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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유럽에서 산업화가 먼저일어날수있던 이유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동을 대체하는 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혁신은 수공업 기반의 사회구조와 생활방식을 기계화된 산업으로 전환시켰다. 이는 공장의 생성과 산업의 확장 등 가시적인 변화에 머물지 않고 경제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뜻이다. 일찍부터 모직물 공업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산업이 발전하였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량생산과 더불어 생산의 효율성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세계 여러 지역에 식민지를 확장한 영국은 해외무역이 활발해져 많은 자본을 축적하였으며, 각 나라의 축적된 문화와 기술 역시 활발한 교류로 인하여 영국에 전해졌다. 경제의 부흥과 교역의 확장은 인구증가와 도시의 확장을 가져왔고, 이것은 산업 활동에 필요한 노동력이 집중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기계산업의 동력인 석탄과 철 등의 풍부한 지하자원 등도 영국의 산업혁명에 촉매가 되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국내외에서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자 대량생산방법을 찾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동력과 기계를 발명하였고, 이것은 생산방법의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면직물산업과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을 거의 주도하였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으로 도시 노동자의 증가, 기계의 발명과 농업혁명, 공장시스템의 등장, 교통과 상업의 발달,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형성과 빈부격차 확대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2차 산업인 제조업 중심으로 사회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근대 자본주의의 태동을 가져오게 된다.
Q.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만 이슬람을 믿는 인구가 많은 이유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두 나라는 종교적으로 이슬람 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는 술탄연합국이며, 인도네시아는 족자카르타 같은 지역은 특별 자치구형태로 술탄의 지위를 인정하고 있다. 반면, 양 국가 사이에는 서로 자국이 문화적 우위, 원조라는 생각을 한다.역사적으로 두 나라는 7세기부터 13세기 사이 스리위자야, 마하자핏, 말라카왕국 등이 영토적으로 공유된 공간을 차지했다. 해상왕국으로 번성하였고, 인접지역인 중동, 인도, 중국의 영향권에서 무역 등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13세기 무렵 말라카 왕국 시기에는 수마트라, 말레이시아 지역이 이슬람 상인들과의 무역으로 이슬람 영향을 많이 받는 시기였다. 양국 모두 무슬림이 대부분의 인구를 차지하는 국가가 되었다.
Q.  북한에도 종교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북한은 종교를 마약이라 하여 종교말살정책으로 종교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서방세계에 보여 주기 위해 형식적인 교회(봉수교회,칠골교회)가 있으며 외부의 사람이 오며는 위장 교회예배를 드립니다.
Q.  러시아인들이 푸시킨을 사랑하는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푸시킨은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막심 고리키의 말대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비평가 역시 푸시킨의 작품을 심도 있게 연구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도스토옙스키의 표현)을 강조했다. 그의 문학작품은 모든 예술사조(ism)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예술사조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모든 요소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대화를 하고 있다.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민족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의 측면에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Q.  살수대첩의 승리비결은 무엇인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12년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13만여 명에 달하는 수(隋)나라군은 음력 3월 15일, 요하에 도달했다. 수나라 침공군의 전 병력이 탁군을 떠나는 데만 40일이 걸릴 정도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대규모의 군대였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진군 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는 데만 2개월이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요하를 건너 요동성 공성전을 시작했지만, 수나라군은 또 다시 1개월이 넘도록 요동성 함락은 커녕 큰 손실을 입고, 음력 6월을 맞이했다.게다가 병력과 물자의 손실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시간이었다. 수양제는 지나치게 거대한 병력을 이끌고 와서 (설령 요동성을 바로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해도) 겨우내 보급을 받으며 요동에 계속 주둔하기는 힘들었기에, 곧 겨울이 다가오면 힘들여 함락한 성들을 모두 뱉어내고 도로 본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요동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3개월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 당시로서는 더더욱 답이 없었다.이에 수양제는 지지부진한 전황을 타개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다. 전군에서 정예병을 추려 300,000명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의 지휘하에 평양성으로 직행시키는 한편, 황해를 건너는 내호아의 수(水)군과 합류하여 한 방에 평양성을 함락시키려는 대담무쌍한 작전이었다.전개양제의 계획은 성공한다면 위협적이었겠지만, 문제는 보급이었다. 당시 수나라군은 300,000명에 달하는 별동대에게 100일 분의 식량과 피복, 병장기, 야전텐트 등을 분배하여 운반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렇게 군장을 분배한 결과 병사 1인당 군장의 무게가 무려 석 섬(약 50kg)이나 된 것이었다.[10] 그러다 보니 이 무식한 짐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한 수나라 병사들이 보급품을 길가에 버렸다.[11] 특히 수나라 장수들은 군수품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어버린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각자 작정하고 몰래 구덩이를 파 묻는 행위를 일일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별동대는 행군 중에 심각한 물자 부족을 겪게 되었다.한편 수나라군이 압록강 근처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에서는 을지문덕이 항복을 구실로 홀로 적군의 본진에 다다랐다. 그리고 별동대가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있어 작전을 실행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직접 확인했다. 일찍이 수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을 만나거든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몰래 명령했으나, 참군(參軍) 유사룡이 사신을 함부로 해치면 안 된다며 을지문덕을 그냥 보내주자고 주장했고 이에 우중문도 할 수 없이 보내주었다. 물론 수나라 장수들이 마음을 바꾸어 을지문덕을 다시 불러오려고 했으나 을지문덕은 그대로 유유히 압록강을 건너가 버린 뒤였다.우문술은 군량 부족을 이유로 퇴각을 건의했지만 우중문은 아니었다. 수양제가 이미 우중문을 대장으로 삼아 지휘계통을 정리했기 때문에 그의 의견대로 수나라군은 평양을 향해 진격했고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의 피로를 가중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전을 강요하면서도 수나라 군대가 발을 빼지 못하도록 짐짓 패배하는 척 더욱 깊숙이 끌어들였다. 어느 날은 우문술의 군대를 상대로 하루에 7전 7패, 즉 7번 싸우고 7번 도망가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고구려군은 게릴라전만 열심히 해대며, 수나라 군대의 체력을 빼놓았다.하지만 이것은 모두 고구려군의 계획대로였다. 결국 을지문덕은 지속적인 유인 끝에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 앞 30리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평양성은 견고하여 수나라군은 지친 상태에서 함락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바다를 통해 상륙하여 호응하기로 했던 내호아는 왕제인 고건무에게 철저하게 박살이 난 상태라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神策究天文신 책 구 천 문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깨달았고妙算窮地理묘 산 궁 지 리 신묘한 셈은 땅의 형편(지리)을 다하였도다戰勝功旣高전 승 공 기 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知足願云止지 족 원 운 지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입조(入朝), 즉 항복을 약속하는 듯한 거짓 항복 문서를 보냈다. 이때 을지문덕은 한 편의 시를 같이 보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與隋將于仲文詩)이다. 언뜻 보면 띄워주는 내용 같지만, 당시 수나라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철저한 조롱이었다.우중문은 답신을 보냈으며, 을지문덕은 이에 대해 다시 답신을 보내기를'수나라가 군대를 물리면, 자신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는 확인 서한을 보냈다. 물론 그만한 지위에 올라간 우중문이 정말로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이게 거짓말이라는 건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퇴각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체면치레, 즉 수양제에게 변명할 거리 하나를 간신히 챙겼다고 생각한 우중문은 그제야 퇴각을 결심했다. 물론 이것 역시 수나라군을 조금이라도 더 철저하게 파멸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준비 시간을 벌려는 을지문덕의 치밀한 계획일 뿐이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이 퇴각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알고는 병력을 준비해 놓았다. 즉 이 시점에서 수나라군 별동대 300,000명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수나라군의 별동대는 힘겨운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평양성 코앞까지 유인하기 위해 거짓 후퇴만 거듭했던 그 때까지와는 반대로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갔다. 사방에서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를 쳐부수기를 반복했으며, 수나라군은 방진을 치며 맞섰다.고구려군의 계속되는 공격속에 약화될 대로 약화된 수나라군 별동대는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간신히 도착했다. 수나라군이 도하를 시작하여 총병력의 절반쯤이 강을 건너는 순간,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 병력을 집중시켜 최후의 총공격을 개시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전에 이르기까지 지상군이 제일 취약한 순간 중 하나가 도하 중일 때였으니 을지문덕의 전투 개시 시점이 절묘했다고 할 수 있다.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수나라 후군이었다. 수나라의 후위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고, 지휘관인 우둔위 장군 신세웅마저 전사할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났다. 그리고 후군의 이런 참담한 붕괴로 인해 300,000명의 대군 전체에 극도의 공포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패닉에 빠진 수나라군 장병들은 살기 위해 서로 도주하면서 연쇄적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군대는 최소한의 편제와 통제가 무너지면, 30만 대군이 아니라 300만 대군이라 할지라도 먹잇감에 불과하다.수나라군 전체가 와해되는 대혼란 가운데서도 몇몇 수나라군 부대는 감투 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별동대의 지휘관들 중 설세웅은 백석산에서 빗발치는 화살비와 포위망을 돌파하며 고구려군 일부를 격퇴하는 무용을 떨치기도 했고, 또 다른 지휘관 왕인공도 고구려군 일부를 물리치는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전으로는 전황을 뒤집기에 턱없이 부족하여 거의 의미가 없었다. 305,000명 중 살수(청천강)에서 빠져나와 압록강에 도착한 장병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그 2,700명도 하루 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177 km)를 도망쳐 왔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기병의 진격속도가 하루 100km가 최대였음을 고려하면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수나라군 패잔병이 대형을 유지하기는 커녕 장비도 다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도망쳤다는 것을 과장법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유사룡은 패전 후 처형당했고, 우중문은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에 홧병으로 병보석을 받고 자택에서 죽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수나라 입장에서는 돈과 인력을 말 그대로 다 때려부었음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전쟁이었다.결과수나라군 별동대 300,000명은 2,700여 명만 남고 모조리 증발했다. 이에 남은 수나라군 총병력은 즉시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대전으로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종결되었다.잔존 병력들이 간신히 본진에 도착하자 수양제 양광은 큰 충격을 받았고 대노하여 패장인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포박하여 서도인 장안까지 끌고 갔다. 이후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서인(庶人)으로 전락시키고 감옥에 가두었다. 다만 우문술은 제3차 고구려-수 전쟁 때 복권되어 참전했다. 특히 유사룡은 을지문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패전의 원흉으로 규정되어 참수되었고, 머리가 효수되었다. 사실 패전에 가장 큰 책임이 있었던 내호아는 정작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우중문과 우문술도 죽음은 면했으니 괜히 애꿎은 유사룡만 패전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한편 별동대의 지휘관들 중 한 명이었던 설세웅은,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종횡무진 활약한 공으로 포상을 받아 승진하기도 했다.수양제는 이후 제3차, 제4차 침공을 계속 이어나갔으나 끝내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렇게 무리한 원정 탓에 그 끝을 모르던 수나라의 국력은 어느새 고갈되었고,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며 대규모 반란이 거듭 일어나 수양제는 강남의 강도에서 근위병들에 의해 교살당하고, 수나라는 멸망했으며 양씨 황족들은 돌궐(쾩튀르크)로 도망친 어린 황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멸당했다. 이로 인해 살수 대전 한 번으로 대제국을 말아먹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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