒤 카라칼라의 목욕탕을 예고하였다. 카라칼라 목욕탕은 1,600여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로 확대되었고 80년 뒤에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목욕탕은 수용규모가 카라칼라의 2배에 달하였다. 제국 말기에는 8개의 초대형 무료목욕탕이 존재했는데 저렴한 요금을 내는 830여개의 중소형 사설목욕탕도 서민들로 붐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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