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미국에 애플은 어떻게 세계굴지에 기업이 될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그리고 로널드 웨인이 Apple Computer Company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후 차고에서 Apple I을 제작한 것이 시초로, 이후 Apple II가 대히트하여 일약 대성장하기에 이른다. 이후 컴퓨터 시장의 1인자로서 군림하고 있었지만 Apple Lisa로 위기를 맞았다가 심기일전하여 Macintosh를 내놓고, 특히 디자인 소프트웨어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다.그런데 Apple은 Microsoft와 Mac OS의 디자인을 대여하는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때 계약서의 내용을 애매하게 놔두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만다. 그 후 Windows는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아차 싶었던 Apple은 "라이선스 계약은 Windows 1.0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걸지만 무참히 기각되고 만다. 결국 Apple은 Microsoft와의 경쟁에서 밀려 2인자 자리에 머물게 된다. 게다가 갖가지 잡스의 삽질들과 마케팅의 실패로 인해 이사회가 잡스를 해고하기까지 이른다.여전히 디자인 업계에서는 많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나친 제품 종류 확장, 차세대 운영체제의 개발 실패 등으로 부도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이때 Apple은 잡스가 세운 NeXT사에서 만든 운영체제 NeXTSTEP을 차세대 운영체제로 선택하면서 NeXT사를 인수하게 되고, 잡스를 다시 경영자로 내세운다. 그 후 잡스는 대규모로 인원을 감축함과 동시에, 제품 종류 간소화로 변화를 주도하였고 Microsoft와의 특허 소송들을 취하하는 것으로 빌 게이츠와 합의하고 Microsoft으로부터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받아 부도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Apple은 1998년 iMac, 2001년 iPod, 2007년 iPhone, 2010년 iPad를 연달아 발표하면서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이 된다.2010년대PC시장에선 점유율이 낮아 보이지만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같이 만들어 판다는 특징, 제품의 소규모 라인업이라는 제약을 고려한다면 명실상부한 Windows 컴퓨터의 경쟁사이다. 물론 위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적 수치로 보았을 때 하드웨어적으로나 소프트웨어적으로나 절대 보급량 및 시장 점유율에는 한참 밀린다. 하지만 디지털 콘텐츠나 디지털 기기 부문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iPod은 아이리버를 누르고 대히트를 쳤고, 그리고 iPhone은 뒤이어 출시될 수많은 정전식 Multi-Touch 스마트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2011년 8월 25일(한국기준)에는 스티브 잡스가 CEO에서 물러나고 팀 쿡이 CEO의 자리에 올랐다. CEO 자리를 물려준 잡스는 7년간의 긴 췌장암 투병 끝에 2011년 10월 6일(한국기준)에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 소식을 들은 누리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충격을 받았다고. iPad 2를 비롯해 잡스 사후에 나온 iPhone 4s, 그리고 더 나중에 나온 iPhone 5와 iPhone 5s. 그리고 EarPods과 AirPods의 기획안까지 모두 스티브 잡스의 유작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Touch ID 또한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고안한 개념이다.잡스는 Apple 경영에서 물러나기 전 자신의 후임을 정해두었다. 잡스가 몇 차례 병가를 냈을 때 임시로 회사를 이끌었던 팀 쿡이 관리형 CEO 자리에 낙점되었고, 조너선 아이브에게 단순히 디자이너에 그치지 않고 창의성 영역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실질적인 잡스의 계승자 역할을 주었다. 관리자 스타일의 팀 쿡에게는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맡기고, 아이브에게는 회사 전반의 방향키를 쥐어 준 것이다.잡스 사후의 Apple은 혁신성 논란에 시달리게 되고, 업데이트되고 새로 나오는 모든 제품, 서비스들이 잡스 이전과 이후를 비교받게 되었다. 진부하거나 품질이 떨어진다고 느껴질 때엔 '드디어 혁신은 끝났다'라는 야유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 특히 CEO 그 자신이 창의력이 폭발하는 아티스트 타입이었던 잡스와는 달리, 팀 쿡은 MBA 출신의 관리자 타입이었고 재무나 물류에는 매우 유능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지만 Apple의 근원적 경쟁력인 신제품 개발에서는 기대를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 방면에서 스티브 잡스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의견도 상당한 상황이었다.2012년에 양호한 실적, 심심한 신제품이라는 딱 팀 쿡 스타일의 성적표가 나왔고, 혁신가의 뒤를 잇는 관리형 CEO라는 측면에서 존 스컬리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기도 하는 등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는 와중에 안테나 게이트의 뒤를 이을 만한 초대형 사고인 Apple 지도 사건이 터졌고, 이를 계기로 당시 iOS 부문 부사장이었던 스콧 포스톨이 사임하는 중대한 인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이 당시의 Apple의 인적 구성은 매우 혼란했다고 전해진다. 팀 쿡은 CEO의 자리에서 안정적인 경영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스티브 잡스의 제품 기획 능력은 전술한 바와 같이 팀 쿡에게는 부족한 부분이었으며 이 부분을 기존의 이사진들이 채워주어야 했다. 디자인 부문에서는 그 유명한 조너선 아이브, 소프트웨어 부문에서는 NeXT 시절부터 잡스와 함께 했던 성골 출신이자 성격, 취향, 업무 스타일 등에서 잡스의 재래라고도 불리웠던 스콧 포스톨(Scott Forstall) 등이 그 역할을 해야 했지만, 아이브와 포스톨은 오히려 모든 방향에서 사사건건 충돌했고 팀 쿡의 혈압을 올리다 결국 대인관계 결함을 이유로 포스톨이 Apple에서 쫒겨난 것이다. 구체적으로, 포스톨은 아이브와 iOS 디자인을 놓고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톨은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 디자인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스큐어모피즘이란 현실의 실물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말한다. 예를 들어 iBooks Store 앱애서 전자책은 가상의 나무 책꽂이에 꽂혀 있으며 Game Center 앱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테이블 모양이다. 잡스가 떠난 Apple에서 포스톨은 스큐어모피즘의 주요 지지자였는데, 이 디자인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아이브의 눈에는 조잡해 보였던 것이다. (포스톨이 해고된 후 발표된 iOS 7에서 스큐어모피즘은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면에서 리틀 잡스로 평가받더니 해고도 잡스처럼 당했다. 그러니까 위의 지도 사건은 사실상 해고의 구실이었던 셈이다. 사과 서명 하나 안 했다고 10년이 넘게 Apple의 소프트웨어를 진두지휘한 인물이 그렇게 추풍낙엽처럼 썰려 나갈 리는 없다.이렇게 Apple의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가운데 2013년이 되어 드디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신제품이 착착 나오기 시작한다. 먼저 선을 보인 것은 신형 Mac Pro. 원통 모양의 디자인으로 NeXTcube, G4 Cube의 뒤를 이을 만한 충격적인 하드웨어 디자인으로 PowerPC G5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은색 사각 케이스 디자인을 대체하였다. 당시 소개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던 필 쉴러는 "Can't innovate anymore, my ass"라는 꽤나 거친 발언과 함께 포스트 잡스 시대의 시작을 알렸고, 이후로 이어진 iOS 7 발표는 그야말로 충격. 잡스가 소중하게 생각하였다는 리얼한 질감의 소프트웨어 UI 디자인, 소위 스큐어모피즘이라 불리우던 디자인 스타일을 모조리 일소해버리고 조나단 아이브 스타일의 전면적인 플랫 디자인을 도입하였다. OS X과 여러 Apple 소프트웨어들도 앞으로 이러한 디자인 스타일로 모두 이전할 것임을 알린 후, OS X Yosemite에서 iOS 7에서 보여준 것과 유사한 미니멀리즘한 디자인으로 변경하였다. 그 결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보다 통합적인 느낌을 주게 되었다. 이로써 여전히 2년 가까이 잡스의 아우라에 휘감겨 있던 Apple은 이제 진정으로 잡스를 떠나보내게 된 셈. 그럼으로써 Apple은 잡스의 유훈 통치 속에서 서서히 저물어 갈 것이라던 일부의 예상은 이제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 되었고, Apple은 망하던 흥하던 새로 설정한 목표를 향해 다시 전속력으로 숨 가쁘게 달리는 바쁜 조직이 되어 버렸다. 현재까지의 평가는 지금의 Apple이 적어도 잡스 사망 직후에 숨을 고르던, 혹은 망설이고 있던 시절보다는 훨씬 낫다는 모양이다.
Q. 조선시대 호패에는 어떤정보들이 기재되어있었는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분에 따라 다르게 제작된 호패17세기 무신이었던 박진영의 호패.호패는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인 경우에만 관청에서 제작한 것을 지급받았고, 대부분의 경우는 각자가 호패에 기재할 사항인 성명, 출생신분, 직역, 거주지 등을 단자(單子)로 만들어 관청에 제출하여 관청 단자와 대조하여 낙인 받은 뒤에 지급받았다.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과 기재내용이 다른데, 의 규정에 따르면 2품 이상은 아패(牙牌), 3품 이하 잡과 입격자는 각패(角牌), 생원, 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 잡직, 서인, 서리는 소목방패(小木方牌), 공천, 사천의 경우는 대목방패(大木方牌)를 사용했다. 또 개인은 자신의 지위 상승에 따라 다른 재질의 호패를 착용하였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 3실에는 문, 무과에 급제한 고위 관료의 호패가 전시되어 있다. 하나는 17세기에 활약한 무신인 박진영(朴震英, 1569∼1641)의 호패이고, 또 하나는 18세기에 활동한 문신인 김희(金憙, 1729∼1800)의 호패이다. 이 두 호패는 호패의 내용과 모양에서 차이를 보이고 호패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박진영 호패는 앞면에 “박진영(朴震英) 기사생(己巳生) 갑오무과(甲午武科)”라 적혀 있고, 뒷면에 아무런 글씨가 없이 낙인만 찍혀 있다. 이를 통해, 박진영이라는 사람이 기사년(선조 2, 1569)에 태어나 갑오년(선조 27, 1594, 당년 26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호패의 제작 시기는 호패에 제작 년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러나 착용자의 생존 시기와 관직 활동을 고려하면, 광해군, 인조 대에 만들어진 호패일 것으로 추정된다.김희 호패는 앞면에 "김희(金憙) 기유생(己酉生) 계사문과(癸巳文科)"라 적혀 있고, 뒷면에 "갑진(甲辰)"이라 적혀 있고 낙인이 찍혀 있다. 이를 통해, 김희라는 사람이 기유년(영조 5, 1729)에 태어나 계사년(영조 49, 1773, 당년 45세)에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며, 갑진년(甲辰年, 정조 8, 1784)에 이 호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Q. 니체의 '우상의 황혼'에서 제시된 예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상의 황혼』은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니체의 철학적 과제를 염두에 둔 작품이다. 실제로 니체는 『우상의 황혼』서문에서 『모든 가치의 전도』의 제1부가 완성된 날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니체가 구상하고 있던 『힘에의 의지』또는 『모든 가치의 전도』의 첫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우상의 황혼』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입증해주고 있다. '우상의 황혼 / 또는 /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 /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표지는 KGW Ⅷ 3 22에서 나타나듯이 여러 번 구상된 후에 최종적으로 결정된다(서문에서 그 제목을 '어느 심리학자의 휴식'이라고 적고 있는 것은 니체가 구상했던 여러 표지들 중의 하나를 염두에 둔 것이다.아마도 니체가 출판사로 보낸 첫 원고에는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 대신에 '어느 심리학자의 휴식'이라고 적혀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이 휴식인 이유는 이것이 『힘에의 의지』 혹은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한 작업으로부터의, 정합적인 세계해석을 구체화시키려는 오랜 기간에 걸친 니체의 작업으로부터의 휴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휴식은 기존의 기획을 포기하게 하여, 그 구상들을 『우상의 황혼』과 『안티크리스트』라는 제목의 책으로 대신 등장시킨다.『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우상의 황혼』의 표지에 등장하는 '우상'이라는 말이 "이제껏 진리라고 불려 왔던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상의 황혼'은 옛 "진리가 종말로 다가간다."를 의미하게 된다.(EH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우상의 황혼) 그리고 여기서의 우상은 영원한 우상만이 아니라, 현대적 이념들인 새로운 우상도 포함된다. 부제인 '어떻게 망치를 가지고 철학하는지'는 의도적으로 이중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즉 중요한 망치질에 의한 철저한 파괴와 동시에 그 우상들에 대한 세련된 진단적인 절차가 진행된다는 것을. 여기서는 형이상학 비판, 언어철학적 숙고, 예술이론적인 고찰들, 문화이론적 숙고들이 최고로 성숙된 최후의 모습으로 정식화하여 등장한다. 이 중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 것은 형이상학 및 철학 비판이다. 그리고 데카당스(décadence)개념이 바로 이전에 쓰인 글인 『바그너의 경우』에서처럼 근본개념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