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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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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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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신돈의 만행을 보고도 공민왕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민왕에게는 태후에 의해서 소개되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그즈음 꾼 꿈에서 자객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꿈에서 자객을 없애준 승려가 신돈이었기 때문이었에 그를 신임하였다고 합니다.조금은 어처구니 없죠... 노국대장공주의 승하 뒤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그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정치 전면에 나선다. 이때 그는 법명인 편조(遍照)를 버리고 환속하여, 신돈으로 개명했다.공민왕에게 전권을 받은 직후의 직책이 어마어마하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5]"로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길다.그야말로 공민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셈이었다. 기본으로 대공신에, 벽상삼한삼중대광(총리도 아니고 부통령급) + 영도첨의사사사(관직 중 최고의 관직으로 본래 공석으로 남겨놓는 명예직) + 판중방감찰사(국방부장관) + 취성부원군(최고 귀족의 명예) + 문화종교부장관 + 농수산부장관 + 기상청장이었던 것이다. 집권 초창기엔 노비를 풀어주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정치로 백성들에게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전민변정도감이 바로 그것.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설치한 기관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부패한 세력들도 몰아냈다.하지만 이후 기록을 보면 막장이었다. 사치와 향락, 부정축재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여자에 빠졌다(...) 그리고 야사에 의하면 공민왕과 동성애 관계였다고 한다.고려의 라스푸틴 점점 원래의 개혁의도보단 자신의 권력에 취한 정책을 내놓은 감도 없지 않아 있다.또한 공민왕도 서서히 커져가던 그를 견제하였고, 환속한 천출승려 출신에 무엇보다도 부패하고 탐욕하다는 이유로 신진사대부들도 그를 불신하여 결국 사면초가. 심지어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하여 쫓겨나게 되었으니, 사실상 자신과 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곤 모두가 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사실 그럴 만도 했던게, 신돈 본인은 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 것이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편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안 그러면 자신이 밀려나니까).결국 신하들의 간언에 의해 역모죄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1371년 수원에서 처형되었다. 국왕의 신임을 받아 개혁을 진행시키다가 국왕의 총애를 잃고 숙청되었다는 점에서 조광조나 홍국영과 약간은 비슷한 필. 다만 이 숙청은 공민왕의 뜻이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죄목은 반역죄였지만 자기 세력이 없는 신돈이 세력을 모으기도 전에 반역을 저지를 리가 만무하고, 투서가 한 신하에 의해 공민왕에게 전해진 것이 몰락의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심문 한 번 없이 처형됐다. 아무리 반역자라 해도 항변 한 번 들어보지 않고 처형하는 것은 무리수였지만, 공민왕은 전혀 번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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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자식이 가장 많은 왕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은 3대 임금 태종입니다. 그는 총 29명(12남 17녀)를 두었습니다.그 중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도 29명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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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불교는 언제부터 믿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처음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인 372년으로,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적인 공식 기록일 뿐, 불교가 이 보다 먼저 전해졌으리라는 것을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梁: 502~557) 때 승려 혜교(慧皎: 497~554)가 저술한 《양고승전(梁高僧傳)》(519) 등의 문헌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불교가 발생지인 인도에서 직접 들어오지 않고 중국[1]을 거쳐 들어왔으며 또한 기원전 6세기에 발생한 불교가 8~9세기라는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4세기에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에서, 한국에 전래된 불교가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 불교와는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사항이다.당시 전래된 불교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전까지 한국의 민간에서 믿어 온 고유한 민간신앙인 무속신앙이나 도교와 별다른 마찰 없이 융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에서 보듯이 초기 전래시 고구려와 백제 보다는 고유 신앙의 융합에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고구려 (372~668)불교의 고구려 전래불교의 고구려(高句麗) 전래는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인 372년에,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使臣)과 함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며 2년 후인 374년에 아도(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 혹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한국 사찰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교를 통한 공식 전입으로, 실상 민간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고구려는 고국양왕 8년(391)에 "불법을 믿고 받들어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다음 해인 광개토왕 2년(392)에는 평양에 9사(寺)를 세웠다. 이 밖에도 구법(求法)과 전교(傳敎)의 고승들이 나라 밖에까지 나가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구려 불교의 특징고구려의 불교는 한마디로 학술 외교불교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학승 등은 중국에 가서 경전을 배우고 연구함을 구법(求法)의 최상목표로 하였으며, 중국의 승려를 지도할 수 있는 고승도 있었다. 그 대표로 장수왕(재위 413~491) 때 태어난 승랑(僧朗: fl. 500년 전후)을 들 수 있다. 승랑은 중국에 들어가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신삼론(新三論)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개척했다.[2] 승랑의 사상은 승전(勝詮) · 법랑(法朗: 507~581[3]) · 길장(吉藏: 549~623)으로 이어졌으며, 길장에 의해 새 종파인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승랑은 중국 사상계를 지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다.고구려 학승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건너가 불교 학술과 예술면에 큰 공헌을 하였다. 최초의 전교자인 혜편(惠便)을 위시해서, 혜관(惠灌)은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에게 삼론의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으로 가서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을 널리 펴서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2]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의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도 익히 알려진 일이다. 또한 혜량(惠亮)은 551년 신라로 가 승통(僧統)이 되어 신라 불교를 일으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구려 불교의 일본 전래고구려 승려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한 최초의 인물은 혜편(惠便: fl. 584)이었다. 그는 일본 비다츠(敏達) 13년(584)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사마달(司馬達)의 딸인 선신(善信)과 그밖에 선장(禪藏) · 혜선(慧善)의 세 여자를 비구니로 출가시켰으며,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 불교사상 비구니 출가의 효시가 되었다.[5]영양왕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간 혜자(惠慈)는 일본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덕태자(聖德太子) 풍총(豊聰)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같은 해 백제에서 건너온 혜총(惠聰)과 더불어 혜자는 일본 불교의 동량(棟梁)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혜자는 삼론학(三論學)을 위시하여 《법화경》·《유마경(維摩經)》·《승만경》과 같은 난숙한 발달을 보인 대승경전을 가르쳤는데, 후일 성덕태자가 불교정신을 뒷받침으로 한 정치를 베풀 때 이러한 불교정신이 통치 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 문화 발전에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같은 영양왕 때 일본으로 간 담징은 불교학은 물론 오경에도 능통하였고 채색(彩色), 지묵(紙墨), 공예(工藝)에 능하여 일본 미술사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가 그린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金堂壁畵)는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 온다. 이 밖에 그는 맷돌 제조법도 가르쳐 일본의 문물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류왕 8년(625)에 일본에 건너간 혜관(慧灌)은 일찍이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 밑에서 삼론학(三論學)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 불교의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三論宗)을 가르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같은 왕대(王代)의 도등(道登)도 일찍이 당(唐)나라 길장 밑에서 삼론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을 강술(講述)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도현(道顯)도 일본에 가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면서 교수(敎授)하는 한편 《일본세기(日本世紀)》라는 책자를 몇 권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기록에 나타난 승려들의 이름 이외에도 망각된 고승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되며, 고구려 불교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선 문화 전반에 걸친 광범한 것이라고 믿어진다.백제 (384~676)불교의 백제 전래 및 전개백제(百濟)에는 불교가 고구려보다 12년 늦게 들어왔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바다를 건너 동진(東晋: 317~420)으로부터 왔는데 왕이 직접 환영하여 맞이하였고 궁중에 머물게 하였으며 예로써 공경하였다. 다음 해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명을 양성했다. 왕이 외국의 승려를 직접 맞이하였고 궁중에 있게 한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그 이전부터 불교가 전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그 뒤 140년쯤 지나 26대 성왕(聖王: 재위 523~554) 때에 이르러 불교는 크게 번창했다. 왕은 겸익(謙益)을 인도에 보내어 계율을 연구하게 했는데, 526년 산스크리트어본의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오자 국내의 고승들을 불러 겸익을 도와 번역하게 하고 주석서를 짓게 했으며, 왕이 몸소 서문을 썼다고 한다. 성왕 23년(545)에 장륙(丈六) 불상을 조성,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해탈하기를 기원했다. 동 30년(552)에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으며, 이것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시초이다. 그때 백제는 여러 가지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불교를 전함으로써 백제의 승려와 예술가와 기능공들이 건너가 일본의 문화를 크게 일으켰다. 백제는 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다.[2]법왕 1년(599)에는 나라 안에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리고 널리 방생(放生)을 행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연장을 모두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이듬해 수도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세웠고, 무왕때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탑을 조성했는데, 백제에는 승려와 사탑(寺塔)이 많았었다는 사실이 중국의 문헌에도 전해지고 있다.백제 불교의 특징백제의 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 예술 불교, 외교 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인도로 유학하였던 겸익(謙益: fl. 526)은 백제 성왕 4년(526년)에 인도 상가나대률사(常伽那大律寺)에 이르러 산스크리트어를 익혀 율부(律部)를 깊이 공부하고, 백제 성왕 9년(531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인도의 승려 배달다 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했다.[7][8][9] 귀국 시에 겸익은 성왕의 환대를 받았으며, 그 후 흥륜사(興輪寺)에 있으면서 명승 28명을 소집하여 율부 72권을 번역하였다.[7] 당시에 중국에는 《오부율(五部律)》 중 음광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파의 율부들은 이미 번역되어 있었다.[10] 그러나 끝내 음광부의 율부는 중국으로 전해지지 못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백제에 《오부율》 전체가 전해지고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율부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11] 겸익의 이러한 활동에 의해 계율 중심의 백제 불교의 특징이 이루어졌다.[7] 중국에서 율종이 성립된 때는 당나라의 도선(道宣: 596-667)이 법장부의 《사분율(四分律)》을 강설하고 저술한 624년인데,[10] 백제에서 겸익에 의해 율종이 성립된 때(526년경)는 이보다 1세기 앞선 것이다.백제는 성왕 30년(552)에 처음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래시켰으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특히 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는 고승들과 불공(佛工)들을 보냈고, 30년에는 일본왕이 고승 파견을 요청하여 일라(日羅)를 파견하였다. 그 후 무왕 3년(602)에 관륵(灌勒)이 각종 역서(譯書)를 가지고 가서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백제는 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으며 아울러 탁월한 불교 예술을 진작시켰다.백제 불교의 일본 전수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한 때는 성왕(聖王) 30년(552)이었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달솔(達率)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를 파견하여 금동석가상(金銅釋迦像)과 미륵석불(彌勒石佛) 및 번개(幡蓋) · 경론(經論)을 보낸 것이 일본 불교의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일본 군신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소아마자(蘇我馬子)만이 이를 예경(禮敬)하였는데, 석천가(石川家)에 불전(佛殿)을 만들고 이를 모셨으나 그 용도나 의미는 몰랐다. 그때 일본(日本)에 와서 있던 고구려 승려 혜편(惠便)을 발견하여 그의 가르침을 받아 세 사람의 여자 승려(尼僧)를 배출하였고, 소아마자(蘇我馬子)는 사마달과 함께 최초의 일본 불교신자가 되었다. 곧이어 2년 후 성왕은 담혜(曇惠) 등 9인의 승려를 일본에 파견하여 도심(道深) 등 7인과 교체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을 위시한 7인의 백제 승려가 집단적으로 이미 일본에 들어가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 경론(經論)과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比丘尼) · 주금사(呪禁師) · 불공(佛工) · 사장(寺匠)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일본에서는 그들을 맞아 난파(難波)의 대별왕사(大別王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라(日羅)라는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관음신앙(觀音信仰)을 크게 일으키고 또 동(同) 35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사공(寺工) · 화공(畵工) · 와장(瓦匠) 등을 보냈으며, 일본(日本)에서는 소아마자(蘇我馬子)가 백제(百濟) 승려(僧侶)를 청하여 수계(受戒)하는 법을 묻는 등 백제와 일본 간의 교류는 빈번하였다. 이때 일본 최초의 비구니(比丘尼)인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로 건너와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갔으며, 같은 해(588)에 혜총(惠聰) · 영근(令斤) · 혜식(惠寔) 등의 사문(沙門)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일본에 보냈다. 이 일행 가운데 혜총은 계율에 정통하여 그곳 대신인 소아마자에게 수계를 행하였다. 이밖에도 당시 도일(渡日)한 승려로는 영조(聆照) · 영위(令威) · 혜중(惠衆) · 혜숙(惠宿) · 도엄(道嚴) · 영개(令開) 등을 들 수 있다.[12]무왕(武王) 3년(602)에는 관륵(灌勒)이 천문(天文) · 지리 · 역서(曆書) · 둔갑(遁甲) · 방술(方術) 분야의 책을 일본에 전했지만 그는 본래 삼론(三論)의 학장(學匠)으로 그곳에서 일본 최초의 승정이 되어 승단의 기강을 정하는 등 불교계의 지주가 되었다. 그는 또 일본 의학의 시조로도 불린다. 그 후 혜미(惠彌) · 도흠(道欽) · 의각(義覺) · 도장(道藏) · 도녕(道寧) · 다상(多常) · 원각(願覺) · 원세(圓勢) · 방제(放濟) 등 많은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 문화 시대(飛鳥文化時代: 538~710)를 꽃피운 인물들이 되었다.신라 (263/479~661)고구려와 백제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불교가 받아들여졌지만, 반도의 동남쪽에 자리잡아 대륙과의 소통도 없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신라에는 백제보다 수십 년 늦게 불교가 전해졌다.최초의 전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 2년(263)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러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또 21대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자(侍者) 3인과 같이 모례(毛禮)의 집에 있다가 아도는 먼저 가고 시자들은 포교했다는 설,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로부터 들어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善山)) 에 있는 불교 신자 모례(毛禮)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화를 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민간의 승려가 들어와 공식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했다는 점이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와의 차이점인데 이런 점에서 쉽게 토착화(土着化)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6] 그러나 그 전래는 완고하고 배타적인 집권계층의 반대에 부닥쳐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법흥왕(재위 514~540)은 불교를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오게 하고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확신하여 즉위 초부터 국가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고심했다. 그러다가 불교 신자요 젊은 신하인 이차돈(503~527)의 순교로 인해 법흥왕 14년(527)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관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공포하고 연호를 세우고 문물을 개발하는 등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왕이었다. 그는 불교 신앙을 통해서 백성들이 선량한 국가적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신라의 문화가 향상 · 발전될 수 있다고 내다보았던 것이다.법흥왕에 의해서 시작된 신라 불교가 특색을 지니게 된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 때부터로, 이는 왕 자신의 신앙심과 불교 정책에 의해서였다. 진흥왕 5년(544)에 선왕 때부터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가 낙성되고, 그해 3월에는 뜻이 있는 자는 승려가 되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반에게 출가를 허락하였다. 만년에는 진흥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 이름짓고 수도하였으며, 왕비도 영흥사(永興寺)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진흥왕은 또 불교이념에 의거한 청소년 수양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여 국민 정신의 함양에 크게 이바지했다.신라는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때에 이르러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마침내 삼국통일(676)의 대업을 성취했다. 겉으로는 당나라를 모방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평화가 깃들여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문화는 눈부시게 뻗어갔으며, 불교도 크게 융성했다. 신라의 승려들은 뒤를 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그래서 한국의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진흥왕과 불교 정책[편집]신라에 처음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재위 514~540) 때부터였으나 불교를 진흥, 발전시켜 국가종교로까지 이끈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에 의해서였다. 그의 치세중의 불교 진흥을 위한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자신도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 말년에 사문(沙門)이 되어 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고 부인 역시 영흥사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의 재위 동안의 불교 업적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13]왕 5년(544)에 흥륜사(興輪寺)가 완공되었고, 3월에 비로소 출가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황룡사(皇龍寺) · 지원사(祗園寺) · 실제사(實際寺) 등 여러 사원들을 계속 새로 세웠으며, 왕 27년(566)에 낙성된 황룡사는 13년 동안에 걸쳐 조성된 거찰(巨刹)이었다.왕 10년(549) 봄에 각덕(覺德)을 위시한 유학승(留學僧)들이 계속 귀국하였고, 이때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경전(經典)을 들여왔다.왕 11년(550)에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설치하여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케 하였으며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으로 삼았다. 왕 12년(551)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승 혜량(惠亮: fl. 551)을 승통(僧統)으로 임명, 교단을 지도 · 육성케 하고 이 승통 밑에 대도유나(大導唯那) · 도유나랑(都唯那娘) 등을 두고 승관제(僧官制)를 정비하였다.왕 12년(551)에 승통(僧統)인 혜량(惠亮: fl. 551)에 의해 인왕백고좌법회(仁王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시작되었다. 인왕백고좌법회는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의 내용에 따라 국가의 안태(安泰)를 기원하고 내란(內亂)과 외환(外患)을 소멸시키기를 비는 법회였으며, 팔관회는 본래 하루하나의 계(戒)를 닦는 법회였으나 신라에서는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였다는 점에서 인왕백고좌법회와 함께 팔관회는 국가의 현실적인 의도와 이익에서 베풀어진 법회들이었다.왕 26년(565)에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귀국할 때 1700여 권의 경전을 들여왔다.왕 35년(574)에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성(鑄成)하였다.왕 37년(576)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인도의 승려 비마라(毘摩羅) · 농가타(農伽陀) · 불타승가(佛陀僧伽) 등이 그를 따라 입국하였고 이때 《능가경》·《승만경》 등 발전된 대승경전을 왕에게 바쳤다.이 밖에도 진흥왕은 재위시 신라 국민사상의 총화를 이룬 화랑도(花郞道)를 제정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진흥책은 진흥왕으로 하여금 정교일치(政敎一致) 정책을 써서 불국토(佛國土)를 신라 사회에 현실화시키려 했고, 왕 자신도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념에 심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신라 사회에서의 불교 발전은 진흥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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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명나라의 만력제는 어떤 황제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명(明)의 제13대 황제로서 이름은 주익균(朱翊鈞), 묘호(廟號)는 신종(神宗)이다. 재위(在位) 때 만력(萬曆, 1573~1620)이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여 만력제(萬曆帝)라고 부른다. 1563년 9월 4일 융경제(隆慶帝, 재위 1567~1572)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生母)는 귀비(貴妃) 이씨(李氏)이다. 위로 두 형이 있었지만 일찍 죽어 여섯 살 때인 1568년 황태자가 되었으며, 1572년 7월 융경제(隆慶帝)가 황위(皇位)에 오른지 6년만에 죽자 10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1620년 8월 18일 죽을 때까지 명(明) 왕조(王朝)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48년 동안 황위(皇位)에 있었다.어린 나이에 즉위한 만력제(萬曆帝)는 즉위 초기 10여년 동안은 선제(先帝)의 뜻에 따라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 1525~1582)에게 정무(政務)를 맡겨 내정(內政) 개혁을 추진하였다. 장거정은 고성법(考成法)을 실시하여 관리가 상주(上奏)하여 황제의 재가를 얻은 사안의 집행 여부를 달마다 보고하도록 하여 행정 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고 기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리고 새로 전국의 농지를 측량하고, 이에 근거하여 각종 조세와 요역을 통합하여 은(銀)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하였다. 또한 몽골 타타르[韃靼]에 대해 화평(和平) 정책을 추진하고, 척계광(戚繼光, 1528~1587)과 이성량(李成梁, 1526~1615) 등을 중용하여 왜구(倭寇)나 몽골, 여진(女眞)의 위협에 대한 국방(國防) 체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명(明)의 정치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여 이른바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고 불리는 사회와 경제,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 시기에 명(明)은 이른바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외환(外患)을 극복하고, 국가 재정(財政)을 크게 확충하였다.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해외 무역도 확대하여 은(銀)의 유입이 크게 늘면서 명(明) 문화의 최성기(最盛期)를 가져왔다.하지만 1582년 장거정(張居正)이 죽고 만력제(萬曆帝)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면서 개혁 정책의 후퇴가 나타났다. 장거정은 탄핵되었으며 고성법(考成法)은 폐지되었다. 특히 1586년(萬曆 14년) 이후 만력제(萬曆帝)가 황태자의 책봉 문제로 내각(內閣)과 대립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는 ‘태정(怠政)’을 지속하면서 명(明)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만력제는 황귀비(皇貴妃) 정씨(鄭氏)를 총애하여 장자(長子)인 주상락(朱常洛, 1582~1620) 대신에 정귀비가 낳은 셋째 아들 주상순(朱常洵, 1586~1641)을 황태자(皇太子)로 삼으려 하였다. 내각(內閣) 대신(大臣)들이 종법(宗法)의 원칙을 내세워 이에 반대하자 만력제는 1589년 이후 30여년을 조정(朝廷)에 나오지 않고 정무(政務)을 내팽개치는 태정(怠政)을 하였다. 대신(大臣)들도 몇 년 동안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신료(臣僚)들의 상주문(上奏文)은 회답이 없이 궁중에 방치되었다. 고위 관직이 비어도 후임자를 제대로 임명하지 못해 내각(內閣)이나 지방 관청의 상당수가 관리가 제대로 충원되지 못해 업무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게다가 만력제(萬曆帝)는 국가 재정을 무시하고 개인의 축재(蓄財)에만 힘을 쏟아 1596년(萬曆 24년)부터 환관(宦官)들을 광세사(鑛税使)로 파견하기 시작해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샀다. 광세사(鑛税使)로 파견된 환관(宦官)들은 지하에 광맥(鑛脈)이 있다는 것을 알면 채굴(採掘)을 위해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모두 몰아냈다. 그리고 채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근의 상인들에게 도광(盜鑛)의 책임을 물어 배상을 강요했다. 광세사(鑛税使)들은 상인과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하였고, 환관의 발호(跋扈)가 나타나면서 환관과 내각 사이의 당쟁도 격화하였다. 광세사(鑛税使) 파견은 명(明) 시대에 나타난 대표적인 악정(惡政)으로 꼽힐 만큼 백성들의 반감을 샀지만, 만력제(萬曆帝)는 재위 기간에 광세사(鑛税使)의 파견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모아들인 돈을 왕실 재정인 내탕[內帑]에 두고 개인적인 사치로 낭비하여 더욱 백성들에게 원성(怨聲)을 받았다. 심지어 1618년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가 이끄는 후금(後金)의 군대가 푸순[撫順]을 점령하자 병부상서(兵部尙書) 설삼재(薛三才)를 비롯한 대신들이 랴오둥[遼東] 방어를 위한 군비(軍費)가 모자라 내탕(內帑)에서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만력제(萬曆帝)는 이조차도 거절하였다.만력제(萬曆帝)의 태정(怠政)으로 명(明)은 매우 빨리 몰락하였다. 황태자의 책봉 문제를 둘러싼 내각(內閣)과 황제의 대립은 정치적 불안정과 당쟁의 격화를 가져왔으며, 환관(宦官) 세력이 발호(跋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592년 닝샤[寧夏]에서 일어난 발배(哱拜)의 난(亂)과 1594년 쓰촨[四川]과 구이저우[貴州]에서 일어난 양응룡(楊應龍)의 난(亂), 1592년 조선(朝鮮)에서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 등에 대규모로 군사를 파견하였는데, 이른바 ‘만력3정(萬曆三征)’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들은 명의 국가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이러한 명(明)의 정치적 혼란은 후금(後金) 세력이 강성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누르하치[努爾哈赤]는 1619년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명(明)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명(明) 조정(朝廷)은 웅정필(熊廷弼, 1569~1625)을 파견하여 랴오둥[遼東]의 정세를 안정시키려 하였지만, 결국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농민반란과 후금(後金)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1644년에 멸망하였다.만력제(萬曆帝)는 1620년 8월 18일 죽어 정릉(定陵)에 안장되었고,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정릉(定陵)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에 홍위병(紅衛兵)들에게 파헤쳐졌고, 만력제(萬曆帝)의 유골이 소각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등의 사서(史書)에서 만력제(萬曆帝)는 명(明)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를 받아왔다. 만력제(萬曆帝)가 태정(怠政)을 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타난다. 그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이었고, 등과 다리가 굽은 신병(身病)을 앓아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 1958년 정릉(定陵)의 발굴이 이루어져 만력제(萬曆帝)의 유골이 복원되었는데, 상체가 심하게 굽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그가 아편 중독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어려서 총명함을 보였던 그가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뒤에 급격히 정무를 게을리 한 사실을 두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을 잃음으로써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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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백제 멸망 후 백제에 대한 평가 중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정림사지 5층 석탑 』고구려 승려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27]에 "7월에 운운, 춘추지(春秋智)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의 하시카시(대부인, 大夫人)[28]가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일본서기》권 제26 백제왕 의자(義慈), 그의 처 은고(恩古), 그 아들 융(隆) 등, 그 신하 좌평 천복(千福), 국변성(國辨成), 손등(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소장군(蘇將軍, 소정방)에게 사로잡혀 당(唐)에 보내졌다. 아마도 이것은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일본서기》 권 26 물론 왕의 부인이 여러 명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은고, 대부인(大夫人), 왕후, 당고종의 질책을 들은 여인이 모두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至庚申年七月。百濟遣使奏言。大唐。新羅幷力伐我 旣以義慈王。々后。太子爲虜而去경신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 왕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일본서기》 사이메이 덴노 6년, 660』4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을 양국에 보내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임금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삼국사기》 -의자왕-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 《삼국사기》 -의자왕-또한 '《한서》 '에 따르면 '대부인(大夫人)'은 정실 부인이면서 세자를 둔 부인을 말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태자는 어디까지나 부여융이고 부여효는 잘못되었다고 부정하지만 신라인과 당나라 사람들은 부여효를 태자라고 여겼다.또한 《일본서기》에 은고를 의자왕, 부여융, 그 외 좌평들이 당나라로 잡혀간 원인이 '아마도 이것은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정적 숙청에 은고와 부여효가 깊게 관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644년에 부여융을 태자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작 백제 멸망 당시 기록에는 부여융은 그냥 왕자고 부여효가 태자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이 기록 차이를 해석해 의자왕이 태자를 교체했단 설이 있다. 만약 은고가 부여효의 어머니라서 부여효로 태자를 바꾸고 대부인이 된 거라면 '왕비의 전횡'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만약 태자를 교체했다면 태자궁을 화려하게 꾸몄다는 기록이 있는 655년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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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인돌 아래에 있는 유골은 어떻게 보관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굴된 유골들은 전시가 되어 박물관에 주로 있을 것 같습니다.평창 하리 고인돌. 강원대 박물관.평창 하리 고인돌 유골 옆 동검. 강원대 박물관. 평창 하리 고인돌 유골 얼굴 모습. 코가 오똑하고 장두형 백인과 비슷하다. 강원대 박물관. 알타이 파지리크 백인 미라. 코가 오똑하고 키가 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 박물관.이미지는 불펌이니 검색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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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는 언제부터 간호사라는 명칭을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는 서양의학을 들어오면서 간호사라는 단어가 도입 되었습니다.그렇지만 당시에는 별로 좋지 않은 뜻이었는데요.집 가 노예 노 부릴 사더할 가 노예 노 일 사 등의 의미로 말이죠.정확하게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이 내용은 어디까지나 사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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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자놀이가 최초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자놀이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삼국사기』에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지금의 울릉도)을 칠 때 전선(戰船)에 나무사자(木偶獅子)를 싣고 가서, 사자로 가장하여 위협한 끝에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고(권제4 「지증마립간」), 같은 책에 가야의 우륵(于勒)이 지은 12곡 가운데 사자기(獅子伎)가 있다고 적혔다(『삼국사기』 권제32 「악지」). 이 곡은 사자놀이를 위한 음악일 것이다.신라 최치원(崔致遠, 857~?)이 읊조린 『향악잡영(鄕樂雜詠)』 가운데 산예(狻猊)는 사자놀이이다(『삼국사기』 권32 「악지」).사막 건너 만리 길 오느라털가죽 다 해지고 먼지 뿌옇게 쌓였구나.머리 흔들고 꼬리 치며 어진 덕에 길들었지만용맹스런 기개야 어찌 뭇 짐승에 비기랴?사자놀이가 먼 서역에서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이두현도 “구자국(龜玆國)에서 중국에 들어온 서량기(西凉伎) 계통”이라 하였고, 김학주도 “백거이(白居易)의 시를 들어 서량기(西凉伎)의 사자놀이와 같다.”고 적었다.당무회의 신라박은 『당무회(唐舞繪)』에 실린 신라사자(新羅猊)탈 모습이다. 이에 대한 전기봉(傳起鳳)과 전등룡(傳騰龍)의 설명이다.…(전략) 신라예는 조선반도의 사자춤이다. 사자는 한 사람이 들어가 꾸몄으며 두 손과 발에 각각 사자 머리를 붙였다. 『악부잡록』의 9사자도 이 계통으로 …(중략)… 현대 일본의 경사자(鏡獅子)가 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중국잡기사(中國雜技史)』).두 사람은 두 손과 발의 사자만 들었으나, 꼬리에도 또 하나의 사자 머리가 달린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사자는 모두 여섯이다. 지금까지 신라 사자탈에 관한 자료가 아무 것도 없었던 터에 이 그림이 나와 이만저만 반가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당무회』의 저자는 당시 이 탈을 직접 보았거나 믿을만한 근거를 바탕으로 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한편, 그림 옆에 적은 ‘신라 박(新羅狛)’은 ‘신라예(新羅猊)’의 잘못으로 보인다. 예(猊)라야 사자에 걸맞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중국잡기사』의 일본말 번역판에는 이 부분이 빠졌으며 그림 또한 보이지 않는다.국내 학자로서는 전경욱이 처음으로 앞 그림을 소개하면서 “일본에 전하는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에 신라박이라는 동물 가면을 착용한 가면희도 그려져 있는데, 이는 사자춤의 일종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신서고악도』는 12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화가(등원도헌(原道憲), ?~1159)는 『당무회』의 것을 본 떠 그렸을 것이다. 한편 『신서고악도』의 신라박 옆에 적은 해제 또한 『문헌통고』의 사자춤 내용이므로, 앞에서 든 대로, ‘이리박(狛)’이 아니라 ‘사자 예 (猊)’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사자놀음은 고려로 이어졌다. 이색(李穡, 1328~1396)이 『구나행(驅儺行)』에 “오방귀(五方鬼) 춤추고 사자도 날뛴다[무오방귀용백택(舞五方鬼踊白澤)].”고 읊은 것이 그것이다.조선시대 기록도 적지 않다. 성종 때(1488)의 중국 사신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 “춤꾼들이 말가죽을 뒤집어쓰고 사자와 코끼리로 꾸몄다식사상진몽해박지마피(飾獅像盡蒙解剝之馬皮).”고 적었다. 19세기 말의 유득공도 이렇게 썼다.나례도감(儺禮都監)에 딸린 연극에 산놀음(山戱)과 들놀음(野戱) 두 종류가 있다. 다락에 포장을 치고 노는 산놀음에 사자 · 범 · 만석중 등이 춤을 추며, 들놀음에는 당녀(唐女)와 소매(小梅)가 등장한다(『경도잡지』).송만재(宋晩載)는 『관우희(觀優戱)』에 줄타기 · 불토하기와 함께 사자놀이를 읊조렸다(1843). 또 앞에서 든 『화성성역의궤』와 김홍도(金弘道, 1745~?)의 「평안감사 환영도」에 등장한 사자는 오방색(五方色) 곧, 청 · 홍 · 백 · 흑 · 황색이다.이은수는 사자놀이가 대체로 탈춤의 한 부분임에도 북청 사자놀이는 이름 그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또 오색(五色) 사자인 점에서 우리 사자놀이의 원형이라고 하였다. 최치원의 산예나 백제의 미마지가 일본에 전한 것도 오색사자 놀이이며, 이들의 원류는 중국이라고 덧붙였다.그러나 오색 사자의 ‘오색’은 다섯 마리의 사자일 가능성이 높다. 『당서(唐書)』에 “사자 다섯 마리를 각각 그 방향의 색깔로 꾸몄다.”고 적혔고(권38 「악지 입부기」), 당의 단안절도 『악부잡록』에 “각각 다섯 가지 색깔의 옷을 입었다.”고 한 것이다. 이밖에 두우(杜佑, 735~812)의 『통전(通典)』이나(권146), 『구당서(舊唐書)』의 사자도 다섯 마리로 보이며, 산악(散樂)의 잡희(雜戱)에는 아홉 마리(九頭獅子)도 등장한다. 따라서 본디 다섯이던 것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한 두 마리로 줄면서 오색으로 꾸민 듯 하다.우리 사자놀이는 고구려를 통해 들어온 오방사자놀이, 이와 같은 계통의 가야의 사자기(獅子伎), 백제 기악의 오방사자놀이, 서량기의 영향을 받은 산예 등이 어우러져 성립되었다.중국 사자놀이에는 서하사자(西凉伎)와 오방사자(五方獅子) 두 계통이 있다. 사자춤과 두 어린이의 대화로 이루어진 서량기는 한 무제(서기전 140~87) 때 서역에서 들어왔다. 또 대월지국(大月氏國)에서 후한 장제(章帝, 75~88)에게 보낸 사자를 길들이려고, 궁인이 사자 가죽을 뒤집어 썼으며, 백성들도 이를 따라 사자처럼 꾸미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도 있다.북위(北魏, 386~534) 때는 사자놀이를 궁중뿐 아니라, 절이나 사당 놀이[백희(百戱)]의 하나로 손꼽았다.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내용이다.건중사(建中寺)에서 4월 4일 석가모니 불상을 밖으로 내올 때, 부정을 물리치는 사자가 춤을 추며 인도한다. 한 쪽에서 칼 물기(呑刀)와 불 토하기(吐火) 따위의 재주를 요란하게 펼치고, 채당(彩幢) 줄타기(上索) 같은 특이하고 괴상한 재간도 베풀었다(권1 「건중사」).단안절은 사자놀이가 구자에서 들어왔다고 적었으며(『악부잡록』), 당의 백거이(白居易)도 『신악부(新樂府)』 「서량기(西凉伎)」에 이렇게 읊조렸다.탈 쓴 호인(胡人)과 탈 쓴 사자가 나오누나.나무를 깎아 머리 만들고 실 꼬아 꼬리 달았네.금칠한 눈에 은칠 입힌 이빨 붙이고털옷 털며 두 귀 흔드는 모습서쪽 사막 건너 만리길 온 듯 하여라.…(중략)…머리 돌려 서쪽 바라보는 사자한 소리 구슬피 울자 관객들 모두 슬퍼하네.(하략)…“사막 건너 만리 밖에서 온” 까닭에, “털옷과 두 귀를 흔들어 터는” 것이다. 안서도호(安西都護)는 양주(凉州)가 함락 되기 전, 장안에 사자와 함께 서역사람 둘을 딸려보냈다. 그러나 양주가 적의 손에 들어가면서 안서로 가는 길이 막히자, 둘은 사자를 벗 삼아 근심을 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사자에게 “너는 양주가 떨어진 것을 아느냐?” 묻자, 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슬피운다는 내용이다. 최치원의 ‘산예’는 이 서량기의 사자놀이이다.다섯 방위를 나타내는 청 · 적 · 황 · 백 · 흑색 실로 꾸민 다섯 마리가 등장하는 오방사자무(五方獅子舞)는 남북조 및 수대에 들어온 듯 하다. 사자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서 춤을 출 때, 140명이 태평악을 불렀다(『통전』 권146 「악전」6). 이백(李白)이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여 지은 「상운악(上雲樂)」에도 보인다.늙은 오랑캐 지극한 덕에 감복하여동으로 와 신선의 가무 진상하네.오색 사자와 구채(九彩) 봉황은늙은 오랑캐의 개와 닭 같은 것.(하략)…『당서』의 오방사자무 내용이다.태평악(太平樂)을 오방사자춤이라고도 한다. …(중략)… 털가죽을 뒤집어쓴 사람이 몸을 숙였다 폈다하여, 길들여져 따르는 모습을 짓는다. 두 사람이 고삐를 잡고 털이개로 다섯 사자를 놀린다. 사자는 그 방향 색으로 표현한다. …(중략)… 사자 높이는 한 길쯤이고, 한 마리에 몰이꾼 열 둘이 붙는다. 붉은 두건, 화려한 옷차림에, 붉은 털이개를 든 그들을 사자랑(獅子郞)이라 부른다(권38 「악지」).오방사자춤은 궁중에서 황제를 위해서만 펼쳤다. 민간에서 놀 때는 청 · 백 · 적 · 흑사자는 허용하되, 황사자는 금하였다. 황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까닭이다. 당의 왕유(王維)는 황색 사자춤을 구경한 죄로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대당전재(大唐傳載)』).중당(中唐) 이후 민간에는 일정한 줄거리를 지닌 양주사자(凉州獅子)가 퍼졌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뒤 당이 쇠미해 가는 과정이 주 내용으로, 무대는 변경을 지키는 병사들의 진영이다. 백거이의 시에 보이는 서량기(西凉伎)가 대표적으로, 대체로 사자랑은 이렇게 읖조린다.오늘 이곳에 나온 사자는 고향인 양주를 떠나 중원으로 왔습니다. 나라가 튼튼하고 번영을 누린 옛적에는 양주의 부엌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소박하였습니다. 뽕나무가 잘 자라고 맛있는 포도주와 휘황한 홍루(紅樓)가 즐비하였으며, 호인과 한인이 섞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나라는 썩고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결국 양주는 티베트에 떨어지고 안서길도 막혔습니다. 우리는 고향에도 못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는 장병들을 격려하고, 변경을 지키는 애국의 정열을 서량 사자의 입을 빌려 부추기는 것이다. 서량 사자는 이후 5백 년이 지난 명대에도 농촌에 남아 있었다.오늘날의 사자춤은 오방사자나 서량기와 아주 다르다. 농민이 아닌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가문이나 집단이 벌이는 예능이 된 까닭이다. 불을 토하거나[화사(火獅)], 탁자 여러 개를 쌓아 올린 높은 대 위[고대사자(高臺獅子)]나, 두 다리를 각각 긴 막대기에 묶고 걸으며 춤추거나[고교사자(高蹺獅子)], 6~8미터의 대나무 장대 위에서 재간을 펼치는[고간사자(高竿獅子)] 등 써커스를 닮았다. 사자를 둘이 꾸미는 것은 태사(太獅), 하나는 소사(小獅)로, 태사 한 마리에 소사 네 마리가 등장하는 하남성의 사자놀이는 옛적의 오방사자를 연상시킨다.호남성에서는 사자놀이패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춤을 춘다. 몰이꾼이 춤 동작에 맞추어 축원을 읊조리면, 집주인은 그 보답으로 돈을 낸다. 춤 동작과 덕담 종류는 수십 가지에 이른다. 이것이 ‘공토미사자(拱討米獅子)’로, 토미는 ‘기쁨을 알린다(道喜).’는 말과 소리 값이 닮은 데에서 왔다.광동성에서도 정월 초하루날 사자패들이 각 집을 돌며 춤을 춘다. 이들이 부자집 앞에서 한판 벌이고 나면, 주인은 수 미터에 이르는 참대 장대 끝에 홍포(紅包, 명절 때 붉은 종이 봉투에 넣어주는 축하금)와 녹색 잎을 매달아 올린다. 사자패들은 다시 한 번 신명을 떤 뒤, 서너 겹으로 둘러서서 무동(人塔)을 서고 사자가 이들의 어깨 위로 올라가 입으로 손을 내밀어 홍포를 거둔다. 이것이 ‘사자채청(獅子採靑)’이다. 패들이 다시 춤으로 답례를 하면, 주인은 폭죽을 터뜨려 호응한다.영남(嶺南)의 정월 초이튿날 사자놀이는 이와 다르다. 오색 천으로 꾸민 사자머리와 꼬리에 한 사람씩 들어가 꾸미며, 붉은 탈을 쓰고 갈색의 짧은 옷차림에 참대가지와 버들부채를 든 『서유기(西遊記)』의 사오정(沙悟淨)을 비롯하여, 귀신탈을 쓴 여럿이 뒤 따른다. 이어 10여 명의 붉은 머리띠를 두른 소년들이 손에 창과 방패를 쥐고 징을 두드리며 합세하여 사원으로 가서 참배를 하는 것이다. 이를 사참(獅參)이라 부른다.사자춤은 북방계와 남방계 사이에 차이가 있다.광동에서는 정월에 20~40명이 한 패가 되어, 집집을 돌며 춤을 추고 덕담을 늘어놓는다. 사자 머리는 대오리로 엮은 틀에 종이를 붙여 만들고, 아름답게 채색한 털이나 갈기를 덧붙여 꾸미며, 두 사람이 들어간다. 아래턱이 움직이는 사자도 있으며, 원숭이 탈을 쓰거나 사오정을 본 뜬 탈을 쓴 사람들이 따르기도 한다. 연기가 끝난 뒤, 권법(拳法)이나 봉술(棒術)을 펼치는 점도 북방과 다르다.북방의 사자춤은 동작이 경쾌하고 활발하며 사자는 사실적으로 꾸민다. 서커스 못지않은 재간을 지닌 점도 특징의 하나이다. 북경에서는 수 놓은 공이 달린 작대기를 쥐고 사자춤을 추기도 한다. 수구(繡球)의 율동에 따라 두 마리의 사자가 뛰거나 웅크리거나 몸을 비틀며 뛰는 모양은 북 · 징 · 나팔 소리와 더불어 신명을 자아낸다(『북경풍속도보(北京風俗圖譜)』).일본의 오방 사자놀이는 7세기초 백제 미마지(味摩之)가 들여갔다. 『일본서기』 내용이다.귀화한 백제 사람 미마지가 오(吳)나라에서 배운 춤을 출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사꾸라이(櫻井)에 살며 소년들을 가르쳤다. 마노노이비도데시(眞野首弟子)와 이마기노하야히도사이몬(新漢濟文)이 배워서 춤을 전하였다(推古天皇, 20년[612] 5월 5일).이 글 가운데 오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다.1) 중국 삼국시대의 오이다.2) 서기 280년에 오가 망한 뒤, 강남지방을 이렇게 불렀다.3) 특정한 나라 이름이다.4) 오는 중국 전체를 가리킨다.3)의 경우, 전라남도 구례(求禮)라는 설[금정학(金廷鶴)]과 경상남도 낙동강에 있던 나라라는 설[이영식(李永植)], 전라남도 남원이라는 설[이병도(李丙燾)], 고구려를 가리킨다는 설[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 삼품창영(三品彰英) · 상전정소(上田正昭) · 금석형(金錫亨)]등이 있다.오는 고구려이다. 고구려의 고(高)는 높임말이고, ‘구려’가 나라 이름으로, 구레는 구려의 일본식 표기이다. 일본말 ‘오’의 소릿값이 ‘구레’인 까닭에 이를 고구려를 가리키는 말로 쓴 것이다. 더구나 6세기 무렵의 남중국에는 오가 아니라, 남조의 송(宋)이 있었다. 실제로 오는 222년에서 280년까지 52년간 존속하였으므로 연대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오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강남지방의 통칭이라는 설도 옳지 않다.구레(吳)가 고구려임을 알리는 기사는 『일본서기』에도 있다(「應神天皇」 37년[306]).봄 2월 무오 초하루, 치노오미(阿知使主)와 쓰가노오미(都加使主)를 구레(吳)에 보내어 재봉공(裁縫工)을 구하였다. 이들은 고마로 건너가서 구레로 갈 생각이었다. 고마에 이르렀으나 다시 갈 길을 몰라 길라잡이를 붙여달라고 청하였다. 고마 왕이 구레하(久禮波)와 구레시(久禮志)를 내주어 구레로 갈 수 있었다. 구레왕은 에히메(兄媛) · 오도히메(弟媛) · 구레하도리(吳織) · 아나하도리(穴織) 등 네 여인을 주었다.구레(吳)는 고구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김석형의 지적대로, 백제로 간 두 사람은 길라잡이를 따라 고구려로 들어간 것이다. 만약 이들이 중국 오에 갔다면, 두 사람이 안내 하였다는 말은 사리에 어긋난다. 또 같은 책 진토쿠(仁德)천황 58년(370) 겨울 10월의 “구레국(吳國)과 고마국(高麗國)이 함께 조공하였다.”는 기사도 사실 여부야 어떻든지, 고구려와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국의 오가 어떻게 당시 일본이라는 이름조차 없었던 야마또(일본)에 조공을 바쳤겠는가?앞 책 유우랴쿠(雄略)천황 6년(462) 여름 4월조에도 “구례국(吳國)이 사신을 보내 물건을 바쳤다.” 하였고, 같은 천황이 두 사람[신협촌주청(身狹村主靑) · 회외민사박덕(檜隈民使博德)]을 구레국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사도 있다.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구레는 분명히 나라 이름이므로, 강남 통칭설은 근거를 잃을 수밖에 없다. 한편 『일본서기』를 비롯한 옛 문헌에 고구려를 ‘고마’로 적기도 하였지만, 이는 백제의 이름이 ‘구다라’로 정착된 이후의 일이다.이러한 점에서 나리사와 마사르(成澤勝)가 구례를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던 대방군(帶方郡)으로 비정한 것은 그럴 듯 하다. 『고사기』에도 “오나라 사람들이 건너 왔으며 이들을 구레하라(吳原)에 살게한 까닭에 구레하라라 이른다.”는 내용이 있다(「雄略天皇」). 따라서 이들도 중국 오나라가 아니라 고구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일본에서 오를 중국 전체로 여겼다는 주장을 편 가와타케 시게토시(河竹繁俊)는 “백제의 미마지가 전한 악무는 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하나 …(중략)… 독특하고 커다란 가면을 생각할 때 …(중략)… 중국이 원산지가 아니라 서역이라 불리는 중앙아시아에서 …(중략)…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티벹 · 인도 등의 가면무도극이 아니었나 추정된다.”고 하여 모순을 보였다. 뒤의 말이 사실이라면 탈춤은 고구려에서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6세기의 긴메이(欽命)천황 때 오왕 자손이 기악(伎樂)을 가져왔다는 기록(『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 있으나, 사자놀이는 2세기 뒤 불교와 함께 건너갔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일본서기』에 686년 신라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와라데라(川原寺)의 기악(춤꾼 · 잽이 · 악기 · 의상)을 쓰쿠바 항구까지 옮겼다는 내용이 보인다(「天武天皇」 하 주조 원년 4월 8일). 기악이 절의 공양 의례 외에 귀빈을 위한 잔치에도 등장한 것이다. 이 기악은 신라에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초기의 사자놀이는 절간의 법회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법륭사(法隆寺) 자재장(資財帳)』 등에 보이는 747년 명(銘)의 기악(伎樂) 탈 들이 그것이다. 특히 가장 오랜 것의 하나로 손꼽히는 752년 명(銘)의 정창원(正倉院) 사자는 동대사(東大寺) 대불개안(大佛開眼) 공양 때 쓴 것이다. 이 뒤 사자놀이가 민간에 퍼지면서 신사의 제례에도 나타났다.기악에서는 액막이 역의 치도(治道)를 선두로 사자 · 오공(吳公) · 금강(金剛) · 바라문(婆羅門) 등이 따르며, 사자는 몰이꾼(獅子兒)의 지휘에 따라 춤을 추면서 악귀를 쫓는다. 기악이나 무악같은 고대 예능의 사자는 제장(祭場)의 잡귀를 물리치는 구실을 한다.사자놀이는 8세기에 크게 퍼졌다. 12세기의 「신서고악도(新西古樂圖)」가 좋은 보기이다. 사자꼴 가죽을 뒤집어 쓴 한 사람은 머리에, 다른 하나는 꼬리에 들어가고, 한 몰이꾼과 두 동자(童子)가 뒤에서 징으로 신명을 돋우는 장면이다. 13세기(鎌倉時代)에도 사자놀이를 사월 파일과 7월 15일의 우란분재(盂蘭盆齋) 때 펼쳤으나, 19세기에 사라졌다.중세(12세기말~16세기)에 이르러 사자는 더욱 신성한 존재로 떠올랐다. 각 집의 부뚜막이나 집터를 정화하는 구실을 맡는 한편, 사자가 머리를 물면 무사태평하다는 속신도 낳았다. 또 기우제나 홍수를 막기 위한 의례에도 사자놀이를 베풀었다.사자놀이는 기악뿐 아니라 무악(舞樂)에도 포함되었다. 주로 절간에서 이어온 무악은 당악 · 백재악 · 고려악 · 신라악이 중심이었으며, 특히 ‘고마이누(狛犬)’가 춤을 추었다. 앞에서 든 대로, ‘고마’는 한반도 또는 고구려를 가리키며 ‘이누’는 개라는 뜻이다. 곧 ‘한국 개’이다. 우리네 제주도개와 진돗개가 일본 개의 시조가 된 사실은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에도 신사나 절간 입구 양쪽에 세운 석상을 고마이누라 부른다. 그리고 이들이 잡귀를 쫓는 구실을 하는 점은 사자춤과 일치한다. 이로써 무악도 우리가 전한 증거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이 춤도 15세기 이후 점점 쇠퇴하였다.그러나 민간에서 세시풍속으로 굳어진 사자놀이는 1998년 9월말 현재 7,878개소에서 벌일 정도로 널리 퍼져 나갔다. 현재 전국에 분포하는 사자놀이는 대륙계의 2인 사자와, 동일본에 퍼진 1인 사자 두 종류가 있다. 2인 사자는 몸을 5색 천으로 꾸미고 앞 뒤 한 사람씩 들어가서 춤추는 반면, 1인 사자는 각기 사자탈을 머리에 뒤집어 쓴 여럿이 요고(腰鼓)를 치면서 춤춘다. 앞의 것을 기악(伎樂)사자, 뒤의 것을 풍류사자라 부른다. 이밖에 백명 이상이 들어가 추는 백족(百足)사자도 있다.1인 사자놀이는 간토우지방의 경우, 숫사자 · 암사자 · 중사자 셋이 등장하며, 꽃관을 쓴 소녀 또는 여장한 남자가 연주하는 음악에 따라 춤 춘다. 이로써 잡귀가 달아나고 복이 오리라 여기는 것이다. 이때 배에 달아맨 북을 스스로 치면서 춤 추고 노래를 부른다. 사자 머리 외에, 용 · 멧돼지 · 사슴 · 곰 머리로 꾸미기도 한다.2인 사자놀이는 사자신악(獅子神樂)이라 하여 제례나 전악(田樂)에서도 벌이며, 태신악(太神樂)과 산복신악(山伏神樂)에도 들어 있다. 태신악은 사자가 벌이는 기도와 곡예로 이루어진다. 전국에서 베푸는 악귀 쫓기나 풍년을 기원하는 2인 사자놀이는 대체로 태신악계이며, 범 머리(虎頭)를 쓰고 추는 호무(虎舞)도 있다.앞에서 든대로 기악 사자놀이는 7세기 초 기악의 일부로 한국에서 들어갔다. 이보다 50년 뒤에 들어온 무악(舞樂)에도 사자춤이 들어 있으며, 사자와 연관된 여러 종류의 예능을 낳았다. 기악 사자는 신이 탄 가마(御輿) 앞에서 제례의 행렬을 이끄는 한편, 음악에 맞추어 악귀도 쫓는다. 이것은 뒤에 시골 청소년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복을 빌어주는 연중행사가 되었고, 이를 생업으로 삼은 사람도 나왔다.한국 · 중국 · 일본의 사자놀이를 견주면 다음과 같다.1) 한국에서는 정월 14일과 대보름 및 단오에, 중국에서는 주로 정월 14일과 대보름에, 일본에서는 정월과 7월 15일 그리고 음력 8월 15일에 벌인다.2)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때, 백수의 왕인 사자의 위엄을 빌어 잡귀를 쫓는 동시에 행운을 맞으려는 세시풍속인 점은 공통적이다. 사자를 앞세우고 집집마자 찾아다니며, 무사태평과 풍년을 빌어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3) 사자춤이 중국 기악에서 무악개장(舞樂開場)에 앞서 악귀를 쫓기 위한 음악으로 선두에 서듯이, 우리 강령탈춤과 은률탈춤에서도 길놀이 선두에 서고 하회별신굿 탈놀이에서도 주지춤이 놀이 첫 대목에 등장한다.이와 달리,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에서는 산예가 마지막에 등장하며 영남의 오광대와 들놀음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 이두현은 “기악의 전승과 오기의 전승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하였다.4) 세 나라에서는 모두 사자놀이를 일반인이 펼친다. 그러나 오로지 마을 주민이 참가하는 한국과 달리, 중국과 일본에서 전문인이 펼치기도 한다. 특히 중국에는 대를 이어 오는 가문(家門)도 있으며, 서커스를 닮은 고난도의 기예를 보인다. 일본의 전문인들은 사자를 앞세우고 전국을 돌며 잡귀를 쫓거나 돌림병을 막는 구실을 한다.5) 중국 사자춤은 오락적인 요소가 많아 흥행에 성공한 반면, 일본은 종교적인 성격이 짙다. 중국과 한국 절간에서는 일찍 자취를 감추었음에도, 일본 사찰 무악에서 사자놀이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까닭은 이에 있다. 한편, 우리네 봉산탈춤에도 불교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에게 “문수보살을 태우고 다니던 네가, 석가여래의 명을 받아 노승을 파계시킨 우리를 벌주려고 왔느냐?” 하는 대목이 그것이다.6) 한국 사자는 한 마리가 원칙이며(북청사자놀이도 본디 한 마리였다), 일본도 한 마리가 많다. 그러나 중국은 1~9마리이다. 한편, 북청사자놀이에서 사자가 사람(기생 또는 어린이)을 잡아먹지만(오늘날에는 토끼로 대신한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다.7) 일본에서 오늘날에도 8천여 개소에서 사자놀이를 즐기며, 중국에서도 대중오락의 하나로 쏜꼽힌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 보존하는 덕분에 명맥이 유지되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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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 영화 드라마에서 실명이나 실제 지명이 드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적 고증이나 추후에 실명으로 고소를 피하기 위함이 강합니다. 최근의 개봉한 서울의봄만 하더라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그 인물들의 실명을 쓰지 않는 이유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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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에서 화폐개혁이 일어난 경우가 있을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명 ‘화폐정리사업’으로 알려져 있는 1905년의 화폐개혁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경제침탈을 목적으로 행해진 개혁사업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자주적 의지로 실시한 화폐개혁은 1950년, 1953년, 1962년 3차례였다. 우리나라의 화폐개혁은 경제적 이유보다 정치적 목적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으며, 일부 화폐개혁은 긴급통화조치와 병행되기도 하였다.1950년의 화폐개혁은 한국전쟁 중 실시되었다. 1950년 6월 12일 설립된 한국은행은 업무개시 13일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 피난지인 대구에서 처음으로 한국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이로써 한국은행권이 조선은행권과 함께 사용되고 있던 가운데 전쟁 중 불법으로 발행된 화폐의 남발과 북한화폐의 유통은 경제를 교란시켰다. 정부는 이러한 비상사태를 수습하고자 1950년 8월 28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0호로 「조선은행권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하고 이를 한국은행권으로 등가교환(等價交換)하였다. 이 교환은 1950년 9월 15일부터 1953년 1월 16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고 그 결과 교환대상액 777억원 중 720억원의 조선은행권이 한국은행권으로 교환되었다.1950년의 화폐개혁은 지역별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제1차 교환은 1950년 9월 15일부터 22일까지로 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연결하는 이른바 워커라인 이남 지역과 제주도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제2차 교환은 1950년 10월 25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울·강원·경기 일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제2차 교환 시부터는 세대 당 2만원까지만 현금으로 교환해 주고 초과액은 금융기관에 예치토록 하였다. 제3차 교환은 1950년 11월 11일에서 18일까지 충남북·전남북·경남북·강원 일부 지역에서, 제4차 교환은 1950년 11월 18일에서 1951년 4월 30일까지로 제2·3차의 미시행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정부는 1951년 4월 30일까지 4차례에 걸쳐 화폐교환을 실시하였으나,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미교환 지역이 수개 군에 달하여 1951년 9월 24일부터 특별교환을 재개하였고 1953년 1월 16일 완료하였다.1953년의 화폐개혁은 한국전쟁 중 남발된 통화와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당시에는 전란으로 생산활동이 위축되고 거액의 군사비가 지출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날로 더해지는 가운데 세원포착이 어려워 세수가 감소함에 따라 재정적자가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을 조기에 수습하고 체납국세(滯納國稅)의 일소(一掃) 및 연체대출금 회수 등을 목적으로 1953년 「대통령 긴급명령」에 따라 제2차 긴급통화조치가 실시되었다.1953년 2월 17일 이후 적용된 긴급통화조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폐단위를 원(圓)에서 환(圜)으로 변경(100원→1환)하고 환표시의 은행권 및 주화만을 법화로 인정한다. 둘째, 원표시의 은행권과 전표시의 조선은행권 등 구화폐의 유통을 금지하고, 각종 지급수단도 2월 25일까지 금융기관에 예입하도록 하며, 2월 17일부터 9일간 예금성격을 띤 자금의 인출 및 지급을 정지한다. 이러한 통화조치의 결과 구원화로 표시된 한국은행권 및 조선은행권의 유통이 금지되었고 1953년 2월 17일부터는 다섯 종류의 새로운 한국은행권이 발행되면서 우리나라 화폐의 완전한 독자성이 확보되었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계속 급등하던 물가가 1958년에 이르러 안정되고 화폐가치에 대한 신뢰도 회복하자, 한국은행은 화폐체계의 정비와 화폐제조비 절감 및 소액거래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최초로 주화를 발행하였다. 이로써 한국은행 창립 이후 거의 10년이 지난 1959년에 50환화 및 10환화, 100환화 등 3개 화종이 최초로 발행된 것이다.1962년의 화폐개혁은 높은 인플레이션 등으로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외국원조가 1957년을 정점으로 격감함에 따라 자립경제 확립을 위한 적극적인 자금조달책이 필요했던 가운데 1961년 수립된 군사정부는 성장 중심의 강력한 경제운용계획을 공표하였다. 이것이 1962년 발표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이 계획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화신용 및 외환정책 등에서도 각종 지원책이 필요하였던 바, 정부는 1962년 6월 10일 긴급통화조치와 긴급금융조치를 단행하였다. 긴급통화조치에서는 환(圜)표시의 화폐를 원(圓)표시로 변경(10환→1원)하고 환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였다. 또한 구권과 구권으로 표시된 각종 지급수단을 6월 17일까지 금융기관에 예입토록 하고 후속조치로 금융기관의 신규예금은 물론 기존예금에 대해서도 봉쇄계정에 동결토록 하였다.한편, 한국은행은 새로운 6종의 은행권(500원권, 100원권, 50원권, 10원권, 5원권, 1원권)을 발행하였다. 소액거래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1962년 12월 1일 10전권과 50전권을 발행하였다.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화폐는 개혁보다는 현재의 액면체계가 정립되는 시기이다. 1970년 11월 30일에는 100원화, 1972년 12월 1일에는 50원화의 은행권을 주화로 대체하였으며, 거래단위가 높아짐에 따라 1972년 7월에는 5,000원권이, 1973년 6월에는 10,000원권이, 1975년 8월에는 1,000원권이, 2009년 6월에는 50,000원의 고액권이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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