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존재론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리스어인 onta(존재하는 것)와 logia(學, 論)를 합쳐, 17세기에 고클레니우스(Rudolf Goclenius, 1547~1628 : 독일의 철학자)나 클라우베르크(Johann Clauberg, 1622~1665 : 독인의 철학자)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존재론이란, 존재하는 것을, 그 특수한 형태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서 일반적으로 그 근본적 규정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말하면, 이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철학, 즉 그의 형이상학이 그와 같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위에 기독교의 입장에서 존재론을 말한 대표자이다.근대에 와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초감각적ㆍ비물질적인 구조를 생각하는 것을 형이상학의 일부분으로서 존재론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의미에서는 현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그 근저에 있는 본체에 관한 연구라는 뜻으로 '본체론'이라 불렀다. 이 본체론을 조직화한 인물이 18세기 초의 볼프(Wolff)였다. 이것은 모든 경험적 과학으로부터 단절되어 개념의 추상적인 연역에서 존재의 여러 성질을 도출해 낸다(존재ㆍ가능성과 현실성ㆍ양과 질ㆍ실체와 속성 따위 개념의 사변적 논의). 이 본체론은 칸트에 의하여 이성의 무제한적인 사용에 의한 '독단론'이라고 하여 배척받았는데, 그 후 독일 고전철학은 새로운 형이상학으로서의 존재론을 만들어냈다.이것은 헤겔(G.W.F. Hegel)에 의하여 존재론ㆍ논리학ㆍ인식론을 통일한 형태로 제시되어, 그가 완성시킨 것은 아니지만 존재론이라는 사변적인 철학적 구상에서 탈피하여 세계에 관한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지식과 결부된 철학상의 고찰의 길을 열었다. 이런 경향은 그 이전에도 홉스(T. Hobbes), 스피노자(B. de Spinoza), 로크(J. Locke) 또는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자들이 경험과학에 기초한 학설을 세운 것에서 사변적인 존재론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새로운 존재론이 제창되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가톨릭 철학자들에 의해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을 새로운 형태로 부흥시키려는 시도(☞ 신(新)스콜라주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순수의식의 본질학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론, 그것을 계승한 하이데거의 변증법적 인간존재를 단서로 하여 존재하는 것을 해명하려고 하는 기초 존재론, 또한 신(新)칸트주의에서 출발한 n.하르트만이 인식론의 근저에는 존재론을 필요로 한다고 하여 주창한 비판적 존재론, 그 외에 현상학에서 도출된 사르트르의 존재론 등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존재론같이 경험과학에서 유리된 것을 철학의 특수부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Q. 요즘은 왜 복덕방이라고 안하고 공인중개사라고 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복덕방은 '부동산 (중개사무소)'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뜻으로 생소한 것이 있네요'인심이 좋은 주인집을 이르는 말' 20세기 초 대도시, 특히 서울과 평양 등에서 부동산중개를 하던 '가쾌'들이 모여 만든 사무실이 바로 복덕방입니다.초기 복덕방은 밑을 여러 갈래로 가른 누런 삼베를 간판으로 했는데누런 삼베는 복이 잘 붙고 오래 갈 수 있다는 뜻이고 밑을 가른건 출입하기 편하라는 의도입니다.당시 주로 노년층이 모여 소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말 그대로 복덕방은, 복(福)과 덕(德)이 있는 곳인 것이죠.복덕방은 영어로 'real estae agency' 입니다.말 그대로 '부동산 중개소'죠. 본업과 따뜻한 우리네 일상이 뒤엉킨 우리의복덕방과 달리, 서구의 복덕방은 이성과 자본 만이 존재하는 경제행위의 장소인 것입니다.1970년 대 본격적으로 강남개발이 이루어집니다. 돈과 폭력으로 점철된 것이죠.실제로도 그 정도였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이후 복덕방은 00부동산,00개발로 많이 바뀌는데요1984년 부동산 중개업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복덕방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부동산의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1984년 이후 큰 틀에서의 복덕방 뜻과 인식은 현재까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다만 '복덕방'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입에 오르고 '부동산'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복덕방 문화를 계승했지요부동산 중개인과 동네 아주머니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MZ세대 중 M세대 해당하는 제게도 익숙하고 여전히 드물지 않게 보입니다.
Q. 조선시대에는 청자가 만들어지지 않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니요 조선시대에도 만들었습니다.조선청자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푸른색 자기를 말한다. 조선초기에 비색청자와 상감청자가 일정하게 생산 이용된 것은 최근에야 비로소 알려졌다. 조선청자는 잿빛도는 푸른색이 많기는 하지만 고려청자의 부드러운 푸른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일부 그릇은 고려청자보다 맑고 아름답다. 또한 버들, 물새, 학, 매화, 국화, 물고기, 용, 연꽃, 봉황 등 상감무늬에서도 고려청자의 무늬와 같고 그 구도도 비슷하다.조선청자는 이와 같이 고려청자와 일련의 계승적인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그와 다른 특징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조선청자가 형태에서 맵시 있고 날씬하지는 못하나 듬직하고 소박한 것이며 굽이 낮으면서도 밑이 퍼진 형태는 고려청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제작수법으로 백자의 바탕흙에 청자유약을 바르고 상감을 위주로 하면서 무늬를 낮은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것 등은 고려청자와 차이나는 점이다. 조선청자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구름, 학무늬청자상감귀대’, ‘용무늬청자상감소반’, ‘어룡무늬청자상감병’, ‘국화무늬청자상감향로’, ‘구름돋을무늬청자바리’ 등을 들 수 있다.여러 가지 자료들은 조선자기가 바로 고려자기를 계승한 것이며 특히 조선 전반기의 청자는 곧 고려청자를 계승한 것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고 있다. 그것은 조선 전반기의 가마터들에서 청자기들이 적지 않게 드러난 데서 알 수 있다. 경기도 광주는 조선시대 자기생산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최근에 이 지방에서는 조선초기에 구어낸 순백자, 석간주백자, 청화백자와 함께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들이 드러났다. 광주군 반천리, 도마리, 우산리, 무갑리, 쌍령리, 도수리 등지의 가마터들에서 10여 점의 청자가 알려졌다.청자 가운데는 백자바탕흙 위에 청자유약을 바른 것과 청자바탕흙 위에 청자유약을 바른 것이 있고 그릇모양과 무늬는 고려청자를 닮은 것이 있다. 이것은 조선청자가 고려청자를 계승하면서도 백자가 생산 보급되면서 그 형태와 장식무늬를 본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17세기 초엽에 대전(왕이 거처하는 궁전)에서는 백자를 쓰고 동궁(왕세자가 거처하는 궁전)에서는 청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궁중에서 백자와 함께 청자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Q. 고려 박진이란 인물은 어떠한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에 따르면 고려 현종은 몽진 행렬이 50명 남짓이었는데, 활까지 쏘는 도적들을 막아가며 힘겹게 몽진하다가 오늘날 양주시 일대에 해당하는 창화현에 이르른다. 이 곳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향리(아전)가 현종의 도움을 문전박대 및 면전에서 하대, 능욕하고, 강조의 남은 일파가 하공진을 필두로 남하하여 현종을 인질로 삼으려 한다는 거짓정보를 주어 행렬을 더 와해시킴과 동시에 현종과 왕후가 떨어지게 하고, 야간에는 적도들을 풀어 행렬을 급습해가며 살해 시도, 산에 흩어져 숨은 왕의 행렬을 수색해 잡으려 하기까지 했다.이때문에 현종 행렬은 몽진 7일차까지 40km가량밖에 남하하지 못해서, 거란 추격군이 걸어서 수 시간 거리까지 좁혀지기까지 했다. 이때 지채문이 현종을 배신하거나 하공진이 사신으로 거란군 진영에 가서 교섭 명목으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현종 일행은 거란군에게 잡혔을 수도 있었다. 해당 아전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사료에 나오지 않고 있어서 불분명하다.박진이란 인물은 지방 호족으로 기록은 되어 있으나 정확한 일을 알기에는 어렵습니다.
Q.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왜 유명한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원전 1800년경 서방에서 셈 족인 아무르(아모리)인이 메소포타미아에 침입해 바빌론을 수도로 정하고 전제적인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제6대 왕이 바로 유명한 함무라비(재위 전 1724~1682)이다. 함무라비 왕은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하고, 법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는 교역을 장려하고 운하와 큰 건축물을 지었으며, 농산물 증산에도 힘썼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에서 서쪽 오아시스 지대를 거쳐 지중해 동해안에 이르는 활 모양을 한 농경 지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라 하는 기름진 곳이다.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이 제정되다20세기 중반까지 최초의 성문법으로 일컬어졌던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은 20세기 초 프랑스 학자 드 모르갱에 의해 서부 이란의 페르시아 만 수사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전 282조 중 제196조에는 '만일 사람이 평민의 눈을 상하게 했을 때는 그 사람의 눈도 상해져야 한다', 제200조에는 '만일 사람이 평민의 이를 상하게 했을 때는 그 사람의 이도 상해져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同害) 복수법에 기초한 형벌법으로서, 타인의 눈을 상하게 한 사람은 자기 눈도 상해져야 하고, 부모를 구타한 아들은 그 손목이 잘려져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