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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소탐대실과 같은 의미인말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과유불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過猶不及「모든 사물(事物)이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이 중요(重要)함을 가리키는 말.
Q.  모짜르트 돈 조반니의 만들어진 배경과 어떤 내용인지 작품해석 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풍자와 해학이라는 측면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만큼 탁월한 작품도 없는 듯하다. 1787년에 프라하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대본작가 로렌조 다 폰테와 손잡고 만든 이른바 ‘다 폰테 3부작’에 속한다. ‘다 폰테 3부작’은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여자는 다 그래]를 말하는데, 오페라를 얘기할 때 이렇게 작곡가가 아닌 대본작가의 이름을 부각시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대본이 그만큼 탁월하다는 얘기다.로렌조 다 폰테(Lorenzo Da Ponte, 1749~1838)는 베니스 출신으로 본래 유대교 신자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신부가 되었다. 하지만 신부로서 금욕적인 삶을 살기에는 그는 너무나 술과 여자, 도박을 좋아했다. 그렇게 신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실을 일삼으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가 사제단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카사노바의 권유로 음악의 도시인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갔다. 그리고 빈에서 모차르트를 만나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를 만들었다. 모차르트와 로렌조 다 폰테. 이 두 명의 천재 악동이 만든 오페라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더불어 로렌조 다 폰테라는 이름도 유명해졌다.서곡과 끝[돈 조반니]는 비장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D단조 음악으로 시작한다. 이 단조의 음악은 오페라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1막 시작하자마자 돈 조반니에게 살해당한 코멘다토레가 유령으로 다시 나타날 때 이 음악을 반주로 노래한다. 이번에는 코멘다토레가 돈조반니를 저승으로 데리고 갈 차례인 것이다. 오페라 [돈 조반니]는 재미있는 희극 오페라로 볼 수도 있지만 두 명의 등장인물이 죽는 비극이기도 하다. 사실 돈 조반니의 비극은 살인으로부터 시작한다. 난봉꾼이 살인자가 되었으니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닌 곳을 건드린 것이다. 모차르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작품이 죽은 자를 위한 종교음악인 [레퀴엠]이며 역시 같은 D단조의 곡이다. 모차르트에게 D단조와 죽음은 분리하기 어려운 것 같다. 바로 그 단조 음악으로 시작하는 오페라 [돈 조반니]는 서곡처럼 희극과 비극이 혼재하는 특별한 오페라이다.코멘다토레는 칼에 찔려도 노래는 한다.돈나 안나의 아버지인 코멘다토레는 이 오페라에서 모두 세 번 나온다. 처음 등장하면서 돈 조반니와 싸우다가 죽은 후 2막에서 동상의 모습으로 노래하며, 오페라 끝에 돈 조반니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로 등장한다. 오페라는 모든 것이 노래로 불려진다. 웃어도 노래처럼 웃어야 하고 울어도 눈물 대신 노래의 선율로 울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코멘다토레가 칼에 찔리는 일이 생겨도 죽기 직전까지 남기는 말은 모두 노래로 해야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오페라는 극적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바로 그 점이 오페라만의 고유한 특징임을 이해해야 한다. 2막에 나오는 죽은 코멘다토레의 동상 장면에서 동상은 레포렐로의 질문에 입을 움직여 답한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정도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 정도만 노래한다. 이 장면에서 코멘다토레 동상은 한 번에 두 개의 음만으로 노래한다. 그러나 이 동상이 마지막 장면에서 유령으로 나타나 돈 조반니를 처벌할 때에는 사람처럼 굴곡 있는 선율로 노래한다. 유령이니까 사람처럼 노래하는 것이다.돈조반니의 작업 실력돈 조반니가 얼마나 뛰어난 작업가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1막의 이중창이 있다. 농촌 처녀 체를리나를 유혹하는 “내게 그대의 손을 주오”에서 돈 조반니와 체를리나는 처음에는 서로 선율을 주고받는다. 먼저 돈 조반니가 자기와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말하고 체를리나는 처음에는 망설인다. 그러나 체를리나의 첫 반응을 들어보면 이미 돈 조반니의 선율을 따라하고 있다. 그에게 이미 끌리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돈 조반니의 아름다운 선율에(오페라가 아니면 감미로운 말에) 체를리나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곧바로 체를리나의 선율이 불안하게 흔들리면서 유혹에 넘어간다. 이 부분이 끝나면 둘은 함께 같은 선율을 흥겹게 노래한다. 의견 일치를 보았다는 뜻이다. 즉 돈 조반니의 작업 성공이다. 둘은 기뻐한다. 이 이중창의 뒷부분을 장식하는 함께 노래하는 선율은 시칠리아라는 춤곡 리듬에 바탕을 둔다. 경쾌한 춤곡으로 둘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모차르트의 성개념은 개방적이다?돈 조반니에게 배신당하고도 그를 잊지 못해 멀리서 스페인까지 달려온 돈나 엘비라의 1막의 두 번째 아리아 “아! 도망가라 배신자여”는 모차르트가 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곡이다. 우선 이 아리아의 반주 음악을 들어보자. 현악기만의 오케스트라 반주와 붓점 리듬은 그 이전 시대의 바로크 음악을 연상시키며 아리아의 끝 부분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콜로라투라 선율 역시 바로크 풍의 장식음이다. 모차르트는 돈나 엘비라를 복고풍의 보수적인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다. 바로크 시대의 과거 음악을 그녀의 아리아에 입힘으로써 그녀에게 마치 정숙하고 복고적인 분위기의 의상을 입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대에 뒤떨어진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예처럼 모차르트는 음악으로 등장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탁월하다.첼로 반주로 애원하기잠시 돈 조반니에게 마음이 끌렸던 자신을 탓하면서 약혼자인 마제토를 달래는 체를리나의 1막 아리아 “저를 때려 주세요.”에는 오케스트라 반주 속에 첼로 독주가 들린다. 이처럼 특정 악기가 강조되어 반주하는 곡을 오블리가토 아리아라고 한다. 오페라에서 종종 특정 악기가 특정한 극적 상황에서 자주 사용되는 예들이 있다. 그중에 첼로 오블리가토 아리아는 대부분 애원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아마도 낮은 음역의 부드러운 음색이 그런 분위기를 이끄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첼로 덕분에 마음이 풀린 마제토는 체를리나를 용서한다.춤에도 계급이 있다.오페라 [돈 조반니]의 1막 피날레는 무도회 장면이 유명하다. 돈 조반니는 체를리나와 마제토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환대를 베푼다. 돈 조반니의 목표물은 물론 체를리나이다. 무도회가 시작되면서 귀족 출신인 돈나 안나와 돈 오타비오는 귀족의 우아한 춤인 미뉴에트를 추고 하층 계급인 마제토와 레포렐로는 도이처라는 민속춤을 춘다. 사회적 신분의 계급에 따라 다른 춤을 추는 것이다. 돈 조반니는 카운터 댄스 음악이 나오자 체를리나에게 다가가 춤을 권한다. 카운터 댄스 역시 민속춤이다. 귀족 출신인 돈 조반니이지만 체를리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하층 계급의 춤을 택한다. 체를리나가 귀족 춤을 모르기 때문이다. 돈 조반니의 주도면밀한 계획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세 종류의 춤곡이 동시에 연주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틈을 이용해 체를리나를 다른 방으로 끌고 가지만 돈 조반니는 실패한다.건방진 하인 레포렐로돈 조반니와 레포렐로의 관계는 단순히 주인과 하인의 관계 이상인 것 같다. 1막 첫 장면에서 주인을 위해 밖에서 망을 보고, 주인의 업적(?)을 일일이 장부를 만들어 기록하는 꼼꼼함도 보이지만, 돈 조반니에 대한 존경심은 없는 것 같다. 주인을 따라다니며 배웠을까? 자기도 돈 조반니 행세를 해보기도 한다. 불만을 말하면 돈 조반니는 돈으로 입막음한다. 2막의 첫 장면에서 레포렐로의 건방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레포렐로가 주인인 돈 조반니의 선율을 건방지게 그대로 흉내 낸다. 주인을 놀리며 불만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주인을 떠나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그 모습이 음악으로는 주인의 선율을 따라 부르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다. 돈 조반니의 주머니에서 또 돈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주인공인 돈조반니의 아리아가 없다?일반적으로 오페라에 등장하는 인물은 최소한 하나의 아리아를 노래한다. 중요한 등장인물이라면 2-3개의 아리아가 주어진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독창 아리아가 없는 등장인물은 하찮은 역으로 간주된다. 돈나 엘비라, 돈나 안나, 돈 오타비오, 심지어 하인계급의 마제토와 체를리나까지 아리아가 있는데 오페라의 제목이기도 한 주인공 돈 조반니는 제대로 된 아리아가 없다. 물론 1막에 나오는 돈 조반니의 “술 마시고 나면”은 형식적으로 아리아이기는 하다. “술 마시고 나면”은 정신없이 같은 선율을 반복하여 술도 마시기 전에 돈 조반니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노래 끝에 내일 아침이면 열 명의 여성 이름을 목록에 올리겠다고 하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돈 조반니가 열심히 아리아를 노래했지만 제대로 된 정상적인 노래를 들은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이 노래는 정신없이 빠르게 부를수록 효과가 있다.반면에 2막에 나오는 돈 조반니의 독창곡은 모두 그의 아리아라고 할 수도 있다. 레포렐로의 옷을 입고 발코니 아래에서 만돌린 반주로 부르는 세레나데 “창밖을 보시오”와 돈 조반니 체포 작전을 직접 설명하는 “당신들 중에 절반은”은 아리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노래는 모두 극 중에서는 돈 조반니가 부르는 아리아가 아니다. 레포렐로로 변장한 상태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악한 돈 조반니,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돈 조반니에게 제대로 된 아리아를 배정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돈 조반니는 자신의 얼굴로 아리아를 부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변장이 잘된 이유2막 앞부분에서 돈 조반니와 레포렐로는 서로 상대방으로 변장을 한다.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경계하니 레포렐로 행세를 하면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변장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마제토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완전히 속는다. 돈 조반니뿐만 아니라 레포렐로도 변장이 잘된 모양이다. 한때 돈 조반니의 연인이었던 돈나 엘비라까지 레포렐로를 돈 조반니로 믿는다. 공교롭게도 돈 조반니와 레포렐로는 바리톤으로 음역이 같다. 항상 같이 다니는 두 명의 주인공을 같은 음역의 성악가에 배정했으니 둘이 서로 역할을 바꿔도 충분히 속일 수 있었다. 오페라에서 목소리가 비슷하면 얼굴이 비슷한 것보다 더 변장에 효과적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중에 두 여성 주인공이 서로 상대방으로 변장하는 장면도 있다. 이 때에도 주변 인물들은 완벽하게 속는다.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 부인과 수잔나는 같은 소프라노이며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 상대방으로 변장한다.[돈조반니]는 희극이다?돈 조반니는 끝내 회개를 거부하고 지옥으로 끌려간다.오페라 [돈 조반니]는 비극처럼 보인다. 내용은 방탕함을 즐기는 돈 조반니의 몰락이니 비극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당시의 오페라는 가벼운 내용인 오페라 부파와 진지한 내용인 오페라 세리아만이 있었다. 그 둘이 혼합되어 있는 [돈 조반니]는 그래서 특별하다. 모차르트는 이 오페라를 ‘드라마 지오코소’라고 불렀다. ‘드라마’라는 단어를 통해 내용의 진지함을 그리고 ‘지오코소’(코믹이라는 뜻)라는 단어를 통해 내용의 가벼움을 강조한 것이다. 돈나 안나와 돈나 엘비라는 전형적인 세리아의 성격을 보여준다. 반면에 레포렐로와 마제토는 오페라 부파의 인물들이다. 이 오페라의 끝 부분에서 돈 조반니가 지옥으로 사라진 후에 모든 등장인물들이 죄인은 처벌을 받는다면 권선징악을 노래한다.교훈적 내용으로 오페라를 끝맺는 분위기는 분명 오페라 부파이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돈 조반니의 종말은 오페라 세리아이다. 결국 [돈 조반니]는 비극적 내용을 희극적 오페라 형식으로 완벽하게 용해시킨 모차르트의 명품 오페라이다.
Q.  일본의 전국시대가 길었던 이유는 무엇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603년에 정이대장군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천하패권을 확립한 1615년부터 1867년 11월 9일의 대정봉환 때까지 약 252년 간 지속되었다. 전란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이전의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 전국시대와는 달리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큰 혼란이나 전쟁 없이 평화가 지속된 안정기였다. 또한 일본 역사 전체 기준으로 볼 때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사실상 반(半)중앙집권 시대이라는 것. 또한 이 시기부터 전국시대까지 변방이었던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됐고, 홋카이도와 류큐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으며 특히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의 중심지는 기존의 교토, 오사카 중심의 긴키 지역에서 현대의 도쿄 중심의 간토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에도 시대 중기인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에는 경제 호황기로 국부를 축적하고 국력도 신장해 소위 겐로쿠 시대를 맞았다. 겐로쿠 시대는 일본 막부 최대의 전성기로 이 기간동안 상업이 흥업하고 오늘날의 선물거래와 같은 쌀 선물거래가 등장하고, 이러한것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카부나카마(株仲間)를 형성하기도 했다. 겐로쿠 시대가 끝날무렵, 방탕해진 재정을 개혁하고자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필두로 享保の改革(きょうほうのかいかく, 교호년의 개혁)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막부의 재정지출을 줄이며 세금의 증세와 치수사업, 신전개발(新田開発)을 실시했다. 또한 급격하게 올라간 쌀값을 견제하고자 금 비율이 낮은 겐분코방(元文小判,げんぶんこばん)을 제조해 의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에도시대는 중흥의 시기를 열었다.이후 타누마 시대(1751~1789)에는 긴축재정을 버리고 상업자본의 이용과 적극적인 정책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부패와 뇌물의 시대로 일컬어지며 농민들의 반란(잇키)가 많아졌다. 계속적으로 재해, 기아가 속출하고, 1772년 에도에서 화재가 발생해 약 2만명 가량의 인명피해를 입자 결국 마츠다이라 사다노부가 로쥬(老中)가 되어 쌀의 선물거래 규제 완화, 귀농민 보호, 술 생산량 제한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寛政の改革(かんせいのかいかく, 간세이년의 개혁) 을 실시했다. 이것으로 다시 막부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하지만 그 후에도 텐보(1841~1843)년에 대기근, 반란, 소동, 모리슨호 사건등이 겹쳐 다시 막부가 기울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로쥬 미즈노 타다쿠니는 위의 교호년의 개혁과 간세이년의 개혁에 따라서 개혁을 실시했다. 주로 탐관오리를 귀양시키거나,가부키쵸 일대의 오락가를 닫아버림으로서 민간의 낭비를 없애버리는식이었다. 또한 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걸 듣고는 서양식 포술을 도입하게하고 군사 체제를 서양식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그외에 선물시장에서 쌀 시세를 혼란시키게 하고있던 카부나카마를 추방시켰으며, 파산한 다이묘들을 위해 그들이 가지고있던 빚을 무이자로 해주고 원본은 20년안에 갚으면 된다는식으로 재정을 안정시켰다.결국 1853/54년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한 뒤 격동의 동란기에 빠져 사쿠라다 문 밖의 변(櫻田門外の變)이 일어나고 번들은 대놓고 막부의 말을 안 들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등 사실상 통치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사쓰마, 조슈 등의 토막(討幕)파 번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1867년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소멸, 이듬해 무진전쟁(보신(戊辰)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에도 막부가 소멸한 1868년은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明治) 시대의 시작이라 하여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Q.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역할에 대해서 궁금하고 동아시아 및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은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군을 이끄는 삼도수군통제사였어요.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군에 맞섰지요. 옥포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 주었으며 이후 사천 해전, 한산도 대첩을 이끌며 남해 바다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가려던 일본군의 발을 묶었지요. 원균과 몇몇 대신들의 모함으로 벼슬 없이 싸움터에 나가기도 했어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서는 12척의 배로 명량 해전에서 승리했어요. 그러나 1598년 물러나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어요.백성들의 삶은 이로 말할 수 없이 비참했겠지요.하지만 그 이후에 백성의 삶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1. 변화하는 조선의 농촌 사회외세의 침략 이후 조선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특히 농사법이 크게 바뀌어 농민들은 예전보다 두 배에 가까운 수확을 올릴 수 있었어요.논농사에서는 모를 한 곳에 심었다가 싹이 자라면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모내기법)이 보급되었고, 밭농사에서는 견종법(골뿌림법)을 쓰게 되었지요. 견종법은 평평한 땅에 고랑을 만들어 작물을 심는 방법으로 바람의 피해를 크게 줄여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어요. 또 논밭을 일구고, 거름을 내는 일을 할 때 쓰는 농기구들도 새롭게 발전시켰지요. 농사짓는 방법에서부터 사용하는 도구까지 발전을 이루자 농사일이 훨씬 쉬워졌고 수확도 두 배 이상 늘어났어요.덕분에 농촌에는 새로 부자가 된 농민들이 생기고, 담배나 인삼 같은 값비싼 농작물을 재배해서 큰 돈을 버는 농민들도 있었어요. 이 당시 인기 있던 작물에는 목화, 약재, 고추, 호박, 삼 등이 있었어요. 또 흉년이 들 것에 대비해 고구마나 감자를 심는 곳도 많았지요..하지만 한편에서는 농사지을 땅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어요. 예전에는 네 명의 소작농(小作農)이 짓던 땅을 한 사람이 지을 수 있게 되니 세 사람은 소작을 지을 땅을 구하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이렇게 농사지을 땅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이곳 저곳을 떠돌며 날품팔이 생활을 하거나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나 광산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2. 광산과 상업의 발달우리 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중국과 일본에 금, 은, 쇠 등을 수출했을 만큼 발달된 광산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조선 초기에는 이런 광산업을 나라에서 맡아했어요. 개인이 함부로 광산을 세웠다가는 엄한 벌을 받았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이 광물을 캐내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어요. 대신 나라에서는 정해진 만큼 세금을 받았지요.여러 광물들 중에서도 은을 캐내는 광산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어요. 청나라에 보내기 위해 많은 양의 은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광산의 발달과 더불어 상업도 조금씩 일어나게 되었어요. 원래 조선은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였어요. 그래서 대부분의 백성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만들어 쓰거나 물건끼리 맞바꾸는 게 보통이었지요. 그러나 전쟁을 치른 뒤 황폐(荒廢)해진 농촌에서 살 수 없었던 농민들이 서울로 올라와 상업에 뛰어들면서 장사는 활발해졌어요. 이들은 육의전(시전) 상인들과는 달리 아무 곳에서나 장사를 했어요. 그래서 이들을 난전 상인이라고 했지요.3. 무역의 발달과 화폐의 사용조선 시대에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계급이 있었어요. 공산품을 주로 만드는 장인들 계층은 상민에 속했어요. 이들은 신분상 농민 다음으로 꼽히면서 점차 발달해 가는 상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어요.장인들은 주로 관청이나 궁중에서 사용되는 물건이나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었어요. 농기구, 동전, 무기, 놋그릇, 금속 활자, 기와, 종이, 대나무 제품 등 종류도 다양했지요. 이런 물건들 중에는 뛰어난 기술로 빚어 낸 훌륭한 예술품들도 있었어요.장인들이 만들어 낸 물건을 외국과 사고파는 무역도 발달했어요. 조선에서 하는 무역은 주로 중국에 조공(朝貢)으로 보내는 물건들이나 중국에서 답례(答禮)로 보내 온 물건들을 사고파는 공무역과, 개인이 나라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사무역이 있었어요.이 때 조선에서는 인삼, 은, 가죽, 소금, 종이 등을 팔고, 청나라에서는 고급 비단, 말, 약재, 문방구 등과 같은 사치품을 주로 가져왔지요.인조 때에는 산업의 발달에 맞추어 많은 사람들이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어요. 나라의 상평청에서 만든 금속 화폐인 ‘상평통보’는 사람들이 널리 쓰면서 숙종 때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한편, 전쟁 후 조선에는 신분상의 변화도 일어났어요. 양반은 원래 문관과 무관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어요. 그러나 나중에는 관직이나 과거 시험의 합격 여부에 상관없이 양반의 후손들을 가리켰지요. 그러다 보니 양반의 수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어요. 중인들도 상업과 무역의 발달로 지위가 올라갔으며, 농민들 중에도 토지를 갖게 된 부자들이 생겨났어요.임진왜란 때 노비 문서가 많이 불탄데다가 나라에서도 많이 풀어 주어 노비의 수도 줄어들었지요. 이렇게 왜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에는 많은 변화가 일고 있었어요.
Q.  사자를 대표동물로 쓰는 국가가 어딘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표적인 국가는 영국입니다.1950년부터 출판된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첫 책은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다. 2차대전 중 독일의 런던 공습을 피해 시골 친척 교수님댁으로 가게 된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는 옷장을 통해 마법의 나라 나니아로 간다. 사악한 하얀 마녀 때문에 겨울만 계속되는 마법의 나라에서 아이들은 사자 아슬란의 도움으로 마녀를 물리친다. 그리고 각각 왕과 여왕이 되어 나니아를 다스리다가 다시 옷장을 통해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다. 어릴 적 이 이야기를 읽고 얼마나 인상 깊었던지, 어른이 된 지금도 커다란 옷장만 보면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그런데 나니아 이야기를 읽다 보니 궁금한 점이 생겼다. 왜 서구 사회에서는 동물의 왕이 사자일까? 왕의 별명이나 문장에 사자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서구 문학에서 사자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왜일까? 유럽에는 원래 사자가 살지도 않는데 이렇게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사자의 서식지는 아프리카·서남아시아·인도 등이다. 고대에도 지중해를 넘어 바로 북부 아프리카를 접하는 남부 유럽인들은 사자를 알고 있었지만, 사자를 모르는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에게 숲에서 흔히 만나는 동물의 왕은 바로 곰이었다. 곰은 유럽 대륙의 원주민인 켈트인과 북유럽의 게르만인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다. 곰을 가문의 시조로 여겨 왕가의 문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전사들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곰의 피를 마시고 몸에 바르기도 했다. 숲의 지배자인 곰은 고대 유럽에서 신적인 동물로 숭배받았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처럼 직립 보행을 할 수 있어 더욱 그랬다.이렇게 오래된 유럽의 곰 숭배 전통은 기독교의 포교를 방해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4세기지만, 유럽 전체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10세기 정도다. 그동안 기독교 교회는 곰을 그리스도의 경쟁자로 여기며 곰과의 전쟁을 치렀다. 심지어 카롤루스 대제 시절에는 곰을 학살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치기도 했다.그리고 유럽에서 실제로 볼 수 없기에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이 적은 사자를 동물의 왕 자리에 앉혔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성경의 무대였던 북부 아프리카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자 문화가 유럽에 전해지며, 12세기 무렵 사자는 신앙의 수호자이자 용감한 기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사자를 상징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기사는 3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사자심왕 리처드이다. 그의 문장은 세 마리 사자였다. 이후 현재까지 영국 왕실은 물론, 잉글랜드 축구팀도 사자를 상징으로 쓰고 있다.13세기에 이르러 사자는 유럽 전역에서 백수의 왕으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중세의 『여우 이야기』를 비롯하여 현대 문학에까지 사자는 왕이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정의로운 존재로 그려진다.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도 배신한 에드먼드의 죄를 대신해 죽은 후 부활하는 사자 아슬란(터키어로 ’사자‘란 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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