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궁금해서 그런데 수에즈운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이집트 때도 필요성은 있다보니 운하를 파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에는 전 세계에서 최고의 건축 및 토목기술이 있었는데도 지금처럼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부분을 파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위 사진처럼 나일강의 하류의 최동단 지류에서 투밀라트 계곡, 대고호(大苦湖, Great Bitter Lakes)[3](거대한 쓴 호수) 등을 통해 동쪽으로 수에즈까지 연결하여 지중해와 간접적으로 잇는 방식으로 시도했다고 한다. 다만 바다와 강을 완전히 연결하지는 않았고 중간에 육지에서 배를 끌어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가장 처음 도전한 사람은 이집트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기원전 19세기)였지만 실패했고, 하트셉수트(기원전 15세기)와 람세스 2세(기원전 13세기) 역시 건설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듯하다.헤로도토스의《역사》에 따르면 이집트 제26왕조의 네코 2세(Necho II)가 기원전 609년에 배 두 척이 동시에 지날 수 있는 너비로 나일강과 대고호와 홍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도했다. 그리하여 인명피해 12만 명을 내면서 완공을 눈 앞에 두었으나, 이 운하가 적에게 유리하게 이용되리란 신탁을 받고 포기하였다고 한다. 네코 2세는 또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걸 시도하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얼마 후에 이집트를 정복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 시대에는 완공해서 페르시아로부터 원활하게 운용됐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3단 갤리선(Trireme)들이 노를 펴고 서로 교차통행이 가능한 너비로 횡단하는 데 나흘이 걸렸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는 비석 5기를 남겼는데 지금도 4기가 남아 있다.이후 홍해와 만나는 운하 종점에 남겨진 비석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270~269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때 정비하고 재개통하였다. 이후로도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2세기 초) 시기를 거쳐, 정통 칼리파 우마르 시기까지 홍수와 침니 현상으로 운하가 막히거나 파괴되어 재개통하기를 반복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약 1000년간 운하는 이집트 농산물 등이 아랍 등지로 수송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아바스 왕조 2대 칼리파 알 만수르 치세이던 767년, 그의 삼촌 압달라의 반란 방어과정에서 이 고대 운하는 완전히 막혀버렸으며, 오늘날 수에즈 운하를 팔 때 작업자들의 식수 공급과 물자 수송을 위한 운하(Sweet Water Canal: 가장 위의 지도의 서쪽에서 팀사호수로 연결된 수로)를 뚫을 당시에 이 고대 운하의 잔해들을 활용했다고 한다.이후 15~16세기에 운하를 다시 개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까지 다다르자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할까 우려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섰지만, 맘루크 왕조와 협상이 벌어지는 단계에서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무위로 그쳤다. 그리고 1565~1579년 오스만의 재상을 지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다시 개통하려 했지만 계획 단계에서 불발됐다. 루이 14세나 나폴레옹도 운하 개설 조사를 했지만 포기했다.건설오늘날 존재하는 현대적인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이에 메흐메트 알리와 우호관계를 맺은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 개통을 위한 주식을 공매하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페르디낭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인데,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된 차에 메흐메트 알리 및 그 아들과 친분관계를 쌓았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 운영 후 운영권을 이집트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이므로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다. 수에즈 운하회사는 주식 총 40만 주를 발행하여 매각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이른바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000 주에 달하는 프랑스 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다. 그나마도 대규모로 사겠다는 고객이 없어서, 주주가 21,000명에 달해서 평균 구입 주식 수가 10주도 안 되었다. 100주 이상 구입한 사람이 199명밖에 없을 정도였다.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을 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당시 제안 받은 나라들은 영국, 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등이었는데, 영국을 제외하면 수에즈 운하가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나라들이었다. 프랑스가 이들 정부에 주식 매입을 타진한 이유는 당연히 영국의 방해에 맞서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자유무역이란 개념이 없어서 해군력으로 해로를 유지해야하는 당대 기준으로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일이 없는 위치에 있는 국가들에 접근한 건 꽤나 어이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다.영국이 수에즈 운하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인 이유는 크게 둘이었다. 영국은 이미 전 세계 해양 패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운하가 그다지 급하게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운하를 빌미로 프랑스가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고 이를 발판으로 인도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하 건설에 도움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프랑스 측이 책정한 이용료 문제가 기름을 끼얹었다. 지분의 과반수를 차지한 프랑스의 운하 운영 정책이 차별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규칙으로 최대 주주인 프랑스는 매우 저렴하게, 주식을 사면 조금 저렴하게, 안 사면 매우 비싸게 통행료를 매겼다. 이런 차별적인 요금정책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은 이렇다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영국은 프랑스보다 비싸게 물어야한다는 사실에 8만 주를 인수해 달라는 레셉스의 요청을 아예 보이콧해버렸다. 영국 상인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후술된 HMS 뉴포트의 불법 통행 행위가 옹호받은 것도 이 불만과 무관하지 않다.결국 이집트 정부는 운하를 통해 돈방석에 앉는 장미빛 꿈을 꾸었으나, 최종적으로는 16만 7천 주에 달하는 주식을 이집트 정부가 덤터기를 쓰게 되었다. 사실 망상에 가까운 자금 조달 계획에 가까웠던 것이, 그나마 팔아치운 프랑스 주식 조차도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의 도움으로 간신히 팔아치운 것이다. 그나마 로스차일드한테도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는데, 주식 취급 수수료로 5%를 내라는 로스차일드 측의 요구를 레셉스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그렇게 주식판매 및 자금조달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영국의 방해는 끝나지 않았다. 영국은 수에즈 인근 사막부족들에게 반란을 부추긴다거나, 수에즈 운하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다며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고 비난하는 등 지속적으로 건설을 방해했다. 이 때문에 레셉스가 영국도 인도에서 똑같이 하지 않느냐고 항변하기도 하였다.결국 협상 끝에 수에즈 법인이 이집트 소유의 이집트 회사이며, 프랑스 정부에는 어떠한 권리가 없다는 최종 합의가 이뤄진 끝에 공사 시작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9,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비용은 처음 주식을 공모할 때의 예상치의 2배 이상으로 들었다.운하를 처음으로 통과한 선박은 영국 해군 연안포함 HMS 뉴포트(Newport)였다. HMS 뉴포트는 운하 공식개통 전날인 11월 16일 밤에, 모든 조명을 끄고 몰래 운하를 통과하는 무모한 행동을 감행했다. 운하 회사 관계자들은 감히 영국의 비위를 거슬릴까 염려하여 항의도 하지 못했다. 이후 뉴포트의 함장은 공식적으로는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내부적으로는 프랑스 놈들에게 대영제국 해군의 기상을 보여줬다며 칭송받았다고 한다.이 공사를 지휘한 페르디낭 드 마리 레셉스는 운하 개통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또 다른 대규모 운하 프로젝트인 파나마 운하 공사(문서 참고)에도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몰락했다.영국의 운하 매입그러나 운하 개통 불과 2년 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전쟁 결과, 프랑스가 참패하고 말았다. 단일개체로서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최대보유자는 17만 주를 가진 이집트 정부였고, 이집트 정부의 가장 지지 세력은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없지만, 이집트의 자체적인 경제력이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프랑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집트의 스폰서를 자처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했다. 뒤를 이은 프랑스 공화정부도 이집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장 패전상황을 추스르며 프로이센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국방력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현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생겼다.그리고 수에즈 운하의 부족한 물동량도 문제였다. 전술한 요금 정책 때문에 수에즈 운하의 이용량은 기대를 밑돌았다. 거기에 더해 건설 비용도 2배로 들었기 때문에, 비용 부족에 시달린 끝에 실제 운하의 완성은 2년 후인 1871년이었다. 결국 요금을 올리려 하였고, 1873년에 운하의 이용 비용을 배의 배수량만이 아니라 화물의 톤수까지 따져서 요금을 매기게 된다.위의 이유로, 결국 수에즈 운하는 충분한 수입이나 추가 비용 지원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에즈 운하 주식은 실질적으로는 공사비용을 조달하는 채권에 가까웠다. 즉, 이집트 정부는 17만주만큼의 부채를 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주요 은행에 대한 채권 만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1875년 11월, 사이드 파샤의 후계자인 이스마일 파샤는 눈앞에 닥친 빚폭탄을 피하고, 프랑스가 주도한 수에즈 운하에 사실 별로 관심 없었다는 제스처로서 전체 주식 물량의 44%인 보유 지분 17만 6,602주를 매물로 내놓았다.이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17만여주를 통째로 매입한 곳은 바로 영국 정부였다. 그 이유는 영국 입장에서도 수에즈 운하는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장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희망봉에 있는 케이프 식민지를 경유하지 않고 인도, 중국의 수입품을 유럽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되어, 영국도 1875년에 경제 공황이 닥치는 매운 맛을 본 터였다. 또한 극동으로 확장중인 식민지를 관리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당시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수에즈 운하의 주식 구입을 주도했는데 이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제2차 중동전쟁 당시 영국 정부가 격앙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디즈레일리 총리는 저녁 식사 도중에 이스마일 파샤의 지분이 1억 프랑(=400만 파운드)에 시장에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바로 운하를 구입해야겠다고 결정한다. 그리고는 주식을 매입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연락해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 엄청나게 부유하긴 했으나 신분제 국가인 영국에서 평민 유대인 가문에 불과했던 로스차일드 가의 수장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대영제국 총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당일 약속 자리에 나와야 했다. 그 자리에서 총리로부터 400만 파운드의 자금 융통을 요청받았다. 로스차일드 측에서는 어떤 담보를 제시할 수 있는지 묻자, 디즈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보는 대영제국입니다." 총리는 남들보다 빠르게 주식을 사기 원했고, 세계최강국 영국을 담보로 내세운 것이다. 갑작스럽게 거액의 대출을 요청받아 다급해진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급하게 자택으로 돌아가면서 저녁 식사는 일찍 끝났다.디즈레일리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로 마차를 타고 버킹엄 궁으로 직행해서, 한밤 중에 빅토리아 여왕의 알현을 요청했다. 그리고 자다 일어난 여왕에게 총리는 대영제국을 담보로 4백만 파운드를 로스차일드에게 빌렸으며, 이 돈으로 방금 시장에 나온 수에즈 운하의 이스마일 파샤 지분 전체를 매입하려 한다고 보고를 올린다. 즉 여왕에게 "폐하의 제국을 방금 유대인에게 담보로 잡았습니다."라고 말한 격이었다. 다행히 여왕은 수에즈 운하를 구입하려는 계획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총리의 월권 행위를 책망하지 않았다.영국 정부는 자국 공관을 통해서 주식을 전부 사겠다고 전달하고, 이스마일 파샤는 팔겠다고 말한 다음날 아침에 주식이 팔린 상황에 만족한다. 이후 로스차일드 측은 가문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이스마일 파샤에게 자금을 보냈고,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받아온 주식증서를 영국 정부에 넘겼다.그리고 아침이 되자 디즈레일리는 영국 하원으로 와서 의원들에게 "방금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영국 정부가 매입했다."고 보고한다. 디즈레일리는 이미 선구매 후결재를 한 상황이었고, 누군가가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면 총리 목도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원 의원들은 모두 기립해서 열렬한 박수갈채와 함께 주식 매입안을 통과시켰다. 의회 보고는 내각이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영란은행으로 부터 400만 파운드를 대출받기 위한 선결 조건이기도 했다. 의회 의결이 끝나자,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합의가 됐습니다! 이제 폐하의 것입니다!(it is settled; you have it, madam!)"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프랑스의 지분은 전술했듯이 개개인들에게 흩어져 있었는데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주식들도 아니었다. 그렇게 수에즈 운하는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은 글래드스턴 내각 시기인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이집트에서 운하가 외국 정부에 의한 운영되는 것에 반대하는 우라비 반란이 벌어지자 군대를 보내 진압한다. 그리고는 1888년에 콘스탄티노플 협약으로 이집트와 수단을 중립국으로 만든 다음 운하 보호를 명목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후 반란과 부패를 모조리 진압하고 운하를 운영한다.통념과는 달리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공정하게 운영했는데, 프랑스의 요금 차별정책에 반발한 점도 컸다. 덕분에 영국 못지 않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도 운하의 혜택을 크게 누렸다.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트 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영국이 거부함에 따라 희망봉을 돌아서 극동으로 향하는 수개월 대여정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는 설이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전함의 실제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의 당시 통항제한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통과를 하지 못한 것이다.(출처) 실제로 나중에 추가파견된 러시아 군함들은 규모가 작아서 수에즈 운하를 무사히 통과했다. 그 무렵 영일동맹의 일환으로 영국에 주문한 일본 해군의 전함 공고 역시 선체 규격이 수에즈 운하의 규격보다 커서 일본으로 향할 때는 희망봉을 통과해야 했다.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아랍 방면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는 공세를 1915년에 단행했지만 영국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후 1918년부터 1924년에 걸쳐서 이집트가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936년에, 영국은 이집트와 협약(Anglo-Egyptian Treaty of 1936)을 맺고 운하의 운영권을 다시 획득했다.2차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알렉산드리아 주둔 영국 해군은 추축국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제한했다.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과 함께 이집트 점령 및 수에즈 운하 차단을 시도했으나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격이 막히고 말았다.제2차 중동전쟁과 이집트로의 귀속2차대전 이후 이집트 정부는 주식을 일부 사들이고 수에즈 운하사와 협약을 체결하면서 운하 운영에 개입했지만, 최종적으론 영국이 운하를 통제하였다. 하지만 1952년 반영 노선을 표방하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국에 유화적이던 파루크 1세 왕정을 무너뜨렸고, 내부 권력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한 가말 압델 나세르는 1956년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다.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영국, 프랑스는 자국이 막대한 돈을 들인 주식이 휴지조각이 된 셈이니 반발하는건 당연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반 이슬라엘 성향인 나세르가 힘을 얻는 것이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그리고, 지금은 의미가 많이 희석된 편이지만, 국유화는 냉전 시기에는 공산주의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수에즈 국유화를 선언했던 압델 나세르는 쿠데타 이후 1세계와 2세계 양측에 양다리를 걸치며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는데, 혁명 정부의 경제적 지원에 미온적인 1세계보다는 적극적으로 구애해온 소련에게 꽤 기울어져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나세르는 중동에서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반이스라엘 선봉장의 이미지를 만들려했고, 이를 위해 홍해 아카바 만의 입구에 요새를 건설하고 해안포를 배치해 이스라엘의 아카바 항을 봉쇄하는 일을 저질렀는데, 나세르가 소련의 편을 들어서 수에즈 운하에 똑같은 일을 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냉전 시기 이 사태를 계기로 아랍이 소련 편에 들것을 우려한 미국도 압박을 놓아, 안보리를 소집해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영국의 반대로 거부 되었다. 미국의 안보리 철수 결의를 낸 다음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공습은 계속되었고, 미국이 제안한 철수를 요구하는 긴급특별총회는 찬성 64표 반대 5표(영국,이스라엘,프랑스,뉴질랜드,호주)로 통과 되었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였다.같은 시기에 영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던 소련의 흐루쇼프 역시 으름장을 놓았는데, 영국과 프랑스에 핵을 쓸 수도 있다고 대놓고 위협했다. 소련은 이미 핵개발에 성공했고, 1953년에는 전술핵(RDS-4)의 개발에도 성공했기 때문이다.당시 소련은 딱 반년쯤 전인 1956년 5월 21일에 탄도 미사일인 R-5 Pobeda(NATO 코드네임 SS-3 Shyster)의 핵미사일 버전인 R-5M을 실전 배치했다.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1200km였는데,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위성국이였던 동독에 배치하면 런던까지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57년도에 세계최초 ICBM R-7이 개발되었다. 사정거리는 8000km된다. 수에즈 사태 당시에는 흐루쇼프가 핵전력 공갈을 많이 치긴 하였는데, 미국 측에서도 내막 완벽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폭격기의 경우, 장거리 항공 사령부에서 B-29를 카피한 Tu-4를 이 실전 배치했는데, 파생형중 하나인 Tu-4A는 소련 최초로 '양산된' 핵폭탄인 RDS-3의 투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Tu-4A는 양산기가 아니었고, 폭격기용 핵무기를 테스트하기 위한 실험용 개조 기체에 불과했다. 이후 소련은 Tu-16A를 양산하면서 1955년 즈음에 전략핵무기 투발 능력을 얻는다. 그런데 1956년의 소련 장거리 항공 사령부는 스몰렌스크(러시아 서부, 벨라루스와의 국경 근처)와 비니차(우크라이나),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토크 북동쪽)의 세 도시에 주둔하면서 Tu-4와 Tu-16 폭격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최단거리인 스몰렌스크부터 런던까지는 2천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고, 1955년 기준 NATO의 가입국인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서독의 영공을 통과해야 했다. RDS-3와 RDS-37는 폭탄창에서 중력낙하로 떨어뜨려야하는 핵폭탄이었으므로, 투발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영공에 진입해야하는 폭격기 투발 핵무기 한계상, 미국이 영공 통과를 허락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이상 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아이젠하워도 소련의 위협에 진심으로 믿어 위축 됐다는 점을 보좌관이 회고하고, 그와 국무부 차관인 하버트 후버와 비공개 대화에서 이 사태가 3차 세계대전의 발발 계기가 될 것을 진심으로 우려하였다.'소련은 어떤 무모한 모험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그들은 히틀러가 말년에 그랬던 것처럼 두려워하고 분노했습니다.독재체제에서 그런 마음 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핵전력 정찰을 시작하였고, 59년도에 이르러서야 소련의 핵전력이 과장이였음을 확정하게 되었다. 즉 당시로서는 핵공갈에 대해 미국 측도 정확한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 영프는 나토니까 방위조약에 의거하여 미국도 참전하여야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방위가 보장되지 않아서 소련이 전쟁에 참전했다면 이스라엘과 했을 것이다. 3차대전의 위협은 미국이 동맹국이였던 영프에 압력을 넣는 데 강한 영향을 끼쳤다.가말 압델 나세르는 서구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으로 급부상해서 아랍권 민중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였고, 이집트는 사실상 중동의 맹주가 되었다. 거꾸로 영국에게는 '이제 대영제국은 없다'는 걸 실감하게 한 굴욕이었다. 그래서 당시 살아있던 윈스턴 처칠은 이 결과에 격분하고 원통해했다고 한다.1960년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한때 수에즈 운하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경계선이 되어 운하가 폐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을 겪었고, 결국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국교 정상화로 시나이 반도 전체가 다시 이집트에 귀속되면서, 수에즈 운하는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이후 여러 차례 확장하였는데, 2015년에 마지막으로 확장공사를 하였다. 현재까지도 수에즈 운하의 통행은 이집트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현재2008년 이후, 수에즈 운하의 관문이나 다름없는 아덴 만 일대에 지나가는 상선을 노리는 소말리아 해적들이 들끓고 있지만 운하를 통과하는 배들이 줄어들 기미는 없다. 운하를 이용하지 않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루트는 워낙 거리와 시간 면에서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다만, 해적들이 더욱 기승을 부려 보험료 할증이나 보안업체 고용비용 같은 부가비용이 급증한다면 수에즈 운하 통행을 포기하는 선주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늘 있다. 그러나 정작 최근에는 소말리아 해적의 활동이 위축된 반면에 서사하라 일대의 해적질이 급증하여 희망봉 우회가 반드시 안전한 루트가 아니게 되었다.제3차 중동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수에즈 운하가 폐쇄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세계의 해운업계와 무역업계가 부담한 추가비용은 당시 미국 달러 기준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했다. 현재의 달러 가치로 하면 매년 수백억 달러를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2009년 한 해 동안 여기를 통과한 배만 해도 22,183척에 달했고 통과료로 받은 돈만 해도 54억 1,000만 달러에 이른다. 척당 평균 통과비는 대략 25만 달러이다. 이는 이집트의 2009년 GDP 4,531억 달러에서 1.3%에 이른다. 과거에나 현재나 여전히 이집트의 돈줄인 셈이다.지구 온난화가 진행되어 북극해의 얼음이 계속 줄어들자, 수에즈 운하나 말라카 해협을 거치지 않고 부산항에서 베링 해협과 북극해를 통과해 유럽까지 가는 북극항로를 타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만약 얼음이 충분히 녹아 바닷길이 열린다면 적어도 중국, 대만 이북에서는 남쪽을 통과하는 것보다 북극항로가 거리상 더 유리하다.2016년에 들어서면서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배들이 늘고 있다. 유가하락과 운하 이용료 상승으로 아프리카 희망봉 쪽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수에즈 운하 직원들의 횡포가 심각한데, 기념품을 강매하거나 세금을 부과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던 배들이 이를 견딜 수가 없어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것이다. 머스크 그룹에 의하면 13.5노트 속도로 운항하면 열하루가 더 걸린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껏 뚫은 운하 대신에 바스쿠 다 가마 시대의 항로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2021년 3월 23일 오전 7시(현지시각) 파나마 선적 에버그린 그룹 소속 2만 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EVER GIVEN)호가 운하 내에서 좌초되어 수에즈 운하가 차단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2023년 1월 9일 화물선이 좌초 됐다고 9일(현지시간) 운하 서비스 업체가 밝혔다. 운하 교통이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는 즉각 밝혀 지지 않았다.가 이스마일리아주(州) 수에즈 운하 지역의 콴타라시 근처에서 좌초되었다.이번에 문제가 된 는 그리스 선박업체인 프리메라가 소유한 길이 225m, 폭 32m 규모 화물선이다. 이 선박은 6만6000톤의 옥수수를 우크라이나에서 중국으로 나르기 위해 시속 8.5노트(약 16km)의 속도로 수에즈 운하를 이동하던 중 이날 오전 5시께 좌초됐다. 좌초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집트 북부 지역은 악천후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확장2015년 8월 6일(현지시각) 제2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이 열렸다. 이를 통해 수에즈 운하의 하루 통행량이 2배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집트 정부는 물동량 증가와 그에 따른 부수적인 효과로 제2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 다만 실제 사용은 2016년부터 했다. 2015년에는 준공식을 했지만 시범운행을 하고 2016년 9월 1일부터 제2 수에즈 운하에 외국 선박의 통항이 허가되었다.
Q.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정부와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과 구분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하며, ‘월남전(越南戰)’이라고도 한다. 남베트남 정부가 붕괴된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되었다. 초기에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內戰)이라는 성격을 띠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전쟁은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이 참전한 국제적인 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미국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으로 군사개입의 범위를 넓히면서 전장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전쟁 중에 미국, 한국군에 의해 미라이 학살, 빈호아 학살, 퐁니 퐁넛 양민 학살 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베트남전쟁의 배경베트남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7년에는 베트남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호찌민[胡志明]을 중심으로 1941년 5월 19일 베트민(Viet Minh, 베트남독립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에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그해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과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Haiphong) 항구에 함포 사격을 가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가 함락될 때까지 9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북위 17°선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제네바협정에서는 1956년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으나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은 선거 실시를 거부했다. 그리고 농민들이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회수하고,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쳐 민중의 반발을 샀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초기에 카오다이(Cao Dai)나 호아하오(Hoa Hao) 등의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시작된 봉기에 베트민의 구성원들이 합세하면서 195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베트콩(Viet Cong)’이라고 불리는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지엠 정권은 1958년 반공법을 시행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으로 반발을 억누르려 했으나, 남베트남의 반란 세력은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해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맞섰다. 이들은 민족민주정부의 수립, 토지개혁, 평화통일, 중립외교 등 10개 항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베트남전쟁의 경과지엠 정권에 대한 반발이 확대되자 1963년 즈엉반민(Dưong Van Minh) 등은 미국의 방조 아래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964년 응우옌칸(Nguyen Khanh)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남베트남 정권은 잇따른 쿠데타로 크게 불안정해졌다. 이렇듯 남베트남의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의 존슨(Lyndon Baines Johnson) 정부는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를 늘렸다. 그리고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1964년 8월 7일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해 전쟁을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그 뒤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으며,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등에 파병을 요청해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의 참전을 이끌어냈다.그러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1월 30일 음력 설날을 이용한 구정대공세를 펼쳐 주요 도시들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배경으로 1969년 6월 8일에는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했다.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곧바로 빼앗겼던 도시와 시설들을 탈환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군사개입의 중단을 내세운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닉슨은 1969년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새로운 안보·외교 전략으로 내세우며 미군의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구정대공세 이후인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의 정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972년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1970년 이후에는 미국이 캄보디아의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장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72년 4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 미국은 북베트남의 모든 항만에 기뢰를 부설하고,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는 등 북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여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정전 협상이 비밀리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파리평화협정은 남북의 휴전과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구성, 60일 안에 모든 미군의 철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에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규모를 크게 줄였고,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1974년 1월부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간의 갈등은 다시 무력충돌로 확대되었다. 결국 북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다. 사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베트남전쟁과 한국한편,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그 과정에서 1만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1999년에는 1만6천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고엽제 제조사들인 미국의 다우케미칼과 몬산토 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Q. 선민의식에 대한 질문 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선민사상(選民思想)은 유대교의 자의식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이스라엘이 신에게 무상의 선택을 받았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 선택이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따라서 신의 선택은 이스라엘에게 당연한 것도 아니며, 본성적 권리에 따른 것도 아니며, 능력에 따른 것도 아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잘나서 선택을 받은 것이라면 이는 '무상'의 선택이 아니게 된다. 즉, 호의는 권리가 아니다.그러나 대중적으로는 이 원칙적 의미가 아닌, 변형된 의미의 선민사상을 말할 때 사용되며, 이 문서에서도 이런 변형된 의미를 주로 설명한다. 곧 종교, 국가, 민족 등 특정 부류나 집단이 자신들만이 신이나 그에 맞먹는 존재 등에게 선택되었고, 때문에 타 집단보다 더 우월하거나 잘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비뚤어진 우월의식을 뜻한다. 굳이 특정 집단만 그렇다기보단 사회적으로 성공한 일부 개인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왕자병, 공주병의 기질과도 일부 유사한 점이 있다.좁은 의미의 선민사상은 어떤 민족이나 종교에서 나타날 수 있는 행태를 뜻하지만, 넓은 의미의 선민사상은 개요의 설명처럼 좀 더 포괄적인 것이다. 현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과 행동도 선민사상의 일종이라 볼수있다.이기심과 함께 대표적으로 가지면 위험한 사상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강자가 이것을 믿게 되면 상대적인 약자 입장에선 전혀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선민사상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보다 극단적으로 위험하다.이 사상은 분야의 타당성을 떠나서 자신이 내세우는 가치관의 절대성을 위해 선의와 반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러나 반성과 선의를 내세워도 그 이념이 보완될 수 있거나 결함이 있음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때때로 엄청난 사회적 소요와 피해를 유발한다.[5] 반성과 선의를 내세우되 자신의 가치관의 절대성이 공고한 것이 선민사상의 특징이다.인간적인 실수는 할 수 있고 그것을 반성하는 모범적인 사람이되, 자신이 따르는 강령만은 틀림없고 모든 사람의 이념을 해당 기준을 따라 재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문화검열, 종교 근본주의 등의 사례뿐 아니라, 통용되는 상식 선 내의 정치적 이념에까지 퍼져 있다. 심지어는 주체사상 또한 수령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반성하는 경건한 자세를 취한다.또한 모든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고, 실수를 한다해도 반성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인류멸망의 현실화라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무섭고 위험한 사고방식이라 볼 수 있다.실제로 인터넷을 조금만 둘러보면 "난 ○○하기에 □□하는 놈들보다도 더 뛰어나."란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그 사례가 매우 다양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행태, 즉 소위 '@@빠'라고 불리는 커뮤니티를 전부 선민사상이라 단정지을 순 없다. 애초에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게 어떤 특정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리상의 제약 없이 모이는 곳인 만큼, 단순히 그걸 좋아해서 모이는 건지 아예 선민사상으로 그곳을 더 우월하다 여겨서 모이는 건지는 구분이 좀 필요하다. 또 현실의 민족이나 종교 등과는 달리 인터넷상에서는 훨씬 더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그들 모두가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다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특정 회사의 제품만을 추켜세우고, 타사 제품을 폄하한다는 것은 극단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선민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지만, 선민사상의 정의대로 특정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는 본인과 그 사용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수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해야한다는 수준의 사상으로 발전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원래 의미의, 즉 특정 종교나 민족에서 나타날 수 있는 선민사상은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민족종교는 높은 확률로 선민사상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는 증산도가 있다. 힌두교 역시 카스트 자체가 큰 영향력이 없는 발리 힌두 같은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인도 본토의 힌두교는 외국인이 힌두교를 믿으며 인도에 귀화하면 힌두교 카스트 중 제일 낮은 수드라로 정해진다. 대종교는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미 설명 끝. 물론 민족종교임에도 선민사상을 딱히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원불교나 천도교 같은 경우 딱히 선민사상이 보이지 않는다. 원불교의 경우 미국에 원달마 센터를 건립하고 명상 붐과 더불어 활발히 선교 중이며, 외국인 교무도 배출하고 있다. 천도교 역시 1990년대 초부터 구호와 봉사를 겸해 해외 선교를 하면서 해외 교구를 두고 있다.그리고 현재까지도 국가지도층이나 종교지도층이 선민사상을 주도하면서, 세계에 폭력과 갈등의 씨앗을 남기기도 하는데, 그 예로 세계 곳곳에 횡행하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포함한 종교 근본주의를 들 수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경우 타 종교인에 대한 역지사지를 금기시하기 때문에 타 문화와의 갈등을 좁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민족이나 국가,종교 단위가 아니더라도 현대사회의 정치인들 중 지지자들과의 호혜관계와 선행을 앞세우는 사람들 중에서도 선민사상을 가진 경우가 종종 있으며, 이런 경우는 자신의 정치적 파벌을 공고히 하며 해당 세력이 내세우는 강령과 이념을 절대화하는 특징을 가진다.일부 재벌과 정치인 등 고위 계층들도 하위계층에 대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경우는 개발도상국이거나 정치적/사회적 의식 수준이 낮을수록 심한 편이다. 이런 경우 하위계층의 선민사상 또한 작용한 경우가 베네수엘라와 같은 케이스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또한 농촌을 중심으로 하층민들에게 선민사상이 작용한 후 사회가 크게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이것이 심화되면 지배계층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물밑 세력을 키우는 경우가 자주 발견되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한민국에서 하나회 같은 케이스가 생겨났었다.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생물이라는 이유로 자연에 속하지 않는 존재로 보고 다른 동식물과 별개로 취급하는 것도 종족 단위의 선민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육식을 동물 학대로 보거나 그 밖에 인간의 행동을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다며 비판하는 행위 등이 그 예시. 넓게 보면 인간도 지구에 속하는 미물 중 하나이고 다른 동물에게서 식량을 취하는 것도 생존을 위한 본능이자 먹이사슬일 뿐이다. 다만 이는 과거부터 현대까지 꾸준히 윤리적 관점에서 논의가 끊이지 않는 사안이므로 정답을 내리기 힘든 문제이기도 하다.도덕적 우월의식 또한 선민의식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인이 우월하다고 남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 또한 선민의식이라고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