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동요 들로 산으로 원곡은 제목이 뭐였죠?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독일곡으로 원제목은 'Go field, Go mountain' 입니다.독일어로는 'Zu den Feldern und Bergen' 입니다.
Q.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전국을 통일했다는데 그전에는 통일국가가 아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천황은 나중에 생겼고 당시에는 쇼군들이 있었습니다.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일본을 다스리고 있었어요.후계자 때문에 고민한 아시카가 요시마사1449년부터 1473년까지 쇼군으로서 일본을 다스렸다. 정치보다는 문화 예술에 관심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요시마사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어요. 그 때문에 요시마사는 동생 요시미를 쇼군의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으로 정했어요. 그리고 관령(쇼군을 보좌하는 직책)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후견인으로 정했지요.그런데 이를 어떻게 할까요? 뜻밖에도 이듬해 요시마사의 부인 히노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를 낳았어요.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이 쇼군이 되길 원했지요. 그래서 야마나 소젠을 후견인으로 삼아 호소카와 가쓰모토에 맞섰어요. 후계자가 되면, 엄청난 땅과 지휘권을 갖게 되기 때문에 서로 한 발도 양보할 수 없었답니다.결국 이 후계자의 문제를 놓고, 양쪽은 무려 11년 동안이나 여러 지방의 지배자인 슈고 다이묘들과 무사들을 끌어들여 치열하게 싸웠어요. 쇼군 요시마사가 전쟁을 멈추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이 일을 두고 ‘오닌의 난’이라고 불러요.결국 1477년이 되어서야 난리가 수그러들었어요.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교토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어요. 사찰은 물론이고, 천황과 귀족들의 집이 불탔고, 문화재까지 부서졌어요. 뿐만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와 쇼군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지요. 슈고 다이묘들은 전투를 끝내고 각자의 지방으로 돌아갔지만, 더 이상 쇼군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오닌의 난 이후에는 쇼군보다 땅 많고 힘센 사람이 최고가 되었어요. 여러 세력이 저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어서는 전국 시대가 막을 연 거예요.아랫사람이 윗사람의 힘을 무시하는 일은 지방에서도 일어났어요. 여러 싸움을 거치면서 스스로 힘을 키운 지방의 세력들은 슈고 다이묘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세력으로 커 나가기 시작했어요. 이들을 센고쿠 다이묘라 부르지요.“누구의 땅이든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센고쿠 다이묘들은 그렇게 외치며 땅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였어요. 서로 뭉쳤다가 배신하기를 반복했지요.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땅을 두고 싸움을 벌였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센고쿠 다이묘들은 땅과 농민을 손아귀에 넣고 경제력을 키워 나갔어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고, 불안한 날들이 계속 이어졌어요.그러던 1543년, 포르투갈의 배 한 척이 폭풍우를 만나 일본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까지 떠내려 왔어요. 이때, 이 지역의 영주 다네가시마 토키타카는 서양 사람이 가지고 있던 총을 사들였어요. 그리고 가까운 부하들에게 총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했어요.총은 전국에 퍼져 나갔어요. 이즈음에는 한참 센고쿠 다이묘들이 서로 다투고 있던 때라 앞다투어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려 했지요. 이 때문에 기마병 중심의 싸움은 점차 줄어들고, 성의 구조도 총알을 막기 위한 모양으로 바뀌어 갔어요.그런데 유독 총을 잘 이해하고 직접 만들어 내는 데 일찍부터 열을 올린 센고쿠 다이묘가 있었어요. 그는 총을 많이 만들고 조총 부대까지 실제 전투에 나서게 했어요. 옛날 방식의 전투를 단숨에 바꾸어 버린 거예요. 그는 오다 노부나가였어요.노부나가는 원래 오하리국 남쪽에 있는 기요스 성의 성주였어요. 그곳은 교통의 중심지였고, 농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땅이었어요. 훗날 노부나가가 재빨리 조총 부대를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지리적 여건이 한몫을 했지요.미쓰히데를 혼내는 노부나가미쓰히데가 배신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뿐이다. 배신한 이유가 노부나가에게 무시당한 원한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결단력이 빠르고 과감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당시의 센고쿠 다이묘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주 컸어요. 노부나가는 7년 동안 준비하여 전국의 중심지인 교토에 재빠르게 먼저 들어갔어요.그러고는 자신과 반대편에 선 적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지요. 1570년 에치젠의 아사쿠라 씨, 오미의 아사이 씨를 굴복시키고,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를 무찔렀어요. 바로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조총 부대를 앞세워 승리를 거두었어요.“기병이 공격해 오는 쪽에 장애물을 만들고 그 뒤에 조총 부대를 두어라!”이에 약 3천 명의 조총 부대가 당시 최강이라고 알려진 가쓰요리의 기병대를 단숨에 무찔렀어요.이어 1580년에는 10년 동안 승부가 나지 않던 정적 겐뇨와의 싸움에서도 항복을 받으며 끝을 냈어요. 그럼으로써 사실상 일본 중앙부의 절반 이상을 손안에 넣었지요. 이제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전국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는 듯했어요.그러던 1582년,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카마쓰 성에서 모리씨와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도움을 청해 왔어요. 이때 노부나가는 급히 달려가 다카마쓰 성에서 멀지 않은 혼노지까지 갔어요.그런데 며칠 후 새벽, 자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 중의 하나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공격해 왔어요. 뜻밖의 배신에 놀란 노부나가는 온 힘을 다해 싸웠지만, 준비를 하지 않고 있던 터라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지요. 마침내 오다 노부나가는 패배를 인정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오다 노부나가가 꿈꾸던 전국 통일은 뒤이어 등장한 히데요시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답니다.
Q.  크리스마스와 산타와의 관계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입니다. 전세계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유명 인사가 산타클로스이며 산타클로스 모자는 크리스마스를 기리는 사람들이 쓰는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이슬람 근본주의 시절 사우디아라비아가 크리스마스는 금지해도 산타클로스는 제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봐도 산타클로스의 상징성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아체, 탈레반 치하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에서는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가 금지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알음알음 산타클로스에 대해 알고 산타클로스는 전세계 사람들이 공유하는 유명인사입니다. 하지만 국가별로 산타클로스의 형태가 다릅니다. 정확히 말하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인물이 다릅니다.산타클로스 원형그 전에 산타클로스 원형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산타클로스의 원형은 로마 제국 시절 성 니콜라우스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낼 돈이 없자 성 니콜라우스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집 기둥으로 딸을 위한 금덩이를 선물을 전해준 이야기가 전해져 지금의 산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 덕분에 세 딸은 시집을 갈 수 있었고 이 헌신이 나중에 밝혀져 성 니콜라우스는 성인으로 존경받았으며 서로 귀중한 선물을 주는 문화가 탄생했습니다. 이것이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 선물 문화로 전해져 옵니다.그리스: 성 대 바실레이오스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는 특이하게 성 대 바실레이오스를 크리스마스 날 선물을 주는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성 대 바실레이오스는 로마제국 종교 분열 위기 속에 이를 해결하고자 한 성인으로 동시에 약자들을 위한 사회 봉헌활동도 활발히 해 모두에게 존경받던 성인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는 성 대 바실레이오스를 크리스마스 날 내려와 약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성인으로 생각하며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아기예수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독일 남부에서는 크리스마스 날 아기 예수 혹은 천사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준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기립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천사 장식을 달고 집이나 교회에 아기 예수와 천사 장식을 달아 봉헌합니다.산타클로스그 외의 가톨릭, 개신교 국가들은 성 니콜라우스를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는 성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부터 성 니콜라우스 이미지는 교황처럼 큰 교회 모자를 쓰고 교황 옷차림을 한 성인 성 니콜라우스가 노새 등에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담아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이미지였습니다. 독일 북부와 폴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 이 이미지가 전달되었고 식민지 개척시대에 그 이미지가 아메리카 국가들로 퍼졌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성 니콜라우스 이미지를 변화했습니다.코카콜라 회사는 브랜드 마케팅 주제로 성 니콜라우스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성 니콜라우스를 산타클로스라고 불렀고 코카콜라 회사는 코카콜라를 마케팅하기 위해 교황 옷차림인 산타클로스 옷차림부터 바꿨습니다. 코카콜라는 산타클로스를 동네 푸근한 할아버지로 묘사하며 산타클로스를 새롭게 재해석했고 코카콜라와 산타클로스를 동시에 브랜드 마케팅했습니다. 이 마케팅이 잘 먹혔고 지금 산타클로스 이미지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만든 이미지입니다.또한 1939년 미국에서 루돌프 사슴 동화가 나오자 동화 내용처럼 산타클로스가 루돌프 사슴 썰매를 끄는 이야기가 새롭게 창작되며 노새를 끄는 성 니콜라우스 이야기에서 루돌프 사슴썰매를 타는 산타클로스 이야기로 이미지가 굳혀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산타클로스 이미지는 미국이 창조한 이미지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세계로 퍼졌고 지금 전세계 크리스마스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Q.  세탁기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탁기는 미국의 엘바 존 피셔에 의해서 발명 됐습니다.피셔는 기계를 다루는 공학자였는데 1908년 토르라는 최초의 전기 세탁기를 출시 합니다.
Q.  노량해전이 왜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전투입니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하였다가 휴전 협상 조건이 서로 맞지 않아 결렬, 1597년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도독 유정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해상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사망하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주둔 일본군의 수뇌부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 왜교성 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시게토라, 남해에 주둔 중이던 소 요시토시 등은 고니시 군을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에 매복시켰다.이튿날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수적 우세로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지만 오히려 퇴로가 막힌 관음포로 유인당해 일본 측이 포위공격을 당하게 된다.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는 기회를 잡고 탈출을 시도했고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했고,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다. 단 한명의 조선수군도 동요되어서는 아니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초계군수 이언량 흥양현감 고득장 등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 군과 함께 일단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였으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2122232425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