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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일본 전국시대의 성(오사카성 등)은 방어하기에 굉장히 효율적인 구조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사카 성의 당당한 주탑은 16세기의 원래 건물을 20세기에 복원한 것이며, 이 또한 21세기에 들어 한 차례 보수된 것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사카 성은 여러 차례의 변모를 겪었으며, 이는 건축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오사카 성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도요토미 오사카 성과 도쿠가와 오사카 성이 그것이다.1583년, 봉건 군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옛 이시야마 호간사가 서 있던 부지에 권력의 상징으로 오사카 성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 성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을 모델로 삼았지만, 보다 더 웅장한 규모에 금으로 덮여 번쩍였다. 이 성은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원정을 나가는 데에 본거지 역할을 했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일으켜 1603년 쇼군 정치를 열었다.도쿠가와가 이끄는 세력은 오사카에서 '오사카 포위 공격'이라 알려진 일련의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했고, 도요토미 가문과 그 성을 멸망시켜 버렸다. 1620년 제2대 도쿠가와 쇼군 히데타다 하에서 오사카 성의 재건축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먼젓번 건물의 화려함을 능가했다. 그러나 새로 쌓은 주 탑은 1665년 벼락을 맞았고, 1931년 복원 작업이 이루어질 때까지 성은 탑이 없는 채였다. 현재의 돌로 된 성벽은 쇼군 시대의 것으로, 쇼군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가장 정교한 건축 기법을 보여 준다.
Q.  진돗개의 유래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 남서쪽 해안에 있는 진도라는 섬에서 유래하였다.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석기시대의 사람들이 기르던 개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개 중에서 나온 동남아시아계의 중간형에 속하는 품종이다. 따라서 기원에 대해서도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에 남송(南宋)의 무역선에 의해 유입되었다는 설과, 1270년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을 때 몽골에서 제주도 목장의 군용 말을 지키기 위해 들여왔다는 설 등 여러 구전이 전해 내려온다. 대륙과 격리된 채 관리되어 비교적 순수한 형질을 그대로 보존하여 오늘날의 진돗개가 되었다. 2008년에 미국켄넬클럽(AKC)에서 공식 품종으로 인정받았다.1962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으며, 이후 문화재관리법과 한국진돗개보호육성법(1967년 1월 16일 공포)에 따라 보호 육성되고 있다. 1995년에는 국제보호육성동물로 공인 지정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에 진행된 '서울 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서 행진 퍼레이드를 진행했으며, 2000년 6월 1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방문 시 ‘우무종 연구소’에서 기증한 평화·통일이라는 진돗개를 북한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Q.  양인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경우는 얼마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인들도 과거로 등용될 수 있었지만 자급자족하기엔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했다. 옛날에는 멀쩡한 청년 한 명이 농사일을 하지 않고 골방에서 책과 씨름하게 되면 기회비용이 매우 컸기에 어지간한 각오와 재력이 없는 이상 과거에 도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노동력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 성인 남성 하나가 농사일을 안하고 앉아서 언제 합격할지도 모르는 공부만 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손해다. 따라서 응시자의 대부분은 중류층의 향리나 귀족이었고, 이들은 대개 진짜 과거라고 볼 수 있는 문과에 응시했다. 양인들은 대부분 그나마 만만한 기술 쪽 잡과로 몰렸다.
Q.  원불교는 어떠한 종교인지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주의 근본원리인 일원상(一圓相, 즉 O의 모양)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종교로,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하여 낙원세계를 실현시키려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다. 교조 중빈은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우주와 인생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가득찬 의문을 한학(漢學)공부로는 풀 수가 없었으므로, 범인(凡人)보다는 높은 차원의 경지에 있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의심의 해답을 얻고자 산상기도와 도사(道士)를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같은 그의 구도정신은 결국 그를 외부로부터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독자적 수도 고행에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어떤 일정한 수행법을 택하지도 못한 채 망아(忘我)의 침잠(沈潛)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다.5년여의 침잠 끝에 1916년 4월 28일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깨어난 그에게는 우주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는데, 그 질서를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불생 불멸(不生不滅)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천명하였다. 그 후 그는 유(儒) ·불(佛) ·선(仙) 3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서 등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금강경(金剛經)》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일치함을 깨닫고 근본 진리를 밝히는 데는 불법(佛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석가를 선각자로 존숭하는 동시에 불교와의 인연을 스스로 정하였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펴기 위하여서는 종래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 불교 ·새 교단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동시에 그는 새 교단 창립과 새 세상 구제(救濟)의 대책을 법어(法語)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수신(修身)의 요법(要法), 제가(齊家)의 요법, 강자 약자(强者弱者)의 진화상(進化上)의 요법, 지도인(指導人)으로서 준비할 점 등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개교(開敎)의 기치 아래 최초의 법어로써 1916년 새 교단을 열 의사를 표명하자, 마을사람들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40여 명이 모였다.그는 이 가운데서 8명을 선발하고 후에 정산(鼎山) 송규(宋奎:후에 一代宗法師)를 맞아 도합 9명을 새 교단 창립의 첫 제자로 삼았다. 원불교에서는 이 해를 원기(圓紀) 1년으로 삼고 있다. 그는 불교의 현대화·생활화를 주장하면서 신앙의 대상을 불상(佛像)이 아닌 법신불(法身佛)의 일원상(一圓相)으로 삼고, 시주(施主)·동냥 등을 폐지하는 대신에 각자가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며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이른바 ‘생활불교’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저축조합의 조직을 필두로, 1918년에는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2만 6,000평의 논을 조성하고, 그후 엿공장·과수원·농축장·양잠·한약방 등 생산적인 경영을 하여 새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였다.한편 1919년에는 9명의 제자와 함께 대기도(大祈禱)를 시작하여 3개월 후 최종 기도에서 ‘백지혈인(白指血印)의 법인성사(法認聖事)’라는 기적(奇蹟)을 낳고, 여기에서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여 신성(信誠)·단결(團結)·공심(公心)을 더욱 굳건히 하였는데, 이것이 곧 교단 창립의 얼이 되었다. 1924년, 마침내 서중안(徐中安) 등이 발기인이 되어 전라북도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설하고 중빈을 총재로 추대하였다.1938년에는 《불교정전(佛敎正典)》을 간행하여 기본원리인 일원상의 진리를 포명(布明)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탄압이 계속되어 겨우 교단을 유지해나갔다. 1943년 교주가 죽자 송규가 종법사(宗法師)가 되어 교통(敎統)을 계승하고, 광복 후 1947년에는 교명을 원불교로 개칭하는 한편, 교육·자선(慈善)·교화(敎化)의 3대 실천목표를 세워 포교에 힘쓰다가, 1962년 규가 죽자 김대거(金大擧)가 2대 종법사에 취임하였다.원불교는 법신불 일원상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는데, 일원상의 신앙은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목표로, 어느 곳 어느 때나 신앙심을 지키어 천지(天地)·부모·동포·법률의 4은(四恩)에 보답하는 것을 불공으로 삼고, 자력양성(自力養成)·지자본위(智者本位)·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공도자 숭배(公導者崇拜)의 4요(四要)를 실천함으로써 복락의 길을 닦자는 것이다. 일원상의 수행이념은 무시선(無時禪)·무처선(無處禪)을 표준으로 하여, 언제 어디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신수양·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의 3학(學)을 수행하여 신(信)·분(忿)·의(疑)·성(誠)의 ‘진행 4조(進行四條:추진할 4가지)’로써 불신(不信)·탐욕·나(懶)·우(愚)의 ‘사연 4조(捨捐四條:버려야 할 4가지)’를 제거하는 8조의 실행에 의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법신불 일원상을 대상으로 신앙하고 수행하는 정각정행(正覺正行)·지은보은(知恩報恩)·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을 4대 강령으로 삼고 있다.원불교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중앙총부(中央總部)에서 교단을 총괄운영하고 지방에 교구(敎區)와 교당(敎堂)을 두고 있으며, 그 운영기구로서 종법사(宗法師)를 중심으로 수위단회(首位團會)·중앙교의회(中央敎議會)·교정위원회(敎政委員會) 및 교정원(敎政院)과 감찰원 등이 있다. 교당에는 교무(敎務)와 교도가 있는데, 교도는 10인을 1단으로 하는 10인 1단 교화단(敎化團)을 조직하는 것이 특색이다. 각종 연구소 외에 교육기관으로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영산원불교대학교(靈山圓佛敎大學校) 등의 종합대학, 전문대학 1개교, 중·고등학교 6개교, 선원(禪院) 3개처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당별로 설치한 유치원·유아원과 양로원·보육원·수양원 등 자선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문화사업으로 경전의 출판과 《원광(圓光)》 《원불교신문》 등 정기간행물도 간행하고 있다.
Q.  사극에서 신하들이 몽진이라는 말을 하던데 어떤 뜻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몽진은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현종이 전라북도 완주군 지역을 거쳐 나주로 피난간 사건입니다.거란군은 1010년(현종 1) 11월 1일에 장군 소응(蕭凝)을 보내 고려를 공격하겠다는 사실을 알리고, 1010년 11월 16일에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공격하면서 2차 침입을 감행했다. 이 때문에 현종은 1010년 12월 28일에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바탕으로 날자별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011년(현종 2) 1월 1일에 거란군이 개경[현 개성시]에 들어왔으며, 현종은 광주(廣州)[현 경기도 광주시]에 묵었다. 1011년 1월 3일에 현종은 광주를 출발해 비뇌역(鼻腦驛)에 묵었다. 1011년 1월 5일에 양성현(陽城縣)[현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일대]과 사산현(蛇山縣)[현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 일대]을 거쳐, 천안부[현 충청남도 천안시]에 이르렀다. 1011년 1월 7일에 공주[현 충청남도 공주시]를 거쳐, 저녁에 파산역(巴山驛)에서 쉬었다가, 여양현(礪陽縣)[현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일대]에서 머물렀다. 1011년 1월 8일에 삼례역을 거쳐 장곡역(長谷驛)[현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 앵곡]에 묵었다.1011년 1월 11일에 거란군이 개경에서 물러났다. 1011년 1월 12일 인의현(仁義縣)[현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백산리 일대]을 지나 수다역(水多驛)[현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에 묵었다. 1011년 1월 13일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현 전라남도 나주시]에 들어갔다. 1011년 1월 16일 거란병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1011년 1월 21일 현종이 가마를 돌려 복룡역(伏龍驛)[현 광주광역시 복룡역]에 묵었다. 1011년 1월 24일 고부군(古阜郡)[현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 묵었다. 1011년 1월 25일 금구현(金溝縣)[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일대]에 묵었다. 1011년 1월 26일에 현종 일행은 전주[현 전라북도 전주시]에 도착해 7일 동안 머물렀다.1011년 1월 29일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1011년 2월 3일 전주를 출발해 여양현에 묵었다. 1011년 2월 4일 공주에 도착해 6일 동안 머물면서 김은부(金殷傅)의 큰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1011년 2월 13일에 청주[현 충청북도 청주시]에 머물렀다. 1011년 2월 16일에 청주를 출발해 1011년 2월 23일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수창궁(壽昌宮)에 들어갔다.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을 당하면서 현종이 나주로 몽진하게 되었다.1010년(현종 1) 12월 28일에 피난길에 오른 현종 일행은 1011년(현종 2) 1월 7일에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일대에 있었던 여양현에서 묵었다. 다음날인 1011년 1월 8일에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 있던 삼례역을 거쳐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에 있던 장곡역에서 묵었다. 현종 일행이 삼례역에 도착하자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평상복[野服]을 입고 어가(御駕)를 맞이했다. 이때 박섬(朴暹)이 “전주는 옛 백제 땅이므로 성조 역시 이곳을 싫어하셨습니다. 행차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현종도 이를 받아들여 전주로 가지 않고 곧장 장곡역(長谷驛)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이날 밤에 현종이 장곡역에 머무르고 있을 때 조용겸은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즙(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함께 장곡역으로 갔다. 이때 현종을 호위하던 지채문(智蔡文)이 유승건을 불러 안으로 들여 조영겸을 데려오도록 했으나 유승건은 도망쳤다. 다시 양협(良叶)에게 조용겸과 이재를 불러오게 하자 주변의 장수들이 조용겸 등을 죽이고자 했으나 지채문이 만류하고 제지했다. 그리고 조용겸과 이재 등을 시켜 대명궁주(大明宮主)의 말을 끌고 가게 했다가, 곧 전주로 돌려보냈다. 당시 거란군은 개경에 있었으며, 1011년 1월 11일에야 개경을 떠나 퇴각했다. 1011년 1월 13일에 나주에 도착한 현종 일행은 1011년 1월 16일에 거란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1011년 1월 21일에 나주를 출발해서 1011년 1월 26일에 전주에 도착해 7일 동안 머물다가 1011년 1월 2월 23일에 개경에 도착했다.1011년 8월 2일에 조용겸(趙容謙)·유승건(柳僧虔)·이재(李載)·최즙(崔檝)·최성의(崔成義)·임탁(林卓) 등은 현종의 몽진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유배를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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