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콜로세움은 로마의 경기장으로 언제 지어졌고 어떠한 용도로 사용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로마의 콜로세움은 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80년에 건축이 끝나 100일 축제 기간 동안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개막식을 올렸다. 온천 침전물 대리석으로 건축된 이 커다란 원형 건물은 처음에는 플라비아누스 원형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이곳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드는 5만 명 가량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대결이 끝나면 승자는 패배한 검투사를 죽여야 할지, 혹은 용맹함을 보여 주었으니 살려야 할지에 대한 관중들의 결정–혹은, 황제가 그 자리에 있다면 황제의 결정–을 살폈다. 오늘날 매우 유명한,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제스처를 통해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다. 시합에 들어가는 동물들(사자, 표범, 악어 등)은 극장 아래에 있는 우리에 가두었다가, 로프로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경기장에 풀려났다.중세에 콜로세움은 교회로 쓰였으며, 그 후에는 저명한 두 로마 가문인 프란지파네 가문과 안니발디 가문에 의해 요새로 이용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이 건물은 손상을 입어 지진의 피해를 입거나 강도가 돌을 약탈해 가고,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생긴 현대의 공해에 시달리게 되었으나, 콜로세움은 여전히 잔혹한 여흥을 즐기는 인간의 취향을 반영하는 기념물로 남아 있다.
Q. 강감찬 장군이 역사에 기록되는 주요 기록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습니다.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고려사절요》 현종 22년, 의 사관 논평앞에서 언급했듯 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북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라며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이다.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다. 즉,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고려사》에는 그에 대해,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라며 칭송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이었다는 소리이다.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이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이 때문에 '한국의 곽자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려시대 당시 60에 가까운 나이까지 장원 급제 이후 고려사에 등장이 없다. 이는 환갑이면 이미 살만큼 살았다는 당시 수명 기준으로 굉장히 늦은 등장인데 이후 현종의 즉위와 함께 출세길이 열리고, 3차에 걸친 고려-거란 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말년에도 문하시중의 직위와 후작위를 받으며 개성에 나성 건축을 주도하는 등 활약했다. 이미 생전에 문하시중이라는 최고위 관직, 후작이라는 사실상 왕족과 개국공신을 제외하면 받을 수 있는 최고위 작위, 권력, 인망 등 모든 것을 누렸다. 그러나 일반적인 권신들과 다르게 숙청되지 않고 평안한 말년까지 보냈으며 사후에도 구국의 영웅으로 배향을 받고, 고려 이후에도 강감찬의 평가는 낮아지지 않았으니 한국사에 손꼽히는 인생의 승리자로 평가받는다.또한, 강감찬이 승리로 매듭지은 귀주 대첩 이후 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북송, 요나라와 더불어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 동안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에 이르는,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였다. 강감찬은 고려시대 최고의 군주인 현종을 보필한 왕좌지재의 신하였던 것이다.이렇게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평화가 이어진 시기는 사실 찾아봐도 거의 없는 편인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 거란군을 귀주 대첩으로 크게 물리친 덕택에 요나라는 정복전쟁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고, 북송, 요나라, 고려, 서하 등 4개국 간의 평화 균형 체제는 훗날 금나라가 흥기하여 요나라와 북송을 잡아먹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단순히 구국의 영웅 이상인,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