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암행어사의 활동 및 권한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개설전국 지방행정의 감찰은 본래 사헌부의 임무이지만 교통과 통신수단의 불편으로 지방관의 악정을 철저히 적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국왕이 비밀리에 어사를 임명하여 각 지방에 파견하여 변복을 하고 비밀감찰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암행어사는 각종 어사 중의 하나로 다른 어사와는 달리 임명과 임무가 일체 비밀인 것이 특징이다. 성종 때 지방 수령의 비리가 크게 문제가 되면서 성립했는데, 조선 후기 삼정문란이 심해지면서 더욱 활발히 시행되었다.암행어사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명종 5년인 1555년이지만 최초의 실질적 암행어사는 중종 4년인 1509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암행어사는 주로 당하관 관리 가운데 왕이 임의로 추생(抽牲 : 임의로 추첨하는 것)하여 임명했지만, 당상관을 암행어사로 임명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또한 전기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암행어사가 후기에는 일반화되었다. 이 제도는 1892년(고종 29) 전라도 암행어사인 이면상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암행어사의 임명암행어사는 봉서(封書)와 사목(事目), 마패(馬牌)와 유척(鍮尺)을 받았다. 봉서는 암행어사에 임명되었음을 알리는 문서이고, 사목은 자세한 임무와 파견 지역이 적힌 문서이다. 마패는 역참에서 역졸과 역마를 징발할 수 있는 증빙이었으며, 이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만이 휴대할 수 있었으므로 암행어사의 신분증명이 되기도 하였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로, 암행어사가 지방 관청의 도량형을 검사하여 되나 자를 속이는지 판별하는 표준 자로 쓰였다.이 물품들은 한개의 상자에 담긴 채로 국왕이 비밀리에 직접 주거나 하급관리를 통해 사택으로 직접 전달하였고, 선발된 암행어사는 봉서를 받는 즉시 출발하였다. 물론 하급관리를 통해 전달될 경우 이 물품을 전달하는 하급관리가 이 물품의 내용물을 열어볼 경우 엄벌에 처해졌다. 봉서 표면에는 도남대문외개탁(到南大門外開坼 : 남대문 밖에 도달하면 열어볼 것) 또는 도동대문외개탁(到東大門外開坼 : 동대문 밖에 도달하면 열어볼 것)이라고 써서 그 내용은 한성 밖에서만 열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 물품 중 하나라도 분실할 경우 암행어사 직에서 파직되었다.암행어사의 서열암행어사는 정2품인 한성부판윤의 바로 아래서열인 종2품(또는 정 3품)에 해당되어 지방 수령들보다 품계가 높다. 이 때문에 암행어사가 출두하면 해당 지방 사또들을 파직시킬 수 있다. 원칙상으로는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서 파직시킬지의 여부를 물어본 뒤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면 해당 지방관을 파직시키는 형식이지만 거리가 너무 멀면서도 일을 급하게 처리해야만 할 경우 선참후계 방식으로 먼저 파직시킨 후 장계로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경우도 있다.암행어사의 임무암행어사가 임명받은 지방에 도착하면 지방행정을 살피기 위해 변복하고 지방을 관찰하였다. 그렇게 염탐을 마치면 고을에 들어가 관가의 대청에 올라 공문서와 관가 창고를 검열하였는데, 이를 출도라고 하였다. 암행어사가 출도할 때는 역졸이 마패를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도요”라고 크게 외쳤다. 억울한 죄인이나 재판 사례가 있으면 재심하여 해결하고 관리의 부정이나 파행이 발견되면 봉고(封庫 : 창고를 봉인함)·파직(罷黜 : 수령의 직책을 박탈함)하였다. 암행어사는 품계분류상 관찰사와 대등한 권한을 가졌다.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암행어사는 서계(書啓 : 보고서)와 별단(別單 : 부속 문서)을 국왕에게 제출하였다. 서계에는 현직·전직의 관찰사·수령의 잘잘못을 상세하게 적고, 별단에는 자기가 보고 들은 민정·군정의 실정과 숨은 미담이나 열녀·효자의 행적 등을 적어 보고하면 임금은 이것을 비변사에 내려 처리토록 하였다. 이 제도는 많은 효과를 거두었으나 숙종 이후부터는 당론이 성행함에 따라 암행어사의 본래의 사명과는 달리 반대당을 공격하고 자기편을 두둔하는 편당적인 색채를 띠게 된 데다가 고관들은 자기들의 비행을 감추기 위해 자기 심복을 어사의 뒤를 밟게 하여 그 보고에 따라 어사를 탄핵하거나 아예 어사를 매수해서 자신의 평가를 좋게 적어 장계를 쓰도록 조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오마패마패(馬牌)는 조선 상서원(尙書院)에서 발행한 둥근 동판의 표지이다. 관리들이 공무로 지방 출장을 갈 때 역(驛)에서 말을 징빙할 수 있는 일종의 증빙 수단이었다. 표면에 1 ~ 10마리의 말을 새겨 그 수효에 따라 말을 내 주었다. 하지만 실제로 말 10마리가 찍힌 마패는 임금이 사용하는 마패이므로 일반 관리들은 사용할 수 없고 암행어사들은 그보다 말의 숫자가 적은 마패를 사용한다. 지름이 10cm 정도이며 한쪽 면에는 상서원인(印)의 자호(字號)와 연월일을 새기고 다른 한쪽에는 말을 새긴 것으로, 어사가 이것을 인장(印章)으로 쓰기도 하였다.또 암행어사(暗行御史)의 인장으로 사용되었고, 출도시에는 역졸이 손에 들고 ‘암행어사출도’를 외치게 하였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는 징발할 수 있는 말의 수를 나타내며 품계에 따라 차등 지급됐는데, 공무가 끝나면 다시 반납해야 했다. 현재는 일마패에서 오마패까지 남아 있으며 왕은 십마패, 영의정은 칠마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방자방자는 본디 관가에서 관리들이 재량껏 사용하기 위해 모아놓은 육체노동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관직명이다. 암행어사로 임명되면 암행어사에게 비서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방자를 1~2명 정도 배치한다. 단, 임금이 암행활동을 하게 되면 방자가 아니라 내시가 그 자리에 배치되며 하는 일은 동일하다.
Q. 한국 음악사에 가장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노래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상고 시대상고 시대의 국악에 관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하지만,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 절제와 같은 제천 행사에 관련된 중국 역사서에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한국의 상고 시대 음악은 각 부족의 제천의식에 쓰이는 의이였던 것이 옛 중국 문헌에서 단편적으로 보인다. 부여ㆍ고구려ㆍ예ㆍ마한ㆍ변한 등 상고시대 부족 국가들은 추수가 끝나는 때, 혹은 씨를 뿌릴 때에 일정한 시기를 택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남녀노유가 함께 모여 연일 밤낮없이 춤과 노래로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삼한의 음악한국음악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중국의 진수(陣壽, 233-297)가 찬한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으로, 여기에 의하면 마한에서는 5월 하종(下種)과 10월의 농공(農功)이 끝났을 때 귀신에게 제를 지내고 군중들이 밤낮없이 쉬지 않고 소리하고 춤을 추며 술을 마셨다. 이 3세기 마한의 굿음악은 아마 오늘날의 별신굿이나 도당굿에서 굿중패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춤추는 요란한 음악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3세기 마한·변한의 아마도 강렬하고도 투박하였던 음악은 저 신라 유적에서 발굴된 흑색의 소박한 토기에 비할 수 있겠다.변진의 악기 고중국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변진에 중국의 축과 형상이 비슷한 현악기(絃樂器)가 있었다. 가야국(伽倻國) 가실왕(嘉實王)이 가얏고를 만들고 왕산악(王山岳)이 거문고를 만들기 전인 한국 최고(最古)의 이 악기는 '고'라고 불리는 가야고의 전신일 것이며 아마 6세기에 가얏고(가야금)가 가야국에서 새로 생긴 후로 자취를 감추고 만 것 같다.안악고분에 나타난 음악영화(永和) 13년(357년)이란 연대가 표시된 안악 제3호 분(墳)의 벽화는 여러 가지 중국 고대악(古代樂)을 보여준다. 전실(前室)의 한 벽에는 입고(立鼓)와 소(簫)를 각각 연주하는 2인과 노래하는 사람 1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입고·소·가(歌)의 그림은 한(漢)의 전정(殿庭)의 고취(鼓吹)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회랑(廻廊)의 벽에는 대행렬도(大行列圖)가 있는데, 후부의 기마악대(騎馬樂隊, 4인으로 되었다)는 일렬 횡대로 고(鼓)·소(簫)·가(茄)(또는 소각(小角))·요를 주(奏)하고 있는데, 이 기마악대의 음악은 한 대(漢代)의 단소요가를 그린 것 같다. 후실(後室)의 벽에는 세 사람의 악인(樂人)이 앉아서 각각 거문고(또는 쟁(箏))·완함(阮咸)·장적(長笛)으로 춤반주를 하는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후전(後殿)의 곡연(曲宴)을 그린 것 같다. 이 4세기의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입고(立鼓)·소(簫)·가(苛)·요 등의 한대(漢代) 악기는 한강 유역에서 발굴된 초두(醮斗)와 함께 한문화의 특색을 보여주고, 마한, 변한의 악(樂)과는 전혀 다르다.
Q.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는 무슨 관계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부여는 굉장히 중요한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여에서 주몽이 내려가서 세운 나라가 고구려거든요. 이란 드라마 기억나세요? 그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에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부여와 고구려는 정치나 사회 모습이 굉장히 비슷합니다. 심지어 똑같은 것도 많아요. 그럼 부여의 기록을 통해 부여의 역사를 살펴볼게요.나라에는 왕이 있으며 벼슬은 가축의 이름을 따라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자, 사자라 칭했다.일단 위에서 계속 등장하는 글자가 있죠? ‘가(加)’라는 한자입니다. 부족장을 뜻해요. 이를 통해 부여는 왕과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는 4부족의 부족장들이 힘을 합쳐 만든 나라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길게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고 항상 부르기 힘드니까 부족장들을 모두 ‘제’ 자를 써서 제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 우, 저, 구는 무슨 뜻일까요? 마는 말을, 우는 소를, 저는 돼지를, 구는 개를 뜻합니다(저가는 저팔계를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게 있죠? 동물의 이름을 통해 토테미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예로 마가는 말을 숭배하는 부족인 거죠.제가들은 별도로 사출도1)를 나누어 맡아보는데 큰 곳은 수천 가(家)이며 작은 곳은 수백 가였다.부족장들(제가)은 각기 지방 4곳을 ‘별도’로 다스렸어요. 그럼 왕은 중앙을 다스리고 다른 부족장들이 왕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자체적으로 각 지역을 다스렸단 얘기예요. 왕이 있으면 뭐해요. 부족장들이 각 지역에서는 왕 같은 존재였어요. 마치 학교에 교장선생님은 있지만 각 반의 담임선생님들이 마음대로 반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거예요. 교장선생님이 아무리 자기 말 안 듣는다고 부글부글해도 소용없었단 얘기입니다. 자연스럽게 왕권은 매우 약했을 거라고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옛 부여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잘못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출도도 있고, 각 부족은 각기 모시는 동물신도 다르고, 심지어 가뭄이 든 것도 왕 탓이니 왕을 죽이거나 교체할 수도 있다니요! 정말 왕권이 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왕권이 강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부족장의 권한이 여전히 강한 상태로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연맹왕국’이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잠깐! 부족들 간 동맹을 맺으며 연맹왕국이 탄생하다우리에게 익숙한 정치구조는 오른쪽 그림과 같은 모습입니다. 강력한 왕이 있고 관리들이 왕 밑에서 일을 하는 거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처음부터 왕권이 이렇게 강할 수 있을까요?우리가 간과하는 게 있습니다. 태초에 인간은 평등했어요. 그러다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평등했던 그들 사이에서 불평등이 시작되었단 말입니다. 차츰 계급과 국가가 생기긴 했지만 아직 나라 체계가 잡히진 않았어요. 그러다 전투력이 더 강한 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부족들 간에 동맹을 맺으면서 연맹왕국이 탄생하게 됩니다.연합을 맺은 부족장 가운데 좀 더 큰 부족을 이끈 부족장을 왕으로 선출한 거죠. 그러니 왕권이 강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반 아이들 중에 한 명을 투표로 담임선생님으로 뽑았다고 생각해보세요. 학생들이 담임선생님 말을 잘 따를까요? “너도 학생이었잖아! 어디서 명령이야!” 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친구들이 훨씬 많겠죠.연맹왕국은 4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 왕권이 약하고요. 둘째, 통일된 종교가 없고, 셋째, 통일된 법도 없습니다. 넷째, 나라의 규모도 크지 않아요. 규모가 커지려면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혀야 하는데 왕권이 약하니 나라 안에서 단결해서 전쟁이 이뤄질 리가 없죠.그럼 부여의 경제 모습은 어떨까요? 일단 여기는 너무 추워서 농사가 잘 안 됩니다. 목축을 병행할 수밖에 없어요. 이걸 반은 농사짓고, 반은 가축을 기른다고 해서 ‘반농반목’이라고 해요.연맹왕국에서 중요한 게 제천행사예요. 제천행사는 ‘땡스기빙데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추수를 감사하면서 하늘에 제사도 지내고 마을에 축제도 여는 거죠. 추수를 언제 하는지 아시죠? 10월에 합니다. 그럼 대부분은 10월에 제천행사를 하겠죠. 그런데 부여는 혼자만 12월에 했대요. 그냥 외우지 마시고요, 항상 ‘왜’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했죠? 부여는 농사가 워낙 잘 안 되니까 중요한 게 사냥이었던 거죠. 12월은 눈이 많이 오는 계절입니다. 그럼 동물들이 눈에 갇혀서 잘 못 움직여요. 그러니까 이때 대대적인 사냥 행사를 하고 친목을 다진 거죠. 이 행사를 ‘영고’라고 부릅니다.사회 모습은 아주 흥미로운 게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순장이 있어요. 순은 ‘따르다’라는 뜻인데요, 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살아 있는 가족들을 함께 매장하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이런 잔망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부여인들이 특별히 잔인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많이 있었던 풍습입니다. 순장을 하는 이유는 사람이 죽으면 그냥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예요. 그래서 생전에 쓰던 물건과 죽어서도 수발을 들어줄 노비와 가장 친한 가족들을 함께 묻는 거죠.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회 풍습 면에서 겹치는 내용이 대부분이에요. 부여에서는 1번 잘못하면 12배로 갚아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친구를 한 대 몰래 때리다 걸리면, 그 친구한테 12대를 맞아야 하는 거예요. 이걸 1책 12법이라고 해요. ‘책’이 잘못을 뜻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책잡히다’ 할 때와 같은 뜻입니다.부여와 똑같은 법이 고구려에도 있어요. 바로 형사취수제입니다.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데요,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는 동생의 부인이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은 특별히 여자를 좋아했을까요? 아닙니다. 역사를 공부할 때 꼭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저땐 저럴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했잖아요. 당시 사람들의 상황 속에 들어가서 이해를 해야 해요. 이 시기엔 여자가 출산하다 굉장히 많이 죽었어요. 마찬가지로 영아 사망률도 높을 때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의 노동력이 너무나 중요했던 거죠. 노동력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제도를 실시했던 것입니다.고구려(高句麗)는 한국의 고대 왕조국가 중 하나이다. 국성은 고씨(高氏)이다. 본래의 국호는 고구려였으나 당시의 금석문과 역사 기록을 토대로 장수왕대에 고려(高麗)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에도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901년)와 왕건이 세운 고려(918년)가 계승하여 '고려' 국호는 천년 이상 지속되었다. 현재 한국의 영문 국호인 코리아 역시 고려에서 유래되었다.고구려는 오늘날 평안도, 랴오닝성, 지린성을 주무대로 삼으며 한반도 중부와 남부, 헤이룽장성 및 연해주, 몽골 동부까지 지배하였다.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내부로는 말갈, 거란, 실위 등을 휘하에 두고 모용수의 후연과 요동군을 놓고 대립하여 이후 요동군 정벌과 북연을 속방으로 만들며 역량을 과시했다. 제도적으로도 도교, 불교, 태학, 율령 등의 제도를 도입해 체계적인 제도를 갖춰 국가를 운영했으며, 백성들은 군주를 천제지자(天帝之子)라고 일컫으며[ 스스로를 천제의 자손이라 여겼고, 영락, 영강, 연수, 건흥, 연가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고구려 시대는 한민족 전통문화의 뿌리로, 각저총]의 씨름도에 근거해 전통스포츠 씨름의 기원이 된 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난방 방식인 온돌, 현악기 거문고의 기원으로도 여겨지며,[ 한민족의 전통설화 토생원전, 바보온달전,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등의 배경이기도 하다. 한반도 남부와 풍습과 언어가 같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Q.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증거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독섬이라고도 하며, 면적은 18만 7,554㎡이다.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89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에, 서도는 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에 위치한다. 동도·서도간 거리는 151m로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6m, 면적 73,297㎡이고, 서도는 해발고도 168.5m, 면적 88,740㎡이다.역사적 기록부터가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입니다.삼국사기에는 512년(신라 지증왕 13) 하슬라주의 군주 이사부가 울릉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왕국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독도가 우산도(于山島)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143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과 무릉 두섬은 날씨가 맑은 날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71년 삼봉도(三峰島)와 1794년 가지도(可支島)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울릉도를 울도군이라 칭하고 울릉전도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하도록 정하였는데, 석도는 '돌로 된 섬'이라는 뜻의 '돌섬'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전라도 방언에서는 '돌'을 '독'이라 하여 전라도 남해안 출신의 울릉도 초기 이주민들은 '돌섬'을 '독섬'이라 불렀으며,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獨島)'가 되었다고 한다. 독도가 행정지명으로 처음 언급된 것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이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서로 알려져 있다.한편, 프랑스와 유럽 같은 나라에서는 독도를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Liancourt)', '호네스트(Hornest)'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1905년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바꾸고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한 뒤 계속해서 근거없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는 한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2005년 3월 16일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竹島の日]'로 정하는 조례안 가결하였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는 같은해 3월 17일 일반인에게 독도 방문을 전면 허용하고 대일(對日) 신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Q. 맛있는 커피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하네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커피는 6~7세기경 에티오피아(Ethiopia)의 칼디(Kaldi)라는 목동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염소들이 빨간 열매(berry)를 따 먹고 흥분하여 뛰어다니는 광경을 목격한 칼디는 자신도 이 열매를 먹어보게 되었고, 그 결과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 사실을 이슬람 사원의 수도승에게 알렸고, 기분이 좋아지고 졸음을 방지해 주는 등 수양에 도움이 되는 신비의 열매로 알려지면서 여러 사원으로 퍼져 나갔다.커피의 전래원산지 에티오피아에서는 농부들이 자생하는 커피 열매를 끓여서 죽이나 약으로 먹기도 했다. 9세기 무렵 아라비아반도로 전해져 처음 재배되었으며, 나중에는 이집트, 시리아, 터키에 전해졌다. 이곳에서는 커피 열매를 끓여 그 물을 마시거나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카와(kawa)라는 알코올음료를 만들어 마셨다. 이 음료는 13세기 이전까지는 성직자만 마실 수 있었으나, 그 이후부터 일반 대중들에게도 보급되었다.이 무렵 커피는 이슬람 세력의 강력한 보호를 받았다. 커피 재배는 아라비아 지역에만 한정되었고, 다른 지역으로 커피의 종자가 나가지 못하도록 엄격히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13세기에 걸쳐 십자군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슬람 지역을 침입해 온 유럽 십자군이 커피를 맛보게 되었다.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인들은 초기에는 커피를 이교도적 음료라 하여 배척했다. 그러나 밀무역으로 이탈리아에 들어온 뒤 교황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음료로 공인받게 되었고, 일부 귀족들과 상인들을 중심으로 커피가 유행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15세기에 이르러 수요가 늘자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이를 독점하기 위하여 수출항을 모카(Mocha)로 한정하고 다른 지역으로의 반출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인도에서 밀반출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17세기 말에는 네덜란드가 인도에서 커피 묘목을 들여와 유럽에 전파했다.그 뒤 유럽의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커피를 대량 재배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커피나무가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인도, 서인도제도, 중앙아메리카,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바로 이웃나라인 케냐, 탄자니아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재배되었다. 커피가 점차 대중화되면서 유럽 곳곳에 커피하우스가 생기기 시작했다.한국에서는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황제가 처음 커피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민간에서는 독일인 손탁이 정동구락부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한 이후 1920년대부터 명동과 충무로, 종로 등지에 커피점들이 생겨나면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 뒤 8.15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미군부대에서 원두커피와 인스턴트 커피들이 공급되어 대중들이 즐기는 기호음료로 자리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