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월트 디즈니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래프 오 그램 (Laugh-O-Gram)월트는 집의 차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거기서 다니던 회사의 카메라를 빌려다 영화적인 기교를 익혔다. 물론 그런 기교는 촬영방식을 확인하는 식의 거의 원초적인 작업이었고 무언가를 알아볼만한 애니메이션 교습서도 드물었다. 당시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던 사람들의 필독서였던 E.G 러츠의 애니메이션 교습서만이 월트의 유일한 교과서였고 그것을 읽으며 월트는 셀 애니메이션의 기본기를 익혔다.회사에서의 낮일이 끝나고 나면 월트는 어브 아이웍스 등의 동료들과 함께 캔자스 시티 미술학원에 다니며 드로잉 수업을 들었다. 기본기가 닦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제 영화광고업자로 전환한 회사의 사장 코거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에 관심이 많았던 코거조차도 셀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필름을 쓰는 일에는 반대했고 월트는 결국 자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밖에 없었다. '래프 오 그램 (Laugh-O-Gram)'이라고 이름지은 1분짜리 애니메이션 필름 릴을 회사 동료였던 하먼 형제와 만들어서 뉴먼 극장의 주인 프랭크 뉴먼을 찾아갔다. '래프 오 그램'은 그시절의 소단위 규모의 사회문제들을 풍자한 짧은 만화로 신문에 연재되는 풍자만화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었다. 월트가 찾아간 뉴먼은 예전에 월트가 일했던 미술가게의 페스먼이 소개해준 자였는데 1분의 짧은 시사를 마친 뒤 지체 없이 그 필름을 사고는 월트와 시리즈 계약도 맺었다.훗날 월트는 자신의 작품명을 따 래프 오 그램 필름사를 설립하고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그 회사의 사장이 된다.마셀린에서의 생활월트는 일생을 통틀어 어릴 때 살던 마을 마셀린을 잊지 못했다. 디즈니 영화가 늘 동물과 숲, 농경과 같은 끊임없는 목가적 꿈을 펼쳐오는 것도 마셀린이 월트에게 남긴 기억들이 새롭게 조직되는 과정에서 출현했다고 훗날의 분석가들은 말한다. 월트는 여기서 기차에 대한 동경과 작은 동물들과 함께 놀던 추억을 가지게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동체 삶의 긍정적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다.최초의 디즈니 스튜디오재정적인 문제로 래프 오 그램의 운영이 쉽지 않았던 월트는 새로운 시작점을 헐리우드로 결정지었지만 당대 애니메이션의 중심지는 당연 뉴욕이었다. 월트가 처음 헐리우드에 도착해서 찾아다닌 일도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실사영화의 감독직이었다. 이전에 형과 함께 개고생을 하며 만든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필름을 가지고 계약을 해볼 심산으로 여러 스튜디오 문을 두드렸지만 길은 열리지 않았고 결국 실사영화의 감독이 되는 것도, 앨리스 코미디를 파는 것도 몇 개월만에 모두 포기했다.위기 속에서도 기회는 찾아왔는데 헐리우드 역사상 최초의 여성 배급자인 마거릿 윈클러가 월트 디즈니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워너 브라더스의 비서인 동시에 자신만의 캐리어 확장을 꿈꾸던 그녀는 애니메이션 배급에서 이미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월트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보자마자 시리즈의 성공 가능성을 점치고는 시리즈 배급계약을 제의했다. 일이 워너브라더스에 있던 윈클러의 상사에게도 알려지면서 그렇게 월트 디즈니의 워너브라더스에서의 첫 번째 경력이 시작되었다.그렇지만 계약을 끝난 뒤에도 월트를 괴롭혀왔던 돈은 여전히 커다란 벽이었다. 그런 월트를 도와준 사람은 로이 디즈니다. 로이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제작에 뜻이 있지는 않았지만 월트의 열정에 감복하고 그를 동경의 눈길로 보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는 하루의 반을 병으로 인한 피곤함으로 누워보내면서도 사무실을 구하고 새로운 아파트를 임대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초창기의 일이지만 월트와 영화를 같이 제작하기 시작했다. 셀에 구멍을 뚫고 카메라를 다루는 일도 맡으면서 스튜디오의 재정까지 책임졌고 그런 역할은 수십년이 지나서도 계속되었다. 형제는 마침내 1923년 10월에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첫 간판을 달았다.오스왈드 래빗월트가 제작한 영화의 배급을 맡던 찰스 민츠와의 긴장이 가시기도 전에 월트가 제작한 영화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의 주인공 버지니아 데이비스와 스튜디오 사이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스튜디오에 애니메이터들이 대거 고용되면서 앨리스 코미디는 달라지고 있었고 돈과 배급과 배우의 문제가 계속 얽히면서 스튜디오의 분위기도 나빠지고 있었다.그러던 차에 찰스 민츠는 월트에게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를 그만 제작하자고 제의한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영화가 나온 앨리스 코미디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비슷한 내용으로 장장 쉰 여섯편이 나온 상황이었다. 월트 역시 새로운 시리즈가 필요함에 동감했다. 그런 상황의 요구에 응답해 개발된 것이 바로 오스왈드 래빗 캐릭터였다.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는 팰릭스 더 캣을 비롯한 고양이 캐릭터가 득세 중이었는데 스튜디오는 고양이가 진부해진 틈을 타 슬쩍 토끼 캐릭터를 꺼내놓았다.그 동안의 애니메이션의 코미디는 무분별한 슬랩스틱과 패러디로 비롯된 것이었고 월트는 여기서 캐릭터를 좀더 입체적으로 구성해보기로 결정한다. 비록 단편이지만 캐릭터에게 동기를 주고 그 동기로부터 불어나오는 의지를 통해 작품의 코미디를 새롭게 규정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바로 이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에게서 최초의 퍼스낼리티 애니메이션들이 등장했고 오스왈드가 그 첫 번째 기수가 되었다.미키 마우스오스왈드 래빗으로 배급자 찰스 민츠와 자신의 애니메이터들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한 월트가 뉴욕에서 돌아오는 길에 화를 억누르는 심정으로 짧막한 시나리오 한 편을 썼다.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스토리에서 따온 것으로 제목은 'Plane Crazy(미친 비행기)'였고 주인공은 쥐로 결정했다. 이 수컷 쥐는 오스왈드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스튜디오에서 유일하게 월트의 편에 섰던 어브는 오스왈드의 귀를 줄이고 코를 통통하게 그린 캐릭터로, 아내 릴리언 디즈니의 의견으로 미키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고 이 캐릭터가 현재까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대표하는 미키 마우스가 되었다. 이후 미키의 디자인은 또 손을 보면서 고쳐 나갔다. 미키 마우스의 원형 디자인은 귀 부분에서 도드라지고 있는데 초창기 애니메이션에서도 귀 모양은 항상 둥글게 나타난다. 이런 디자인은 시청자들에게 미키 마우스가 쉽게 인식되게 해주며 귀 모양은 미키 마우스의 비공식적인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미키마우스 로고 모양은 디즈니社에서 미키 마우스를 표현할 때 종종 사용되고 있다증기선 윌리월트는 시사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깔아 상영했는데 그때의 관객들의 환호를 상기시키며 작품에 사운드를 도입해보기로 했다. 이 아이디어는 그때 제작중이던 미키 마우스의 두 번째 작품이 아닌 세 번째 작품 '증기선 윌리'에서 처음 실현시키기로 했다. 이 작품은 무성영화의 기수 비스티 키튼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패러디한 공식적인 미키마우스의 데뷔작으로 인식되었다. 또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증기선 윌리의 시사회는 성공이었지만 총 네편의 미키마우스 시리즈 계약은 쉽지 않았다. 그 때 증기선 윌리를 본 적 있는 브로드웨이에 있는 콜로니 극장 주인이었던 해리 라이헨바흐란 남자가 월트에게 다가왔고 그 작품에게 매료된 그는 당시 애니메이션 가격으로는 유례없이 비싼 천불에 2주간의 상영권을 월트에게서 구입했다. 월트는 매일마다 극장에 와서 모든 상영을 지켜보며 극장 관객들의 반응을 체크했다. 관객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고 이 작품은 미키 마우징이라고 불리는 언더스코어링 기법-액션과 사운드를 유기적으로 결합한-을 사용한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었다. 뉴욕타임즈에 월트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 기사가 실리고 그토록 작품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배급사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컬러 애니메이션월트는 이전까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실감나는 만화를 만들고 싶었다. 컬러 애니메이션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컬러 프린트의 상태들이 좋지 않아 눈을 심하게 자극하거나 물빠진 색만 보이는게 대다수인지라 실용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월트는 이미 유니버설에서 일하던 월터 랜츠가 최초로 사운드와 컬러를 입힌 애니메이션 '재즈가수'-일부분이 컬러다-을 보며 연구에 몰두했다.그렇게 나온 애니메이션 '꽃과 나무'는 앞서 말한 삼색 인쇄법을 활용한 최초의 컬러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이미 월터 랜츠가 컬러 애니메이션을 시도했지만 그 작품보다 이 영화가 더 뛰어난 평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색의 선명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놀라운 사실성 때문이었다. 이전과는 색이 전혀 다른 애니메이션이 처음 등장한 것이었다.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비평적으로도 큰 성과를 남겼다. 그 해 처음생긴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첫 수상작이 되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월트는 바로 그 부문에서 이해부터 8년 연속으로 상을 받게 된다.중흥기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는 1930~1940년대로 불리며, 1970년대 이후로는 버블경제를 뒤에 업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부흥으로 디즈니의 독주는 차차 깨져갔다. 그러나 1989년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를 시작으로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킹에 이르는 4개의 작품으로 디즈니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94년 라이온킹 이후 디즈니는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을 내놓지 못했으나 2013년 겨울왕국을 내놓으며 다시 비평과 상업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Q. 군 기관 중에 과거에 기무사 라는 곳이 있던데 어떤 일은 하던 곳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군기무사령부(國軍機務司令部, 영어: Defense Security Command, DSC) 또는 단순히 기무사(機務司)는 대한민국 국방부직할의 수사정보기관이었다. 군사에 관한 정보 수집 및 군사 보안 및 방첩, 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했으나 사실상 정부에 반대하는 인물을 잡아가서 고문하고 사망하도록 했다.그러나 과거 보안사령부 시절부터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들에 대한 납치, 암살 ,고문 등이 주 내용이었다. 잡아가서 고문해서 사망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두환은 정치에 개입하거나 군사 반란을 주동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부대는 본부와 지원 부대로 구성되었고 지원 부대는 국군의 연대급 이상의 부대에 배속되었으나 배속된 부대와 별개의 독립부대처럼 운영되었다.2018년 8월 6일 입법예고된 새로운 기관명은 군사안보지원사령부라고 확정되었다. 개편안은 8월 14일에 국무회의에서 심의·의결되었다.2018년 9월 1일 군사 정보, 보안, 방첩 기능을 수행하는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새롭게 창설함에 따라 과거 세월호 유가족 사찰, 국정 여론조작, 계엄령 준비 논란을 일으켰던 국군기무사령부는 해체되었다.
Q.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문학적 의의가 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작품은 우리의 재래적 토속신앙인 무속(巫俗)의 세계가 변화의 충격 앞에서 쓰러져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무녀도」라는 그림에 담긴 한 무녀의 사연의 풀이로 제시된 이 작품은, 모든 것이 변해 가는 소용돌이 속에서 소멸해 가는 것의 마지막 남은 빛에 매달려, 이를 지키려는 비극적인 인간의 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전체의 구성은 김동리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액자구조로서,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담겨져, 이중(二重)의 허구화현상(虛構化現象), 즉 내부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 유발과 그것의 인증기능(認證機能)을 하고 있다. 한편, 내부 이야기도 모화와 욱이의 극적인 갈등이 중심을 이루면서 발단-전개-절정-대단원의 견고한 짜임을 보여준다.발단에서는 퇴락한 집과 ‘사람냄새’의 대비, 인물들의 서로 다른 방언의 대비, 무속과 기독교적 신관의 차이 등을 통하여 이미 이야기 전체의 기본적 갈등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모화와 욱이의 상호 거부 대립이라는 외적 갈등이 점진적으로 전개되며, 마침내 욱이의 죽음을 부르는 갈등으로 발전, 절정을 이룬다. 그 뒤 쇠퇴해 가는 모화의 자기 세계를 되찾으려는 마지막 굿과 죽음이 비극적인 대단원을 이룬다.여기에서 모화의 죽음과 패배는 기독교의 승리로 볼 수도 있으나, 그러한 승패보다는 도도한 역사의 변화 앞에서 이에 맞서고 겨루어보려 한, 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비극적으로 제시한 것에 이 작품의 의미가 있다. 「무녀도」의 그림이 전제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적인 시간을 초극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적인 삶의 보편성을 암시하려는 작가의 세계관이 천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