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임진왜란 당시 제주도는 큰 문제없이 평화로웠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목표는 조선 국왕을 잡아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제주도는 그 길목에서 벗어나 있어서 신경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와 제주도를 점령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승리로 인해 그 목표가 다시한번 좌절 됩니다. 제주도에 한번 일본이 얼쩡거렸는데 그걸 확실히 박살냈고, 제주도의 조선군들은 명나라 군대로 위장해서 건드릴 엄두를 못 냈습니다.운도 좋았고, 제주도 그 자체에서도 준비된 덕에 제주도는 별 일 없었죠. 그리고 이순신 장군 등의 육지의 수군들에게 지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Q. 12.12사태의 발생 원인과 결과는 어떻게 된건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단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사망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鄭昇和) 간에는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金載圭)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 했습니다.전개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兪學聖), 1군단장 황영시(黃永時), 수도군단장 차규헌(車圭憲), 9사단장 노태우(盧泰愚)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朴俊炳), 1공수여단장 박희도(朴熙道), 3공수여단장 최세창(崔世昌), 5공수여단장 장기오(張基梧)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李鶴捧)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許三守),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禹慶允)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 했습니다.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 했습다.한편, 정승화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鄭柄宙), 수경사령관 장태완(張泰玩),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金晋基)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許和平)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 됐습니다. 연회 도중 정승화의 연행 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 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습니다. 정승화의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정병주와 장태완은 수도권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대응하려 하였지만, 신군부는 전방을 지키던 노태우의 9사단을 끌어들이며 대처했습니다. 결국 신군부는 정병주와 장태완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며 반란 진압군은 무력화되었습니다.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 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崔圭夏)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고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국방장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며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국방장관 노재현(盧載鉉)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게 설득 했습니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 했습니다.결과와 영향군사반란이 성공하자 신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전두환은 대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대통령에 이르렀고, 노태우 역시 대장, 내무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을 지냈고 이밖에 군사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인원들도 요직을 차지 했습니다. 또한 12·12 군사반란의 성공으로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민주헌정을 중지시키고 군정으로 회귀하려 했습니다. 이에 많은 국민과 정치인이 저항 운동을 펼쳤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됐습니다. 그리고 이는 5·18 민주화운동으로까지 이어 졌습니다.
Q.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중에서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그리스만큼 동성애를 대놓고 즐겼던 문명권은 전무후무 합니다. 중근세 일본이나 중동에서 와카슈도나 높으신 분들이 소년들을 대상으로 남색을 즐기는 경우는 있었지만 고대 그리스처럼 시민 구성원 대부분에게 퍼져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진 않았습니다. 반면 고대 그리스의 경우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동성애가 일반적인 풍습에 가까웠는데, 일부 철학자들은 심지어 동성애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예찬할 정도였습니다.그리스인들이 동성애를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는 증거가 그리스 로마 신화입니다. 제우스가 사랑한 미소년 가니메데, 아폴론이 사랑한 미소년 히아킨토스 등 신들조차도 동성애를 했을 정도로 당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보편적 이었습니다. 신들 뿐만 아니라 영웅들도 동성 연인들이 많았습니다. 아킬레우스는 동성 연인 파트로클로스를 두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동성 연인들과 사랑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신화에까지 동성애 요소를 집어넣은 문명권은 그리스 문명이 유일합니다.'고대 그리스가 게이들의 천국이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게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플라토닉 러브 문서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당시 고대 그리스의 동성연애는 현대의 자유로운 동성연애와는 살짝 결이 다릅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완벽한 사랑은 남성들끼리만 할 수 있는 거라 여겼습니다. 성적 접촉이 존재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육체적 욕망에만 탐닉하는 건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는 단순한 자유연애가 아니라 성인들이 소년들을 교육시키며 사회적 진출을 곁에서 도와주는 스승-제자의 관계이자 후견인의 관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동성 간의 정신적인 사랑을 더 중요시했습니다.아무리 고대 그리스식 동성애가 플라토닉 러브였다지만 정신적인 사랑에는 육체적인 사랑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소년 가니메데가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서 옷 사이로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자, 제우스가 그 뽀얀 살결을 보고 반해서 그를 납치했다는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와 육욕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다만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육체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도 절제가 중요시 되었습니다. 항문 성교보다는 허벅지 성교가 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항문성교를 행하면 당하는 대상이 지나치게 여성스러워질까봐 였습니다. 펠라치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나치게 경망스럽고 음란한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 었습니다. 성기가 작은 사람을 이상적으로 여겼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제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야만인으로 여겨졌는데, 남성기가 크면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원숭이 같은 인간일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고대 그리스의 소년애 관습은 동성애 성향이 존중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시각 또한 존재합니다. 우선 (평생을 함께한 동성 커플이나 신성부대 등의 사례가 있듯이 남성 동성애자가 차별받는 분위기와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소년애를 행하던 사람 중 다수가 나이를 먹고 여자와 결혼을 해 자손을 잇는 경우가 많았고 보통은 남성 전반이 아니라 미성년자 소년만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 소년애를 동성애라 볼 수 없고 그저 고대에 존재했던 독특한 성 관습이거나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는 시야에선) 아프가니스탄의 미성년자 남창 문제 처럼 성학대에 가깝다는 주장이 존재합니다.부작용에 대한 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