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삼국지의 촉나라 무장 관우는 어떻게 죽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여몽전에 이르길 이때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병을 많이 남겼는데 관우가 자신의 뒷치기를 두려워 한다고 알아챈 여몽은 계책으로 병 치료를 명목으로 건업으로 돌아갔다. 관우가 이를 믿고 점차 병사를 번성으로 보냈다. 당초 여몽을 대신하여 육구에 도착한 육손이 관우에게 관우를 치켜 세우는 편지를 보내자 오만해진 관우는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편지에서 육손이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적극적으로 협력을 약속하였는데 관우는 이 말을 듣고 오판한 것으로 보인다.이때 위에서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삼국지집해 여몽전에 수록된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여기서 상관은 익양대치 시 서쪽 촉한이 취한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청릉현 옆이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하야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라고 했으니 해당관은 양측의 경계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 상관과 번성은 수백리가 넘으니 관우가 직접 취하진 않았을 것이며 관우 휘하의 관리들이 이를 취했을 것이다.애초에 관우를 칠 생각이던 손권은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상인의 복장을 입히고 노를 젓게 하여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과 미방이 모두 항복했다. 호삼성은 이를 보고 미방과 사인의 투항이 없었다면 관우가 오의 기습을 일찍 알아차렸을 거라 평가했다.당시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고 장군 부사인이 공안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여몽전 오록에 따르면 사인은 본디 항복할 마음이 없었고 오군의 항복사자인 우번을 내치기까지 했으나 우번이 편지를 보내 내응이 있었으니 이렇게 대응하지 못할 지경으로 포위된 것이며 이대로 있어봐야 살길은 없고 죽도록 싸워봤자 당신의 일족만 멸살될 것이며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협박하니 눈물을 흘리며 항복하였고 우번이 이는 속이는 병사이니 사인을 응당 끌고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남군으로 끌고갔다고 한다. 여몽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고 하며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자 소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저항없이 항복했다고 하였다.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만 항복한것이고 다른 남군 사람들에게 항복은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에 여몽을 치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번은 한참 미방에게 받은 기물로 주변사람들과 성밖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여몽에게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뿐인데 성안의 사람들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는가?'라고 진언했고 여몽은 그제서야 남군으로 들어가 마침 반격을 준비하던 성안의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어쨌거나 관우가 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하자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했다며 조엄전에 전한다. 한편 오나라의 장수 장흠은 함대를 이끌고 면수로 들어갔다. 단 장흠전에는 면수로 들어갔다가 나온 기록만 있어 실제 관우의 수군과 교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한편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동시에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손에 넣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고 오주전에 전한다. 관우는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중을 두루 다니게 하며, 집집마다 묻게 하고, 혹은 손수 글월을 써서 신의를 보였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오자, 사적으로 서로 참여하여 묻고는,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평시보다 과하게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관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거기에 관우군의 처자들이 일종의 인질이 되었는지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수경주에 이르길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에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중국의 학자 전부생(田福生)은 자신의 저서 《관우전關羽傳》에서 맥성은 수백 가지고는 수만의 오군에 한달간 대항할 수 없다며 맥성에 2만명이 주둔했을거라 여겼다. 어쨌거나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급기야 관우는 거짓항복까지 시도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맥성과 임저의 위치를 보건대 관우는 이미 장악당한 영안 방면이 아니라 상용 방면으로 어떻게든 돌파할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관우는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때는 12월,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사로잡아 더 이상 도망 못가도록 붙잡았으며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형주 남군 임저현 회마파(回馬坡)에서 참했다.이때 손권은 장군을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을 붙잡아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하자 좌우에서 말했다.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이에 관우의 목을 잘랐다. 이는 촉기의 기록인데 배송지는 이 기록에 대해 손권이 있는 강릉과 관우가 목이 잘린 임저는 200~300여리나 거리가 된다며 그르다 평가했다. 그렇다면 관우는 난전중 전사를 했거나, 현장에서 지휘하던 여몽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반장 등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손권 앞에 관우가 붙잡혀 온 것은 오서 오범전에서도 교차검증이 되는 부분이므로, 애초에 손권이 임저 부근까지 직접 주둔해 있었을 수도 있다. 정사 속 배송지의 주석이 모두 타당한 것만은 아니기도 하다.
Q.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대성당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Yerevan)에서 서쪽으로 18㎞ 떨어져 있는 에치미아진(Echmiadzin) 시에 있는 성당이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301-303년에 성 그레고리[Saint Gregory]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아르메니아 성당 최초로 합법적 공인을 받은 성당이다. 고대 건축의 정수이자 기독교 건축양식의 원형으로 꼽히며, 성당 건축발달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2000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 목록[UNESCO World Heritage Sites]에 등재되어 있다.5세기경 기록된 아르메니아 문서에 의하면, 성 그레고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가 금 망치로 땅을 치는 환상을 본 후 그 자리에 성당을 설립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비롯하여 성당 이름이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곳’을 뜻하는 에치미아진으로 명명되었다. 1945년까지 바가르샤파트(Vagarshapat)로 불렸던 도시 이름도 에치미아진으로 변경되었다.최초 설립 당시 중앙부가 돔으로 되어 있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립되었으나, 480년 사산왕조 총독 바한 마미코니안(Vahan Mamikonian)에 의해 바실리카 양식의 건축물이 철거되고, 십자가형 모양의 성당으로 신축되었다. 618년에는 성직자 카톨리코스 코미타스(Katholikos Khomitas)에 의해 재건되면서 목조 돔(dome)이 석조 돔으로 대체되었다. 석조 돔은 4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받쳐져 있으며, 이 기둥들은 아케이드를 통해 외부 벽과 연결되어 있다. 15세기 중반과 16세기 및 18세기에 부분적 보수가 있었고, 근래에 다시 보수했다. 성당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 부분인 애프스 위에 있는 건물은 지붕이 둥글고 화려한 것이 특색이며, 17세기 중반 건립된 3단으로 된 성당 종탑이 있다. 2001년 아르메니아 건국 700주년을 기념하여 대성당에 조형물을 건립하였으며, 여기에는 성 그레고리 신부가 조각되어 있다.성당 안에는 로마 병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사모창과 아라랏 산에 있는 노아방주에서 떼어온 돌판 위에 붙여 놓은 십자가가 있다.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성직자들이 행사 때 착용하는 모자, 의상, 액세서리 등이 진열 보관된 방과 러시아에서 보내온 성화상 등이 있다. 내부 지하실에는 역대 아르메니아 성직자들의 무덤이 있다. 성당 바로 서쪽에는 총대주교 사택 도입을 주도했던 성 티리다테스(St. Tiridates)의 이름에서 유래한 성 티리다테스 문이, 북동쪽에는 영성 아카데미(Spiritual Academy)가, 북쪽에는 아르메니아 특유의 돌 십자가상인 카츠카르(khachkar)가 여러 개 세워져 있다.이곳에는 아르메니아 중세시대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었으나, 최근 예레반에 있는 고문서 박물관인 마테나다란(Matenadaran)으로 이전되었다.
Q. 알래스카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미국땅이 아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빙하기 때 유라시아 대륙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이 베링 육교를 통해 알래스카로 유입된 후로 상당수 부족이 동남쪽으로 계속 이동하면서 미시시피 문화와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문명, 안데스 문명 등을 건설하며 번성했고, 이후 시베리아 쪽에서 온 다른 민족들이 알래스카에 들어와 씨족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면적 대부분이 한랭지인 만큼 별다른 문명사회가 들어서지는 못했으며, 실질적인 알래스카의 역사는 17세기부터 시작한다. 17세기부터 러시아가 손을 뻗기 시작했고, 1759년 알래스카 서부 알류샨 열도 애널래스카 섬에 러시아인이 상륙했다. 이후 1784년 그레고리 이바노비치 셸리호프가 이끄는 러시아 원정대가 현재의 코디액 섬에 정착지를 세우고, 셸리호프 회사(Shelikhov-Golikov Company) 설립과 함께 모피 장사꾼들이 알래스카로 정착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로서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이 모피 장사꾼들이 악질이었는데 알류트인들을 인질로 삼아서 농노처럼 부려먹었고, 알류트인들이 이에 저항하면 보트를 파괴해 생존 수단 자체를 없애버리는 행패를 일삼았으며 알류산 지역과 알래스카 서부지역의 해상동물을 무더기로 남획해갔다. 특히 해달이 그들의 주요 타겟이었다.한편 러시아와는 별개로 스페인 제국도 동쪽 캘리포니아, 오리건으로부터 북상하여 알래스카에 원정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1775년 브루노 헤세타가 이끄는 탐험대를 시작으로 1779년, 1788년, 1790년, 1791년 연거푸 원정대가 파견되어 지금의 야쿠타 만, 프린스 윌리엄 만 등을 발견하고, 발데즈, 코르도바 등지 알래스카에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1788년 에스테반 호세 마르티네즈(Esteban José , 1742 ~ 1798)와 1790년 살바도르 피달고(Salvador Fidalgo, 1756 ~ 1803)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가 코디액 섬과 알렉산드롭스크(현재 앵커리지 남부) 러시아 정착촌을 방문해 별다른 충돌없이 좋게 좋게 끝난 것을 보면 워낙 척박하고 인구도 적다보니 상호간 충돌을 원하지 않고, 각자 주장하는 영역을 딱히 침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후 스페인은 1819년 조약으로 이 지역과 함께 북위 42도선 이북 지역의 모든 권리를 미국에 넘겼다.미국 북서부의 주. 전 세계에서 하루가 가장 늦게 시작되는 곳. 특히 이곳에 애투(Attu) 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9], 모든 대륙과 섬 중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땅이다. 가장 북쪽에 있으면서도 가장 동쪽 및 서쪽에 있는 주이다. 이누이트의 본고장이다. 알래스카라는 이름도 '섬이 아닌 땅'이라는 의미의 알류트어 '알라흐스하크(Alaxsxaq)'에서 유래된 것이다. 탐험가 비투스 베링의 부하인 알렉세이 일리치 치리코프(Алексей Ильич Чириков)가 유럽인 중 최초로 발견하였다. 동쪽은 캐나다와 접하며 북아메리카 대륙 지역인데도 미국의 다른 주들과 떨어져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월경지. 서쪽으로는 베링 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 추코트카와 접하며 남쪽은 태평양, 북쪽은 북극해에 면한다.
Q. 빵은 어떤 유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빵의 유래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BC 3000년경 바빌로니아인들이 밀을 발효시켜 맥주를 만들면서 나온 발효된 밀가루 반죽을 구운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스트를 넣은 본격적인 빵이 만들어진 것은 BC 2000년경 이집트로, 고대 이집트의 회화와 조각품 중에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굽는 그림이 있으며, 당시의 사람들은 이집트인을 '빵을 먹는 사람'이라 불렀다고 한다.고대 그리스에는 돌과 벽돌로 만든 오늘날의 오븐과 같은 화덕이 있어 여기에 빵을 구웠으며 로마시대에 제빵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였는데 이는, 전리품으로 들여온 좋은 재료와 우수한 기술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는 말총으로 체를 만들어 고운 밀가루를 제조하고 설탕을 첨가하여 이스트의 작용을 상승시켜 잘 부푼 질 좋은 빵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빵 전문점(bakery)이 생기고 1세기경에는 제빵업자끼리의 조합이 결성되었다. 이후 로마제국이 붕괴되고 제빵 기술도 한때 쇠퇴하였으나 르네상스를 맞으며 다시 기술이 부활하여 질 좋은 빵을 만들게 되었다. 1683년 네덜란드의 과학자 안톤 판 레벤후크가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최초로 효모균의 존재를 확인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효모균의 분리 배양이 가능해졌다. 이후 19세기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효모를 쉽게 배양하는 이스트가 만들어지면서 빵은 대중적인 음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기계식 반죽기, 간접 가열식 오븐의 등장으로 대량생산이 시작되었다.한국에 빵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조선 말엽으로 추정된다.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숯불을 피워 빵을 구웠는데, 빵의 모양이 우랑처럼 보인다 하여 우랑떡이라 하였다. 개화기에는 빵을 '면포'라 불렀는데, 이는 중국어로 빵을 의미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에는 일본식 빵이 유입되었다. 초기에는 일본인 위주로 빵 제조업이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에게도 기술이 전수되며 조선인이 경영하는 제과업소도 등장하였다. 국내에 ‘빵’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 역시 식민지시기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18세기 일본에서 포르투갈어 ‘팡 드 로(Pão-de-ló)’을 ‘빵(パン)’이라 부르던 것이 그대로 정착한 것이다. 이 시기의 빵은 일제의 통제경제로 인한 원료 부족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소비되지는 못하였으나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며 원조물자로 밀가루, 분유, 설탕 등이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초에는 분식 장려 운동이 전개되며 빵의 보급이 크게 증가하였고, 빵을 대량생산하는 업체와 소규모 제과점들이 성업하며 유명제과점들이 프렌차이즈 형태로 영업을 확대하였다. 1980~90년대에는 제과제빵 업체의 규모가 점차 대형화 되어 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며 기능성 빵과 과자가 등장하고 각종 전문점 시장이 확대되었다.오늘날 한국인의 빵 소비량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 발행한 《2018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빵류 시장》에 따르면, 한국인 1인당 1일 빵 섭취량은 2012년 18.2g에서 2016년 20.9g으로 5년간 14.8% 증가하였다. 85g 기준으로 보면 2016년 연간 빵 섭취량은 1인당 90개이다.
Q. 황제라는 말의 기원인 삼황오제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황오제(중국어: 三皇五帝, 병음: sānhuáng wǔdì)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들로 세 명의 황(皇)과 다섯 명의 제(帝)를 말한다. 이들 여덟 명의 제왕은 중국 문명의 시조로 추앙되며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 추앙되었다. 현대의 역사학계에서는 삼황오제 신화가 후대에 창조되고 부풀려진 신화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 중국은 중화민족주의에 입각하여 국가 차원의 개입을 통해 삼황오제를 실존 인물로 격상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학계의 우려를 낳고 있다.역사삼황오제 신화의 기본 틀이 되는 상고대 시조 설화의 원형은 상나라 무렵부터 이어져 왔다. 그리고 춘추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가 각종 사상을 주창하고 제후들에게 유세하면서 삼황오제 신화가 창조되어 틀을 갖추어 나갔다. 오제 신화의 경우 음양오행설이 유행한 이후에 5명의 제왕이 신화로서 정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후대에 재창조된 신화이기 때문에 삼황과 오제의 구성원은 제자백가의 주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춘추 전국 시대에서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삼황오제 신화는 계속 재창조되었다.삼황오제는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역사적 사실로 오랜 기간 추앙되었다. 특히 황제와 요, 순은 중국의 이상적인 성천자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 캉유웨이, 구제강 등이 주도한 의고학파(疑古學派)의 연구를 통해 삼황오제 기록의 역사성이 부정되고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임이 판명되었다.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강화되면서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중국 역사의 기원을 상향 조정하고 신화 속 제왕들의 연대를 비정하는 등 삼황오제를 비롯한 신화 속의 인물들을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각종 공정을 진행하고 있어 학계의 우려를 사고 있다.삼황(三皇)중국 역사상 삼황오제에 관한 설은 전국 시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삼황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7종의 설이 있다.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 《사기(史記)》 〈보삼황본기(補三皇本紀)〉에 인용된 《하도(河圖)》, 《삼오력(三五曆)》천황, 지황, 태황(泰皇) :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 : 《풍속통의(風俗通義)》 〈황패편(皇覇篇)〉복희, 신농, 공공(共工) : 《통감외기(通鑒外紀)》복희, 신농, 축융(祝融) : 《백호통(白虎通)》수인(燧人), 복희, 신농 : 《풍속통의》 〈황패편〉에 인용된 《예위(禮緯)》 〈함문가(含文嘉)〉복희, 신농, 황제(黃帝) : 《십팔사략》,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십팔사략에 나온 삼황아래는 십팔사략에 나온 삼황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에서의 삼황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말한다.삼황은 맨 처음 세 명의 왕도 아니고, 연속적인 세 명의 왕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 인류 문명에 필요한 획기적인 발명을 통해 후세에 큰 모범이 되었기에 “삼황”(三皇)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삼황의 첫 째인 복희는 태호(太昊 : 큰 하늘)라 불렸으며,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복희의 뒤를 이어 몇 명의 왕이 자리를 잇다가, 두 번째 삼황인 신농의 시대가 왔다. 염제(炎帝 : 불꽃 임금)라고도 불린 신농은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 그는 태양신이자 농업신으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또한,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쳤다고 한다.염제 신농의 자리를 이은 것이 바로 황제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과 옷 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레를 발명했다. 글자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해 천문과 역산을 시작하고, 의료술을 시작한 것도 황제였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자 황제는 태산(泰山)에 행차하여 천지 사방의 신을 모두 불러 모았다. 황제는 큰 코끼리가 끄는 보물로 된 수레를 탔으며, 황제의 위세를 본 신들은 그의 위력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천지 사방의 신 중, 황제에 따르지 않는 무리는 치우(蚩尤)를 따라 반란을 꾀했다. 치우는 눈이 넷, 손이 여섯이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쇠와 돌을 즐겨 먹는 신으로 자신의 72명의 형제와 함께 싸움에 매우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황제는 치우의 모반을 알자마자 군사를 모아 판천과 탁록에서 치우를 격파하였다. 치우는 부하인 풍백, 우사와 함께 저항했으나 결국 황제에게 항복했다.치우의 난을 평정한 황제는 이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백 살 되던 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가 하늘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많은 사람이 황제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기원했지만,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 이후 황제의 다섯 자손(“오제”)이 세상을 다스렸다.오제(五帝)오제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설이 없으며 주로 다섯가지로 요약된다.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 《황왕대기(皇王大紀)》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 《세본(世本)》, 《대대례(大戴禮)》, 《사기》 〈오제본기〉태고(太皋: 복희), 염제(炎帝: 신농),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顓頊) : 《예기(禮記)》 〈월령(月令)〉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嚳), 제지(帝摯), 제요(帝堯) : 《도장(道藏)》 〈동신부(同紳部)·보록류(譜錄類)·곤원성기(混元聖記)〉에 인용된 양무제(梁武帝)의 말소호(少昊), 전욱(顓頊),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 《십팔사략》십팔사략에 나온 오제십팔사략에서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하며,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의 다섯 명이다. 뒤의 두 명을 따로 떼어 '성군'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순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소호 금천(少昊 金天)은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승천한 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봉황이 날아들어 소호의 정치를 도왔다.소호의 뒤를 이은 것은 전욱 고양(顓頊 高陽)으로, 전욱은 소호의 형의 아들이었다. 아직 반고의 천지 창조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다. 전욱은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 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다.전욱의 뒤를 이은 것은 소호의 아들인 제곡 고신(帝嚳 高辛)이었다. 그는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삼황오제의 동이설삼황오제는 중국 신화 속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이들을 동이(東夷)나 한민족으로 간주하는 주장이 있다. 삼황오제가 동이였다는 중국의 사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동이라는 존재를 모두 한민족으로 보는 역사관이 존재한다. 또한 20세기 이후에 쓰여진 《환단고기》와 같은 일부 서적에는 삼황오제 가운데 일부 혹은 전부를 동이나 한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그러나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와 한(漢)나라 이후의 동이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한민족이 속해 있는 동이는 한나라 이후의 동이이기 때문에 진나라 이전의 동이에 해당하는 삼황오제의 동이 여부와 한민족은 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환단고기》와 같은 서적은 위서로 판별되어 역사적 가치가 없어 삼황오제 동이설의 근거가 될 수 없다.한편 《삼국사기》를 비롯한 일부 기록에서 신라 및 가야의 왕족이 소호 금천씨를 선조로 기록한 것이 나타나며, 고구려 왕족 역시 제곡 고신씨 또는 전욱 고양씨를 조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술은 왕족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일부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시조로 삼는 것으로 해석되므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