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김상옥 의사님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3년 24세 때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풍기광복단이 결성되자 채기중, 한훈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6년 5월 한훈, 유장열 등과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 기습 작전에 참여하여 헌병 2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였다.1917년 28세 때 영덕철물점에서 말총 모자를 제조 · 판매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양말과 장갑 등도 제조 · 판매하였다. 이 시기 직공이 50여 명이나 될 정도로 번창하였는데, 공인조합을 만들어 직공들을 보호하였고 동업자들의 결속을 위한 동업조합도 조직하였다. 또한, 사회 계몽과 인재 양성 사업을 위한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였다.1919년 3월 1일 오후 철시(撤市)주1하고 직원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상인들의 만세 시위 참여도 독려하였다. 그날 오후 동대문 근처에서 경찰에게 쫓기는 여학생을 구하고 일본도를 빼앗았다.1919년 4월 1일 중앙학교 학생인 박노영, 윤익중, 정설교, 불교학원 학생인 신화수 등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 모여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였다. 4월 17일 제1호를 시작으로 5월 11일까지 주 6회, 그 후부터는 주 1회 발행하였으며 6개월 동안 지속하였다. 그해 8월에 『혁신공보』 발행과 관련해 체포되어 기소되었으나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해 10월에 발각되고 자금난까지 겹치는 바람에 『혁신공보』를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1920년 1월 하순 혁신단은 『혁신공보』 발간 대신에 조선총독부의 고관과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의열 투쟁의 전개를 결의하였다. 이 무렵 김좌진의 길림군정서 요원으로 국내에 파견한 김동순에게 군자금을 지원하였다.3월에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의 하에 무기를 가지고 입국한 광복단 충청지구 결사대장 한훈을 만나 무기와 폭탄을 확보하고, 함께 암살단을 발족하였다. 이후 세 달간 암살단원들은 북한산 등지에서 특공 훈련에 들어갔다. 암살단원들은 8월 24일 미국 의원단 42명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들을 처단하고 총독부를 폭파하며 일대 시가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윤익중과 김상옥은 각자의 집을 저당(抵當)하여 각각 1천 원과 2천 원의 운동자금을 만들었고, 박영효 등 사회 저명 신사들과 박승직 같은 동대문 지역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 무기와 트럭 3대를 확보하였다.암살단의 계획은 먼저 미국 의원단 환영 인파 속에서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선도하고 ‘암살단 취지서’와 ‘철시경고문’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또한, 트럭 1대에는 폭탄과 폭약을 실어 조선총독 이하 고관들을 처단하고, 다른 2대에는 사격대를 태워 출동 병력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하지만 8월 24일 당일 오전 경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치자 2층 창문을 통해 피신하였다. 경찰은 2층 방을 수색하여 ‘암살단 취지서’, ‘암살단 명부’ 등의 문건을 발견하였다. 때마침 이곳에 총과 탄환을 전달하러 온 한훈이 포박당하였다. 결국 몇 개월간 준비해 왔던 모의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3개월간 서울 시내 각처를 돌며 은신하였는데, 그동안 단원들이 차례로 붙잡혔지만 다행히 국외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 선양으로 피신하였다. 궐석재판(闕席裁判)주2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1920년 11월 의열단원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최경학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을 지원하였다. 이듬해 1921년 1월 김원봉의 의열단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같은 해 7월에 국내에 들어와 서울, 충청, 전라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금하였고, 자신의 활동을 돕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병중에 있던 장규동을 대동하여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4월 상하이에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1922년 12월 다시 경성에 돌아와 암살단 동지를 재규합하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 처단, 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종로 2정목의 경찰서 서쪽 창문을 향해 던진 폭탄이 폭발하면서 폭음이 종로거리를 뒤흔들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근처를 지나던 매일신보(每日申報)주3 사원 5명과 기생 1명, 어린이 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스스로 폭탄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폭파하고는 삼판통 고봉근 집에 몸을 숨겼다. 종로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별동수사대까지 꾸려진 가운데 서울 전역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으며, 거리의 행인들은 곳곳에서 몸수색을 당하였다. 결국 경찰 정보망에 은신처가 탐지되었다.1923년 1월 17일 새벽 4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田村〕를 중심으로 경찰 21명이 체포에 동원되었다. 17명은 집 주변을 포위 · 매복하고, 다무라를 비롯한 4명은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 체포조 4명과 대치하며 총격을 가해 다무라를 처단하고, 재빨리 포위망을 벗어나 남산으로 탈출하였다. 군인과 경찰 500여 명이 남산을 포위하고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남산을 가로질러 왕십리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였다. 수유리 이모 댁으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경성 시내 효제동 73번지 이태성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이 집은 어릴 적 살던 집의 옆집으로 잘 알 뿐만 아니라 장녀 이혜수와 자매들이 협력을 아끼지 않던 곳이었다. 이 집에 숨어 은밀하게 동지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던 중 1월 21일 동지 전우진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은신처가 발각되었다.경찰은 1월 22일 새벽 군경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이태성 집을 4중으로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집들의 담을 넘나들면서 세 시간 동안을 혼자서 지붕 위와 담벼락 등에서 공격해 오는 경찰에 대항해 총격전을 벌여 16명을 사상케 하였다. 탄환이 떨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Q. 조선 세조때 사육신 사건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양 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이었는데,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2년 뒤인 1455년에는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세조)이 되었다.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을 가리킨다. 이들은 수양 대군 세력을 제거한 뒤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세종과 문종의 신임을 받았던 신하들은 수양 대군의 행동이 의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특히 문종으로부터 어린 세자를 잘 지켜 달라는 유언을 들은 신하들은 크게 분노했다. 당시 집현전 학사로 일하던 성삼문과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과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으로 일하던 유응부는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받들 것을 결의하고 기회를 노렸다.마침내 1456년에 명의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 세조와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을 제거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자, 거사에 참여하기로 했지만 불안감을 느낀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었다.세조는 관련된 자들을 직접 고문하며 죄를 따져 물었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가 지져지고 팔이 잘려나가는 잔인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했다. 박팽년은 그의 재주를 아낀 세조가 죄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되레 세조를 ‘나리’라고 낮추어 부르며 맞섰다.결국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죄인의 다리를 두 대의 수레에 한쪽씩 묶어서 몸을 두 갈래로 찢어 죽이던 형벌인 거열형을 당했다. 하위지는 칼로 목이 베이는 형을 당했고, 유성원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이후 사육신 집안의 모든 남자는 죽임을 당했고, 여자는 노비가 되었으며, 집현전도 폐지되었다.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이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탄로 나자 세조는 이들을 잡아 혹독하게 고문했다. 하지만 사육신은 잔인하게 처형되는 순간까지 당당하고 의연했다. 이들은 비록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지만 나중에는 최고의 충신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사육신은 한동안 역적 취급을 당했지만, 제19대 임금인 숙종 때에는 충절과 의기를 높이 평가해 관직을 돌려주었다. 1691년부터는 노량진의 동산 묘소 아래에 민절 서원을 세워 제사도 지내게 했다. 1955년에는 서울시가 사육신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고, 1972년에는 묘역을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8호로 지정했다.한편, 사육신처럼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벼슬을 버리며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이맹전, 조여,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또는 권절) 등은 ‘생육신’이라고 부른다. 이 중 남효온이 쓴 《추강집》에 단종 복위 운동의 주도자로 사육신의 이름이 처음 나온다.
Q.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는 언제 어디에 세워졌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라 나라에서 오래 된 사립학교인 배재학당이 세워진 해는 1885년이고, 이화학당은 1886년, 경신학교 역시 1886년이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오래 전에 세워진 학교가 있다 배재학당보다 2년 먼저 세워진 원산학사가 바로 그곳이다. 말하자면 이곳이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사립학교이다.학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학교가 문을 연 곳은 함경남도 원산이었다. 개교한 시기로 볼 때 과연 근대적인 의미의 학교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지만 그렇지가 않다. 엄연히 교사와 학생이 있었고, 유교의 경전이 아닌 신학문을 가르쳐야겠다는 이념이 분명했으며, 나름의 학칙도 만들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뒷받침을 할 수 있는 기구도 만들어놓았다.더구나 이 학교는 초기 사립학교가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데 반해, 전적으로 지방민들의 자력에 의해 설립된 것이어서 그 의의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원산학사가 문을 열게 된 것은 원산이 외국에 문호를 연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특히 일본인들이 와서 살게 되면서부터 원산주민들은 상공업 분야에서 그들에게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구의 문물을 먼저 받아들였던 일인들은 원산 사람들의 눈에는 위협적인 존재로 보여지기까지 했다.이에 서당을 개량하여 한문 교육만이 아닌 신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런 일을 맨 먼저 자발적으로 한 사람들은 덕원읍의 읍민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처음부터 애로점이 많았다. 교원의 확보도 그렇고, 재원도 그랬다.하지만 마침 정현석이 신임 덕원부사로 부임해오면서 읍민들의 계획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정현석은 개화파 인물로, 읍민들이 자치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보고 적극 권장하고 나선 것이다.그는 원산 쪽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윤중과 정헌시에게 도움을 청해 덕원부 원산에 원산학사라는 학교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관민이 힘을 합쳐 세운 학교였다. 그때가 1883년 8월 28일이었다.이 학교는 학칙에 정원이 50명인 문예반, 2백 명인 무예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문예반에 입학하려면 나이가 어리면서 총명한 덕원읍민의 자제여야 하고, 타지역 사람일지라도 입학금을 낼 수 있으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무예반에는 별다른 조건이 없었다. 이로 볼 때 원산학교는 요즘으로 하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정도의 교육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원산학사에서 가르친 것으로는 필수과목에 산수와 과학·기계·농업·양잠·채광·일어·법률·세계역사·지리가 있었고, 전공 과목으로 문예반은 한문, 무예반은 병서와 무예가 있었다. 이는 전통의 학문을 전혀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학문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교수들은 외부에서 초빙해왔다. 그러나 그 인원이 수명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교수 1인이 여러 과목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학생들은 나이나 출신 환경이 달라 자칫 무질서해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징계 조항을 두었는데, 그중에는 술집에 출입할 경우 가해지는 벌칙도 있었다.경비는 118명의 덕원읍민과 원산의 상인 모임, 관리들 그리고 원산 세관에 고용되어 있는 중국·미국·영국인들이 기금을 출연하여 충당했다. 원산학사에는 이 기금을 관리해서 공용 비용을 조달하도록 하는 계가 조직되어 있었다.원산학사는 최초로 설립된 학교인만큼 이후 세워지는 학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895년 정부에서 신학제를 만들 때 이 학교의 선구적 역할은 어떤 형태로든 기틀이 되어주었다.원산은 정세 변화에 민감한 지역이었다. 그런 반응을 서당의 개량으로 나타내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곳 읍민들의 자주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원산학사는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무예반이 없어지고, 문예반만 남았다. 그리고 개교 11년째 되던 갑오개혁 때 문예반은 원산소학교가 되었다. 공립학교로 발전한 것이다.
Q. 현대사회에서 대중화된 컴퓨터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PC의 첫 번째 유사성은 일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발명 했는가, 누가 컴퓨터를 발명 했는가? 19 세기 영국의 수학자 Charles Babbage 는 그러한 분석 기계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고 개발 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심지어 프로토 타입을 만들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의 전체 구현을위한 재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1946 년, 미국 회사 인 ENIAC는 Mauchly와 Eckert의 프로젝트에 따라 트랜지스터의 첫 번째 컴퓨터 를 만들었습니다. 개발 기간은 약 3 년 동안 50 만 달러를 보냈다. 이 기계는 다시 프로그래밍하여 모든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컴퓨터는 매우 인상적인 장치로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약 28 톤의 무게와 항공기 엔진의 도움으로 냉각되었습니다! 1971 년, 유연한 자기 디스크와 첫 번째 마이크로 프로세서에 대한 드라이브를 발명했습니다.그러나 그러한 컴퓨터는 거대하고 값 비싼 장치 였지만 대기업과 주 단위 조직 만이 가질 수있었습니다.1965 년 최초의 미니 장치는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는 PDP-8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더 이상 냉장고가 아니 었습니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모델을 따라 갔지만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1976 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있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단계는 두 명의 젊은 미국인 워즈니악과 잡스가되었습니다. 그들은 프로그래밍 할 수있는 비디오 게임용으로 설계된 장치를 개발했습니다. 그것은 "애플"이라고 불렸다. 이후 스티브 잡스 (Steve Jobs) 는 비슷한 이름의 회사를 만들었고 개인용 컴퓨터 생산을 담당했습니다.1986 년에 IBM은 16 비트 Intel 프로세서와 Microsoft가 개발 한 소프트웨어를 갖춘 IBM PC 를 만들었습니다. 이미 1990 년대 초반. 이러한 장치는 대량 사용의 대상으로 변모했습니다.우리가 오늘 알고 있던 장치에 컴퓨터의 경로는 상당히 길고 어려웠습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훨씬 간단합니다. PC는 거의 모든 가정에서 사용 가능하며 일부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컴퓨터를 발명하고 개선에 노력한 사람들에게 감사해야합니다. 결국,이 장치는 우리 각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 요소가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의사 소통과 좋은 취미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Q. 신라시대에 만들었다고 알려진 삼대목이 등장하는 문헌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대목(三代目)은 신라 후기 진성여왕 2년(888년), 각간 위홍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편찬했다는 한국 최고(最古)의 향가집이다. 현재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 진성여왕 본기에 삼대목이란 가집이 편찬되었다는 기록만 전해진다."신라 시대의 향가를 3등분하여 상대, 중대, 하대로 분류해 삼대목이라 한다."는 설이 있으나, 편찬 당시에는 신라가 존속했으므로 그러한 구분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 김부식 대에 와서야 '삼대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고 처음 편찬했을 때부터 삼대목이라 하였기(운云) 때문에 그러한 구분은 너무 미래 시점에서 생각했다는 지적이 있다. 자기 나라를 곧 망할 나라로 보아 '하대'라는 명칭을 썼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상대, 중대, 하대가 아닌 성골 시대, 무열왕계 진골 시대, 내물왕계 진골 시대 등으로 구분했을 가능성도 있다. 삼대목의 뜻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삼대목에 어떤 향가가 실려 있었는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짓도록 명한 승려 대구화상은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서도 등장하는데, 대구화상은 요원랑 등 여러 화랑들의 부탁을 받아 경문왕을 칭송하는 향가를 지은 적이 있다. 이 노래 제목은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었는데 이 노래들의 내용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중 문군곡의 문군(問群)은 '무리에게 묻는다.'는 뜻이므로, 이 음악은 국왕과 백성 간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음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대구화상이 삼대목을 편찬한 만큼 저 세 노래는 분명히 수록되었을 것이다. 또 경문왕은 화랑 출신이고, 향가 중에는 모죽지랑가나 찬기파랑가처럼 화랑을 칭송하는 노래가 있다.이를 통해 삼대목의 편찬 목적이 경문왕부터 진성여왕까지 이어지는 경문왕가 신성화 작업, 왕권 강화의 일환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즉 훗날 조선에서 용비어천가를 지은 것과 같은 목적. 이렇게 보면 단순히 문화적 동기로 향가를 수집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하대 왕권을 다잡아보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던 셈이다.
Q. 김두환이 정치인 시절에 국회에 똥물을 뿌렸다는데 왜 그런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6년 9월 22일 국회의원 김두한이 국회의사당(現 서울특별시의회 본관)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오물(분뇨)을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정렴 재무부장관, 민복기 법무부장관[1] 등 주요 국무위원들을 향해 뿌린 사건이다.1966년 9월 15일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가 동년 5월 일본에서 사카린의 원료를 밀수해 들여온 사실이 경향신문의 보도로 알려지면서 정재계를 넘어 사회 전체가 뒤집혔다. 이에 국회에서 본회의가 열려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의 상정 및 통과가 진행됐고 관계인들이 모두 소환되어 추궁을 받았다.이때 야당 민중당 등은 물론이고 여당인 민주공화당까지 힘을 합쳐 정부의 모르쇠와 삼성 비호에 대해 비판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인사들은 삼성 비호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여야는 계속 한목소리로 관련자 전원 구속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면서 국회는 들끓어오르고 있었다.정부와 대기업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거센 와중에 국회 질의 마지막 날인 9월 22일 결국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이 일을 저질렀다. 당시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에 휘말렸다가 겨우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독립당은 완전히 와해되어 무소속인 상태였다. 즉, 울분이 쌓일 만큼 쌓여 있던 상태였다.실제로 김두한은 발언 중에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서대문형무소에서 영하 20도의 날씨에 콩밥을 먹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게다가 김두한이라는 인물의 원래 성격 자체가... 그는 이미 1954년에도 자신을 무시한다고 사세청장을 폭행한 것은 물론 잠깐 자유당에 몸담았던 시절에도 같은 당 의원인 장경근에게 손찌검을 한 전과도 있었던 정치계의 유명한 트러블메이커였다.사실 김두한의 태도는 발언 전부터 매우 험악했다고 전해졌다. 이효상 국회의장을 대신해서 사회를 봤던 이상철 국회부의장이 김두한의 발언 순서를 불리하게 조정하자 김두한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당신 이거 한번 부서지는 거 보려고 그래요?" 라면서 협박했고 "그 따위로 당신 하면 좋지 않아! 노인이니까 그냥 두지, 장 부의장같이 유도깨나 쓰면 날릴 테야!" 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장경순은 실제로 유도를 잘 했고 말년에는 유도협회에서 명예 10단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장경순의 나이는 국회부의장치고는 아주 젊은 나이인 44세에 불과했고 김두한보다 나이가 4살 어려서 서로 몸싸움이 났으면 사건이 더 커질 뻔했다. 실제로 사세청장을 폭행한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5] 김두한의 이런 발언들은 매우 심상치 않게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어쨌거나 본회의에서 민주공화당 이만섭, 신민당 김대중의 질의가 끝나자 김두한의 질의가 시작됐는데 일단 김두한은 “교동공립보통학교 3년 동안에 2년을 낙제하고 1년밖에 못 다녀 기초상식이 부족하여 말을 (잘)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김두한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고 당시 국회 본회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김두한은 실제로 정규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깡패 출신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굉장한 달변가로 유명할 정도로 말솜씨가 매우 좋았던 편이었다. 결국 이 때부터 그의 장광설이 시작됐다.
Q. 콩글리시는 일본식 영어에서 영향을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콩글리시가 일본 영향만 받았다기는 어렵습니다.일본식 발음들로 교육이 되던 때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잔존한다는 주장은 어렵습니다.한국식으로 변형된 영어 표현. 일종의 혼성어 내지는 피진 잉글리시로 이해할 수 있다.싱가포르에서 쓰이는 크레올인 싱글리시(Singlish)와는 달리, 콩글리시는 일상생활에서 구어로 쓰이는 경우가 낱말 및 짧은 인사말 등에 한정되어 있다.따라서 콩글리시의 문법적인 특징은 단순히 '오류'에 가깝게 보는 반면, 콩글리시만의 어휘는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한국어에 완전히 융화되었거나 그렇게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유래만 영어일 뿐 영어를 이용해 만들어낸 한국어나 다름없다.정서적 원인은 영어를 구사할 때 한국어를 바로 1:1로 번역하여 말하는 것이 가장 크다. 따라서 문화적 차이로 인해 아예 다르게 형성된 어휘, 문법적 맥락이 모두 무시된다. 가령 ㅋㅋㅋ를 대신해 kkk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웃는 것을 'ㅋ'라고 하니까 'k'가 ㅋ처럼 웃음소리를 나타낸다고 표현한 것이지만, 이를 이해할 수 없는 비한국어권 화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각하면 쿠 클럭스 클랜(KKK)을 의미하는 줄 알고 기겁하게 된다.문법적 예시로, 한국어 '결혼하다'는 '-와 결혼하다'로, 조사 '-와'가 필요하다. 하지만 영어 동사 'marry'는 그 자체로 '-와 결혼하다'를 그대로 지칭하기 때문에 '-와'에 해당하는 성분을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 'marry with'라고 쓰면 콩글리시가 된다. "6시에 보자" 같은 표현도 한국어 '-에'를 in으로, '보다'를 watch에 대응하면 "watch you in 6"라고 하면 될 것 같지만 문법에 맞으려면 "see you at 6"라고 해야 한다.음성학적 원인은 한국어의 발음 체계가 영어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f]와 [z]는 한국어에 없는 발음이기에 각각 ㅍ[p]과 ㅈ[d͡ʑ][4]로 표기하게 된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서 [f]와 [p]를 구분할 줄 알면 다행이지만 표기된 그대로 발음하면 혼동하기 쉽다.그 밖에 한국어에서 자주 쓰이는 억양이 섞인 한국식 영어가 되면 영미 현지인들로서는 알아듣기 힘들다. 이는 한국인이 꽈찌쭈의 어설픈 한국어를 이해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음 문제는 재플리시와 유사하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국어 장단음, 강세 개념이 로마자를 쓰는 영어와는 상당히 달라서, 영어 청자가 듣기에 콩글리시는 모든 음절을 과하게 힘줘서 발음하는 걸로 들릴 수 있다.문법적인 콩글리시의 특성들 중 상당수는 일본식으로 정착한 19세기~20세기의 옛 영국식 영어 문법을 뿌리로 한다.재플리시에서 그대로 넘어오지 않아도, 한국어와 일본어의 유사성 때문에 유사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전치사 of의 전후를 오역하는 등)단어가 콩글리시인 경우는 재플리시 유래일 수도 있고, 상표의 보통명사화 등으로 고유명사가 보통명사가 된 경우도 있다.
Q. 일본의 헤이안시대 소설가 무라사키 시키부는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라사키 시키부(일본어: 紫式部, 973년경 ~ 1014년 및 1025년경)는 헤이안 시대 일본 황실의 궁녀로,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무라사키는 최초의 소설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일본어 소설 《겐지모노가타리》의 작가로도 잘 알려져있다. 겐지 이야기는 1000년에서 1012년 사이에 집필되었다.[1] 무라시키 시키부는 필명이고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1007년 황실 일기에서 언급된 궁녀 후지와라노 교코(藤原香子)로 추정될 뿐이다.헤이안 여성은 전통적으로 행정에서 쓰는 문자인 한문 학습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학자였던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무라사키는 한문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유창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무라사키는 20대 중후반에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남편은 결혼 2년 만에 죽었다. 무라사키가 《겐지모노가타리》의 집필을 시작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결혼 생활 도중이나 과부가 된 직후로 추정된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1005년경 무라사키를 황실로 초빙하여 쇼시 황후의 시녀로 삼았다. 이는 무라사키가 가진 작가로서의 명성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라사키는 시녀로 일하면서도 계속 글을 썼고 작품에 궁정 생활을 담았다. 5~6년 후, 그녀는 은퇴하여 궁궐을 나오고, 쇼시와 함께 비와 호수 지역으로 간다. 무라사키가 사망한 연도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대부분은 1014년까지 살았다는 설에 동의하지만 1031년까지 생존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무라사키는 시집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와 소설 《겐지모노가타리》를 썼다. 겐지 이야기는 완성된 지 10년 만에 지방 곳곳으로 퍼졌다. 《겐지모노가타리》는 한 세기 만에 일본 문학의 고전으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학술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무라사키의 작품은 20세기 초에 번역되었다. 6권 분량의 영어 번역은 1933년에 완역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헤이안 궁정 사회의 정점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이러한 작품의 중요함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13세기부터 일본 화가들이 무라사키 작품의 삽화를 그렸으며 유명한 우키요에의 대가들도 그녀의 작품을 목판에 담았다.
Q. 북한이 공산주의인 이유는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북한은 명목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다당제 공화국이지만, 북한의 이념은 널리 알려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을 왜곡하여 통치 가문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조하고 독재 체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북한의 정치체제적 특성상 옛 공산권국가들과 현재의 중국처럼 당이 국가를 소유하는 형태로 권력구조가 짜여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당을 특정 가문의 수장이 소유함으로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돌아가게 한다. 북한을 통치하는 가문은 전주 김(金)씨성을 가진 자칭 백두가문이며 초대 가주인 김일성으로부터 2023년 현재의 가주인 김정은까지 3대에 이르러 통치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의 지배체제 세습은 전대 지배자의 유훈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전대 가주의 유훈으로서 권력을 계승할 수 있었다.이러한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배는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라는 사상/이념으로 정당화되고 유지된다. 과거 김일성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의 정치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근간으로 했음을 인정했고, 스탈린주의의 질서를 명백하게 따랐으나, 중소분쟁으로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자유롭기위하여 마오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아닌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사상인 주체사상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기조는 김정일에 의하여 더욱 심화되었으며, 북한의 양대이념 중 하나인 선군정치가 발족한 것도 김정일 시기다.오늘날 북한의 권력계층은 조선의 정치인 주체사상과 선군정치가 이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초월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칭 위대한 사상을 김일성-김정일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명시했다. 현재 북한의 헌법은 김일성-김정일주의가 북한의 지도적 사상임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이 사상들이 독자적이라는 말은 거짓이며, 북한의 체제와 이념은 유교(대가없는 충성), 기독교(개인숭배), 스탈린주의를 짬뽕해서 만든 사이비 공산주의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남북히 하나 되지 못한 것은 해방후에 신탁통치에 의해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통치하게 되면서 갈라섰기 때문이다다. 625 전쟁 이후 휴전이 된 이후로 계속 지속되고 있다.
Q. 고대 페르시아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어떤 황제의 치세냐에 따라 다르긴 하나 대체로 노예 소유가 불법이었다. 페르세폴리스의 웅장한 궁전 유적들도 노예들이 아닌 임금노동자들의 손으로 지어졌고 고대인들의 사고에서 노예가 되는 것이 당연했던 정복지 주민, 빚쟁이 등의 계층들도 제국의 보호를 받았고 노예가 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았다.고대 로마나 대항해시대 신대륙 플렌테이션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 쪽도 만만치는 않았다. 중세 때 노예 수요가 중동으로 집중되었다는데 있다. 중동의 노예무역이 매우 알려진 데에는 노예의 출신 및 처우가 매우 다양했다는 것도 한몫한다. 고대 로마와 마찬가지로 노예의 처우도 극과 극을 달렸는데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말을 탈 줄 아는 노예의 경우 도심 2~3층짜리 건물 한 채 수준의 가격이 매겨져서 서민보다 나은 대접을 받은 받았다. 튀르크계 군인 노예의 경우 운이 좋은 경우 합법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흑인 노예의 경우 운이 나쁘면 뙤약볕 아래 모기가 들끓는 늪지대를 개간하는 극한 작업을 맡았다. 현 이라크에 위치했던 압바스 왕조에서 흑인 노예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을 정도다.역사적으로 흑인 노예무역에 열을 올린 사람들 역시 유럽인이 아니라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이었다. 북아프리카 외에도 중근동 역시 인도양을 중심으로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티오피아, 말리 등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와 부족들은 고대시대 때부터 아랍 상인들과 많은 교류를 해왔다. 이는 근대까지 이어졌으며 아랍에 대한 아프리카의 주요 수출품은 상아나 황금 외에도 약탈로 노획한 노예였다.고대 쿠시 왕국이 정기적으로 노예를 상아와 함께 페르시아에 조공으로 바친 것을 최초로 본다. 아랍인들은 흑인들을 열등하게 여기는 경향이 심각한데 18세기 오만 제국의 경우 흑인 노예 20~50명의 시세 가격이 전투용 말 한 마리 가격과 맞먹었다.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를 비롯한 중동 문학에서 흑인은 추악하고 우매하게 묘사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노예들 중 흑인 남성들에 대해서 성욕이 과해 일을 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하여 생식권을 박탈하고 예외없이 거세를 시켜버렸기 때문에 흑인 노예의 자손들은 흑인 여성 노예로부터 태어난 후손들을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고 한다. 아프리카男을 노예로 삼고 거세한 아랍인들한테 카다피가 사과하기도 했다.근세 이란에서 발흥한 사파비 제국의 경우 오스만 제국의 데브시르메 제도를 모방하여 군인 대부분을 캅카스 지역에서 납치한 혹은 투항한 조지아인으로 채웠는데 이는 사파비 제국 초창기 종파 차이 문제로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하여 믿을만한 세력이 이들 노예병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었던 아르메니아인이나 체르케스인, 조지아인을 강제로 이슬람 시아파로 개종시켜 순니파 봉기군들을 진압하도록 활용한 것인데,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요새에서 고립된 노예병들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조지아인 남성이 군인으로 끌려갔다면 조지아인 여성은 술탄의 하렘으로 끌려갔다. 하렘의 후궁을 납치한 기독교인으로 채우는 관습은 사파비 제국의 후신 카자르 왕조로도 이어졌다. 1829년 당시 테헤란의 주 페르시아 러시아 대사관에서 아르메니아인 노예들을 해방하고 구출한 일을 두고 이란인 군중들이 샤한샤를 모욕했다고 여겨 폭동을 일으키고 습격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문인으로도 유명했던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러한 경향은 근대에도 이어지는데 특히 이들 아랍 국가 중 오만 제국은 당시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제국, 다호메이 왕국 과 함께 잔인하고 악랄한 제국주의자 노예 상인으로 유명했다. 오만 제국 치하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과 바가모요, 잔지바르는 세계 최대의 노예 무역항이었다.더욱이 아랍 국가들에서 아랍 흑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은 현재진행형으로 심각하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흑인 국가들은 자기 나라들을 식민지배했던 유럽계 백인 못지않게 아랍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다.특히 차드나 말리, 니제르, 세네갈, 탄자니아, 케냐 등 과거 아랍인들에게 침략, 식민지배를 받았거나 전쟁을 겪었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의 사람들에게 이집트나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같은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그것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아니다. 라고 바로 욕부터 튀어나오거나 나쁘게 여길 정도이다.이집트 남부와 수단에 흑인 아랍인과 모리타니인은 누비아인과 서아프리카 흑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로 모국어로 수용한 경우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이라크, 오만에서는 흑인 노예의 후손도 있으며, 무함마드도 한창 박해를 받았을 때 같이 탄압을 받았던 에티오피아로 신도들을 내보낸 것도 있기도 하다.이슬람권은 세계에서 가장 뒤늦게 노예제를 폐지시킨 지역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여러 국가에서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극단주의자들은 다시 부활시키자고 하고 테러단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나 보코 하람 등은 실제로 노예제를 부활시켰다.그리고 아프리카엔 이슬람이 발흥하기 이전에도 흑인노예 무역루트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평등과 평화를 약속한 종교가 뻔뻔하게 똑같이 악랄한 노예 장사를 했다는 점, 그리고 그게 현대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노예무역과 마찬가지로 정상참작의 여지는 없다.여담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예는 노예치고 후한 대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