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신라의 진흥왕의 업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실상부한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이자 한국사에서 광개토대왕, 근초고왕, 선왕과 더불어 자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군주로 자리매김한 걸출한 명군. 진흥왕이 고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부분은 수백년 가까이 한반도의 패권 싸움이 백제 vs 고구려로 돌아가던 틀을 깨부쉈다는 것이다. 지증왕, 법흥왕 때까지만 해도 신라는 나제동맹과 같이 변수 역할까지는 가능했지만 근초고왕, 광개토대왕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전체의 최강을 다투는 경쟁에서는 사실상 바깥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구도를 뒤흔들어 놓은 임금이 바로 진흥왕이었다. 신라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장악하면서 백제는 해상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고립무원 상태로 전락해버렸고, 고구려도 한강 유역을 상실해 언제든지 수도 평양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국경을 위협당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이전까진 존재감이 별로 없다가 거의 새로 등장하다시피한 신흥 강국 신라에 온 국력을 쏟으면서 맹공을 가해야 했다. 특히 백제는 예전 정세로 바꾸기 위해 더욱 끊임없이 맹공을 가했으나, 도리어 성왕이 전사하여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온달 전설로도 전해지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일시적으로 신라가 밀렸다는 설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진흥왕 대에 확장한 북방 국경은 함경도를 제외하면 고구려 멸망 때까지 줄곧 신라가 유지하며 우위를 점하는데, 이는 진흥왕 대의 영토 확장이 시발점이 된 것이었다.또한, 신라는 내물왕 대에 본격적인 중앙 집권화를 시작했지만 내물왕 만년에 왜, 가야, 백제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을 받으면서 결국 중앙집권화가 지체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100년 후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대를 거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확실히 변모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와 대등하거나 더 나아가 이 두 국가를 흡수통일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갖추어 나가는 강력한 정복국가가 된 시기도 진흥왕 대이다.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한 지난한 과정을 겪게 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진흥왕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서로 동맹을 맺어 신라를 협공하는 구도가 되어 진지왕과 진평왕, 선덕여왕으로 이어지는 7세기 중엽까지 오히려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면서 황해로 통하는 통로를 얻어 이때부터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게 되었기에, 넓게 보면 이후 삼국통일전쟁의 당나라, 신라 vs 고구려, 백제, 왜국 구도를 열어 젖힌 것도 진흥왕이다.진흥왕이 폭발적 성장을 이끌었지만 그가 일찍 죽어버리고 곧이어 기세가 꺾였던 것은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후계자 진지왕이 4년만에 폐위당해 확장에 필요한 동력을 낭비했고, 이후 무려 100여년이 지난 문무왕의 삼국통일 이전까지 신라는 오랫동안 진흥왕이 만든 판도를 지켜내는 굳히기 태세를 이어나가게 되기 때문. 진흥왕은 42세에 사망했는데, 당시 평균수명이 낮았다고 하지만 유아사망률을 감안하면 40대 초반은 전근대시대라도 아직 활발히 활동할 나이대였기도 하고, 지증왕부터 문무왕까지 신라 중대 대부분 왕들이 진흥왕과 진지왕을 제외하면 50대~70대 정도는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족력을 따져도 진흥왕은 좀 빨리 세상을 떠난 편이었다.일각에선 비판도 있는데, 진흥왕 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건 좋았으나 이로 인해 빡친 백제가 무왕, 의자왕 대에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고 주요 요충지인 대야성을 포함한 성들이 함락되고 고구려 역시 맹공을 가하며 후대왕인 진평왕이 고생을 했을뿐만 아니라 당나라가 개입을 안했으면 신라는 하마터면 멸망당할뻔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토인 경상도까지 뚫렸고 고구려-당 전쟁이 없었으면 주필산 전투의 150,000명, 금산의 200,000명,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 40,000명 등 일개 성들에게서 신라 각지에서 긁어모은 주력군과 같은 수의 병력이 뽑혀져 나오고 전투 한번에 10~20만명을 동원하는 고구려군과 백제군 3~4만명이 연합해 들어왔으면 신라는 그대로 망하는 수순을 밟았다는 것이 이 비판의 주된 내용이다.하지만 이런 평가는 선후파악을 잘못한 다소 성급한 주장에 불과한데, 한강 유역 점령을 하지 않았으면 당나라의 개입 이전에 이미 영남의 3류 국가로 전락해 도태하여 멸망했을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우선 신라가 거길 차지하지 않았으면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당장 신라의 경쟁상대인 고구려나 백제가 거길 차지했을 것이다. 그들을 상대하는 신라는 한강 유역 생산력의 2배만큼 불리해지는 셈으로 실제 역사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한강 유역은 단순히 전략적인 요충지이자 농경지였을 뿐 아니라 당나라와의 교역 루트를 담당했던 곳으로써 이 곳이 없었다면 단순 국력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밀릴 뿐 아니라 중원 왕조와의 교류 및 나당동맹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고구려 - 백제 - 왜국의 협공에 대응하려면 당나라와 외교를 해야 했는데, 남해를 거쳐서 당나라를 가거나, 한강 유역에 위치한 당항성을 거쳐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남해로 이동할 경우 백제에게 가로막힐 확률이 매우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항성의 존재는 신라에게 단비같은 존재였을 수 밖에 없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당시 신라의 최고 장수였던 김무력을 한강일대를 다스리던 신주의 초대 군주로 임명했던 것도, 신라 최정예군을 대야성을 비롯한 대(對) 백제 전선이 아닌 신주에 배치했던 것도, 한강을 잃으면 신라는 버틸수 있는 기반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한강 유역에 비해 간과하기 쉽지만 한강 유역뿐 아니라 진흥왕대에 신라가 가야 거의 전체를 흡수한 것도 엄연히 진흥왕의 공적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미 함안 안라국까지 백제군이 동진했던 상황인 이상 적어도 가야 서부지역은 백제의 몫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고, 7세기 신라 서측 국경의 철통 방어선이었던 대야성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또한 위의 비판점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는 한강유역을 빼앗기기 전부터 이미 신라를 틈만 나면 털어버리려고 눈에 불을 키고 있던 나라들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광개토대왕 - 장수왕대의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다스렸고, 나제동맹이 결성되기 이전까지의 백제는 신라의 적국으로서 수차례 전쟁을 주고 받았던 관계였으며, 동맹 기간에도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이었으나 양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야를 놓고는 신경전이 지속되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의 지배여부와 상관 없이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가 약해보인다 싶으면 덮쳐버릴 준비를 했다.따라서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침공해 후대 왕들이 고생한게 아니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과 가야 지방을 차지한 덕분에 훌륭한 군사적 요충지+압도적인 자원+훌륭한 교역망을 얻었고, 이로 인해 멸망할 뻔 한 나라를 살릴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Q. 기아자동차에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4년 12월 11일에 학산 김철호에 의해 '경성정공'으로 설립되어 초기에 자전거 부품을 만들었으나, 1952년 3월 국내 최초의 자전거 '3000리호'를 출시(다들 아는 그 삼천리자전거의 기원이 된다.)하고 1952년 부산공장 신설 후 기아산업(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1957년 시흥공장 설립 후 1961년에 일본 혼다와 합작해 2륜 오토바이를 처음 생산했고, 1962년 도요공업의 모델을 들여와 356cc짜리 3륜 화물차 K-360을 생산하면서 '기아마스타' 모델을 쓰며 자동차 사업에도 손을 뻗었다. 1970년 4륜 화물차 복서 및 타이탄을 출시했다. 1973년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 종합자동차공장을 세우고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했으나, 그해 김철호 사장이 숨지자 장남 김상문이 후계자로 나서며 1974년에 국산 FR 승용차 브리사를 제작하였다. 브리사는 당시 국산 승용차 시장 1위를 차지하는 최강자의 위치에 있었을 정도로 막강[32]했던 차량이다.1975년에는 이륜자동차 부문을 떼내 '기아기연'으로 출범시켰고, 1976년에는 동국제강으로부터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고 1979년 자전거사업부를 '삼천리자공'으로 독립시켰다. 1981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산업합리화)로 인해 정부로부터 '중소형화물차 및 버스 전문생산업체'로 지정받아 승용차 생산이 금지되면서 경영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전문경영인 체제가 들어선 이후 마쓰다의 소형승합차 봉고를 라이선스 생산해서 대성공을 이루는 한편, 1982년부터 원가절감운동 'RCD-22' 작전을 밀어붙여 경영을 정상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위기를 넘겼을 뿐이지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의 여파를 모두 털어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상 합리화 조치의 최대 피해자라 할 수 있다.1983년 일본 마쓰다와 이토추상사의 지분 참여를 받아들인 후, 이듬해 중앙기술연구소를 열었다. 1986년에 미국 포드와도 자본 제휴를 맺으며 오대양 육대주를 휘날리는 깃발(또는 물결무늬)을 형상화한 로고로 변경하고 여의도 거산빌딩을 인수하여 건물 이름을 기아빌딩으로 바꿔 입주하였다. 1987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풀리고 프라이드, 콩코드로 다시 승용차 시장에 진출한 뒤 1989년 경기도 화성군[39] 우정면 석천리•이화리에 아산만공장(현 화성공장)을 준공하고 아산만출하사무소(현 화성출하사무소)를 개소하고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기아빌딩(북수원지점)을 개점했다.같은 해 필리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국민차개발 참여업체로 지정받은 뒤 1992년 일본에 첫 현지법인을 세웠으며, 최초의 독자모델 세피아를 출시하고 여의도 2번사옥을 지으면서 확실하게 그룹을 키워갔다.1993년 아산만공장 내에 종합주행시험장을 완공한 후 1994년 1월부터 2021년까지 사용한 타원형 로고로 변경했다. 바뀐 이유는 그 전 로고의 모양이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환경오염을 연상하게 해서 바꿨다는 것이 정설이다. 어쨌든 같은 해 세피아와 스포티지를 처음 독자적으로 수출하고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평리에 발안지점을 개점했다. 1995년 독일에 첫 해외 판매법인을 세우고 1996년에는 공식 홈페이지까지 개설하였다. (계열사 아시아자동차는 글자만 달랐다.)1990년대 중순에는 마쓰다주식회사 및 포드 모터 컴퍼니로의 의존도를 줄이고 엔진 기술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영국의 로터스 엔지니어링, 로버 그룹과도 제휴하였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로버 KV6 엔진의 한국 생산분, 그리고 로터스 엔지니어링에 운전역학 설계를 일정 부분까지 맡긴 기아 크레도스였다.1990년대 중순에 MBC 라디오에서 방송하는 잠깐만 캠페인에 협찬한 바 있다.모터스포츠 쪽에선 1995년에 WRC 호주 랠리 비개조 클래스(NP2, NP3)에 세피아로 출전한 5대, 8대의 차량중 1등을 한 기록이 있는 회사다.(이때 박정룡 선수가 NP2 클래스에 참가했다.) 당시 전체 순위는 각각 36, 28위였으며, 이날 경기 우승은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3기가 차지했다. 또한 해외 지사의 출격이긴 하지만 다카르 랠리 완주 경험도 있다.1997년 7월 경영악화로 부도를 맞은 뒤 1998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국제 공개 경쟁입찰로 처리방침이 확정됨에 따라 1998년 10월 현대자동차에 낙찰된다. 1999년 아시아자동차와 함께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어 현대그룹에 편입되었고, 6월에는 기아자동차판매, 아시아자동차, 기아대전판매, 아시아자동차판매 4개사를 통합한 뒤 2000년 2월 회사정리절차가 종결됐다.
Q.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사에서 가지는 위상은?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련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프로코피예프와 함께 현대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20세기 음악사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0대 시절부터 조숙한 음악성을 확립하여, 음악인생 내내 특유의 번득이는 신랄함과 풍자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작곡하였다.20세기에 태어난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서방과 전혀 다른 음악환경을 가진 공산주의 국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조성의 해체와 아방가르드가 대세였던 서유럽의 음악사조와는 상당히 다른 음악세계를 구축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소 암시적으로 돌려 말하였으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꺼렸고, 그의 행적 역시 우유부단, 자기모순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사료에 기반한 평가들도 서로 모순적이며 극명히 갈리는 작곡가이다.따라서 쇼스타코비치를 공산주의자이자 정권 친화적인 음악을 창작한 어용 성향의 작곡가라는 기존 해석, 소련 체제의 비판자였다는 해석, 절충적으로 레닌이나 러시아 혁명 등 초기 혁명가들에 대한 경외심을 계속 유지했지만 스탈린 등 이후 집권자들에겐 비판적이었다는 해석들 중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그가 창작한 작품의 이해에 영향이 크다. 이런 논란과 별도로 그의 음악은 다른 현대작곡가들의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들이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많은 작품들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연주되고 음반으로 발매되고 있다. 그가 작곡한 15곡의 교향곡은 현재까지 교향곡 분야 최후의 '대작'(=마스터피스(masterpiece))으로 평가받는다.20세기를 대표하는 스타급 작곡가였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대중적 인지도 측면에서는 시벨리우스와 투톱을 이룰 정도였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때 그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높아졌는데, 그의 교향곡 제7번은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라디오로 들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쇤베르크, 힌데미트, 바르톡 등 구미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의 질투를 한 몸으로 받았고, 소련에서도 그 압도적인 인기 때문에 견제를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서구와의 교류와 정보가 제한된 소련에서 활동하던 작곡가였으므로 신비주의적인 아우라가 형성된 측면도 있다.오늘날 클래식 작곡이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었고, 새로운 기법의 발달 역시 80년대 이후 지지부진하게 고여버린 상황 속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일각에서 최후의 클래식이라 불릴 정도로 평가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대중적 인기와 별개로 '현대음악의 동향으로부터 동떨어지고 보수적인 어법에서 나아가지 못한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느냐'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학계의 시각도 줄고 있는 상황이며,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어필하는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 때문에 새로이 입문하는 젊은층도 많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 작곡가들이 개성적이고 기발한 어법에도 불구하고 죽고 나면 빨리 잊혀져버리는 것과 정반대인 특이한 케이스.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권력에 의해 진보적인 작풍이 꺾여버렸으므로, 음악적 혁신을 중시하는 음악사적 관점에서의 평가는 여전히 미묘하다. 기본적으로 그가 뛰어난 재능과 음악성을 지닌 작곡가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소시적의 파격과 실험정신을 계속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법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 성향의 답보와는 거리가 멀다.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에 국가가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예술활동에 각종 간섭을 했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의 음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런 시대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충분히 뛰어넘는 음악성을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그의 음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정치에 엮여서 제대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는 단순히 시대의 희생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권 친화적인 음악을 창작한 어용 성향의 작곡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한 예로, 스탈린의 진노를 산 것 때문에 체제에 도전적인 곡마냥 여겨지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도, 사실은 플롯 면에서 당시의 사회 기조에 맞추어 쿨라크를 풍자하는 등 애초에 체제옹호적인 작품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도 있다. 쇼스타코비치 본인도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리기는커녕 신예 작곡가로서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더라는 말도 있고.한편으로는 쇼스타코비치를 '관제 작곡가'나 '체제 비판자' 같은 정치적인 문제와 얽기보다는 음악 자체만 놓고 평가해 보자는 '순음악' 계열의 움직임도 있다. 이런 움직임은 서방이나 일부 망명 음악가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볼코프의 '증언'이 진서로 취급받던 1970~80년대에는 쇼스타코비치 음악에서 '선전성'을 걷어내고 냉정한 시각을 견지하는 해석이 나타났다는 점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즉, '음악과 정치'의 연계를 주장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작곡가이다. 공산 체제의 어용 음악가에서부터 '내부 반항자'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정말 천차만별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여기에 작품에 나타나는 특유의 수수께끼같은 요소나 생전의 각종 행적들이 논쟁을 더 격화시키고 있다.Op.10 교향곡 1번 f단조 (1923~25)쇼스타코비치의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작품으로서, 쇼스타코비치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이다.Op.14 교향곡 2번 B장조 '10월 혁명에 바침' (1927)러시아 혁명과 레닌을 찬양하는 곡이다. 마지막 대목의 가사인 '이것은 구호이며, 살아있는 세대의 이름이다: 10월, 코뮌, 레닌!(Вот знамя, вот имя живых поколений: Октябрь, Коммуна и Ленин!)' 에서는 아예 노래가 아니라 해당 문구를 크게 읊조리는 슈프레히게장을 사용하여 공산주의 정권의 혁명이념을 강조하였다.Op.20 교향곡 3번 E플랫장조 '메이데이' (1929)쇼스타코비치가 '새로운 사회주의 세계의 건설과 축제 분위기' 의 표현에 진력했다는 곡이다. 메이데이와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는 내용이다.Op.43 교향곡 4번 c단조 (1934~36)초연 직전 작곡가가 연주를 포기함으로써 20년이 넘도록 베일에 가려졌던 교향곡. 당시 기준으로 전위적으로 작곡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백베스 부인'이 '프라우다' 신문을 통해 거센 비난을 받아, 역시 당시 기준으로 전위적으로 작곡한 이 곡의 초연을 포기하고 다음의 교향곡 제5번을 작곡하였다.Op.47 교향곡 5번 d단조 (1937)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중 가장 연주 빈도가 높은 곡. 이 곡을 통해 정치적 위기로부터 기사회생하였고, 국제적인 명성도 확고하게 얻었다.Op.54 교향곡 6번 b단조 (1939)Op.60 교향곡 7번 C장조 '레닌그라드' (1941)일명 '레닌그라드'. 나치 독일군과 소련군의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모티프로 작곡하였고, 2차대전 당시 소련의 동맹이던 미국은 라디오에서 매일같이 틀어주었다고 한다.Op.65 교향곡 8번 c단조 (1943)Op.70 교향곡 9번 E플랫장조 (1945)숫자가 숫자인지라 베토벤의 9번에 버금가는 장대한 작품이어야 한다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지만, 상당히 가볍고 유머러스한 작품을 만듦으로써 모두의 기대를 빗나갔다. 이후 즈다노프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교향곡 작곡을 오랫동안 유보한다.Op.93 교향곡 10번 e단조 (1953)9번 교향곡 이후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스탈린 사후에 빠르게 작곡함으로써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격렬하고 공포스러운 2악장은 스탈린에 대한 초상이라고 '증언'에서 밝힌 바 있다.Op.103 교향곡 11번 g단조 '1905년' (1957~58)Op.112 교향곡 12번 d단조 '1917년' (1960~61)Op.113 교향곡 13번 b플랫단조 '바비 야르' (1961~62)Op.135 교향곡 14번(1969)독특한 편성과 파격적인 악장 구성을 가진 쇼스타코비치 말기의 대작.Op.141 교향곡 15번 A장조 (1971)
Q.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참전한 계기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나라군의 참전 이유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러운 야사들이 많지만 사실 이 전쟁의 목적부터도 그렇고 전략적으로 봐도 명나라가 참전할 이유는 충분했다.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명분은 명나라를 정복[唐入り]하여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지, 단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도요토미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통보한 요구 사항도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은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며 이러한 의도를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런데 당시 조선과의 일본의 경계에 위치하여 양속관계에 있던 대마도의 도주 소 요시토시는 그 요구 사항이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불손한 내용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국서의 내용을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살짝 바꿔서 전했는데, 그마저도 가도입명(假途入明), 즉 명을 치러 가려 하니 조선은 그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이에 머리끝까지 화난 만력제는 비전투지원은 물론이고 대규모 파병을 실시했다.따라서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 데다가 병력을 20만 이상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려 요동, 동남부 해안가, 그리고 수도 북경까지 위협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그 대가로 막대한 군비를 감당해야 한다. 반면, 조선 왕조는 개창 전부터 조공국으로서 큰 마찰없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으니 당연히 변경의 울타리 역할을 맡은 조선을 살려두는 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주변에 적국을 늘리는 것은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을 일이었을 것이다.또한 만력제 본인에게도 임진왜란 참전은 상당히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이미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만력제는 후계자 문제로 인한 쟁국본과 본인의 태업으로 인해 신하들과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만력제는 권위를 확보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터진 임진왜란은 만력제로선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위기에 처한 번국인 조선을 구원하고 감히 천조의 질서를 어지럽힌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명분은 천자로서의 위엄을 떨치고 권위를 확보할 매우 확실한 방법이었다.결론적으로,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만력제가 동의한 것도 사실이나 더 중요한 건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적극적인 참전 주장 때문이었다. 석성은 홍순언과의 야사가 유명하지만, 종계변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사는 야사. 실제로는 저런 야사 때문에 조선을 도운 게 아니라 병부상서를 맡았던 인물인 만큼 당시 명나라의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명나라군의 참전과 역할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나라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든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나라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명나라군의 참전은 의의가 없지는 않았지만 명나라군이 지나치게 폄하당하는것에 대한 반발인지 재평가를 넘어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군 덕분에 이긴 전투는 실질적으로 4차 평양성 전투밖에 없다. 심지어 4차 평양성 전투도 제대로 이겼다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는 전투이고 조선군도 1만명이 함께 싸웠기에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이다. 명나라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나라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다만 명나라가 건국 초기 15만 군대로 북원을 쓸어버리고, 20만 군대로 베트남까지 원정가서 베트남 호왕조를 무너뜨릴 정도의 군세를 자랑했지만 유독 왜구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명나라 초부터 국토 동남해안을 탈탈 털렀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몇십년 전 정규군도 아닌 사실 이 왜구들이 이후 정규군으로 편제되었지만 아무튼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 남부가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명나라군이생각보다 약했다고도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왜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이때 파병된 명군은 (해외파병의 성격상 당연히) 정예군이었고 열심히는 싸웠다.제1차 조승훈의 3,000~5,000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0,000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불랑기포라는 신무기로 포격해(육상군 주제에 대포 500문을 퍼붓는 중국의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평양성을 탈환(1593년 1월 27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 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나라군과 동장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연합군과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1593년 5월 18일) 다만 한양 수복을 위해 12만 대군을 박박 긁어모은 조선은 벽제관에서 패배하고 그대로 셧다운 상태가 되어버린 명나라군 5만까지 17만의 보급물자를 대느라 하루하루 말라죽었고, 결국 한타 싸움이 아니라 장기전 압박과 협상으로 한양을 탈환하긴 했지만, 이때는 보급물자도 민생도 파탄나버린 후였다. 이렇게 올인 한타를 벌였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식량소비량 급증 +식량생산량 급감) 조선은 병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이여송이 평양부를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도 조총으로 명나라군을 엄청나게 사살한 끝에 고니시와 그의 군대는 안전하게 평양에서 빠져나온다. 그렇다고 해도 평양성 탈환으로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당장 고니시가 평양부 점령 후 선조를 추격하지 않은 것도 고니시군이 공세 종말점에 도달해 여력이 없었던 점도 있지만 명나라군의 참전에 대한 소문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만약 고니시군이 지치지 않고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원이 없었다면 이순신이나 조선군과 의병의 활약도 의미가 없이 전쟁이 거기서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원나라 시대에 쓴 《송사》에는 한세충과 같은 사기적 명장이 있어도 지도자인 황제가 한심해서 금나라에게 결과적으로 지고 있었는데, 선조도 명나라로 도주할 생각까지 했던 만큼 그와 비슷한 한심한 작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결론적으로 명나라군은 전선이 명나라 땅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인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란 중 각지에서 명나라군은 조선군과 연합해 활약했다. 비록 많은 추태와 패배를 하기도 했지만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전쟁 막바지에는 유정과 같이 명 육군이 전투를 회피하는 일이 빈번히 생겨 이순신 장군이 조금 고생하기도 했다. 반면 명 수군을 이끌던 진린은 유정과 달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같이 싸우긴 했다. 대표적으로 노량 해전에서는 일본군이 철수하므로 명군은 더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지만 진린은 끝까지 이순신과 협조했고, 자신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비록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순신은 물론 자신의 휘하 장수인 등자룡을 잃었다.더불어 명나라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 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란으로 조선 경제가 굉장히 피폐해진 상태여서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어 농사짓게 하는일이 급했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나라군의 참전 이후 크게 줄어든다.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나라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탱커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고, 정유재란 때는 대규모 파병으로 아예 명나라군이 주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나라군은 약 5만~7만 4천 명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나라군은 9만~11만 7천 명에 달했다.조선인에 대한 약탈이 엄청나게 심했던 명나라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154]에 따른 조선의 식량 사정이 나아졌다.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선조는 이후 재조지은이라며 명나라군을 드높이는데 이는 명나라군의 역할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당시 선조가 조선군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데는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 + 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 +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나라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경략 송응창은 조선에서 명나라 병사들의 대민약탈을 항의했을때 사과했고 군대와 그를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군령삼십조(軍令三十條)를 하달하여 군기를 확립시켜 조선의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군령 삼십조'에는 조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명하는 조항이 3개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관과 장졸들은 조선의 지방을 지나며 개와 닭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도록 하여 조금도 범하지 말 것, 감히 민간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5조), '조선 부녀자를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6조), '조선의 강산은 곧 황상의 강산이며 조선의 백성들은 황상의 백성이니 함부로 조선의 남녀를 죽이거나, 투항한 자나 부역한 자를 죽이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20조)]였다. 게다가 명나라군의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명나라는 피해를 준 부분이 있지만 분명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일본이 이길 줄 알고 일본군에 붙거나 협력한 조선인들도 의외로 적지는 않았는데 명나라군이 참전해서 상대적으로 조선에 힘이 더 실려 그런 내부적 불안 요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정감이 생겼다. 일단 명의 황제가 계속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조선 혼자서 일본이란 강적과 싸울 때보다는 사기도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가 재조지은을 외친데에는 전란으로 인해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자국의 전쟁 영웅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찾았는데 그 이유는 명나라를 높이 세우면서 명나라군을 요청한 자신의 공을 인정해달라는데 있다. 이후 조선 조정은 청조의 감시까지 피해가면서 경복궁 뒤뜰에 대보단을 만들어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명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자 청에 대한 반발 심리 역시 적용된 것이다.
Q. 예수의 탄생일은 기록이 없는데, 왜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기리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초대교회에 성탄절을 지켰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게 되었는데, 주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요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성탄절을 지키지 않은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일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산 사람에게는 “나 살아있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죽은 사람은 “이 사람이 이 땅에 살았던 실재 인물”이라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고,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만났던 분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았고, 어느 샌가 예수님은 전설 속의 한 인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성탄절이 제정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하면서 예수님은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재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하셨던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생일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고민하던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이 3월25일에 수태되어 12월25일에 탄생했다는 민간에 퍼진 전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 날을 성탄절로 하게 된 것은 당시 기독교가 처한 사회적 상황도 한 몫을 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국교였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의무적으로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실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기독교 의식보다는 이전에 자신들이 믿었던 신앙에 더 친숙했습니다. 우리가 설날을 양력으로 옮기려고 해도 음력 1월1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외적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실제로는 국교화 되기 이전 헬라의 여러 신들을 섬기던 것이 몸에 배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12월 25일이 되면 동지에 가까워지며 태양신을 섬기는 전통적인 축제가 열렸습니다. 평소 기독교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 절기가 되면 다시 예전 우상을 섬기던 그런 시절의 사람으로 되돌아가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는 이 날을 태양이 아니라 참 빛이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절기로 바꾸자는 것이었죠. 이것은 상당한 효과를 낳았습니다. 성탄절을 지키기 시작한 때로부터 이전까지 지켜오던 태양의 축제가 건전하고 성스런 축제로 변모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후 354년에 정식 절기로 정해져 지켜오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