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흐의 작품중 내 방에서 본 파리 풍경 그림해석 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수련한다. 그는 브뤼셀의 왕립 미술아카데미에 등록을 해서 자신이 싫어하는 아카데미식 교육을 받기도 했고, 에텐과 헤이그, 누에넨, 안트베르펜 등을 돌면서 여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동생 테오가 미술상을 하며 살고 있는 미술의 성지 파리에 입성을 한다.하지만 아직도 화가 구실을 하지못하는 반 고흐는 테오의 아파트에 얹혀살아야 하는 신세였다. 비교적 성공적인 미술상이었던 테오는 파리 몽마르트르의 르피크 거리에 비교적 번듯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물론 당시의 몽마르트르는 포장도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유명한 물랭 드 갈레트 풍차 주변에 포도밭이 있는 거의 시골같은 곳이긴 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 무렵에는 수많은 화가들이 몽마르트르 지역으로 몰려들었을 만큼 집세가 싼 동네였다. 그리고 거의 평지다시피한 파리에서 유일한 언덕이 있는 곳인 몽마르트르는 파리가 내려다 보이는 좋은 전망을 자랑했다.반 고흐는 테오의 아파트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화실을 만들었으며, 창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경치를 가끔 그림으로 그리곤 했다. 아래 두 그림은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1886년 그림이고, 위의 것은 역시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그림이지만 1887년에 그린 그림이다. 찾아보면 이 시기에 반 고흐가 그린 파리 풍경, 그것도 아파트 창밖을 보면서 그린 그림들이 더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위의 그림과 같은 각도로 그린 1887년 그림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개인 소장이라 좋은 스캔본을 찾지 못해 올려놓지는 않았다.파리가 반 고흐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인상파 그림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에서 인상파를 비롯한 최신 스타일의 미술을 흡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아직 그가 네덜란드 시절의 어두운 팔레트를 버리기 시작했지만, 아직 인상파로의 전환을 완전히 마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그림들이기도 하다.
Q. 우리나라 최초 고갯길인 "하늘재"는 어떤 용도로 이용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요즘에는 트래킹 장소로 각광 받고 있죠월악산 미륵리 3층석탑을 조금 지난 왼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하나 있다. 멀리 황장목(적송)과 떡갈나무, 해송 등의 운치 있는 풍경을 마주하며, 청량한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길이 열리는 이 길은 일명 ‘하늘재’, 길 왼편 아래로 나 있는 도랑은 가뭄 탓에 때때로 말라버린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기암절벽 산봉우리와 길가의 진분홍 물봉선, 짙은 자줏빛의 수리취, 노란 짚 신나물 등의 들꽃들이 여행객들을 반긴다. 얼핏 보면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하늘재(해발 525m)는 이름처럼 높지는 않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고 있는 도 경계로서 미륵리에서 30∼40분(2㎞) 정도 걸어 오르면 곧바로 문경 관음리로 연결된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은 하늘재 고갯마루에 이르러 쭉 뻗은 아스팔트 길로 이어지는데 서쪽으로 문경 대미산(해발 1,115m) 정상이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하늘재 아래의 중원미륵리 사는 신라 말∼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옛 절터로, 당간지주와 회랑 등의 흔적만으로도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찰로는 유일하게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지릅재와 하늘재 사이의 분지인 미륵리에 터를 잡고 있다. 중원미륵리사의 목조건물은 13세기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는 5층 석탑(보물), 석불입상(보물)을 비롯해 석등(지방유형문화재), 3층석탑(지방문화재) 등이 남아있다. 중원미륵리 사는 지난 1977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청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작업을 통해 일연스님이 거처했던 ‘미륵대원’으로 밝혀졌다.
Q. 음악 산업의 주요 동향과 미래 예측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음악산업의 경제적 특성 • 미디어산업으로서 음악산업 – 경험재적특성: 위험성이 크고 성공이 불확실 – 수요 안정화전략 추구 – 규모의 경제 추구 – 수직적. 수평적 통합을 통한 소유의 집중 – 해외 진출 등을 통한 시장 확대 – 수익 다변화 추구 • 음악산업의 시장구조 – 소수의 음반사들에의해 시장이 지배되는전형적인 과점시장의 특성 – 메이저 음반사들 간 인수합병을 통해 과점기업의 수는 6개에서 5개로, 그리고 현재는 3개 – Universal Music Group, Sony Music Group, Warner Music Group – 유명 가수들과의 계약을 통해 음반제작의전 과정을 담당하고있으며, 전 세계 유통망을장악함으로써 안정적인수익 확보 음악산업의 구조 • 가수, 작사가, 작곡가 및 프로듀서, 가수 발굴, 트레이닝, 음반 기 획, 녹음,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기획사, 음반을 제작하는 음반 사, 제작된 음반을 유통하는 배급사, 그리고 노래를 틀어주는 방 송사 등 다양한 행위자들로 구성 • 음악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 기획(creation) - 제작(production) - 프로모션(promotion) - 유통(distribution) • 프로모션의 다변화: 공연, 방송 -> 매체의 다양화로 프로모션 창 구역시 다양해짐 ex) 게임, 소셜미디어 등 • 음악 유통은 가장 큰 변화를 겪음 – 아이튠즈, 아마존 등 새로운 중간매개자 등장 – 다운로드, 스트리밍 방식 디지털 기술과 음악산업의 진화 음악생산과 유통에 미친 디지털 기술의 영향 • 재생산 및 유통비용 절감되고 생산효율성 극대화 • 메이저 음반사들의 영향력 약화 • 다양한 로컬 음악의 해외 진출 용이 •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은 불법복제를 확산시켜 음반시장을 위축 • 음반시장의 축소와 디지털 음원 시장의 확대• 음악 소비의 채널 다각화 – 음반 및 디지털 음원시장외에 콘서트, 뮤지션에 대한 기업의 후원, 비디오 게 임이나 텔레비전과 영화, 그리고 온라인 마케팅 등에 음악 활용 • 새로운 유통강자의 부상 – 애플 아이튠즈, 스포티파이(spotify) 소셜미디어와 음악• 인터넷을 통해 뮤지션과 음악회사가 팬들과 직접 소통 • 소셜미디어: 효율적인 마케팅과 홍보의 채널• 소셜음악 서비스 – sns기능과 음악 결합 – 소비자들이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다른 소비자들과 음악 을 공유하고 음악에 대한 정보와 관심을 나누기 원함 • 클라우드 음악서비스 – 음원을 개인의 PC나 스마트폰저장장치에 보관하는 대신 서비스 사업자의 중 앙데이터센터에 저장한 후 인터넷을 통해 다운로드하거나 스트리밍 방식으 로 음악을 듣는 서비스 C세대의 등장과 음악소비의 변화 •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음악은 “디바이스가 없는(deviceless)” 콘텐츠로 변화 • 음악 팬들이 수동적으로 음악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소셜미디어 나 인터넷 활동을 통해 음악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 • 프로슈머(prosumer)와 프로듀저(produser) • 인터넷을 통한 음악팬들의 활동은 뮤지션과의 협업 (collaboration)의 형태일 뿐 아니라, 공동생산적 노동(cocreative labor) • 디지털 시대 음악소비의 참여적 특성은 새로운 C세대의 등장과 밀접한 연관 • C-Generation – C는 ‘연결하다’(connect), ‘소통하다’(communicate), ‘변화시키다’(change)를 의미 – 1990년대 이후에 출생하고 2000년대 들어 성년이 된 사람들 – 디지털기기에매우 친숙하며 평균적으로 하루 6시간 이상 사용 – 스마트폰과컴퓨터를 대부분 소유하고 있으며, 인스턴트 메시지를사용해 소 통하는 한편 페이스북과 유튜브의 충성도가 높은 사용자들 – 대부분의사회적 상호작용은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며 이 공간에서자신의 의 견과 태도를 표명하는데 거리낌이 없음. – 유무선 기기를 통해 인터넷에늘 연결 –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리터러시능력의 향상으로 독자적인 콘텐츠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역량 보유 디지털 시대와 음악의 미래 음악의 소유 VS. 접근 • 역사적으로 음악 산업의 주류 소비 형태는 사용자가 음반이나 CD 등을 구매하여 소유권을 갖는 것 • 디지털 기술 등장 이후에도 이러한 방식은 음원 다운로드의 형태 로 지속 • 브로드밴드와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음악 소비의 형태가 빠르 게 다운로드에서 스트리밍 방식으로 전환 •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의 확산으로 비소유 방식의 음악 소비가 더 욱 증가 • 미래 음악소비는 음악 소유권을 갖는 것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 는 접근권을 구매하는 것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음 뮤지션과 팬의 관계 • 뮤지션과 팬과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지고 관계의 성격 역시 정서 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을 넘어 경제적인 것으로 진화 • 뮤지션과 팬과의 유대는 뮤지션과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정서적 이고 문화적인 것에서 비롯 • 그들의 관계는 훨씬 친밀해지고 일상화되며, 팬들의 역할은 프로 모터와 마케터로 확장 • 공연이 음악 비즈니스의 주력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뮤지션 과 팬들의 친밀한 관계는 경제적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 디지털 기술과 음악산업의 혁신 •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같은 최첨단의 디지털 기술은 음악 음악산업에 지속적인 혁신을 촉진할 것임 • 빅데이터 – 사용자의취향을 고려한 음악 추천 등을 대중화시킬 것 – 특정 음악 일변도의 소비라는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 – 큐레이션(curation) 서비스와결합하면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할 것 • 사물인터넷 – 공간 및 디바이스간 끊김 없는(seamless) 음악 청취를 가능케 함 – 빅데이터기술을 통해 사용자의기분(mood)과라이프 스타일을 고려한 자동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 • 애플의 시리(Siri)나 아마존의 알렉사(Alexa) 같은 음성인식 인 공지능 기술 역시 과거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혁신적인 음악소비 경험을 가능케 할 것
Q. 프랑스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프랑스혁명은 사상혁명으로서 시민혁명의 전형이다. 여기서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계급으로서의 시민혁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혁명의 이념은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왕권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에 의해서 여전히 국왕친정과 신권이론(神權理論)을 받들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을 계속하였다.신권왕정 밑에서는 모든 국민이 단순히 국왕의 신하에 불과하다. 그 위에 소수의 귀족·성직자들만이 별도의 특권신분을 구성하고, 국민의 90%를 차지한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면서 우아하고 무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순은 처음부터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였다.그러한 과정에서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재정궁핍에 빠졌다.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에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臨時地租)’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귀족·성직자들은 국왕을 뒷받침하던 사법관료의 핵심인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하고 고등법원이 가진 법령심사권한을 이용해서 왕정고문부의 재정안(財政案)에 저항하였다.이렇게 왕권 내부에서 투쟁하는 사이에 재정총감 칼론과 그 후임자 브리엔이 실각하고, 1788년 8월에 네케르가 재차 재정총감으로 기용되었다. 네케르는 고등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전국 삼부회를 다음해에 소집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였다.
Q. 구당서와 신당서는 어떤차이가 있는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완성 및 주상(奏上)은 후진 개운(開運) 2년(945) 6월로, 그 이듬해에 후진이 멸망하는 바람에 편찬책임자가 도중에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덕분에 한 인물이 두 개의 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거나 초당(初唐) 시기에 비해 만당(晩唐) 시기에 대한 기술이 다소 빈약하다는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때문에 후세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북송(北宋) 시대에 다시 《당서》(唐書)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신당서》). 그러나 거꾸로 당대 《실록》 등의 1차 사료의 원문들이 고스란히 인용되어 있어, 사료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오히려 《구당서》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한편 발해사의 해석 문제에서 《구당서》와 《신당서》는 각기"발해말갈의 대조영은 고려의 별종이다.""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속민이던 족속인데 성은 대씨였다."라고 기술해,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혹은 속말말갈계 고구려인)이냐 말갈인이냐에 대해 한국 학계와 중국, 일본 학계의 해석이 다르다.참고로 《구당서》에서는 고구려에 대해서 부여의 별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高麗者 出者夫餘地別種也")또한 당시 일본 열도에 대해 (倭國傳)과 (日本國傳) 등 두 열전이 입전되어 있는데,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해 뜨는 변두리에 있으므로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했다. 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아름답지 않음을 꺼려서 일본이라고 고쳤다고도 하고, 일본은 예로부터 소국이었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했다고도 한다.(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고 되어 있다. 또한 《구당서》에는일본국의 남쪽과 서쪽은 큰 바다를 접하고, 동쪽과 북쪽은 큰 산으로 막혀있으며, 큰 산 너머에는 모인(毛人)의 나라가 있다.(西界南界咸至大海東界北界有大山爲限山外即毛人之國)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일본 정치의 중심이 교토임을 고려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산은 오늘날 일본 알프스라 불리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키소 산맥(木曽山脈), 아카이시 산맥(赤石山脈)을 말하는 것이며 그 너머의 모인(毛人)은 아이누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이 기록은 송대 초기의 《태평어람》에도 인용되었는데 이 기록에 대해서는 편찬 과정에서 존재했던 일본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모리 기미유키(森公章)는 일본이라는 국호 성립 이후에 최초의 견당사(遣唐使)가 파견되었던 702년 이후에도 국호 변경 사유를 일본측에서 특별히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했고, 오오바 오사무(大庭脩)는 이를 간단히 편찬 과정에서의 실수라기보다는 과 의 왜국(일본) 관련 기사의 중절된 시간대에는 백강구 전투 및 임신의 난이 있었으며, 당시의 중국측에는 임신의 난에 의해 '왜국'(덴지 덴노의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국'(덴무 덴노의 정권)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했기에 이에 대해 확실하게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이설로써 모두 병기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