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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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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정강의변은 무엇인지 알수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휘종(徽宗)은 채경(蔡京)·동관(童貫) 등의 진언에 따라 금과 동맹하여 요(遼)나라를 협공하여 5대 후진(後晉) 때 빼앗긴 연운(燕雲) 16주를 탈환하려 하다가 도리어 실패하여 군사력의 약체를 드러내고 제위를 흠종(欽宗)에게 양위하였다.1126년 카이펑은 금나라의 공격을 받았으나 다액의 금은재물을 제공하고, 중산(中山)·허젠[河間]·타이위안[太原]의 3진(三鎭) 할양, 금나라를 백부(伯父)로 호칭하는 등의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송은 조약을 지키지 않고 금나라의 내부 교란을 획책하였기 때문에 두 번째 공격을 받아 카이펑은 함락되고, 금나라는 휘종·흠종 이하 왕실의 3,000여 명을 포로로 하여 돌아갔다.1127년 흠종의 아우 강왕(康王)이 즉위하여 남송(南宋)이 성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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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문득 궁금해서 그런데 소크라테스에 업적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크라테스(기원전 469/470년 - 기원전 399년)는 서양 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플라톤, 제노폰 등의 제자들의 기록을 통해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소크라테스는 본인이 쓴 저작물은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철학은 윤리와 진리의 추구에 중점을 둡니다. 그는 자아인식과 도덕적 정직성의 중요성을 믿었고, 학생들에게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자신의 생각을 가지도록 격려했습니다.소크라테스의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는 소크라테스식 질문법입니다. 이 방법은 개념이나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도와주기 위해 일련의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방법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지혜를 도전하고 비판적 사고를 장려했습니다.소크라테스는 원칙에 대한 그의 불굴의 신념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전통적인 종교적 신념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비난받았으며, 독주로 처형되었습니다.비록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지만, 소크라테스의 유산은 세기를 초월하여 이어져왔습니다. 자아 검토와 윤리적 행동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현대 철학에서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그의 소크라테스식 질문법은 비판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을 가르치는 도구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소크라테스의 명언"생각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나는 아는 것이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나는 나 자신을 깨우치는 것을 교육이라 부른다.""남의 말을 믿지 말고, 직접 경험해 보라.""진리는 간단하다.""시작이 반이다."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하루도 일하지 않은 것과 같다.""인간이 미워하는 것 중에 가장 불안한 것은 불확실성이다.""언제나 진실을 말하라, 그러면 기억하기 쉽다.""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를 다스린다, 멍청한 사람은 그의 욕망에 이끌린다.""위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은 위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라.""진실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실을 숨기는 것이 어렵다.""나는 인간인 것이 더 중요하다.""높은 것은 아름답지만, 지혜로운 것은 더 아름답다.""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아무것도 확실히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철학적인 삶의 시작이다.""아름다움은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다.""우리는 영혼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이다.""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단순함은 복잡함보다 높은 지혜를 나타낸다.""내게 하나의 지식을 주면, 나는 두 배로 갚을 것이다.""진리는 시련과 고난을 겪은 사람들만이 찾을 수 있다.""올바른 대화는 모든 것을 치유한다.""너 자신을 알라.""우리는 영혼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찾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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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현대소설책을보니 품바공연이나오던데 품바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장터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동냥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입니다.시장에서 혹시 공연하시는 분들을 본적 없으신지요? 공연 후 주로 엿을 팔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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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수지킴 간첩 조작사건은 어떤 사건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개요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은 윤태식이 부인 수지 김을 살해하고 저지른 월북 미수 사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여러 사건들을 의미한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명백한 피해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필요에 따라 그녀를 간첩으로 내몰았고 이는 결국(결과적으로는) 반공주의를 운운했던 당대 정권들이(혹은 국가기관) 가지고 있던 안보관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서 그녀의 유족들, 아니 자국의 안보마저 엄청난 위해(危害)를 초래하게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사건 전개 과정사건의 시작은 일반적인 살인 사건이었다. 1987년 1월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나간 윤태식은 사업자금 문제로 아내 김옥분과 말다툼을 하다가 흥분해 김옥분을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김옥분은 충북 충주의 1남 6녀의 가난한 농촌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루 일당 540원인 버스 안내원을 시작으로 서울의 공장을 거쳐 미8군 술집, 일본인 대상 유흥 접객원 등의 거친 일을 하다가 홍콩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서 영국령 홍콩으로 이민을 갔지만 곧 이혼하고 또 다른 홍콩 남자를 만났지만 오래 못 갔는데 그러다가 만난 사람이 윤태식이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 와서 겉이 번지르르한 젊은 남자가 감언이설로 다가서자 고마운 마음에 덜컥 결혼한 것이 화근이었지만 6세 연하인 윤태식은 자격지심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폭력을 휘둘렀고 결국 채 몇 달도 함께 살지 않은 1987년 1월 3일 아내를 살해하고 말았다.후일이 두려워진 윤태식은 싱가포르로 날아가 북한 대사관에 망명(월북)을 신청했지만 아무리 체제경쟁이 심해서 누구라도 월북하면 선전용으로 써먹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살인범을 선전용으로 써먹을 가치는 없으니 당연히 북한 대사관은 윤태식을 쫓아냈다. 그러고 나서 찾아간 곳은 미국 대사관이었는데 당연히 여기서도 쫓겨났고 미국 대사관은 한국 대사관에 연락해 행동이 수상한 자가 왔다 갔음을 알려줬다. 결국 윤태식은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으로 끌려왔는데 이 때 살인 혐의를 피하기 위해 아내가 간첩이었다는 시나리오를 지어냈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 제21조 3항에는 이 법의 죄를 범한 자를 체포할 때 반항 또는 교전상태하에서 부득이한 사유로 살해하거나 자살하게 한 경우에는 체포한 경우에 준하여 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생포해야 하지만 죽여 놓고 반항 또는 교전상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인 셈이다. 윤태식은 영화광이었고 시나리오도 첩보영화들을 보고 고안한 것이었다.그 시나리오는 "사실 아내는 '수지 김'이라는 북한의 간첩으로, 빚쟁이들에게 잡혀 있다며 싱가포르로 자신을 불러내 북한 대사관으로 끌고 와 납치하려 했고 자신은 탈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한국 정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1987년 당시의 한국은 전두환 정권 타도로 시끄러웠고 제5공화국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쏠리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윤태식의 시나리오를 이용하기로 했다. 즉, 사건의 진실인 '살인+자진 월북(시도)' 사건을 도리어 '납북' 사건으로 조작하였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장세동의 지휘 아래 사건 조작이 전개되었다. 그렇게 '반공, 반공' 하면서 정작 진짜 월북하려던 인간은 봐주고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간첩으로 만드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살인자와 안기부의 더러운 공모윤태식은 안기부 해외 공작원들로부터 입국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철저히 교육받았으며 실제 입국할 때의 보도 자료를 보면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야 서울에 온 것 같습니다"라고 울먹이는 어조로 답하고 심정을 묻자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너무 무서워가지고요 말을 못하겠어요"라는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물론 홍콩에서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있었다. 시체를 침대 밑에 숨겼는데 당연히 부패되어 냄새가 났고 옆집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여 시체를 발견했다. 외부의 침입 흔적이나 제3자의 족적이나 지문, 모발 등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집안에서도, 피해자 부부의 행적과 지인에 관한 수사에서도 북한이나 정치, 사상 등과 관련된 그 어떤 자료/문서/기타 흔적은 없었만 한국 정부는 '대공사범(국가안보 관련 사범)'이라는 핑계로 홍콩 경찰의 정당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다.한편 윤태식이 스스로 월북하려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 역시 곧바로 대공분실로 끌려가 몽둥이 찜질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모든 사건의 전모와 함께 북한으로 망명하려 했다는 것까지 실토했다. 이 사건을 다룬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는 윤태식을 직접 패던 안기부 직원이 "이 새끼 이거 완전 개구만?"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원칙대로라면 윤태식은 이 시점에서 살인 및 월북 시도 혐의로 감옥에 보내져야 했지만 그러면 간첩 (조작)사건 작전이 망쳐진다는 이유로 그냥 출국만 막고 살인범을 그냥 풀어주고 방치했다.피해자인 김옥분은 억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서 미인계를 쓴 희대의 여간첩이라고 왜곡 선전되었고 언론들은 안기부의 지시대로 온갖 소설을 휘갈겨 댔다. 한국 언론은 ‘여간첩 수지 김’ 이야기를 연일 대서특필했으며 심지어 당시 방영 중이던 KBS 드라마 은 중간에 ‘수지 김’이라는 여간첩 배역을 만들어 투입하기까지 했다. 물론 진실이 밝혀진 홍콩에서는 ‘수지 김은 간첩이 아니며 윤태식에 대한 납치 흔적은 없다’라는 보도가 계속 나왔지만 보도통제가 살아있고 인터넷도 없어서[7] 외신을 접하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보니 한국에서는 그런 진실이 알려지지 않았다.피해자 유가족의 피해피해자 유가족들은 온 가정이 완전히 붕괴되었다.김옥분의 셋째 여동생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에서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뉴스를 보고 고향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가 "지금 전화하지 마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때 친정집에는 이미 헌병들이 찾아온 상황이었으며 헌병들은 김옥분의 엄마와 오빠를 끌고가서 '당신 딸이 간첩이었다는 걸 실토해라', '언제 어디서 공작금을 받았는지 실토하라'며 60세가 넘었던 노모를 군화로 짓밟았다. 뿐만 아니라 그때 김옥분의 어머니가 입고 있던 코트가 공작금의 증거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둘째 여동생은 남편, 3살 아들과 함께 끌려왔고 고문을 당하는 사이 가족들조차도 안기부에게 세뇌당하기 시작했다.고통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간첩의 가족이라며 연좌제로 세상의 멸시를 당했고 실제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가혹행위를 수반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간첩의 가족'이기 때문에 보안감찰이라는 명목으로 안기부의 감시가 일상화되었으며 직장과 학교에 틈만 나면 연락을 취해 행적을 캐물으면서 민폐를 끼쳤고 당연히 그들이 매사에 눈총을 받게 만들었다. 당연히 유가족들은 제대로 된 일상생활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해져 직업을 가지기 어려웠고 결혼 생활도, 학교에 다니기도 힘들었으며 신분을 숨기고 연락을 끊어야 했다. 어머니는 이로 인해 실어증을 얻어 1997년에 사망했고 나머지 형제자매 5명도 고초를 겪었다.전매청(현재 KT&G)에 다니던 큰언니는 사건 직후 해고된 뒤 정신질환자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그해 겨울에 타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큰언니의 남편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1988년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고 폐인이 되었다. 오빠도 주위의 비인간적 멸시 속에 술에 의지하다 2000년에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목격자에 따르면 대형 트럭이 2번이나 후진하면서 아예 깔아뭉갰다고 한다. 윤태식을 형사고발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여동생 4명 중 3명은 이혼당했고 그 자녀들도 간첩의 가족이라며 학교에서 집단괴롭힘을 당해 자퇴하고 가출, 방황했는데 그 중에서도 셋째 여동생이 가장 비참했다. 당시 그녀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김옥분이 남파공작원이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시댁 식구들이 몰려와서 언어/육체적으로 폭행하고 강제로 이혼당했다. 당시 3살이었던 아들은 남편이 양육하기로 했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남편의 가족(고모들)이 연좌제의 피해를 입을 것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남편 몰래 아이를 절에 내다버렸다. 이로 인해 아이는 8년이나 부모를 모른 채 고아 아닌 고아 신세로 살았다고 한다.국가안전기획부와 윤태식은 아내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그녀의 가족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까운 친척마저 지옥으로 떨어뜨렸다.윤태식의 활동과 윤태식 게이트의 서막사건 이후 안기부 직원들과 친분을 맺었는지 윤태식을 감시만 했고 윤태식은 아내의 죽음과 관련해 구속조치 같은 건 받지도 않은 채 사기 행각을 일삼다가 형사 처벌을 받으면서도 안기부의 묵인과 도움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하면서 살고 있었다.윤태식은 자금을 마련해 영화 배급 사업에 손을 댔다가 쫄딱 망한 뒤 본인 회사의 직원들이나 주변 여자들을 통해 얻은 회사원 20명 등의 신분증, 재직증명서를 위조해 신용카드 수십 장을 발급받아 5개월 동안 수억 원을 사용하다가 1994년부터 2년 6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8] 이 밖에도 중국산 위폐개수기를 자신이 개발한 것처럼 속여 금융기관에 납품될 제품의 공급권을 주겠다며 돈을 빌려 가로채거나 중국 푸둥지구에 건설 사업을 따게 해 주겠다고 했다가 흐지부지되어 사기 혐의를 받는 등 사기 행각을 지속해 왔으며 적발되어도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재기했다. 1996년 7월에 출소한 윤태식은 교도소 수감 시절 알게 된 교도소 동료로부터 지문인식 관련 사업을 하는 회사를 소개받아 동업을 했는데 이 동료로부터 모 언론사 사장 부부를 소개받아 이들을 끌어들여 이전 동업자와 결별하고 1998년에 ‘패스21’이라는 벤처기업을 창업했다. 패스21의 초기 자본은 이들 부부 중 웨딩, 가구 관련 사업을 하던 부인이 대부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두 아들도 패스21의 감사와 이사를 지내는 등 이들은 패스21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고 윤태식은 위에서 언급된 교도소 동료로부터 김모 전 국회의원을 소개받아 그를 통해 정관계 로비를 진했다.오랜 기자 생활로 정관계에 발이 넓었고 언론사 사장이었던 김모 사장과 전 국회의원의 비호를 통해 윤태식의 패스21은 재경부 장관을 지낸 인사를 대표이사로 영입하기도 했으며 정통부 장관은 물론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기술 설명을 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러한 로비와 더불어 90년대 후반에 불어닥쳤던 벤처 열풍으로 인해 패스21의 장외 주식은 15만 원에서 30만 원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윤태식은 장부상 수백억 원 대의 부자가 되었다. 심지어 김모 사장이 고등학교 동창인 이종찬 당시 국정원장에게 부탁해 윤태식이 국정원에서 기술시연회를 열기도 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윤태식은 주목받는 사업가로 아침 방송에도 출연했다.의혹 제기와 재조사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고 아무리 봐도 내세울 게 없던 윤태식이 갑작스럽게 벤처 사업가로 잘 나가는 것을 보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결국 2000년 주간동아에서 이정훈 기자가 처음으로 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이정훈 기자는 1994년 주간조선에 근무할 때 부장으로부터 이 사건을 전달받은 뒤 당시 싱가포르 대사였던 이장춘 대사와 국제전화로 통화를 하고 수지 김의 유족들을 만나면서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단 당시에는 아직 안기부의 힘이 막강한지라 기사가 나가지 못했고 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보도할 수 있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자세히 취재하여 방송했다.수지 김의 유족들은 간첩 누명 자체는 정권 차원에서 조작된 거니 당장 어찌할 수 없다고 쳐도 최소한 윤태식의 살인 행위만큼은 사전에 알고 있었으니 감옥으로 보내졌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방송 등을 통해 윤태식이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았다는 것을 알게 된 유족들이 분노해 검찰에 수사 요청을 했지만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전해철이 유족들의 법률대리인을 맡아 노력한 끝에 그 과정에 안기부의 압력과 방해 공작이 있다는 의혹 등 모든 진실이 결국 만천하에 드러났다.이때 국정원과 윤태식, 그리고 정치권의 커넥션이 폭로되었다. 국정원은 윤태식을 철저하게 입단속시켰으며 1991년부터 출국을 금지하고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고 윤태식도 이를 이용해 잘 먹고 잘 살았을 뿐 아니라 벤처열풍을 틈 타 패스21 주식을 여러 국회의원들, 그리고 언론 각계 인사들에게 뿌려대며 로비를 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벤처 3대 게이트에 번외로 들어가기도 하는 '윤태식 게이트'라는 헬게이트를 소환했는데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공소시효 만료를 50일 남겨두고 간신히 윤태식을 구속한 검찰은 홍콩 경찰들에게서 받은 수사자료를 토대로 윤태식이 살인범이자 사기꾼이며 여기에 국가 기관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 사건에 관여한 공직자들은 한 집안 사람들 모두의 인생을 망쳐 놓고도 공소시효가 매우 짧은 현행법 때문에 처벌은커녕 재판조차 받지 않았고 분노한 유족들은 국가와 윤태식, 그리고 장세동을 비롯한 과거 국정원 고위관계자들에게 손해배상소송을 걸었다.법원은 죄질이 너무 나쁜 데다 반성도 안 하고 있으니 중형을 받아 마땅하다며 윤태식에게 살인죄로 징역 12년, 기타 비리로 징역 3년 6개월 등 징역 15년 6개월을 선고했으며 국가가 유족들에게 42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명했다.[18] 이 배상금 액수는 당시 정부가 배상한 손해배상 사건 중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큰 금액이다. 국가도 장세동을 비롯한 안기부 간부들과 윤태식에게 구상권을 행사했고 결국 대법원은 장세동에게 9억, 윤태식에게 4억 5천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윤태식의 재산은 이미 공중분해되었고 장세동은 이미 시가 8억 원대의 빌라를 처분하는 등 재산을 빼돌린 뒤였다. 현재까지도 아직 남은 구상금 6억여원을 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수지 김 사건은 단순한 실수’라는 등 반성보다는 합리화하기에 바빴다. 장세동 재산, 없나? 숨겼나? 물론 이 돈을 다 받았다고 해도 유족들이 그동안 받아온 모욕과 고통이 위로될 리는 없을 것이며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유족들은 재조사 이후에야 수지 김이 묻힌 곳을 홍콩 현지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유해를 수습할 수는 없었는데 홍콩 당국에서 무연고자 시신으로 처리해서 다른 무연고자 시신들과 함께 한 곳에 모아서 묘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묘지의 흙을 고향으로 가져와서 고인의 어머니의 묘지에 뿌렸다고 한다.재조사의 영향결국 국정원은 2003년 8월 21일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안전기획부가 사건을 조작한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며 사망한 김옥분과 유가족 그리고 국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지만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뒤였다.이 사건으로 국정원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지나면서 좀 나아졌나 싶었던 인식이 다시 극심하게 나빠졌을 뿐 아니라 신뢰도가 바닥을 기면서 해결해온 사건들도 조작 아니냐며 의심받는 등 궁지로 몰렸다. 특히 이 사건으로부터 10개월 뒤에 제기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음모론은 수지 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직후 절정에 달했다. 물론 철저하게 자업자득이었다.국가가 개입해서 부당하게 개인은 물론이고 그 주변인들의 인생까지 망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소시효가 고작 1~3년 정도밖에 안 되어 관련자 대부분을 형사기소하지 못해서 이들은 아무런 처벌은커녕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국가가 저지른 반(反)인륜적 범죄에는 시효를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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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문하시랑평장사는 어떤 벼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문하시랑 ·문하평장사라고도 한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다음 자리로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와 같은 지위이다. 성종 때 처음 두었으며 1061년(문종 15) 정2품, 정원 1명으로 정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원(元)나라의 강요로 관제를 격하 ·개편할 때, 중서시랑평장사와 합쳐져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개칭하였다. 1298년 폐지하였다가 다시 두었다. 1308년 중호(中護)로 개명하고 3명으로 증원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 반원운동의 일환으로 다시 문하시랑평장사, 정원 1명으로 바꾸었다. 1362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1369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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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키비스트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록물의 보존을 담당하는 전문가를 말한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보존의 범주 안에는 유지, 관리, 분류 등의 개념이 포함된다. 한마디로 기록 업무만을 담당하는 전담 인력. 특성상 사서나 복원전문가 등의 직업과 교점이 있다.사실, 아직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뚜렷한 아키비스트의 번역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명칭으로 혼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키비스트(Archivist), 기록물관리전문가, 자격증은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공무원은 기록연구사라는 명칭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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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백제의 멸망은 어떻게 된건지 알수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나·제 동맹이 깨지고 한강 유역을 신라에 빼앗긴 백제는 국력을 키우는 데 온 힘을 쏟았어요. 그러다가 제30대 무왕 때에 이르러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지요.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 또한 신라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을 빼앗고, 신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까지 점령했어요. 또한 당성(경기도 화성에 있는 산성)도 점령해 신라가 힘겹게 마련한 당나라와의 통로를 막아 버렸어요.나아가 백제는 고구려와 사이좋게 지내면서 신라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어요. 결국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어요. 신라와 당나라는 연합군을 결성(結成)하게 되는데, 이를 ‘나·당 연합군’이라고 해요. 나·당 연합군은 힘센 고구려보다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했어요.당나라가 신라와 손을 잡은 까닭은 한반도 전체를 차지할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에요.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총사령관이 되고, 신라의 김인문이 부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향해 쳐들어갔지요. 의자왕은 의직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주어 백강(지금의 금강 하류 지역)에서 당나라 군사를 막게 하고, 계백 장군에게는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신라 군사를 막게 했어요.계백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들러 아내와 자식들을 불렀어요.“당나라군과 신라군이 공격해 오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면 신라나 당나라의 종이 될 것이다. 어찌하겠느냐?”“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백제인으로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아버님의 칼에 죽게 해 주시옵소서.”계백은 눈물을 흘리며 가족을 차례로 베고 싸움터로 나갔어요. 계백과 백제군은 신라보다 먼저 황산벌에 도착했어요. 계백은 병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험한 언덕을 골라 배치했어요. 그리고 비장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했어요.“신라군은 5만이지만 우리 백제군은 5천에 불과하다. 하지만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다면 반드시 백제군이 이길 것이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버리고 나와 더불어 죽을 결심으로 적을 쳐부수도록 하자.”병사들은 계백 장군이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병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계백 장군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했어요.2.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이윽고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의 5만 군사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도착했어요. 김유신은 황산벌에서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어요. 먼저 도착해 있던 품일 장군이 수차례 백제를 공격했지만 매번 패했다는 것이었어요.품일 장군은 백제군을 가볍게 보고 덤벼들었으나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백제군을 당해 낼 수 없었던 거예요.“성급하게 공격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김유신은 새로운 작전을 짜서 백제군을 공격하기로 했어요.다음 날 김유신은 기습 작전을 썼어요. 하지만 백제의 진(陣)을 뚫지 못한 채 돌아왔어요. 그 다음 날, 김유신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백제군을 일제히 공격했어요. 처음에는 신라군이 이기는 듯했지만 갑자기 백제군이 반격을 해 와서 신라군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어요.“왜 신라는 5만의 대군으로 5천의 백제군을 이기지 못하는가?”신라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어요. 하지만 수차례 신라의 공격을 막아 낸 백제 진영도 부상당한 병사들이 넘쳐났어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야 한다는 결심만으로 버티고 있었지요.그러던 어느 날, 신라 진영에서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더니 어린 병사 하나가 백제 진영으로 돌격해 왔어요.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이었어요. 관창은 백제군을 상대로 용감히 싸웠지만 곧 사로잡히고 말았지요.계백은 어린 관창을 살려 보냈지만 관창은 계속해서 돌격해 왔어요. 계백은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어요. 목숨을 버리고 싸운 관창의 용기에 신라군들은 다시 힘을 얻었어요.“백제군을 무찌르자! 관창의 원수를 갚자!”백제군도 질세라 큰 소리로 외쳤어요.“끝까지 싸워 마지막 충성을 다하자!”백제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신라군에게는 어쩔 수 없었어요. 결국 계백과 5천의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전멸(全滅)하고 말았지요.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어요. 웅진성으로 피해 있던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나·당 연합군에 항복했다고 알려졌어요.(잠깐! 예식진 일가족 무덤이 2012년 당나라 서울인 지금의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발견되었는데, 해당 묘지명에 따르면 부하 장군이었던 예식 장군이 의자왕을 당 군에게 바치고 항복하게 한 것으로 적혀있어 갑작스런 의자왕의 항복에 대한 의문이 풀렸답니다.)의자왕을 비롯해 왕자, 왕족들, 백제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어요.이로써 백제는 700여 년 만에 망하고 만 거예요. 그러나 백제의 백성들과 남은 군사들이 복신 장군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復興)군으로 다시 일어섰지요.백제는 멸망 후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이 왕자 풍을 왕으로 받들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말아요.복신은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 왕자를 왕으로 받들고 백제 왕조의 부흥을 선언(宣言)했어요. 백제 부흥군이 조금씩 백제의 영토를 되찾아 나가자, 위기를 느낀 신라는 다시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어요.하지만 백제 부흥군을 지휘하던 풍 왕자와 복신 사이가 갈라졌어요. 결국 왕자 풍은 복신을 죽이고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어요.지도층의 분열로 백제 부흥군의 힘은 매우 약해졌어요. 왕자 풍은 일본에서 백제를 위해 보내 준 수백 척의 배와 군사들을 이끌고 백강에서 싸움을 벌였지만 끝내 지고 말았어요.백제 부흥군은 뿔뿔이 흩어지고 부흥 운동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요. 의자왕의 항복 이후 4년 동안 계속된 백제 부흥군의 싸움도 막을 내리고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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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미국의 팁을 주는 문화는 언제생긴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Tip은 To Insure Promptness의 약자로 '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로 알려져 있습니다.16세기 유럽 귀족들은 평민이나 하인들에게 서비스 대가이자 사회적 약자를 도우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일부로 약간의 돈을 남기는 관례가 있었습니다.또한 귀족이나 부자가 거스름돈을 돌려받는 것은 인색하다고 인식하면서 잔돈을 팁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이 문화가 남북전쟁이 끝난 미국으로 확산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가장을 잃은 과부와 어린이들이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서비스업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팁을 베푸는 문화가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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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요 라는 장난감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이로스코프 원리를 이용한 스킬토이. '다시 돌아오다'라는 필리핀어이기도 하다.의외로 요요의 시작은, 작은 돌을 예리하게 갈은 후 질긴 실을 꿰어 만든 필리핀 원주민의 무기라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릴 때 갖고 노는 가벼운 장난감으로 취급되지만, 본격적으로 파고 들면 해볼 수 있는 기술이 정말 많은 스킬 토이 중 하나.요요의 구조는 대체로 본체와 베어링, 축, 패드로 이루어져 있고, 일부 요요는 베어링을 양쪽에서 고정시키는 두개의 스페이서를 포함하고 있다.롱 슬리퍼를 걸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요요가 자동으로 올라오는 클러치 요요 및 손목 스냅이나 강제 리턴이라는 스트링 기술을 사용하여 자신이 직접 끌어올려야 하는 초창기의 고정축 요요나 베어링 요요가 있다.베어링의 종류로는 요요가 나온 초창기 때의 나무 베어링부터 나일론(혹은 플라스틱) 베어링, 그리고 메탈 베어링이 있다. 본격적으로 기술을 연마하려면 메탈 베어링을 사용하는 요요를 써야 하는데, 메탈 베어링의 종류로는 대체로 볼 베어링이 많으며, 슬라이드 베어링도 종종 쓰인다.요요는 재질과 형태에 따라서, 또는 각 요요에 적합한 종목에 따라서 분류되는데 재질에 따른 분류하면 보통 플라스틱 요요와 풀메탈 요요로 나뉘며 형태로는 나비형(버터플라이), 드럼형(모디파이)으로 나뉜다. 4A용 요요는 나비형 요요이지만 따로 분류된다. 일반적인 나비형보다 훨씬 크며 몸체가 비교적 탄성이 좋은 재질이거나 매우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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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고종의 개화정책에 대해서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의개화를 실행하기 위하여 1880년대에 정부 주도로 추진한 정책.개설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된 뒤 조선은 근대 열강과의 통상 교섭이 확대되고 열강의 도전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국내외 정세변화에 대처하며 나라의 독립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노력이 선각자들과 초기개화파 관료들 사이에 나타났다.그들은 개항 이후의 정세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계승하면서 열강의 선진 과학 기술을 배우고,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부강한 근대 국가의 체제를 갖추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초기 개화정책의 움직임은 1878년부터 현저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열강의 약육강식의 정책 아래 늦게 출발한 개화정책은 수많은 시련에 부닥쳤지만, 우여곡절 속에서도 줄기차게 진전되어 많은 성과를 냈다. 1876년의 개항부터 1884년 갑신정변 직전까지의 개화정책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개화기 새 관제의 설치개항 이후 국내외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국가 기구로는 부적합하였다. 즉, 대외통상의 새로운 과제에 적응하기 위한 정부 기구의 개편이 요청되었다.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는 이러한 새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 기구 개혁의 첫 출발이었다. 1880년 음력 12월(양력 1881년 1월)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은 종래의 의정부·육조기구와는 별도로 전혀 새로운 기구였다.설치 목적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정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章程>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무(時務)를 강구하고 변통(變通)을 참작함을 전담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리기무아문이 처음 신설될 때에는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담, 관장하도록 하였다.통리기무아문은 내외의 군국기무를 총지휘하는 기능을 담당했으므로, 대신 중에서 총리를 임명하고 지위를 특별히 높여 정1품 아문으로 정하고, 사무를 감독, 관장하게 하여 의정부와 마찰이 없도록 하였다.통리기무아문은 그 뒤 세 차례의 개편이 있었다. 1차 개편은 1882년 11월 통리기무아문을 통리아문과 통리내무아문으로 분화시키고, 밑에 동문(同文)·군무(軍務)·통상(通商)·이용(理用)·전선(典選)·율례(律例)·감공(監工)의 7사를 두도록 하였다.2차 개편은 1882년 12월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개칭하고, 밑에 정각(征搉)·장교(掌交)·부교(富敎)·우정(郵政)의 4사를 두었다. 그리고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개칭하고, 밑에 이용·군무·감공·전선·농상(農商)·장내(掌內)·농상(農桑)의 7사를 두었다.이 때, 김윤식(金允植)·박정양(朴定陽)·어윤중(魚允中)·김홍집(金弘集)·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김명균(金明均)·변원규(卞元圭)·윤기진(尹起晉)·이원긍(李源兢)·윤치호(尹致昊)·이건호(李健鎬)·여규형(呂圭亨)·고영철(高永喆)·장박(張博)·김기준(金基駿) 등 초기개화파들이 크게 진출하였다.그리고 1884년 10월 단행된 3차 개편으로 두 개의 아문 중, 통리군국사무아문은 의정부에 통합시키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만 남게 하여 기구가 축소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갑오경장때까지 지속되었다.개화기 신식 군대의 창설조선은 개항 전후 열강의 도전, 특히 두차례의 양요(洋擾)와 운요호사건 그리고 무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고압적 외교의 경험에 비추어 군사력의 강화가 시급함을 절감하고 군제개편과 신식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당시는 실제로 외교의 자주성 정도가 국가무력의 강약에 크게 좌우되었다. 일본을 비롯한 조선의 모든 인접 국가들이 최신식 무기로 장비를 갖추고 무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조선은 군대를 하루속히 근대화하여 국가 방위의 힘을 기르는 것이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여기게 되었다.정부는 먼저 1880년에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온 별군관(別軍官) 윤웅렬(尹雄烈)이 중심이 되어, 오영(五營)의 군문으로부터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1881년 4월 무위영(武衛營) 소속으로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다.별기군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대로서, 근대식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신식 군사 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종래 군제였던 훈련원·어영청·수어청·금위영·총융청의 오군영제를 무위영·장어영(壯禦營)의 이군영제로 개편하였다.별기군의 교련소 당상(堂上)에는 민영익(閔泳翊), 정령관(正領官)에 한성근(韓聖根), 좌부령관(左副領官)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원(金魯元), 참령관(參領官)에 우범선(禹範善), 교관에는 일본군 육군 소위 호리모토(掘本禮造)를 초빙하여 신식 교련을 시켰다.별기군은 소부대로서 구식 군대를 완전히 대치할만한 대규모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부는 장차 별기군을 확대하여 구식 군대를 모두 신식 군대로 바꾸려고 하였다. 별기군은 임오군란에 이르러 구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로 한때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군대의 근대화는 초기 개화정책의 기본적 내용의 하나가 되었다.개화기 과학기술 유학생의 파견개항에 뒤따른 무비자강(武備自强)의 일환으로 김윤식·어윤중 등 개화파들이 중심이 되어 유학생을 파견해서, 중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과학 기술 및 병기의 도입과 학습을 시도하였다.개화파들은 젊은 국왕 고종을 움직여 중국으로부터 병기 학습을 위한 과학 기술 학도의 유학 파견을 종용하였다. 그래서 1879년 7월 조선측 이유원(李裕元)과 청나라측 이홍장(李鴻章)은 학도 파견에 대해 교섭을 벌여나갔다.그 결과 1880년 4월 조정 대신들의 소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초기 개화파의 자문을 받은 고종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유학생 파견이 추진되었다.우선 정부는 변원규(卞元圭)를 파견하여 청나라와 유학생 파견에 대한 장정(章程)을 체결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변원규가 4개조로 된 약관을 성공적으로 체결하고, 1880년 11월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학생 파견 준비가 추진되었다.그러나 국내외의 반발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도리어 오랑캐를 불러들이는 매개가 된다”고 하며 강력한 반대 상소가 있었다.그리고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신군제와 군사훈련은 일본의 것을 참작하여 실행할 것을 권유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청나라에서도 그들에게 부담이 되는 사업이라 여기도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그러자 1881년 이른 봄, 초기 개화파들은 청일 양국 사이에 중립형평책을 써서, 일본에 대해서는 이른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는 일본국정시찰단을, 청나라에 대해서는 공학도(工學徒)를 각각 파견하도록 하여, 두 이웃나라에 들어와 있는 근대 문물을 널리 받아들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신사유람단은 예정대로 일본으로 출발했으나, 청나라에의 ‘영선사(領選使)’라는 공식 명칭의 유학생사절단 파견은 처음 4월 11일로 출발 일자로 택정했다가, 다섯 차례나 날짜를 지연, 변경하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9월 26일에야 출발하게 되었다.영선사 단원을 보면, 영선사에 김윤식, 종사관에 윤태준(尹泰駿), 별관당상에 변원규·이근배(李根培), 관변(官辯)에 백낙륜(白樂倫) 등을 비롯하여, 관원 12명, 수종(隨從) 19명, 학도 20명, 공장(工匠) 18명 등 모두 69명으로 구성되었다.청나라에 도착한 유학생들은 톈진기기국(天津機器局)에 배속되었다. 톈진기기국에 파견된 학도와 공장들은 화약이나 탄약제조법만 학습한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자연과학 지식과 외국어도 습득하였다.이것은 영선사 일행에 의한 유학생 파견이 좁은 의미의 병기 제조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의 신과학 기술 섭취를 위한 개화정책의 하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와 개화파들은 1882년 5월 통리기무아문 주사 어윤중과 이조연(李祖淵)을 문의관(問議官)으로 파견하여 유학생들을 격려하게 하였다.이때 초기 개화파들은 낙오자들이 중도에서 다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서 과학기술을 배워온 학도와 공장들을 중심으로 신병기창(新兵器廠)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근대적 병기를 제조하며 신과학기술을 도입, 발전시키려 하였다.그러나 청나라에의 유학생 파견은 도중에 중단되어, 1882년 10월 철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1882년 6월 9일 발발한 임오군란의 영향이었다. 6월 18일이 되서야 국내의 사정에 대해 본국의 정부가 붕괴되었다라고 소식을 전해 들은 유학생들은 매우 동요되었고 학습에 참여하지 않았다.둘째, 학도와 공장 중에서 각종 사유로 귀국자가 많이 생긴 탓이었다. 1882년 5월초까지 38명의 유학생 중에서 19명이 여러 가지 사유로 탈락하였다. 이렇듯 탈락자가 많이 생기면서, 나머지 유학생의 사기를 저하시켰다.셋째, 재정의 빈곤이었다. 당시 정부는 영선사 일행을 톈진기기국에 파견해놓고도, 그들의 학습을 뒷받침해 줄 충분한 경비를 보내지 못하였다. 영선사 김윤식이 현지에서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차관을 얻어 학도와 공장들의 경비를 조달한 일이 여러 번 있었을 정도였다.넷째, 서울에 기기창(機器廠) 건설 계획이 수립된 사실이었다. 영선사 일행이 불리한 여건에 직면하고, 공학도들의 학습 기간이 장기화할 전망이 뚜렷해지자, 정부는 대안을 모색하였다.그 결과 정부는 서울에 기기창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자연과학을 학습시키는 것이 경제적일 것이라는 판단하에 기기창 설립이 추진되고 공학도 귀환이 촉진되었다.1882년 10월 28일 마침내 김윤식은 유학생들을 인솔하고 기기창 설립을 위한 다수의 기계들을 구입하여 1년 만에 톈진을 출발하여 11월 1일 인천에 도착함으로써, 청나라에의 공학도유학생 파견은 중단되었다.그러나 영선사 일행의 파견은 그 뒤 우리 나라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첫째, 유학한 공학도들에 의해 처음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이 체계적으로 학습되어, 그 뒤 선진 과학 기술을 섭취하는 토대가 되었다.둘째,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각종 근대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이 대량으로 도입되어, 국내의 과학기술 지식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셋째,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병기공장인 기기창이 1883년 3월 서울 삼청동북창(北倉)에 건립되었다. 넷째, 구미제국에 대한 자주 개국의 실현이 촉진되었다. 영선사 김윤식은 톈진과 북경에 체류하면서 공학도의 감독과 함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다변 외교와 통상을 청나라와 협의하여 추진하였던 것이다.개화기 일본국정시찰단의 파견정부는 청나라에 영선사 일행의 파견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본의 개화상태를 정확히 알고자 이른바 ‘신사유람단’의 파견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881년초 일본국정시찰단이 구성되었다.그런데 이는 일본측의 권고나 주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조선측이 독자적으로 준비하여 일본측에 협조를 요청하여 이뤄졌다. 이를 주선한 것은 개화승인 이동인(李東仁)이었다. 이동인은 일본 히가시혼간사(東本願寺) 부산분원의 일본승과 통교하여 이를 준비했으므로, 시찰단이 구성될 때까지 주한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모르고 있었다.당시 국내에서는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둘러싸고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이 비등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열강의 압력과 함께 청나라와 일본이 다투어 조선에 자기의 영향력을 부식하려고 힘쓰고 있었다.이러한 내외정세에 비추어 일본국정시찰단 파견은 극비리에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조정은 시찰 단원을 동래 암행어사로 발령하여, 비밀리에 동래에 모여서 일본으로 출발하도록 하였다.시찰단의 구성을 보면, 전원을 12개반으로 편성하여 책임자는 조사(朝士) 12명으로 하고, 조사 1명에 대체로 수원(隨員) 2명, 통사(通事) 1명, 하인 1명씩을 배치하여 1개반을 5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총인원은 62명에 달하였다.일본국정시찰단 일행은 1881년 1월 11일∼2월초에 걸쳐 개별적으로 서울을 출발, 3월 하순경에 동래에 도착하였다. 4월 10일 일본상선 안네이마루(安寧丸)를 타고 부산을 출발하여 4월 11일 나가사키(長崎), 4월 17일 오사카(大阪), 4월 20일 교토(京都), 4월 26일 고베(神戶), 4월 28일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4월 28일 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일본에 더 남아 있다가 뒤에 청나라로 돌아온 어윤중·김용원의 2개반을 제외한 10개반은 7월 28일 고베를 출발하여, 윤7월 2일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만 3개월간 문물을 시찰, 조사하였다.일본국정시찰단은 각 조사 사항에 대하여 자세한 시찰보고서를 작성하여, 각 문제들에 대해 자기들의 입장에서 평가를 내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의 관제·세관·통상 등에 대해서는 완벽하리만큼 매우 정밀한 시찰 복명서를 고종에게 제출하였다.일본국정시찰단의 파견은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둬었으며, 그 뒤의 개화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첫째, 근대적 제도개혁에 참조가 될 수 있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으며, 각 부문의 시찰보고서와 견문록은 조선의 제도개혁에 참고 자료로 사용되었다.둘째, 시찰단에 참가했던 조사와 수원들이 모두 각 부문의 전문가가 되어 정부기구 안에서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였다. 1881년 11월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될 당시, 육군과 군사를 각각 시찰한 홍영식과 이원회는 군무사 당상에 임명되었다.그리고 내무성과 농상성을 시찰 조사한 박정양은 이용사당상에, 공부성을 시찰 조사한 강문형은 감공사 당상에, 외무성과 세관을 각각 시찰 조사한 민종묵과 이헌영은 통상사 당상에, 사법성을 시찰 조사한 엄세영은 율례사 당상에 각각 전문관료로 진출하였다.셋째, 개화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영선사 일행과 일본국정시찰단 일행은 일부의 척족 세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개화자강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개화파에 가담함으로써 단기간에 초기 개화파의 세력이 증강되었다.개화기 관세제도의 신설정부는 일본과의 통상조약에서 기만당하여 무관세 무역을 인정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 뒤 정부는 해관(海關) 설치와 관세의 설정을 당면 개화정책의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개항 2년 뒤인 1878년 경상도 암행어사 이만식(李萬植)의 제의와 정부의 승인으로, 동래 부사 윤치화(尹致和)는 1878년 9월부터 부산두모진(豆毛鎭)에 수세소(收稅所)를 설치하였다. 그래서 수입상품에 대하여 수입세를 부과했으며, 우피(牛皮) 등 수출품에 대해서도 수출세를 부과하였다.그런데 조선측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선 상인에게만 수세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이를 조약 위반이라고 트집잡아 무력시위와 협박을 하며 수세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청나라의 이홍장까지 일본과의 충돌 회피를 권고해왔으므로 정부는 부득이 11월 26일 두모진 수세를 일단 정지할 수 밖에 없었다.그 뒤 조정은 1880년 5월 김홍집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관세의 설정, 인천개항의 연기 또는 변경, 식량 수출의 완화 등의 안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이 때, 김홍집은 수출입상품에 5%의 관세를 부과하는 관세세목초안을 일본측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이를 회피만 하고 전혀 협의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결국 김홍집은 외교적 노력을 거듭하다가, 일본이 서양 각국과 30%의 관세율 인상을 교섭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그래서 조정은 다시 1881년 11월 조병호(趙秉鎬)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관세 설정을 교섭하도록 하였다.조선측은 수입 상품을 6종으로 분류하여, 5∼35%의 관세 설정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면세 대상을 넓히고, 10% 세율 품목에 해당하는 다수 품목을 5% 세율 품목으로 개정하자고 주장하며 협상에 임했다.그런데 돌연 일본은 조병호가 수신사일 뿐 전권대사가 아니라고 트집을 잡으며, 협상을 파기하고 수출입세를 5%로 평준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조병호도 일본측과의 관세 설정에 대해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하고, 교섭을 중단한 채 귀국하였다.이와 같이 일본측은 끝까지 관세 설정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초기 개화파들은 구미제국과 자주 개국을 하여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해관세칙(海關稅則)을 포함시킴으로써 관세를 설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해결 방법이 기울면서, 이홍장의 알선으로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체결이 추진되었다.조선측은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의 노력과 일본 견제를 노린 이홍장의 지원으로 1882년 양력 5월 22일(음력 4월 4일) 조미수호조규(朝美修好條規)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제5관에 조선 조정이 주장하는 관세자주권(關稅自主權)과 10% 기준의 관세율을 명기하는데 성공하였다.즉, 수입 관세는 일용품이 10%, 사치품은 30%로 정하고, 수출세를 5%로 정했으며, 선세(船稅)를 매톤에 5전으로 정하였다.그 결과 문제의 일본에게 미국과 동률인 관세율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항을 우려한 일본측은 온갖 방해를 했으나, 결국 정부의 주장대로 관세율이 결정되었다. 이것은 일단 초기 개화정책의 성공한 업적의 하나가 되었다.조선은 해관 설치가 급히 이뤄졌으므로 이홍장의 추천을 받은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f, P.G.V., 穆麟德)를 실무자로 고빙(顧聘)하였다. 그러나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발하고, 그 뒤 청나라의 적극적인 간섭정책이 강화되면서 사태는 급변하였다.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협판에까지 승진한 묄렌도르프는 총세무사(總稅務司)의 직책을 겸임하여 해관을 창설하고, 이홍장의 지시에만 의거하면서 일본과 관세 설정 문제를 타결하려고 하였다.그리고 묄렌도르프는 관세문제에 정력을 쏟았던 조선 개화파들의 자문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일본측에게 유리한 통상장정과 해관세칙 초안을 작성하였다.1883년 양력 7월 25일 묄렌도르프가 초안한 통상장정이 체결되었다. 일본 선박의 한국연안 취항을 인정했으며, 미곡수출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였다. 또한 금수(禁輸)를 원할 때에는 1개월 전에 통고하도록 하여 후일 방곡령사건(防穀令事件)의 소지를 만들었으며, 일본 관청과 관련된 상품과 선박에 대한 면세 특혜를 허용하였다.또, 그가 초안한 해관세칙은 관세율을 5∼30%의 7종으로 분류하고, 대부분의 일본제 수입품에 대해서는 최저율인 5%를 적용하게 하였으며, 수입품의 대종인 면직물에 대해서는 8%의 저율을 적용하게 하였다.그런데 이와 같은 세칙은 일본제 상품의 대부분에 5%의 저율 수입세를 규정한 이기 때문에, 일본측이 주장하던 5% 기준 관세율에 비하면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저율 관세제였다. 뿐만 아니라 금은의 수출을 면세로 정하는 커다란 허점을 가지고 있었다.이렇듯 묄렌도르프의 무책임한 양보에 의하여 일본이 저관세율을 획득하자, 당시 조선에서 수입하던 면직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독일과 연합하여 면직물 수입 관세에 대해서도 일본 상품과 마찬가지로 5%의 관세율을 적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이에 조선측은 처음에는 강력히 반대했으나, 결국 굴복하여 대체로 영국이 주장하는 관세율에 따라 조영수호조규(朝英修好條規)와 조독수호조규(朝獨修好條規)를 개정하였다. 그런데 개정된 조영수호조규에서 결정된 관세율은 그 뒤 각국에 적용되었다.조약에 의하면, 수입 관세를 5%·7%·10%·20%의 4종류로 나누두록 하여 상한을 종래의 30%에서 20%로 대폭 내렸으며, 직물 중에서 면사와 모사(毛絲)에 대해서는 5%, 직포에 대해서는 7%의 세율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그밖에는 대체로 조일해관세칙에 준하였다.1883년 11월 해관이 설치되어 수세 사무가 시작되었다. 기구를 보면, 부산·원산·인천에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었고 정부는 감리를 임명했다. 한편 총세무사 묄렌도르프 밑에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세무사를 두는 이원 체제가 수립되었다.그러나 이 때는 청나라가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펴고 있을 때이며, 실권이 총세무사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관의 실제 사무는 조선인 감리에 의해 관리된 것이 아니고 외국인 세무사에 의해서 관리되었다.이러한 구조는 그 뒤 시정되지 못하고 해관은 내내 외국인의 관장하에 놓이게 되었다. 관세의 설정과 해관의 설치 과정이 초기 개화정책에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진전되었는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개화기 근대학교의 설립개항 이후 선각자들은 열강의 도전에 대처하여 나라의 독립과 발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지식을 갖춘 강건한 인재를 교육, 양성해야 한다고 하여, 교육을 가장 급무라고 강조하였다.그래서 그들은 근대학교의 설립을 매우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였다. 즉, 그들은 근대학교의 설립이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하는 동력기관의 창설이라고 생각하고,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이에 1878년 개항장인 동래에 무예교육을 위한 제도를 창설하였다. 1883년 이른봄부터 여름에 걸쳐 개항장인 원산에서는 민간인들이 개화파 관료들의 지원을 얻어 원산학사(元山學舍)를 설립하였다.그 뒤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鄭顯奭)은 민간인들의 요청과 출재에 의해 학교가 설립됐다고, 1883년 8월 28일 정부에 보고하여 정부의 승인까지 얻어 냈다. 이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이자 최초의 민립학교가 되었다.원산학사 설립의 출재 비율을 보면, 총설립 기금의 88.8%를 지방민과 개화파 관료가 출재했고, 11.2%를 원산감리서에 고용된 외국인 세무사들이 출재했다.출재를 민간인과 관료로 나누어보면 민간인이 95.0%, 관료가 5.0%를 출재하였다. 원산학사가 민·관합작으로 설립되었지만, 주로 민간인들에 의해 이뤄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학급은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편성되었으며, 문예반은 지방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제를 약 50명 입학시키고, 타읍인이라도 수업료를 내면 입학을 허가하였다. 무예반은 정원을 200명으로 하여 무사를 입학시켰으며, 다른 지방의 무사도 입학을 희망하는 자는 모두 허가하도록 하였다.원산학사가 문예반과 함께 특히 무예반을 병설한 것은 일본의 무력도발이 개항장에서 자주 자행되는 사태와 관련하여 무비자강을 실현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에 대응하기 위한 창의적인 것이었다.교과 과목은 특수 과목으로서 문예반은 경의(經義)를, 무예반은 병서(兵書)와 사격술을, 문무 공통과목으로는 산수·물리로부터 각종의 기계기술·농업·양잠·광채(礦採) 등을 가르쳤다. 그 밖에 일본어 등 외국어와 만국공법(국제공법), 그리고 각국 지리도 교수하였다.원산학사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재력을 모아서 개항장에 밀려오는 외세에 대항하고 실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립학교라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그리고 원산학사와 같은 일반학교는 아니지만 같은 해인 1883년 통역관 양성을 위해 통리기무아문 부속의 동문학(同文學)이라는 영어학교가 있었다. 동문학은 연소하고 총민한 어학생 약 40명을 뽑아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영어·일본어·서양산술 등을 가르쳤다.그리고 학생 중에서 우수한 자는 학용품과 기숙비를 통리기무아문에서 공급하여주었다. 동문학은 1883년 8월 영국인 핼리팩스(Hallifax, T.E., 奚來百士)를 초빙하여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면서 발전적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므로 동문학은 우리 나라 최초의 관립학교인 셈이다.개화기 근대신문의 발간초기 개화파들은 1880년대에 들어서자 근대신문의 발간을 추진해 오다가, 1883년 양력 10월 30일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를 발간하게 되었다.신문 발간을 추진한 개화 인사는 박영효(朴泳孝)로, 그는 1880년부터 신문 발행을 주장해 오다가 한성 판윤이 되자 국왕의 허가를 얻어 유길준(兪吉濬)을 등용시켜, 본격적으로 신문 발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박영효가 수구파의 미움을 받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면서 신문 발간 계획은 중단되었다.그런데 박영효의 신문 발간 계획은 개화 인사 김윤식에게 인계되었다. 김윤식은 동문학 장교(掌交)인 김만식(金晩植)에게 신문 발간 사업을 위임하였다.김만식은 신문 발간의 담당 부서로 박문국(博文局)을 신설하고, 편집 주사로 김인식(金寅植)을 선발하였다. 그리고 조선인 편집 부원 3명과 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郎)를 번역 부원으로 고용하여 편집 진용을 갖추었다.이 무렵 인쇄 기계와 신문 용지로 쓸 개량지도 구입되어, 양력 10월 30일 역사적인 ≪한성순보≫ 창간호가 나오게 되었다. ≪한성순보≫는 세로 25㎝, 가로 19㎝ 크기의 8면에 달하는 규모로 오늘날의 주간지 비슷한 것이었다.내용은 순한문으로 표기하고, 창간호에서는 창간사에 해당하는 ‘순보서(旬報序)’, 정부소식의 ‘내국기사(內國記事)’, 외국소식의 ‘각국근사(各國近事)’, 교양을 위한 특별 해설로 지구에 대한 여러 가지 과학적 설명을 수록하였다.대체로 매호마다 내국기사, 각국근사, 교양을 위한 해설기사 등이 ≪한성순보≫의 주요 내용을 이루었다. ≪한성순보≫는 이름 그대로 10일마다 빠짐없이 발행되다가, 1884년 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인해 박문국이 파괴되어 신문 간행이 중단될 때까지 40호 이상 발간되었다.≪한성순보≫ 폐간 뒤 신문이 없어 큰 불편을 겪게 되자 김윤식이 복간을 서둘렀다. 그는 인쇄기를 다시 구입하고 편집 부원도 11명으로 늘려서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 漢城周報≫ 창간호를 발행하였다.≪한성주보≫는 ≪한성순보≫를 계승하여 비슷한 체재를 갖춘 것이었으나, 발간 횟수를 주 1회로 늘렸으며, 신문 기사를 국한문혼용으로 작성하여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성주보≫는 1888년 양력 7월 7일까지 100호 이상을 내고 운영난으로 정간되었다.개화기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초기 개화파들은 근대적 산업시설을 만드는 것을 부국 강병의 중요한 기초라고 생각하고, 산업개발과 근대적 상공업 기업체 설립에 주력하였다.그러한 개화정책의 영향으로 1880년대에 들어서, 서울과 전국 각 지방에서 각종 근대적 회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그 밖에 전통적 상업 자본으로 개항 이후 대성장한 서울의 시전상인(市廛商人), 전국 각 지방의 객주(客主)·보부상(褓負商) 등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런데 일부는 근대적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몰락했지만, 대부분은 1884년까지도 계속 성장하여 객주상회사(客主商會社) 또는 상무사(商務社)로서 근대적 형태로 변모해 갔다.농업부문에서도 개화정책이 실현되어 1884년 잠상공사(蠶桑公司)가 설치되고, 근대적인 양잠법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외국의 농법과 양잠법을 소개하고 보급할 목적으로 1881년 안종수(安宗洙)의 ≪농정신편 農政新編≫, 1884년 이우규(李祐珪)의 ≪잠상촬요 蠶桑撮要≫ 등의 각종 새로운 농서(農書)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특히, 1884년의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의 설립은 이 시기의 주목할만한 개화사업이었다. 농무목축시험장은 우리 나라 최초의 미국 파견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이 귀국한 뒤, 사절단의 수행원이었던 최경석(崔景錫)이 관리관이 되어 설치한 농업시험장이었다.보빙사 일행은 미국 방문 도중 홍영식이 중심이 되어, 농업시험장설치의 희망을 표시하고 협조를 약속받은 다음 귀국하여, 국왕의 허가를 얻어 동대문 밖에 농업시험장을 설치한 것이다.농업시험장에는 각종 농작물과 야채 및 과수를 재배하고, 최경석이 미국에서 가져온 신품종을 중심으로 시험재배를 하여 성공을 거뒀다. 최경석은 농업시험장 설치 첫 해에 이미 대성공을 거두어 거기서 수확한 개량신품종의 재배법을 설명하는 해설서를 첨부, 각 지방에 송부하여 개량종을 재배하도록 권장했다.최경석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목축의 도입과 가축의 개량도 시도했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젖소·황소·말·돼지·양 등의 가축을 도입했으며, 농업시험장에서 가축의 품종개량과 사육방법의 개선, 버터와 치즈 등 낙농제품의 생산까지도 계획했다. 그러나 농업시험장은 1885년까지 대성공을 거두다가 1886년 최경석이 죽음으로써 큰 시련에 부닥쳤다.또한, 기선해운 부문에서도 1884년에 기선회사(汽船會社)가 설립되어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기선회사는 통리기무아문의 전운국(轉運局)에서 미국 상인의 중개를 통하여 기선 3척을 도입하여 설립되었다. 그래서 연해의 화물운송과 조곡(租穀)의 운송, 군대와 그밖의 관용화물 운송에 종사하였다.이 밖에 초기 개화정책에서 특기한 것은 김옥균 등에 의해 이뤄진 해외 유학생 파견, 박영효가 한성판윤으로 있을 당시 치도국(治道局) 설립과 서울시내의 도로 정비, 홍영식의 우정국 설립, 근대적 우편제도의 창설, 그리고 초기 개화파들이 추진한 복식제도의 간소화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국내의 위정척사파로부터의 반발과 국외로부터의 열강의 압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에 들어오면서 개화정책은 빠르게 진전되었다.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내세우며, 개화정책에 대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정책이라며 간섭하고 탄압을 가해 왔다. 갑신정변 이후 급진개화파가 몰락하고 온건개화파만 남게 되면서 청나라의 압력을 받으며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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