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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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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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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중국의 수나라는 왜 빨리 멸망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초강대국 수나라, 고구려와 돌궐을 주시하다수나라라는 초강대국의 출현으로 동아시아는 팽팽한 긴장상태에 들어갔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중국의 분열을 이용하여 고도의 양면 외교를 펼칠 만큼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특히 삼국의 선두주자이며 거란이나 말갈족의 지배를 두고 중국과 국경을 다투는 만주의 실력자 고구려의 존재는 수나라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한편, 서북의 돌궐도 북주와 북제의 분열을 틈타 강력한 유목국가로 성장했다.수나라는 통일의 기세를 몰아 돌궐과 고구려를 주시하였다. '왼쪽 눈으로 돌궐을 무섭게 쏘아보고, 오른쪽 눈으로는 고구려의 동정을 주의 깊게 주시'하는 형국이었다. 때마침 돌궐은 '가한'이라고 불리는 제왕의 지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고, 수는 이를 교묘히 이용함으로써 제국을 동서로 분열시키는 공작에 성공했다.문제, 요서에서 고구려에 패하다고구려는 수왕조가 수립되자 곧바로 사절을 보내 수의 책봉체제에 들어갔으나, 남조의 진왕조와의 교섭도 단절하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중국의 책봉에서 고구려가 받은 칭호는 '요동군공 고구려왕' 정도였다. 그러나 진이 멸망해버리자 고구려는 방위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돌궐과 연합을 꾀하면서 적극적인 대비책을 강구하였다.수나라가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는 거란 · 말갈 등에까지 세력을 뻗쳐옴에 따라, 요서방면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고구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영양왕은 598년 요서를 공격하였고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일으켜 수륙으로 침공해 들어왔다. 결과는 수의 참패였지만 고구려 측의 손실도 컸다. 고구려는 다시 형식적인 사죄 사절을 보내 사태를 진정시켰다.양제, 고구려 침공을 위해 대규모 원정을 하다양제는 다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에 매달렸다. 607년의 어느 날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는데 때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던 고구려 사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돌궐과 고구려의 결탁은 수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으며, 게다가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의 요청은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뒷날, 수는 백제에게 고구려의 동정을 탐색하는 일을 의뢰했으나 백제는 막상 수의 침공 때에는 중립을 지켰다.612년 1월, 드디어 양제는 고구려를 '군신의 예를 어기는 자'라고 힐책하면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대운하의 북쪽 종점인 북경에는 113만의 대군이 집결했고 보급부대의 숫자는 그 2배를 넘었다. 병사들의 행렬은 장장 480km에 달해 출발에만 40일이 걸렸다. 수군 정예부대 4만 명도 산동 반도를 떠나 평양으로 진격했다.수나라의 평양성 공격, 살수대첩에서 참패하다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함으로써 서전을 장식했다. 그러나 요하를 건널 때부터 이동식 다리인 부교가 설계 착오로 짧게 만들어져 전쟁도 하기 전에 많은 사상자를 낸 데다가, 요동성의 철통같은 방비는 대군의 3개월간의 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군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외곽까지 진격했으나, 고건무가 지휘하는 결사대 500명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수나라 군대는 할 수 없이 30만 정예로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을지문덕살수대첩 등으로 수양제의 대군을 격파해낸 고구려의 을지문덕.이때 고구려의 총지휘관 을지문덕은 수의 별동대를 깊숙이 끌어들인 후 일시에 섬멸하는 작전을 세워놓고 예정된 후퇴를 거듭했다. 수나라 군대는 하루 7번 싸워 7번 이기는 승전을 거듭하며 평양성에 닿았다.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평양성 북방 30리에 병영을 설치한 수의 명장 우중문에게 을지문덕의 시 한 수가 날아왔다.귀신같은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도다.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았으니만족함을 알아서 그치기를 바라노라.우중문은 서둘러 총퇴각을 명령했으나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뒤였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수나라의 병사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고구려의 복병은 퇴각하는 수나라의 병사들을 사면에서 공격해댔다. 고구려는 패주하던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를 반쯤 건넜을 때 막아놓았던 강물을 일시에 터뜨림으로써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30만 별동대 중에 살아서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세계 전투사에 빛나는 살수대첩이다.수양제의 대군이 무참히 격파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수나라는 이 싸움에서 대패함으로써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고구려 원정의 실패, 몰락의 길에 치닫다1차 원정에서 뼈아픈 참패를 당한 양제는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수나라 백성들 사이에서는 '요동에 가서 개죽음 당하지 말자'는 노래가 유행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무모한 고구려 원정에 동원되어 헛되이 인생을 마감하기를 원치 않았다. 민심이 떠난 것을 알아챈 지방의 유력자들도 수왕조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2차 고구려 원정에서 수군이 급거 철수하게 된 것은 보급을 담당했던 양현감의 반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수나라는 거듭된 고구려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외부의 고구려가 아니라 중국 내부에 있었다. 각지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린 양제는 강도에서 시국을 점치고 있던 중, 결국 자신의 친위대장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함으로써 50년의 생을 마쳤다. 그때가 618년, 수가 건국된 지 불과 2대 37년이 경과하고 있었다."주모자가 누구냐?"죽음 직전, 양제의 호통에 들리는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온 천하가 똑같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어찌 한 사람에 그치겠습니까?"수 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200개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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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류과 최초로 농사를 지은 때는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마빈 해리스의 문화 3부작에 따르면, 농업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이미 화전과 비슷하게 땅을 정리하여 식물이 자라기 좋도록 관리하는 형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씨앗을 뿌리는 과정만 없을 뿐 사실상의 농업이나 마찬가지. 수렵을 하며 떠도는 호주 원주민에게서도 비슷한 양태를 볼 수 있다.본격적인 농업은 기원전 9050년 전 레반트 지역에서 최초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텔 아부 후레이라 유적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일명 신석기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농경 혁명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빙하기가 끝나 당시 식량원이었던 상당수의 거대 동물이 멸종된 것이 한 원인으로 추정된다.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집단 노동이 필요하였기에 씨족 중심의 정착지(마을)가 발전했으며, 이후 잉여 식량을 저장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이러한 지혜가 확산되며 인구가 증가하였다. 잉여 식량의 축적은 사유재산의 개념을 발달시켰으며, 권력층은 생산물을 토대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계급이 탄생하였다. 이에 따라 여성도 부계 안에 포함, 동시에 상대의 재산을 약탈하기 위한 무리나 부족 간 전쟁이 빈번해졌으며, 각종 제도를 수비하는 과정에서 군사 조직과 더불어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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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개신교 역사는 약 140여년으로 이는 민족과 함께한 복음 140년이 되는 2024년을 의미한다. 1884년 6월 24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 R. S. 매클레이(Maclay, Robert Samuel)가 고종 황제로부터 선교를 허가 받은 지 140년이 되는 2024년의 해를 기념하며 이를 한국 개신교의 역사로 보는 시각이다. 다만 메클레이 선교사가 고종 황제로부터 허가를 받기 1년 전인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대구면 송천리에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이미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한 바 있다. 즉 해외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인들 스스로 교회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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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기타를 학원에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배울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시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나... 경험자로써 학원을 다니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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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현악기 종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떻게 줄을 진동시키느냐에 따라서 현악기는 세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로 줄을 활로 문질러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 둘째는 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 그리고 셋째는 줄을 쳐서 소리를 내는 타현악기다.찰현악기로는 아쟁과 해금이 있다. 거문고·가야고·비파·월금·금·슬 등은 발현악기이다. 타현악기는 양금이다. 우리나라의 현악기 중 양금만이 철사로 됐고, 나머지는 모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줄로 됐다.중국의 전통적 악기분류법에 의하면, 모든 현악기는 팔음 중 사부에 든다. 서양의 악기분류법으로는 현명악기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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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도에 힌두교가 전파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힌두교(Hinduism, 산스크리트어: हिन्दू धर्म) 또는 사나타나 다르마(산스크리트어: सनातन धर्म)는 인도 신화 및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인도 계통 다신교로,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서 널리 믿는 종교이자 인도의 민족종교 및 최대종교이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은 넓은 강을 의미하는 ‘신두(Sindhu)’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인도와 같은 어원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라고 할 때 민간 힌두교 전통과 베다 힌두교 전통에서 비슈누파와 같은 박티 전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전통 전체를 뜻한다. 또한 요가 전통과 카르마 개념에 기초한 매일의 도덕적 삶과 힌두 결혼 풍습과 같은 사회적 일반 규범도 포함한다.힌두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다음 가는 세계에서 3번째로 신도 수가 많은 종교다. 그 수는 2005년 기준으로 9억 4천만명에 달한다. 힌두교의 발생은 고대 인도의 종교 사상인 베다와 인도 신화에서 비롯하며, 베다 사상은 기원전 15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다는 초기 힌두교 종교이며, 그 경전은 현존하는 문학 문헌 중 가장 오래 되었다고 여긴다. 힌두교 신자는 출신 지역이나 가문과 연계한 신 하나를 섬기지만, 여러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다신교적 일신교(택일신교 또는 일신숭배)다. 다양한 지역적 신들이 하나의 종교사상으로 연합한 형태의 종교이므로 교주(敎主) 즉 특정한 종교적 창시자가 없는 특징이 있다.근대 이전에 인도 부근의 네팔, 인도네시아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근대에 이르러 인도인들의 이주에 따라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다. 힌두교의 많은 신들과 주요 사상은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의 전파와 함께 힌두교의 신화와 전설이 전파되었다.네팔은 2008년 힌두교를 국교로 지정했었지만 2015년부터 민주화로 인해 국교가 아니게 되었다. 인도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나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를 믿는다. 또한 힌두교는 굽타왕조의 지원 아래 확산되었다.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모리셔스가 힌두교가 종교 중 최다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서울 용산구 용산동 2가 해방촌에 크리슈나를 모시는 힌두교 사원, 즉 스리 라다 샤마순더르 사원이 있었다. 과거 위치. 용산동 2가 고바우 슈퍼 근처에 위치했는데, 그 고바우슈퍼는 현재 GS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그 힌두교 사원은, 경의중앙선 한남역 근처에 이사간 후 하레 크리슈나 사원(Hare Krishna Temple)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557-47[46]이고, 사원은 '청운독서실' 건물의 1층에 있다. 하지만 간판이 없기 때문에, 도착하더라도 어리둥절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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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피라미드는 언제 건축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전 세계의 피라미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 특히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고대로부터 매우 유명해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기도 하는데, 연대 자체는 이미 사라진 7대 불가사의의 6개 건축물보다 2천 년가량 더 오래됐다. 현대를 기준으로 대략 4000년에서 4700년 전의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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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잉카 문명은 언제 있었던 문명이고 어떻게 멸망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잉카 제국, 혹은 타완틴수유[는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100년 간 남아메리카 일대를 다스린 대제국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의 남북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으로 군림하면서 남미 대륙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다스렸다.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서부, 볼리비아 남서부, 칠레, 아르헨티나 북서부, 콜롬비아 남서부 등 총 6개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도 했다.잉카족은 12세기경 현재의 쿠스코 근방에 거주하던 부족이었다. 전설적인 지도자인 망코 카팍의 시대에 잉카 제국의 전신인 쿠스코 왕국이 세워졌으며, 정복군주이자 초대 황제인 파차쿠티-쿠시 유판키의 재위기에 인근의 창카족을 정벌하고 페루 지역 대부분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쿠스코 왕국은 파차쿠티의 시대에 영토를 4방위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소규모 부족국가에서 본격적인 제국으로서 탈바꿈했다. 파차쿠티가 1471년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인 투팍 잉카 유판키가 그의 뒤를 이어 치모르 왕국을 정복하고 손자인 우아이나 카팍이 에콰도르 남부까지 진출하면서 잉카 제국의 강역을 최대로 넓혔다. 잉카 제국은 북쪽 뿐만 아니라 남쪽과 동쪽으로도 확장 사업을 펼쳤으나, 남쪽에서는 마푸체족의 극렬한 저항으로 더이상 영토를 넓히는 데 실패했고 동쪽에서는 아마조니아 원주민들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포기했다.강대했던 잉카 제국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천연두로 붕어한 이후 형제들끼리 내전이 벌어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두 아들인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사이에서 제위계승전쟁이 일어났고, 제국은 두 쪽으로 갈라져 분열되었다. 그 상태에서 결정적으로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왔고, 168명의 스페인군이 옮겨온 전염균들에 면역이 없었던 잉카인들이 떼로 죽어나가면서 안그래도 약해진 잉카 제국은 더더욱 세력이 줄어들었다. 우아스카르를 내전에서 꺾고 황제에 오른 아타우알파는 잉카를 정복할 기회만을 노리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계략에 휘말려 포로로 잡혔고, 몸값으로 방 하나를 2번 채울 정도의 황금을 바쳤으나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처형되었다.아타우알파 황제가 교수형 당해 죽은 이후, 피사로는 후임으로 망코 잉카 유판키를 새로운 꼭두각시 황제로 추대했고, 허수아비 제국을 부여잡은 채로 남미의 재물을 약탈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렸다. 망코 잉카 유판키는 처음에는 스페인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다가 결국 빌카밤바로 도망가 신잉카국을 세우고 스페인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저항운동마저 최후의 사파 잉카인 투팍 아마루가 사로잡혀 처형당하면서 끝났고, 이후 남아메리카 지방은 스페인 제국의 혹독한 통치하에서 신음하게 된다.현대에는 마추픽추 등 험한 산꼭대기에 거대한 도시들을 세운 문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보통 황금과 보물이 넘쳐났던 신비한 고대 문명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같은 아메리카 대륙의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 문명과도 자주 혼동되는 편인데, 잉카 제국은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와는 달리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세우지 않았으며 정글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건조한 산맥 지대가 주 터전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잉카의 신왕(神王) 제도와 막대한 부를, 아즈텍의 호전성과 인신공양을, 마야인들의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피라미드 등을 모두 모아 만들어진 가상의 문명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더더욱 잉카와 아즈텍, 마야를 헷갈려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잉카 제국의 몰락 원인은 여러모로 멕시코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 제국과 흡사하다. 중앙정부의 잔인한 학살과 폭정으로 반감을 사고 있던 와중에 스페인인들이 들어와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고, 잉카 제국은 거기다 내전 문제까지 겹쳐 그야말로 망하기 딱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잉카 제국은 아즈텍 제국보다 인신공양을 적게 했으므로 인신공양 풍습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47], 대신 반란을 일으킨 지역에서 모든 남자들을 학살하거나 인구의 절반 이상을 쓸어버리는 등 잔인한 보복은 오히려 아즈텍보다 더 심했다. 다만 잉카 제국이 무작정 사람들을 죽여대는 살인 국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잉카인들은 기본적으로 영토를 확장할 때에 평화로운 외교술을 선호했고, 언제나 친선 사절을 먼저 보내 복속 여부를 물었으며 평화적으로 해결될 일이라면 그렇게 했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신들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얄짤없이 잔혹하게 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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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조가 관우를 좋아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8년 조조와 유비가 여포를 격파할 때 관우는 조조, 유비와 함께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습니다. 이때 관우는 조조에게 진희록의 전처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조조에게 부탁했습니다. 조조는 관우가 여러 차례 부탁하자 그녀에게 관심이 생겼고 조조는 그녀를 자신의 측실로 맞이했습니다. 그녀를 빼앗긴 관우는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조는 관우보다 미녀(두씨)를 더 높게 생각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199년 조조에게 의지하던 유비는 그에게서 벗어나 서주자사 차주를 공격해서 해치며 서주를 차지하고 소패로 돌아갔고 관우는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했습니다. 유비는 손건을 보내 원소와 동맹을 맺었고 조조는 유대, 왕충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지만 유비군은 이들을 격파했습니다.200년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합니다. 유비는 원소에게 도망쳤고 관우는 조조에게 붙잡혔습니다. 조조는 관우를 편장군에 임명하고 예의를 지키며 정중하게 대우했습니다.조조군과 원소군의 전쟁이 시작되고 원소는 안량을 백마로 보내 동군태수 유연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조조는 관우와 장료를 보내 안량을 공격하게 했고 관우는 안량의 휘개(전쟁에 쓰인 수레에 달린 대장기의 덮개)를 보고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베고 수급을 챙겨 돌아왔습니다. 원소군은 백마의 포위를 풀었고 조조는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에 봉했습니다.조조는 관우의 인품을 높게 생각했고 그가 자신의 밑에서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조는 장료에게 관우의 생각을 알아보라고 했고 장료는 관우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관우는 조조의 은혜를 잘 알고 있지만 유비에게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끝까지 머물 수 없다고 했고 반드시 공을 세워 조조에게 보답한 뒤에 떠난다고 말했습니다. 장료는 관우의 얘기를 듣고 혹시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봐 고민하다가 결국 조조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조조는 장료의 말을 듣고 관우를 의롭게 여겼습니다.관우가 안량을 베는 공을 세우자 조조는 관우가 떠날 것이라고 생각해 더욱더 많은 포상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관우는 유비의 소식을 알게 되면서 받은 것들을 남겨두고 조조에게 작별 편지를 남긴 뒤 원소에게 의지하고 있는 유비에게 떠났습니다. 조조의 부하들이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그들을 말렸습니다.이후 유비는 원소의 곁을 떠나 형주의 유표에게 가서 의했고 관우도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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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국 음식이 맛없는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국 유학을 하다 보면 도대체 뭘 먹고 사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많은 분들이 영국 음식이 맛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걱정을 해준다. 고급스럽고 맛있는 음식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요리를 많이 떠올릴 것이다. 반대로 맛없는 음식으로 유명한 나라를 생각할 때 필자는 사람들이 1초의 고민도 없이 영국을 떠올릴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러한 인식은 유럽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인터넷에서 많이 돌아다니는 ‘웃기는 짤’ 중에 영국 음식이 주제로 만들어진 것이 꽤 있다. 그중 ‘정어리 파이’라는 게 있는데 비주얼이 압도적이다. 여러 마리의 정어리 머리가 밖으로 나오게 파이에 꽂아 그대로 구운 음식이라 생선 머리가 노골적으로 사람을 쳐다보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 친구들이 이 정어리 파이 사진을 필자에게 보내주며 안부를 묻는다.이 칼럼의 첫 부분에 언급된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필자는 주로 한식을 해 먹는다. 한식을 안 먹을 때는 파스타 같은 다른 외국 음식을 해 먹는다. 이건 필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친구들과 무언가를 축하하기 위해 멋진 곳에서 좋은 식사를 계획할 때도 당연히 외국 음식을 생각한다. 영국 가정에서 가장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있는 음식도 파스타다. 웃기게도 영국 사람들도 영국 음식을 잘 해먹지 않는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분점을 가지고 있는 프랜차이즈 식당들도 다 다른 나라의 음식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이야기들은 매우 현실적인 영국의 식문화에 대한 인식과 일상이다.영국의 명소나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영국적 요소들은 식민주의 시대에 영국이 식민지에서 뺏어 오거나 수입해온 문화와 문화재들이 대부분이다. 대영박물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과 미술관들과 식자재 같은 것들이다. 영국인들이 매일 마시는 차도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다.이렇게 영국이 음식문화의 발달에 소홀했던 이유는 산업혁명의 영향이 크다.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농산물의 생산보다는 기술 발달에 큰 중점을 두게 했다. 풍족하고 다양한 농산물을 생산하기에는 열악한 기후조건도 무시할 수 없다. 영국에서 살다 보면 계절에 상관없이 햇빛을 보기가 힘들고, 비가 오다가 바람도 불다가 결국 하루 안에 사계절을 다 겪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날씨가 좋은 날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두가 밖에 나와 일광욕을 한다.이러한 기후환경으로 인해 품질이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기 어려우니 나라를 대표할 만한 빵이나 와인조차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만들기도 어려운 환경에서 산업혁명으로 밤낮없이 일까지 해야 했으니 좋은 음식 문화를 만들기는커녕 끼니를 대충 때우고 일만 하기에도 벅찼을 것이다.따라서 영국이 식민지를 만들고 플랜테이션 농업을 강행한 것은 영국 내에서 개선하기 어려운 기후환경과 농산물 문제를 식민지의 다른 환경과 노동력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절대로 정당화할 수 없는 인류의 역사지만 말이다.이러한 가운데도 영국을 대표하는 국민 음식들이 당연히 있다. 피시앤칩스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영국 음식으로 튀긴 대구와 감자튀김 요리다. 펍에서 자주 먹는 요리인데 맥주와 같이 먹으면 꽤 맛있다. 웃기게도 맛이 없기 힘들어 보이는 이 피시앤칩스도 의외로 맛없게 만드는 곳이 영국에 많다. 두 번째로 잘 알려진 음식은 선데이로스트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영국인들이 일요일에 즐기는 전통음식이다. 가장 전통적인 형태는 그레이비소스를 얹은 채소와 로스트비프, 그리고 요크셔푸딩으로 이뤄져 있다. 가정에서도 많이 만들어 먹지만 필자는 주로 친구들과 펍에서 먹는 편이다.결론적으로는 이렇게 영국도 국민음식이 있긴 하지만 열악한 기후조건과 식민지 시대의 영향으로 인한 외국 음식문화 수입으로 현대 영국의 식문화는 그 음식의 근원지를 찾는 것이 의미가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인류가 세계화 시대에 진입하면서 그 영향이 더 커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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