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집사성이라는 것은 어떤 기관인지?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집사성은 651년(진덕여왕 5)에 집사부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치된 관청으로, 왕정(王政)의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일을 하는 담당하였다. 왕명의 전달과 그것이 잘 시행되는지를 관리하는 기능을 주로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여러 행정 관청들을 총괄하는 최고 관청의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집사부 설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설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초기에는 귀족 세력이 강성하고 왕권이 미약하였다. 국정 운영은 귀족 회의체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왕은 신라의 대표로서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타 귀족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정치 권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병부(兵部)와 같은 신라의 주요 관청들은 장관이 2인 이상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담당한 업무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요 정책을 회의를 통한 합의에 의해 결정했던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하지만 지증왕(智證王)에서 진평왕(眞平王)에 이르는 시기에 왕의 위상과 권력은 크게 강화되어 갔다. 그 결과 왕의 직계가 다른 왕족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진평왕 사후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지만, 딸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다른 왕족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정 운영에 귀족들의 합의가 여전히 필요한 정치 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성하였고, 왕권에 위협이 될 여지가 있었다. 더구나 선덕여왕 말년에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마땅치 않자, 다시 귀족 세력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갔다. 급기야는 선덕여왕의 와병 중에 왕위를 노리고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의 난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비담의 난은 친왕 세력인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에 의해 진압되었고, 두 사람은 선덕여왕의 사촌 동생인 진덕여왕(眞德女王)을 다음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실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김춘추는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정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현하려 하였다. 귀족들의 합의에 의한 국정 운영에서 벗어나, 왕명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 중심의 정치 제도를 마련하여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자 한 것이다. 또 당(唐)과의 적극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삼국 간의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였다.이에 당의 관료제도를 적극적으로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집사부를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결국 집사부는 왕권 강화 및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관료제의 마련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전과 다른 왕권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 집사부의 설치 목적이라고 하겠다.이전까지 귀족 합의제적인 정치 체제의 중심에 있었던 관직은 신라의 최고위직인 상대등(上大等)이었다. 상대등은 귀족 회의체의 구성원들인 ‘대등(大等)’의 대표 격인 존재이다. 따라서 상대등은 어떤 경우에는 왕권과 대립되는 성격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상대등을 정점으로 하는 신라의 정치 제도는 귀족들의 합의를 근간으로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의 세력이 강성할 수밖에 없었다.집사부와 그 장관인 중시의 설치는 신라의 정치 제도를 상대등과 귀족 회의 중심에서 왕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집사부는 왕명을 전달하고 그것의 집행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집사부가 여러 관청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상대등을 대신하여 집사부 중시가 여러 관원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중시는 귀족들의 대표인 상대등과 다르게, 왕의 행정적 대변자라 할 수 있었다.중시는 귀족 중 가장 높은 인물이 임명되는 것도 아니었고 규정과 달리 관등이 낮은 인물이 임명되는 사례도 종종 있어서, 지니고 있는 지위나 신분 보다 맡은 바 직무를 중요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 왕의 근친이 임명되는 사례가 많았는데, 왕의 가까운 인물을 행정 기구의 요직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방파제 내지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케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왕을 대신해 중시가 물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집사부와 그 장관인 중시는 왕을 대변하는 동시에 왕권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Q. 집성촌은 어느시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의 집성촌은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난다. 삼국 시대에도 집성촌은 있었지만 유교가 보급된 조선 시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집성촌이 형성된 것이다. 중국은 일찍이 종법질서가 확고히 자리잡아 역사가 오래된 집성촌이 많이 있지만, 한민족은 신라를 제외하면 부여 때부터 2000년 이상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 살았다. 고려 때에도 그랬고 유학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도 중기까지는 그랬다.그래서 하나의 마을에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위가 유입되는 이른바 각성받이 마을이 전국적으로 많았다. 저 아래에 언급된 하회마을과 양동마을도 원래부터 풍산 류씨와 월성 손씨, 여강 이씨가 대대로 살았던 게 아니라 17세기 그 마을에 있는 집안에 사위로 들어갔다가 사회 풍조가 변해 대대로 거기 살게 된 것이다.집성촌이 생기게 된 것은 양반들의 경제적 문제, 특히 재산 상속과 관련이 깊다. 유산 상속을 할 때 본래 남녀 관계 없이 균등하게 물려주는 게 전통이었는데, 부모는 두 명뿐인데 자녀가 여러 명이면 그만큼 재산은 흩어지기 마련이다.유럽에서 비귀족 시민들이 부르주아로 승급된 것과 같은 현상이 조선 후기에도 일어났는데, (예속민은 언제나 비참하지만) 평민 중 재산을 집적해 사회문제를 생각해 볼 여유가 시민 계급도 등장하고, 그 중에서는 재산이 분할되어가는 양반보다 재력이 우월한 경우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양반의 재산이 평민보다 적으면 당연히 위신이 설 수 없고, 양반들은 재산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연장자 상속제 비슷한 형태가 도입되었고, 아들에게만 균분 상속하는 과도기를 거쳐 장남에게만 몰아서 장자 상속제가 도입된다. 이 과정에서 문중 재산과 집성촌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본래 조선은 양반의 기준을 재산이나 문벌이 아니라 생원진사시 합격자로 정해서 귀족 계급이 전사-지주나 성직-지주로 변질되는 병폐를 막으려 했으나, 여기까지 오면 평민 계급의 성장으로 탄생한 비귀족 지주를 이겨먹기 위해 귀족 지주가 생겨나고 이들이 서로 알력다툼을 벌이게 되면서 체제가 이점을 완전히 상실하고 패악만 나타나게 되었고. 이 시점에 와서는 성리학마저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면세 토지 집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런 지주 간의 알력 문제는 현대까지 남아서 지긋지긋한 암덩이로 존속 중이다.달리 말하면 돈 주고 족보를 산다는 건 진짜 양반 족보를 사서 거기다 자길 끼워 넣는게 아니라 가짜 족보를 만드는 것이란 소리다. 양반들이 말이 좋아 족보를 팔았지 실상 식자층으로써 적당껏 서류를 조작해준 게 전부다. 집성촌 형성이 족보 판매보다 빨랐으므로 족보를 샀다고 가문에 슬쩍 끼어들어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가짜 족보 여부 판단의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가 가문원이 어딜 자꾸 싸돌아다니는지 살피는 것. 조선 후기에 오면 유력가는 죄다 집성촌에 뭉처 살았기 때문에 이 동네 저 동네에 가문원이 흩어져 있다면 해당 족보가 가짜거나 가문이 완전 망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2] 그리고 나중에는 평민들도 양반처럼 가문원끼리 모여 집성촌을 만들어 살게 된다.이렇게 전국에 수많은 집성촌이 우후죽순 생겨나 한때는 인구 대부분이 집성촌에서 거주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도시화와 이촌향도, 그리고 댐 건설 등으로 마을이 없어진다거나 결정적으로 남북분단~6.25 전쟁 기간 동안 같은 마을 안에서도 이념으로 나뉘고 타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가 정착해버리는 등 전통적 향촌구조가 많이 파괴된 탓에 집성촌도 많이 없어졌다.지금은 양반문화가 강하거나 노인들이 많은 지방 농촌 지역에 집성촌이 많이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인근 도시로 나가 있거나 돌아오지 않아서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하며 근근히 유지되는 곳이 많고, 이 때문에 집성촌에서 살거나 일하는 젊은이들의 태반이 중국, 동남아, 몽골,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집성촌이 더 이상 집성촌이 아니고, 오히려 다문화촌이 된셈이다. 생각 외로, 1980년대 후반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집성촌이 있던 시골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상경한 사람들이 꽤 많다.다만 서울, 부울경은 비교적 적은 편인데 양쪽 지역 다 개발로 인해 집성촌 폐촌 비중이 높았고, 그나마 부울경 지역은 지리산권에 조금 많은 편이다.
Q. 어떻게 38도선이 만들어 졌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남북한간의 경계선인 38선은 애당초 순수한 군사적 목적에 따라 일시적 편의를 위하여 책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임박하였음을 미리 내다본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측 3개국 수뇌들은 1945년 2월 4∼11일 얄타 회담에서 전후 처리에 관한 협정을 맺었고, 소련은 대일참전(對日參戰)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서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다.① 적절한 시기에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협약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고, ② 어느 단일국가에 의한 한국의 군사점령은 강한 정치적 반응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한국을 구분된 지역이 아니라 단일체로 취급하여 중앙집권제행정원칙에 입각한 군정청(軍政廳)을 조직할 것 등의 내용이 논의되었다.그러나 그후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전후의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분담하여 점령하기로 약정되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비로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할 뜻을 밝히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주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였다.그후 소련측과 합의하여 미·소 양군의 군사분계선으로서 38선을 책정하였다. 그것이 문서상으로 나타난 것은 1945년 9월 2일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시 제1호였다. 여기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국에 있는 일본군은 소비에트 극동군 최고사령관에게, 그리고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합중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명시하였다.
Q.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어떤으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내용은 크게 ‘왕이 할 일’과 ‘신하가 할 일’로 나뉘어 있는데, 이것을 왕과 정부로 보기도 한다. 이 법전에서 정도전은 임금의 할 일로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정보위 (正寶位) - 보위를 바르게 함국호 (國號)정국본 (定國本) - 국본(國本: 세자)을 정함세계 (世系) -교서 (敎書)신하의 할 일로서 아래의 육전(六典)을 설치하여 각 전의 관할 사무를 규정하고 있다.치(治)부(賦)예(禮)정(政)헌(憲)憲典 總序 - “…그러므로 성인이 刑을 만든 것은 형에만 의지하여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형으로써 정치를 보좌할 뿐인 것이다. 즉 형벌을 씀으로써 형벌을 쓰지 않게 하고, 형벌로 다스리되 형벌이 없어지기를 기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정치가 이미 이루어지게 된다면 형은 방치되어 쓰이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어리석은 백성이 법을 모르고 금법을 어기는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 주무관청에 명하여 을 방언으로 번역케 해서 대중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치게 하였고, 무릇 처단과 판결에 있어서는 모두 이 법률에 의거하였으니, 위로는 황제의 규범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의 생명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다. 백성들이 금법을 알아서 법을 범하지 않을 것이며, 형은 방치되어 쓰이지 않게 될 날을 볼 것이다.…”憲典 人命 鬪毆 - 사람과 사람은 다 같은 동류이며, 다 같은 우리 동포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서로 친해야 하고 서로 해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로 해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상해한 자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상당한 형을 주는 것이니, 漢의 법이 좋은 것은 다 이 때문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형률을 제정하는 사람은 살상을 가장 중하게 다루고, 투구를 그 다음으로 다루지 아니함이 없다. 대개 형벌을 해서 형벌이 없어지게 하는 것은 공존하고자 하는 것이니, 아 인자한 일이구나! 인명투구편을 짓는다.상하 두 권으로 이루어진 필사본으로 《삼봉집》에 들어 있다.상권[편집]치전 (治典)부전 (賦典)예전 (禮典)하권[편집]정전 (政典)헌전 (憲典)공전 (工典)
Q. 도산서원은 어떠한 이유때문에 유네스코에 등재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네스코가 ‘한국의 서원’을 평가하면서 꼽은 등재기준, 즉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는 크게 두가지다. 대상 유산인 9곳의 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조선시대 지방 지식인들이 세운 대표적인 사립 성리학 학교이다. 등재 기준 중 첫번째로 꼽히는 ‘OUV’는 대상 서원들이 성리학 가치에 부합되는 지식인을 양성했고, 지역의 대표 성리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향(제사를 지냄)했으며,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와 관련, “성리학자들은 서원에서 강학을 통해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세계를 이해했고, 정기적인 제향으로 학파의 결집을 도모했으며 교류를 통해 성리학에 부합한 향촌 교화활동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두번째 ‘OUV’는 신청유산이 한국 서원 건축 유형의 탁월한 사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16세기 서원들이 처음 생길 때부터 정형화한 건축유형은 후대의 서원 건축에 모델이 되었다. 즉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안향의 옛 집터에 건립됐듯 서원은 제향인물의 연고지역에 자리잡았고, 성리학자의 전인교육에 적합한 환경을 선택했다.여기에 제향과 강학, 휴식 공간으로 나뉜다. 제향공간은 사당을 중심으로 하며, 선현들을 위한 제사가 베풀어진다. 강학공간은 학습의 전당인 강당과 동·서재(기숙사)를 포함한 구역이다. 휴식 공간은 잠시 책상을 떠나 머리를 식히고 심신을 고요히 유지하는 수신의 영역이다.각 공간은 지형과 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뚜렷한 건축전형을 완성했다. 입지를 고를 때부터 무척 신경썼다. 도산·병산·옥산서원 등의 경우 앞쪽에 맑고 깨끗한 계류와 긴 여울이 감싸고,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언제라도 누각에 오르거나 창문만 열어도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입지 선정에 심신 수양의 환경을 첫손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각 서원의 기본골격은 비슷했다. 사당과 강당, 동·소재와 내·외삼문, 전사청(제수를 준비하던 곳), 장서각(도서관) 등의 부속건물로 구성됐다. 강당이나 누각, 정자, 연못, 계류의 이름도 반드시 지었다. 그러나 허투루 짓지 않았다. 강당의 경우 성(誠), 중(中), 경(敬), 의(義), 인(仁), 예(禮), 덕(德), 도(道), 교(敎) 등 성리학의 핵심개념을 표방했고, 누각이나 정자는 연(蓮)이나 매(梅) 등 옛 성현이 사랑한 꽃이름이나 풍(風), 월(月), 산(山), 수(水)자 등이 포함된 이름이 많았다. 이것은 서원이 학문과 덕성의 터전인 동시에 본성을 보존하고 정서를 함양하는 장수(藏修)의 공간임을 일러주고 있다.
Q. 허수아비의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느 마을에 ‘허수’라는 농사꾼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힘들게 한 해 농사를 지어 논과 밭에 곡식과 작물들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가을철이 되면 뿌듯한 기분을 망쳐놓는 게 있었다.땀의 결실에 매일같이 달려들어 까먹는 수천마리의 새떼들 모습이 그것이었다. 한해의 결실을 지키기 위해 매일처럼 새떼와의 전쟁을 치르다보면 밥은커녕 뒷일 볼 짬을 내기도 힘든 형편이기 일쑤였다.그러던 하루는, 참새떼들을 쫓고 난 후 땀을 식히면서 뾰족한 수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번뜩 꾀 한 가지가 솟아났다.바로 궁즉통(弓則通) ! 짚으로 정성스럽게 사람모양을 만든 후 제 아비의 등걸 적삼을 입히고 모자까지 씌웠다.이것을 논 한 가운데 세워놓으니 새떼가 깜작 속아 날아드는 게 뜸했다.그러니 밥도 제 때에 챙겨먹고 뒷일도 편히 볼 수 있었다.헌데 동네 사람들이 이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논 가운데 서있는 것의 옷과 모자만 보고‘이보게 허수아비 나좀 봅세! 라고 멀을 골었다.그러나 대답이 없어 자세히 보니 진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그런데 그게 새떼들이 접근을 막는다는 사실을 알고 너도 나도 허수어비를 만들어 새워 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게 소문에 소문의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드디어 그 입소문, 말없는 말(言)이 천리를 달려,즉 무족지마(無足之馬)(말) 주천리(走千里) 라~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들은 임금님은 어명을 내렸다.‘온 나라에서 새떼에게 빼앗기는 곡식이 수만 석 일터! 그 귀한 곡식을 지혜로써,굶주릴 백성들 배불이 먹게했으니 기특한 허수에게 백민 1백석으로 포상하고 허수아비를 전구에 장려하노라!‘그 이후 허수아비라 명명된 이것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Q.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이 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갑신정변은 ① 일본군을 끌어들여 민심의 저항을 초래한 점② 고종의 이반과 권력 기반의 조성에 실패한 점③ 좌우영군의 장악을 소홀히 하여 이탈을 방조하고 무기를 정비하지 않은 점④ 독립과 개화라는 정변의 목표와 지향이 당대의 사회적 요구나 정서와 거리가 있었던 점⑤ 일본과 청이라는 외세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파악의 미흡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실패하였습니다.정변 실패 결과 참여자들에게는 적몰가산(籍沒家産), 파가저택(破家瀦澤)의 형이 집행되었고 부모, 형제, 처자에게도 연좌법이 적용되었다. 갑신정변 주도자 혹은 참여자 중 사망자 44명, 일본 망명자 9명, 유배자가 1명으로 확인된다. 이외에도 김옥균과 내통 혐의를 받은 자들은 숙청되었다.갑신정변은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한 사건으로 이해되었고, 그 결과 개화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개화에 대한 인식 악화는 개화 정책의 중단, 개화세력의 위축, 여론을 등에 업은 수구세력의 반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김옥균 등을 난적으로 규정하고 변란으로 규정하며 처벌 의지를 내비쳤다. 이어서 개화 정책 관련 기구를 폐지했고, 위정척사 계열 인물들을 대거 석방하였다.정변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친청파들이 정국을 좌우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왕권 회복을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하여 러시아에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는 조러밀약을 추진하는 한편, 1885년에는 개화 자강 업무를 추진할 내무부를 설립하여, 정부 정책면에서 정변의 반동과 역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일본측은 정변으로 소실된 공사관 건물에 대한 배상과 조선 정부측 사죄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885년 1월 9일(음력 1884년 11월 24일)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정변 후 청일 양국군이 주둔하던 상황에서 양국 간 개전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던 가운데, 주중영국공사 파크스(Sir Harry S. Parkes)의 중개를 통해 청일 양국군의 철수를 규정한 「텐진조약」이 1885년 4월 18일 체결되었다.특히 이 조약에서 장래 조선에 변란이 발생할 경우 청일 양국이나 한 나라가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알린다는 내용은 이후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일본이 파병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Q. 러시아는 어떤 이유로 알레스카를 미국에게 팔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개요1867년 10월 18일 오후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 대대와 미국 제9 보병대대가 러시아-아메리카(Russian America)의 수도인 뉴 아크엔젤(NewArchangel)의 중앙 광장에서 서로 마주보고, 러시아 깃발을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는 공식행사를 준비했다. 이것은 러시아로부터 미국으로 알래스카(Alaska)를 이전하는 마무리 행사였다. 이 기념식은 북미 북서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의 약 70년간의 존재를 끝냈다. 러시아는 150년 전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후진 농업국으로 인식되던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 유럽의 경찰국가로서 당당하게 세계무대에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남하정책을 기본적인 대외정책으로 삼은 러시아는 흑해의 크림반도로 진출했고, 결국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투르크와 크림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했습니다. 크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재정적 위기와 더불어 아시아 극동지역을 포함하여 해외에서도 전략적인 열세에 직면했고, 러시아-아메리카의 상황도 위태로워졌습니다. 결국 비엔나체제 하에 사사건건 러시아와 경쟁한 영국에 의해 정복당하느냐 미국에 파느냐의 전략적 선택에서 러시아는 영국에 적대적인 신생 미국에 판매함으로서 전략적인 우방을 만들 것을 결정했고,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매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알래스카 판매의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게다가 알래스카의 판매는 당시 미국의 지정학적 야망과 러시아의 아무르강 연안과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려는 러시아의 의도가 잘 맞아 떨어진 경우로 보고 있습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알래스카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는 1867년 3월 초에 주미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트 스테클에게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슈워드와의 알래스카 매매에 관한 협상을 지시했고, 결국 3월 30일 새벽 4시, 면적이 거의 1,600,000km²에 달하는 알래스카를 미화 720만 달러(금)(1100만 루블금), 즉 헥타르 당 5센트 가격에 판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2. 알래스카 매매의 역사적 배경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단기전략 목표에 휘둘려 러시아 제국 영토의 6%를 차지하는 해외 소유물을 처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에는 러시아의 많은 이들은 러시아-아메리카의 존재 자체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이 사건에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차르의 독단적이고 갑작스런 결정으로 금전적인 이익을 자의적으로 침해당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AC, Russian-American Company)의 주주를 제외하고는 알래스카의 매각을 애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알래스카를 미국에 파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최초의 인물은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 영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열렬한 러시아 애국자인 무라브요프–아무르스키 백작이었습니다. 그는 북태평양 전역에 러시아의 자원을 분산시키는 대신, 알래스카에서 러시아의 취약한 존재감을 줄이고, 러시아의 먹거리(breadbasket) 역할을 할 수 있는 남쪽으로의 팽창, 즉 극동지역으로의 확장에 집중함으로써 러시아 제국이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무라브요프–아무르스키 총독의 계획에 신뢰성을 더한 요소는 1860년대 러시아 제국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극동지역뿐만 아니라 면화의 원천인 중앙아시아로의 방향전환이었습니다. 사실, 러시아 제국은 북서 아메리카의 식민지에 대한 이해관계를 상실한 반면, 자신의 국경을 훨씬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867년(알래스카 판매의 해) 러시아 제국은 투르크메니스탄 총독부(Turkestan general-governorship)를 세우면서 중앙아시아 정복을 완성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고 주민이 거의 없는 러시아 -아메리카는 분명 제국의 보호를 받을만한 중요한 전략적 자산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래스카의 주요 자원으로 자주 인용되는 대형 금 매장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따라서 축소되는 제국의 영역에 대한 애국적 수사학의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러시아아메리카회사(RAC)가 특히 러시아의 농노제 폐지 이후 알렉산드르 2세와 그의 동생 콘스탄틴 대공이 주창한 근대화 계획에 맞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했습니다. 콘스탄틴 대공에게 토착민과 혼혈인의 노예계약 노동을 이용하여 특별한 특권을 누린 독점기업으로서 러시아아메리카회사는 현대화를 방해하는 전근대적 관료주의 구조로 보였습니다. 콘스탄틴 대공은 이미 1857년 러시아-아메리카의 미국에의 양도를 추진했었습니다. 러시아 외상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에게 보낸 메모랜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기만해서도 안되며, 미국이 끊임없이 자신의 소유물을 늘려나가고 북미 전역을 완전하게 지배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식민지를 우리로부터 획득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해야만한다.” 콘스탄틴 대공의 이 제안은 1857년과 1858년에 걸쳐 러시아 정부의 상층부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틴의 편지를 본 알렉산드르 2세는 “이 생각은 가치가 있다.”라고 썼습니다. 북미에서 즉시 철수하겠다는 콘스탄틴의 제안을 지지하는 측은 뿌쨔찐 제독과 미국의 러시아 장관인 스테클을 포함했습니다. 고르차코프는 러시아-아메리카를 포기할 필요성에 동의했지만 그 판매까지의 점진적인 과정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해군장관과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AC)의 전임 최고관리자인 랑겔의 후원을 받았다. 랑겔은 캄차트카와 아무르 분지의 경제 발전에 투자하기 위해 알래스카 판매의 일부 수익금을 요청했습니다. 러시아의 황제는 마침내 고르차코프와 협의하여 러시아아메리카회사의 특허가 만료되는 1861년까지 협상을 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크림전쟁 패배 후의 황실의 재정적 위기와 해외 식민지, 특히 러시아-아메리카에서 영국과 미국의 전략적 위험에 노출된 당시 환경에서 영국이나 미국에게 빼앗기기보다 미국에 알래스카를 판매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비엔나체제 이후 세계 전역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해온 영국이 크림전쟁에 이어 북미 대륙에서 전쟁을 일으켜 러시아-아메리카를 포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항한 동맹으로서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미국에 알래스카를 파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에서 영국은 남부를 지지했고 러시아는 북부를 지지했었습니다. 지금 미러관계와 미영관계 생각하면 아주 격세지감이 느껴지실 겁니다. 마침내 1867년 3월 주미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트 스테클과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슈워드는 미화 720만 달러로 알래스카의 매매에 대해 합의했습니다. 알래스카 매매는 러시아와 미국의 알래스카 매매에 대한 조약이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인준과 더불어 미국 상원에 의해 인준되고, 미국 앤드류 존슨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국민들은 판매 이유와 낮은 가격에 의문을 표했고, 미국인들도 왜 필요 없는 동토를 구매했는지 의문을 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인 인디언, 알류트족, 에스키모족들도 이 거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알래스카 매매 협상을 진행한 윌리엄 슈워드 당시 미 국무장관은 알래스카 판매협약에 서명했고, 그것에 대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거래를 “슈워드의 어리석은 행동(Seward’s Folly)”, "슈어드의 아이스박스(Seward’s icebox)"로 비난했습니다. 판매협상을 승인한 상원의원들 사이에는 그가 러시아 대사에게 매수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상원은 단 한 표 차이로 알래스카 매입 조약을 비준했습니다. 3. 알래스카 판매, 장기적으로는 미국에 큰 이득이 되다 알래스카 매입이 있은 지 30년 후인 1897년 금광이 잇따라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 석탄까지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로서 미국은 막대한 지하자원을 얻었다. 더군다나, 알래스카에 매장이 되어있는 석탄의 양은 전세계 1위였습니다. 알래스카에는 위에서 세번 째 기사에 따르면 2007년 기준 미국 전체 석유.석탄 매장량의 50%, 주석 매장량의 80%, 니켈 매장량의 20%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석유만 보면 확인 매장량만 45억 배럴에 이른데 여기에 위에서 첫번 째 기사에 거대 유전이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알래스카 매입이 있고서 80년 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과 소련이 냉전으로 대립을 하게 되면서 군사적, 지정학적으로 가치가 더욱 상승했습니다. 미국은 알래스카를 군사 기지로 삼아서 냉전 시대에 소련의 아메리카 진출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육군 중심이던 소련은 해군, 공군력이 상대적으로 자신들보다 우위였던 미국과 태평양, 북극해, 대서양으로 떨어져 있어서 미소전쟁 발발하면 어느 정도의 불리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만회하고자 쿠바에 미사일 기지도 설치할려 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만약 알래스카가 소련의 영토였다면 소련은 미국 및 캐나다 본토에 육군을 전개하여 지상전을 벌일 수 있는 우위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위에 마지막 사진에서 보듯이 쿠바가 아닌 소련의 영토인 알래스카에 미사일 기지를 배치한다면 미국으로서도 막을 명분도 전혀 없기에 냉전시기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역이 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