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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헤일리후보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고 어떤 집단에게 인기있길래 크게 격차를 줄이며 트럼프를 추격하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트럼프와 격차는 크지만 2개월 남은 첫 경선 투표에서 헤일 리가 얼마나 많은 지지를 받을지가 주목되고 있다.미 워싱턴포스트(WP)는 21일(현지시간) 헤일리 후보가 매우 비중이 큰 아이오와주에서 지지율이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를 제치고 2위로 나섰으며 뉴햄프셔주와 고향인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도 선두 자리를 굳히는 추세라고 전했다.헤일리 후보는 트럼프가 불참한 공화당 후보 토론회에서 맹활약을 펼치면서 돈 많은 후원자들의 주목을 끌고 유세 청중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WP는 그러나 헤일리 후보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공화당내 트럼프에 대한 지지도가 요지부동인 점이 가장 큰 과제다. 특히 역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뒤늦게 지지율이 오른 후보들이 결국은 경선에서 패배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밖에 디샌티스 후보가 전국적으로는 아직도 헤일리 후보를 앞서는 상황이다.헤일리 후보의 선거 캠프는 고향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트럼프에 맞먹는 득표를 해야 경선을 계속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헤일리 후보 선거자금 모금 전략가인 마크 해리스는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에서 많은 표를 받으면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많은 표를 받을 수 있다”면서 아이오와주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디샌티스보다 헤일리가 여러 차례의 기회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헤일리는 뉴햄프셔 유세에 힘을 쏟는 중이다.헤일리는 트럼프가 내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공격해 왔다. 트럼프는 헤일리를 “새 대가리(birdbrain)”라고 조롱하면서 간간이 공격하고 있으나 아직은 디샌티스를 공격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다.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시절 중국 투자 유치에 적극적이던 행보가 현재 강경 대외정책을 강조하고 있는 헤일리 후보를 공격하는 주요 포인트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력한 지원 입장도 다른 후보들로부터 공격당하고 있다.디샌티스는 헤일리가 너무 물러터져서 공화당 후보로 적절하지 않다고 공격하고 바이든 대통령은 헤일리 후보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시절 강간당한 사람의 임신중절도 임신 6주가 넘을 경우 금지한 사례 등을 들어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의 줄인 말) 극단주의자로 비판한다.헤일리는 자신이 경선에 뛰어들기 전까지 과소평가된 인물이라면서 경쟁자들에게 “반격할 것”을 경고했다. 토론회에서 헤일리는 성차별적으로 비쳐지는 다른 후보들의 공격에 날카롭게 반발했다.◆“헤일리 때문에 공화당을 다시 지지한다”지난 20일 헤일리 유세에 참가한 청중들 가운데 헤일리를 처음 본다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트럼프와 디샌티스가 싫어서 유세에 왔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헤일리와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 중 누구를 지지할 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한 청중이 헤일리에게 크리스티 후보를 러닝메이트로 삼을 수 있느냐고 물었으나 헤일리는 답하지 않았다, 반면 크리스티 후보는 헤일리와 동맹을 맺을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최근 WP와 몬머스대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뉴햄프셔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트럼프가 46%, 헤일 리가 18%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나타났다. 크리스티 후보가 11%로 3위, 디샌티스는 7%로 4위였다.뉴햄프셔의 경우 비공화당 유권자들도 공화당 후보 경선에 투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또 임신중절 규제가 약한 곳이어서 헤일리와 크리스티 후보에 유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뉴햄프셔 무당파 유권자라는 코린 풀런은 트럼프를 “허풍선이 어릿광대”라고 했다. “트럼프 이전까지 공화당원이었다”는 그는 “헤일리 때문에 공화당 유세에 나왔다”고 했다. 그는 “지난 번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이번에는 헤일리를 지지할 것”이라며 “헤일리가 따듯한 모성으로 미국을 다시 단결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트럼프는 지난 2016년 대선 당시 백인 노동자 계층의 공화당 지지자가 많은 뉴햄프셔에서 크게 승리했다. 그러나 최근 트럼프는 지난 8일 재향군인회의 날을 맞아 뉴햄프셔에서 유세하면서 자신에 대한 반대자들을 “해충”이라고 묘사해 파시스트 독재자라는 반발을 샀다.◆아이오와주의 지지율 급등으로 주목뉴햄프셔주 경선에 앞서 아이오와주에서 투표가 있을 예정이다. 지난달 여론조사에서 헤일리와 디샌티스가 각각 16%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는 43%였다. 보수성향이 강한 이 곳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헤일리의 지지율이 크게 오른 것이다.헤일리는 트럼프나 디샌티스에 비해 아이오와주 유세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정된 선거운동원과 조직력을 감안하면 유세 청중이 상대적으로 많았다.트럼프를 대신할 수 있는 후보를 기대하는 아이오와주 공화당 유권자들의 절대 다수가 헤일리와 디샌티스 중 한 사람을 지지할 것이라고 밝힌다.추수감사절을 맞아 디샌티스 후보 진영이 헤일리 후보를 공격하는 100만 달러 광고를 준비하고 있다. 디샌티스 진영은 헤일 리가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디샌티스 후보 진영 한 단체 책임자인 크리스틴 데이비슨은 “헤일리는 트럼프 반대자다. 월스트리트 기득권자들이 그를 지지한다. 그러나 헤일리는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다. 결국 트럼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디샌티스를 지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돈많은 기부자들이 헤일리 주시초기 경선이 이뤄지는 주들에서 헤일리가 선전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트럼프에 반대하는 부유한 공화당 기부자들이 주시하기 시작했다.헤일리와 디샌티스의 선거 자금 모금 경쟁이 최근 두달 동안 치열해졌다. 폴 싱어 켄 그리핀, 켈리 크래프트와 조 크래프트 부부 증 부유한 기부자들이 참여하는 미국기회동맹이라는 단체를 상대로 헤일리 후보와 디샌티스 후보가 자신의 대통령 당선 전략을 설명하기도 했다.켈리 크래프트는 헤일리처럼 트럼프 정부에서 유엔 대사를 지낸 인물이다. 남편은 경선 후보 중 지지하는 사람이 아직 없지만 부부가 몇 주 뒤 헤일리 자금 지원 모임을 주선할 예정이다. 이 부부는 지난 9월 디샌티스 후보 자금 모임을 열어 30만 달러를 지원했다.시타델사 CEO 그리핀은 이번 대선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오다가 최근 헤일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헤일리에 대한 자금 지원을 결심하기 직전이라고 밝혔다.뉴욕 변호사로 주요 정치자금 지원자인 에릭 르바인도 헤일리를 위한 자금 모금을 하고 있으며 내달 초 뉴욕시에서 모임을 주최할 예정이다. 그는 또 아이오와주 유권자들을 향해 헤일리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Q.  그림에서 명암이 주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사진도 흑백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에게 컬러텔레비전이 판매되고 컬러 방송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컬러 아냐?” 많은 사람들이 흑백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색이 빠졌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런 경험은 흑백으로 만든 영화를 감상해 보면 쉽게 할 수 있는데, 흑백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흑백 화면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색보다 명암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명암은 영향력이 크지만 마치 피부와 근육 속에 숨어서 인체를 지탱하는 골격처럼 그 영향력을 쉽게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옷이나 피부, 근육 등에 더 관심을 빼앗겨 골격의 영향력을 잘 느끼지 못하듯이 그림에서도 명암 자체보다는 색이나 형태에 더 관심을 빼앗기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인체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골격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듯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좋은 채색의 바탕이 되는 명암의 영향력과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Q.  급진개혁파였던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요동정벌이 과연 시작이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장애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선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하며 내세운 4불가론이 고스란히 당시에도 적용되었다. 당장 고려 말 고려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은 왜구는 아직도 해안가를 침범하고 있어서 국가적인 문제였다. 세종 때까지 왜구가 기승을 부려서 세종은 해안가를 포기할 생각까지 하다가 상왕 태종이 주관해서 대마도 정벌까지 해서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왜구를 확실히 족칠 정도의 군사력을 준비하는데 세종 즉위년까지의 안정기가 필요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남쪽에 덤비는 왜구는 냅두고 원정군을 편성하는 건 비현실적이었다. 최소한 박위가 한 것 같은 대마도 원정 등으로 남쪽을 안전시키는데 우선이었다.정치적으로도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정도전을 지지하는 남은 정도를 제외하면 요동정벌에 찬성하는 여론은 강하지 않았다. 그럼 반대파를 전부 무시하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원정군은 누가 이끌고 후방은 누가 책임지는냐는 걸림돌이 생긴다. 원정군의 중요성과 경험과 군사적 능력,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볼 때 최고의 선택은 이성계의 친정과 정도전의 후방 보좌가 이상적이었다. 유방-소하, 조조-순욱과 같은 예에서 보듯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시너지 효과도 높았다. 하지만 요동정벌은 여론도 안 좋았고 정안군을 중심으로 하는 반 정도전 파벌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이성계가 정도전만 내버려두고 원정을 가기는 불안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성계도 이미 나이가 60세가 넘었고 당시에 병도 자주 앓았다. 건강해도 군대를 이끌기 어렵고 아직 어리고 배경도 미약한 세자를 두고 멀리 나갔다가 변이라도 생기면 살벌한 이복형제들에게 둘려싸인 세자의 지위만 위태롭다. 요동정벌로 정도전에 대한 여론도 안 좋은데 이성계가 없고 정도전과 세자만 둘 수 없었다.여기에 이성계가 후방 지휘를 한다면 누구에게 원정군을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성계 본인이 요동 원정군을 이끌고 가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경력자였다. 이번 요동정벌도 똑같이 반대여론을 등에 업고 나서는 행복한 군인이 또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 정도전이 야전지휘를 한다? 백면서생의 정도전은 진도훈련과 같은 군사적 지식은 있었지만 실전 즉 야전 지휘는 다른 문제다. 제갈량 같은 군재를 보이지 않는 이상에 패망은 확실했고, 실제로도 조괄이라는 이론만 빠삭하고 실전에 무지한 사례가 있었다. 야전 지휘관으로 잔뼈가 굵은 이성계가 아무리 정도전을 신임한다 해도 국내행정이 아닌 전장 지휘를 맡기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성계를 제외하고 그 누가 중대한 원정을 지휘할 군사적 재능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상승장군인 이성계도 힘든 일인데 가능한 인물이 있는가? 그리고 누군가에게 맡기더라도 불안요소는 결국은 남았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종친을 붙이는 게 제일 효과적인데, 만약에 원정군에 따라간 종친이 공을 세우고 군심을 모아서 왕위를 노린다면? 정종 이방과처럼 우직하고 군사적 능력도 있는 사람은 믿을 수 있지만 이방간, 이방원 같은 야심가는? 그렇다고 이방과만 보내야 하는가? 대병력을 지휘하려면 야전지휘관이 더 필요한데 종친을 더 보내야 맞지 않는가? 이미 출정은 고사하고 진도강습조차 사병을 빼앗겨 이 가는 소리가 도성에 울려퍼지는 종친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던 것이 당시 요동정벌 준비의 현실이었다.게다가 정도전의 친구들조차도 사병혁파가 아닌 요동정벌 자체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정황이 보이는데, 태조 7년 8월의 진도강습 태만 처벌대상자 명단을 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은, 이제, 이방번, 유만수, 이무, 이지, 정신의 같은 친정도전파 인사들이 잔뜩 포함되어 있다. 특히 남은은 정도전과 함께 대놓고 조준 등 반대파를 막으러 다녔던 사람인데도 강습태만으로 처벌받을 지경이었으니 나름 추진세력이라는 이들부터가 이모양인데 반대파는 말 할 것도 없었다.고려하면 할수록 정치적으로 한계가 있고 세자의 지위가 불안하고 반대파가 강성한 상황에서 소수만으로 전쟁을 강행하기에는 무리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다 김사형의 말마따나 도성 공역으로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린지도 얼마 안 되는데다가 조준의 말대로 대외적으로 왜구의 침입으로 내부적으로 어수선하고 피해가 속출하는 와중에 전쟁을 벌이는 건 힘들었다. 제일 중요한 이성계는 와병 중이어서 정치적으로 안정도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실록을 보면 문제의 태조 7년은 툭하면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는 악천후가 이어져 몇번이나 법회를 열어댔고, 심지어 태조 본인도 우박이 내리고 강풍이 부는 날 무리하게 흥천사에 거둥했다가 무인정사의 빌미가 되는 병이 들었을 정도다. 날씨가 이러면 작황이 어떨지야 뻔하고, 이쯤되면 요동출병이 아니라 당장 유민진휼부터 고민해야 정상이다. 군량미가 없는데 무슨수로 방어전도 아니고 원정을 나간단 말인가?굳이 태조 7년에 출병할 필요 없이 병력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출병하면 된다고 주장할수도 있으나, 병력을 소집하여 훈련시키는 자체가 막대한 재원을 소모하는 일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노동력은 곧 생산력으로 직결되는데 보인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태종시기 정병:보인의 비율은 1:3이었으니 이 정병을 모두 소집하면 15~60세 양인남성의 1/4이 병영에 꽁꽁 묶인다는 소리다. 농한기에야 그렇다 쳐도 농번기에 이랬다간 난리난다. 하지만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듯이 요동 주둔병력만 10만에 그 뒤에는 주체가 이끄는 최정예 연군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실제로 이 정도의 병력이 있어야 뭐라도 해 볼 수 있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게다가 방어전도 아니고 공격전이니 병력들의 훈련도도 일정수준 챙겨야 했고 그러자면 농한기에만 반짝 소집하는것으로는 부족했다. 정난의 변에 맞춰 공격하면 요동군을 조선과 연이 동시에 협공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횡행하지만, 정난의 변 당시 연군의 상황을 보면 수십만씩 몰려오는 적을 요격하기에 바쁘지 요동군에게 선공을 걸거나 할 태평한 상황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연왕이 조선과 상대할테니 꿀빠는건 건문제지 조선이 아니다. 또 어느쪽이 이기더라도 명나라의 내전이 끝난 뒤 그 후폭풍이 상당할 것이다.이렇다보니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진심으로 요동으로 정벌하는 게 아니라 명의 압박으로 불안해진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행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명의 요구를 빌미로 정도전을 어떻게든 실각시키려는 세력에 대항해서 명과 전쟁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실각의 빌미인 명의 요구를 차단하고(전쟁 상대의 말을 들어줄 필요는 없으니) 전쟁을 상황에서 국가적 단결을 촉구하고 반대파를 누르고, 진법 훈련과 군사력 강화를 이유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권을 회수해서 위협요소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일 뿐 실제로 싸울 생각은 없는 전형적인 정치인의 위기 조성으로 돌파하는 방법이라는 것. 그러나 이건 이것대로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차라리 진짜 출병이면 요동 영지나 군공이라는 떡고물로 온건파 종친들을 회유할 가능성이라도 있지, 출병이 없다면 종친들로써는 아예 어떤 떡고물도 없이 그냥 눈 뜨고 자기 세력기반만 뺏기는 꼴이 된다.다만 준비하고서 얼마 안돼서 정도전과 일파가 숙청되고 중국도 황제가 교체되는 등 전쟁을 준비한 시간이 길지는 않고 반대도 심하다보니 실제로 어느 선까지 나아갈 지 세부적인 전쟁 계획은 어떻게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Q.  우리나라 전통의 한옥에 대한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구석기인들은 막집을 지어 살았다. 신석기시대에 들어 발전한 형태인 움집이 지어졌다. 땅을 얕게 파고 서까래와 기둥이 있는 작은 집을 지은 수혈주거를 중심으로 생활하였다. 서까래와 기둥은 나무, 지붕은 풀을 덮었다.청동기시대에는, 내부에 여러 개의 기둥을 세운 비교적 넓은 집에서 거주하였으며, 철기시대에는 여기에 구들과 온돌이 더해져 난방기능이 향상되었고 흙을 구운 기와를 지붕에 얹은 기와집이 등장하여 오늘날의 한옥으로까지 이어진다.이렇게 지하에 땅을 파서 지은 움집은 장마 폭우에 매우 취약하여 차츰 지상건축물로 변화했다. 초기에는 백제 사람들이 큰 나무 위에 집을 지었는데, 이는 기둥을 세우고 허공에 마루를 까는 오두막 집이었다. 그 뒤 고구려 인들이 이주하면서 고구려의 구들과 백제의 마루가 합쳐졌다. 현재 한옥의 특성인 구들과 마루가 합쳐진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구들과 마루가 합쳐진 것을 한옥의 정형이라고 부르며, 한옥 중에서 구들이나 마루만 있는 것은 원초형 한옥이라고 부른다.일제강점기 이후 기독교의 교파인 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문화의 토양 깊이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썼다. 그래서 한국 건축 양식인 한옥으로 지은 성공회 성당들이 지금도 강화 (강화성당), 진천 (진천성당), 청주 (수동성당) 등에 남아 있다.일제강점기에는 주가, 조선주택으로 불렸으며 1907년에 한옥이라는 용어에 대한 처음 기록이 있지만 당시 한옥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1970년대 이후 현대적 건축을 배운 건축가들이 한옥을 구시대의 잔재인 고루한 건축물과 비효율적인 건축으로 인식하고 헐어 없애면서 많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한옥이 많이 사라졌으나, 2000년대 들어 한옥의 자연친화적 기능과 치유의 효과가 강조되면서 한옥의 가치는 재조명받고 있다. 오늘날에는 환경적인 요인이 원인인 아토피나 천식 등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한옥으로 이사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한옥의 가치가 새로 인식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8년 기준 한옥 건축물의 수가 전체 건축물 대비 0.77% 정도로, 그 수가 적은 편이다.최근에는 화장실이나 안내문과 같은 공공 시설, 심지어는 카페와 같은 사설 기관에도 한옥이나 한옥 모양을 본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현재 일부 철도역의 역사(전주역, 진주역, 홍성역)나 주민센터, 도서관 등이 한옥으로 지어졌다.
Q.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발전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그리스는 단일 국가가 아니라 수백여 개에 달하는 도시국가들이 점점이 흩어져 서로 경쟁하고 공존하는 구조였다. 다른 지역들처럼 단일 왕정이나 정치권력을 형성하지 못했던 이유는 산지가 많고 강, 협곡, 산맥 등으로 잘게 갈라진 지형이 많은 그리스의 특성상 아무래도 주위를 압도할 세력이 탄생하기 어려웠던 것도 한 몫했다. 이렇게 그리스에서는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서로 난립하면서 경쟁했는데, 이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통치 구조가 발생했다. 사실 현대인들이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오히려 굉장히 불안정한 제도였다. 당시에는 오히려 왕정이나 제국이 훨씬 더 안정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이었으며, 그 로마 공화정 역시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걸출한 천재가 등장한 이래 로마 제국으로 탈바꿈하면서 제정으로 전환된다. 무엇보다 당대 기술력 수준으로는 웬만큼 덩치가 큰 나라는 민주주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 아테네야 도시국가 수준이니 사람들이 일일이 모여서 투표하고 하는 게 가능하지 덩치가 커지면 사람들이 모이기 어렵다. 모이더라도 그 모인 인구들이 투표한 것을 옮기고 일일이 확인하여 개표하는 등의 문제도 커진다. 그리스는 하나의 황제나 왕이 위에서 통치하는 구조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세금과 시민의 의무를 질 수 있는 성인 남성에게만 한정된다는 한계점은 있었지만 이후 꾸준히 발전하며 현대 사회의 정신적 틀을 만들었다는 의의를 남겼다.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민주주의가 발생한 곳은 아테네였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원래 아테네도 기존에는 왕정이었지만, 기원전 6세기경 왕의 폭정에 지친 아테네인들이 왕을 몰아내고 귀족들이 다스리는 과두정으로 바꿨고 나중에는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정으로 발전했다. '아티카 지방의 패자이자 유력 대도시던 아테네가 민주주의 체제로 바뀌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의 폴리스들도 모두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어서 스파르타의 경우 세습되는 두 가문에서 왕을 2명씩 배출하면서 왕정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다.무력을 숭상하던 스파르타는 유독 정치체제가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유별날 정도로 차이가 심했다. 스파르타는 2개의 마을이 합쳐져 만들어진 도시였기에 그 이래로 2명의 왕을 섬겼다. 각각 아기아다이 가문과 에우리폰티다이 가문에서 1명씩 가장 먼저 태어난 남자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줬으며 왕위는 세습직이었다. 스파르타의 왕은 최고 사제직을 겸했고 전쟁을 선포할 권리도 있었다. 허나 스파르타 왕권은 날이 갈수록 쪼그라들었는데, 외교권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로 5인의 선출직으로 구성된 에포로스에게 넘어갔고 내정 역시 60세 이상의 장로 28명으로 구성된 장로회의 게루시아에게 넘어갔다. 결국 왕은 종교 업무를 제외하면 군대 최전방에서 싸우는 걸 빼고 거의 할 일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만으로 남았다.'에포로스'는 1년마다 시민들의 선거로 뽑혔고, 나중에는 왕보다도 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스파르타의 최고 의결 기구로 떠올랐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1년마다 갈아치워졌고 재선이 불가능했던 탓에 퇴임 후 보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5명의 에포로스들은 장로회의, 즉 게루시아와 함께 국정 대소사를 총괄했다. 반면 민회 에클레시아의 경우, 안건을 상정할 수도 없었고 에포로스가 제시한 안건에 투표만 가능해서 기타 그리스 폴리스들에 비해 권한이 확연히 적었다. 에클레시아에서 통과된 안건도 다시 에포로스와 게루시아의 상의 끝에 시행되었다. 워낙 에포로스와 게루시아가 보수적인 집단이었던 탓에 스파르타의 정책 실행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느렸다. 대신 권력이 분립되고 상호 견제되었기에 체제 안정성이 매우 탁월했고, 대중 독재와 폭군을 모두 방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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