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김상옥 의사님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3년 24세 때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풍기광복단이 결성되자 채기중, 한훈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6년 5월 한훈, 유장열 등과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 기습 작전에 참여하여 헌병 2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였다.1917년 28세 때 영덕철물점에서 말총 모자를 제조 · 판매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양말과 장갑 등도 제조 · 판매하였다. 이 시기 직공이 50여 명이나 될 정도로 번창하였는데, 공인조합을 만들어 직공들을 보호하였고 동업자들의 결속을 위한 동업조합도 조직하였다. 또한, 사회 계몽과 인재 양성 사업을 위한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였다.1919년 3월 1일 오후 철시(撤市)주1하고 직원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상인들의 만세 시위 참여도 독려하였다. 그날 오후 동대문 근처에서 경찰에게 쫓기는 여학생을 구하고 일본도를 빼앗았다.1919년 4월 1일 중앙학교 학생인 박노영, 윤익중, 정설교, 불교학원 학생인 신화수 등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 모여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였다. 4월 17일 제1호를 시작으로 5월 11일까지 주 6회, 그 후부터는 주 1회 발행하였으며 6개월 동안 지속하였다. 그해 8월에 『혁신공보』 발행과 관련해 체포되어 기소되었으나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해 10월에 발각되고 자금난까지 겹치는 바람에 『혁신공보』를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1920년 1월 하순 혁신단은 『혁신공보』 발간 대신에 조선총독부의 고관과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의열 투쟁의 전개를 결의하였다. 이 무렵 김좌진의 길림군정서 요원으로 국내에 파견한 김동순에게 군자금을 지원하였다.3월에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의 하에 무기를 가지고 입국한 광복단 충청지구 결사대장 한훈을 만나 무기와 폭탄을 확보하고, 함께 암살단을 발족하였다. 이후 세 달간 암살단원들은 북한산 등지에서 특공 훈련에 들어갔다. 암살단원들은 8월 24일 미국 의원단 42명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들을 처단하고 총독부를 폭파하며 일대 시가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윤익중과 김상옥은 각자의 집을 저당(抵當)하여 각각 1천 원과 2천 원의 운동자금을 만들었고, 박영효 등 사회 저명 신사들과 박승직 같은 동대문 지역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 무기와 트럭 3대를 확보하였다.암살단의 계획은 먼저 미국 의원단 환영 인파 속에서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선도하고 ‘암살단 취지서’와 ‘철시경고문’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또한, 트럭 1대에는 폭탄과 폭약을 실어 조선총독 이하 고관들을 처단하고, 다른 2대에는 사격대를 태워 출동 병력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하지만 8월 24일 당일 오전 경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치자 2층 창문을 통해 피신하였다. 경찰은 2층 방을 수색하여 ‘암살단 취지서’, ‘암살단 명부’ 등의 문건을 발견하였다. 때마침 이곳에 총과 탄환을 전달하러 온 한훈이 포박당하였다. 결국 몇 개월간 준비해 왔던 모의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3개월간 서울 시내 각처를 돌며 은신하였는데, 그동안 단원들이 차례로 붙잡혔지만 다행히 국외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 선양으로 피신하였다. 궐석재판(闕席裁判)주2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1920년 11월 의열단원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최경학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을 지원하였다. 이듬해 1921년 1월 김원봉의 의열단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같은 해 7월에 국내에 들어와 서울, 충청, 전라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금하였고, 자신의 활동을 돕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병중에 있던 장규동을 대동하여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4월 상하이에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1922년 12월 다시 경성에 돌아와 암살단 동지를 재규합하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 처단, 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종로 2정목의 경찰서 서쪽 창문을 향해 던진 폭탄이 폭발하면서 폭음이 종로거리를 뒤흔들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근처를 지나던 매일신보(每日申報)주3 사원 5명과 기생 1명, 어린이 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스스로 폭탄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폭파하고는 삼판통 고봉근 집에 몸을 숨겼다. 종로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별동수사대까지 꾸려진 가운데 서울 전역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으며, 거리의 행인들은 곳곳에서 몸수색을 당하였다. 결국 경찰 정보망에 은신처가 탐지되었다.1923년 1월 17일 새벽 4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田村〕를 중심으로 경찰 21명이 체포에 동원되었다. 17명은 집 주변을 포위 · 매복하고, 다무라를 비롯한 4명은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 체포조 4명과 대치하며 총격을 가해 다무라를 처단하고, 재빨리 포위망을 벗어나 남산으로 탈출하였다. 군인과 경찰 500여 명이 남산을 포위하고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남산을 가로질러 왕십리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였다. 수유리 이모 댁으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경성 시내 효제동 73번지 이태성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이 집은 어릴 적 살던 집의 옆집으로 잘 알 뿐만 아니라 장녀 이혜수와 자매들이 협력을 아끼지 않던 곳이었다. 이 집에 숨어 은밀하게 동지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던 중 1월 21일 동지 전우진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은신처가 발각되었다.경찰은 1월 22일 새벽 군경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이태성 집을 4중으로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집들의 담을 넘나들면서 세 시간 동안을 혼자서 지붕 위와 담벼락 등에서 공격해 오는 경찰에 대항해 총격전을 벌여 16명을 사상케 하였다. 탄환이 떨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Q.  조선 세조때 사육신 사건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양 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이었는데,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2년 뒤인 1455년에는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세조)이 되었다.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을 가리킨다. 이들은 수양 대군 세력을 제거한 뒤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세종과 문종의 신임을 받았던 신하들은 수양 대군의 행동이 의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특히 문종으로부터 어린 세자를 잘 지켜 달라는 유언을 들은 신하들은 크게 분노했다. 당시 집현전 학사로 일하던 성삼문과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과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으로 일하던 유응부는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받들 것을 결의하고 기회를 노렸다.마침내 1456년에 명의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 세조와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을 제거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자, 거사에 참여하기로 했지만 불안감을 느낀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었다.세조는 관련된 자들을 직접 고문하며 죄를 따져 물었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가 지져지고 팔이 잘려나가는 잔인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했다. 박팽년은 그의 재주를 아낀 세조가 죄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되레 세조를 ‘나리’라고 낮추어 부르며 맞섰다.결국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죄인의 다리를 두 대의 수레에 한쪽씩 묶어서 몸을 두 갈래로 찢어 죽이던 형벌인 거열형을 당했다. 하위지는 칼로 목이 베이는 형을 당했고, 유성원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이후 사육신 집안의 모든 남자는 죽임을 당했고, 여자는 노비가 되었으며, 집현전도 폐지되었다.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이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탄로 나자 세조는 이들을 잡아 혹독하게 고문했다. 하지만 사육신은 잔인하게 처형되는 순간까지 당당하고 의연했다. 이들은 비록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지만 나중에는 최고의 충신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사육신은 한동안 역적 취급을 당했지만, 제19대 임금인 숙종 때에는 충절과 의기를 높이 평가해 관직을 돌려주었다. 1691년부터는 노량진의 동산 묘소 아래에 민절 서원을 세워 제사도 지내게 했다. 1955년에는 서울시가 사육신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고, 1972년에는 묘역을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8호로 지정했다.한편, 사육신처럼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벼슬을 버리며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이맹전, 조여,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또는 권절) 등은 ‘생육신’이라고 부른다. 이 중 남효온이 쓴 《추강집》에 단종 복위 운동의 주도자로 사육신의 이름이 처음 나온다.
Q.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는 언제 어디에 세워졌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라 나라에서 오래 된 사립학교인 배재학당이 세워진 해는 1885년이고, 이화학당은 1886년, 경신학교 역시 1886년이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오래 전에 세워진 학교가 있다 배재학당보다 2년 먼저 세워진 원산학사가 바로 그곳이다. 말하자면 이곳이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사립학교이다.학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학교가 문을 연 곳은 함경남도 원산이었다. 개교한 시기로 볼 때 과연 근대적인 의미의 학교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지만 그렇지가 않다. 엄연히 교사와 학생이 있었고, 유교의 경전이 아닌 신학문을 가르쳐야겠다는 이념이 분명했으며, 나름의 학칙도 만들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뒷받침을 할 수 있는 기구도 만들어놓았다.더구나 이 학교는 초기 사립학교가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데 반해, 전적으로 지방민들의 자력에 의해 설립된 것이어서 그 의의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원산학사가 문을 열게 된 것은 원산이 외국에 문호를 연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특히 일본인들이 와서 살게 되면서부터 원산주민들은 상공업 분야에서 그들에게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구의 문물을 먼저 받아들였던 일인들은 원산 사람들의 눈에는 위협적인 존재로 보여지기까지 했다.이에 서당을 개량하여 한문 교육만이 아닌 신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런 일을 맨 먼저 자발적으로 한 사람들은 덕원읍의 읍민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처음부터 애로점이 많았다. 교원의 확보도 그렇고, 재원도 그랬다.하지만 마침 정현석이 신임 덕원부사로 부임해오면서 읍민들의 계획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정현석은 개화파 인물로, 읍민들이 자치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보고 적극 권장하고 나선 것이다.그는 원산 쪽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윤중과 정헌시에게 도움을 청해 덕원부 원산에 원산학사라는 학교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관민이 힘을 합쳐 세운 학교였다. 그때가 1883년 8월 28일이었다.이 학교는 학칙에 정원이 50명인 문예반, 2백 명인 무예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문예반에 입학하려면 나이가 어리면서 총명한 덕원읍민의 자제여야 하고, 타지역 사람일지라도 입학금을 낼 수 있으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무예반에는 별다른 조건이 없었다. 이로 볼 때 원산학교는 요즘으로 하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정도의 교육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원산학사에서 가르친 것으로는 필수과목에 산수와 과학·기계·농업·양잠·채광·일어·법률·세계역사·지리가 있었고, 전공 과목으로 문예반은 한문, 무예반은 병서와 무예가 있었다. 이는 전통의 학문을 전혀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학문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교수들은 외부에서 초빙해왔다. 그러나 그 인원이 수명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교수 1인이 여러 과목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학생들은 나이나 출신 환경이 달라 자칫 무질서해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징계 조항을 두었는데, 그중에는 술집에 출입할 경우 가해지는 벌칙도 있었다.경비는 118명의 덕원읍민과 원산의 상인 모임, 관리들 그리고 원산 세관에 고용되어 있는 중국·미국·영국인들이 기금을 출연하여 충당했다. 원산학사에는 이 기금을 관리해서 공용 비용을 조달하도록 하는 계가 조직되어 있었다.원산학사는 최초로 설립된 학교인만큼 이후 세워지는 학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895년 정부에서 신학제를 만들 때 이 학교의 선구적 역할은 어떤 형태로든 기틀이 되어주었다.원산은 정세 변화에 민감한 지역이었다. 그런 반응을 서당의 개량으로 나타내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곳 읍민들의 자주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원산학사는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무예반이 없어지고, 문예반만 남았다. 그리고 개교 11년째 되던 갑오개혁 때 문예반은 원산소학교가 되었다. 공립학교로 발전한 것이다.
Q.  현대사회에서 대중화된 컴퓨터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PC의 첫 번째 유사성은 일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발명 했는가, 누가 컴퓨터를 발명 했는가? 19 세기 영국의 수학자 Charles Babbage 는 그러한 분석 기계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고 개발 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심지어 프로토 타입을 만들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의 전체 구현을위한 재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1946 년, 미국 회사 인 ENIAC는 Mauchly와 Eckert의 프로젝트에 따라 트랜지스터의 첫 번째 컴퓨터 를 만들었습니다. 개발 기간은 약 3 년 동안 50 만 달러를 보냈다. 이 기계는 다시 프로그래밍하여 모든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컴퓨터는 매우 인상적인 장치로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약 28 톤의 무게와 항공기 엔진의 도움으로 냉각되었습니다! 1971 년, 유연한 자기 디스크와 첫 번째 마이크로 프로세서에 대한 드라이브를 발명했습니다.그러나 그러한 컴퓨터는 거대하고 값 비싼 장치 였지만 대기업과 주 단위 조직 만이 가질 수있었습니다.1965 년 최초의 미니 장치는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는 PDP-8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더 이상 냉장고가 아니 었습니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모델을 따라 갔지만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1976 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있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단계는 두 명의 젊은 미국인 워즈니악과 잡스가되었습니다. 그들은 프로그래밍 할 수있는 비디오 게임용으로 설계된 장치를 개발했습니다. 그것은 "애플"이라고 불렸다. 이후 스티브 잡스 (Steve Jobs) 는 비슷한 이름의 회사를 만들었고 개인용 컴퓨터 생산을 담당했습니다.1986 년에 IBM은 16 비트 Intel 프로세서와 Microsoft가 개발 한 소프트웨어를 갖춘 IBM PC 를 만들었습니다. 이미 1990 년대 초반. 이러한 장치는 대량 사용의 대상으로 변모했습니다.우리가 오늘 알고 있던 장치에 컴퓨터의 경로는 상당히 길고 어려웠습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훨씬 간단합니다. PC는 거의 모든 가정에서 사용 가능하며 일부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컴퓨터를 발명하고 개선에 노력한 사람들에게 감사해야합니다. 결국,이 장치는 우리 각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 요소가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의사 소통과 좋은 취미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Q.  신라시대에 만들었다고 알려진 삼대목이 등장하는 문헌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대목(三代目)은 신라 후기 진성여왕 2년(888년), 각간 위홍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편찬했다는 한국 최고(最古)의 향가집이다. 현재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 진성여왕 본기에 삼대목이란 가집이 편찬되었다는 기록만 전해진다."신라 시대의 향가를 3등분하여 상대, 중대, 하대로 분류해 삼대목이라 한다."는 설이 있으나, 편찬 당시에는 신라가 존속했으므로 그러한 구분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 김부식 대에 와서야 '삼대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고 처음 편찬했을 때부터 삼대목이라 하였기(운云) 때문에 그러한 구분은 너무 미래 시점에서 생각했다는 지적이 있다. 자기 나라를 곧 망할 나라로 보아 '하대'라는 명칭을 썼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상대, 중대, 하대가 아닌 성골 시대, 무열왕계 진골 시대, 내물왕계 진골 시대 등으로 구분했을 가능성도 있다. 삼대목의 뜻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삼대목에 어떤 향가가 실려 있었는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짓도록 명한 승려 대구화상은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서도 등장하는데, 대구화상은 요원랑 등 여러 화랑들의 부탁을 받아 경문왕을 칭송하는 향가를 지은 적이 있다. 이 노래 제목은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었는데 이 노래들의 내용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중 문군곡의 문군(問群)은 '무리에게 묻는다.'는 뜻이므로, 이 음악은 국왕과 백성 간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음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대구화상이 삼대목을 편찬한 만큼 저 세 노래는 분명히 수록되었을 것이다. 또 경문왕은 화랑 출신이고, 향가 중에는 모죽지랑가나 찬기파랑가처럼 화랑을 칭송하는 노래가 있다.이를 통해 삼대목의 편찬 목적이 경문왕부터 진성여왕까지 이어지는 경문왕가 신성화 작업, 왕권 강화의 일환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즉 훗날 조선에서 용비어천가를 지은 것과 같은 목적. 이렇게 보면 단순히 문화적 동기로 향가를 수집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하대 왕권을 다잡아보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던 셈이다.
12345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