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당태종 이세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26년 7월3일 형과 아우를 죽인 '현무문의 변'으로 태자가 되다“대형(大兄)!” 벽력처럼 부르짖는 소리에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신무장을 하고 자신들을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고 있는 둘째를 본 맏형은 어쩔 줄을 몰랐고, 옆에 있던 넷째가 재빨리 활을 들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손이 떨려, 세 발이나 목표를 빗나갔다. 그 사이에 둘째가 침착하게 쏜 화살이, 맏형의 목을 꿰뚫었다.그의 즉위 과정은 지저분했으나 통치는 길이 빛을 남겼다친형을 살해한 둘째가 고함을 지르며 말을 탄 채 달려들자, 그를 따르는 부하들도 칼을 뽑고, 활을 쏘았다. 넷째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지만 이를 부드득 갈며 다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데려온 호위병들과 둘째의 병사들이 뒤엉켜져 싸우는 소리가 어스름한 새벽의 공기를 뒤흔들었다.그 순간 못 믿을 일이 일어났다. 둘째가 타고 있던 말이 사납게 날뛰는 바람에 둘째가 그만 땅바닥에 굴러 떨어진 것이다.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귀신 같은 모습의 넷째가 달려왔다. 주먹다짐이 벌어지고, 어느새 넷째는 둘째의 몸 위에 올라타서는 있는 힘을 다해 형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그러나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용맹함이 짝이 없는 용사, 울지경덕이 달려들고 있었다. 넷째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달아나려 했지만, 울지경덕의 화살이 더 빨랐다. 얼마 후. 울지경덕은 두 형제의 목을 잘라서 높이 휘두르며 싸우고 있던 적병에게 투항을 종용했다. 차차 싸움이 그치고, 아직도 아픈 목을 어루만지며, 둘째는 자기편 병사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세민, 28세. 이제 천하가 그의 손 안에 있었다.유방과 조조의 기량을 한 몸에 갖춘 인물한, 송, 명, 청···. 오랜 중국사에 수많은 왕조가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그 중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왕조는 당이다. 원이나 청에 비해 “한족의 왕조”라는 정체성이 있고, 송나라 못지않은 문물을 이룩한 데다 명나라 이상의 국위를 떨쳐, 당시 이슬람제국과 함께 세계 2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왕조가 당이기 때문이다. 그런 당나라를 만든 주인공이 다름 아닌 태종 이세민이다. 그의 연호인 ‘정관(貞觀)’에서 딴 “정관의 치”는 오랫동안 신화적인 이상정치의 시대인 “삼대(三代)” 다음 가는 최고의 태평성대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626년 7월 2일 벌어지고, 7월 5일 이세민이 황태자에 책봉됨으로써 마무리되는 “현무문의 변”이 필요했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의 둘째아들이었던 이세민은 여기서 태자인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죽이고 부왕을 위협하여 태자 자리를 쟁취했다.이세민은 599년 1월 23일 태어났다. 아버지 이연은 북주와 수나라에서 대대로 대장군을 지내고 당국공으로 봉해진(당이라는 국호는 여기서 나왔다) 명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두씨는 선비족의 귀족이었다. 16세에 장교가 되어 18세부터 십 년이 넘게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617년, 아버지를 따라 태원 지방에 있던 이세민은 수양제의 실정으로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지는 상황에서 거병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당이 천하를 차지하기까지 7년 동안 크게 여섯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이세민이 그 중 네 차례를 이끌어 모두 승리하였다. 맏형 이건성도 앉아만 있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형제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적진에 뛰어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당의 건국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이세민이었다. 그러나 적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에 밀려 황태자 자리는 이건성에게 돌아갔고, 이세민은 진왕에 봉해졌다.나중에 다소 미화되었을지 몰라도, 이세민의 인물됨은 실로 출중했다. 어떤 사람은 그를 “한고조 유방과 위무제 조조의 기량을 한 몸에 갖췄다”고 평가했다. 유방의 호탕함과 뛰어난 용인술, 거기에 조조의 지모와 용병술을 갖췄다면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지도자가 아닌가. 그런 인물이 옆에 있으니 황태자 이건성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세민 역시 그만한 기량을 갖고 옥좌가 탐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상대를 헐뜯고 모함하는 한편 장군들에서 후궁들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갖은 애를 썼다. 태자의 신분이면서도 불리해 보이던 이건성이었으나 넷째 이원길과 결탁하면서는 오히려 이세민이 불리해지는 듯했다. 마침내 이원길이 이세민 편의 핵심 세력을 해체하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아버지인 황제의 허락까지 받아내자, 이세민은 더 기다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626년 7월 1일에 “태자와 원길이가 부황의 후궁들과 은밀한 관계입니다”는 밀고를 하고, 이에 노한 황제가 두 사람을 궁궐로 불러들인 것을 기회로 궁궐의 현무문에서 두 사람을 습격해 죽였던 것이다. 이를 “현무문의 변”이라 한다.정관의 치형제의 피를 뒤집어쓰며 옥좌에 앉은 당태종 이세민. 그러나 그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곧잘 평가되는 이유는 그런 과정을 거쳤을지언정 훌륭한 정치를 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우선 교만하지 않았다. 28세라는 한창 나이에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니 마음을 턱 놓고 권력과 사치에 잠길 만도 하건만, 태종은 반대로 근검절약을 생활화하고 황족과 대신들도 이를 본받도록 했다. 또 사람 쓰는 일에 신중했고 교묘했다. 한고조나 명태조는 천하를 손에 넣기까지 함께 애써온 개국공신들을 남김없이 숙청해서 그들이 황실을 위협하지 못하게 했다. 반대로 조선의 세조는 공신들을 극진히 대접하다가 훈구파들이 좌지우지하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당태종은 공신들을 변함없이 존중하는 한편, 문벌은 약해도 실력이 뛰어난 인재들을 계속 발굴해서 원로 공신들과 균형을 맞췄다.그리고 무엇보다 당태종은 애써 천하를 통일했으나 2대만에 멸망한 수나라의 예를 거울삼고, 집권 과정에서 흘린 형제의 피를 잊을 수 있도록 진정한 제왕의 정치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그는 철이 들 무렵부터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무인의 삶을 살았으나, 태자로 책봉되고부터는 당대의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책에 묻혀서 살았다. “천하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만인의 것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을 정치의 근본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황제가 된 뒤에도 자신이 혹시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가차없이 지적하도록 간언을 장려했다. 여기서 가장 신랄하고 적절한 간언을 하여 ‘쓴소리의 황제’로 올라선 사람이 위징이다. 위징은 본래 이건성 쪽 사람이었으나, 당태종은 그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통렬히 꾸짖도록 했던 것이다. 한 번은 태종도 위징의 꼬장꼬장함에 진력이 나서 “저 늙은이를 죽이고 말 테다!”고 소리쳤지만, 황후의 간언을 듣고 취소했다고 한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대의에 따르는 황제, 자신의 열락보다 백성의 살림살이에 더 관심을 가지는 황제. 남북조 시대와 수양제 시대에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자기 배를 불리는 일에만 급급한 왕후귀족들을 질리도록 봐온 백성들에게 이는 가뭄 끝의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당태종은 내치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외치에도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한나라 말기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을 유린했으며, 특히 최근 백여년 간은 돌궐의 세력이 막강했다. 부황인 당고조도 돌궐에 사실상 신하 노릇을 하며 몸을 낮춰야 했다. 그러나 당태종은 돌궐의 분열을 최대한 유도한 끝에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공격, 힐리가한을 포로로 잡아버렸다. 또 서방의 토욕혼, 서남의 토번 역시 무찔렀고, 멀리 서역의 고창, 구자까지 정복했다. 사실 당태종 본인도 선비족 과의 혼혈이므로 북방민족다운 성격이 없지 않았지만, 실로 수백 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 앞에 수세를 면치 못한 한족 왕조가 공세로 돌아섰던 것이다. 당태종은 귀순한 북방민족에게서 ‘ 천가한 (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의미였다.당태종은 제도의 정비와 문화의 창달에도 힘썼다. 10년의 노력을 들여 마련한 율령은 ‘당률’이라고 해서 이후 신라, 일본 등 ‘동양 문화권’의 정치제도의 근간이 된다. 또 도교와 불교가 지나치게 유행해서 귀족들의 방종을 낳았다고 보아, 를 편찬하고 과거제를 강화하는 등 보다 금욕적인 유교를 장려했다. 당태종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직접 서법 서적을 짓기도 했으며, 따라서 전국적으로 서예가 크게 발전했다. 또 음악과 무용에도 관심을 보여 한족과 북방민족의 예술을 종합한 새로운 예술을 창시했다.두 가지 실수, 고구려와 후계자 선정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쌓은 당태종도 평화로운 세월이 계속되자 그만 말년에는 해이해졌던 것 같다. 신하들의 간언도 잘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위징이 죽은 뒤로는 그런 성향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결국 두 가지의 큰 아쉬움을 남기고 마는데, 하나는 후계자 선정이었다. 당태종은 맏아들 이승건을 황태자로 세웠지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황제가 된 아버지와 달리 태평세월을 만난 여유 때문이었는지 방탕으로 날을 지새더니 끝내는 황제 자리에 일찍 앉으려고 역모까지 꾸몄다. 그를 내쫓은 당태종은 평소 아끼던 넷째아들 이태에게 태자 자리를 주려고 했으나, 처남인 장손무기를 비롯한 원로들이 이태의 비리를 들추며 아홉째 이치를 미는 바람에 결국 그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원로들이 이태보다 재능이 많이 떨어졌던 이치를 밀었던 이유는 어린 황제 뒤에서 국정을 농단하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늙은 당태종은 젊어서라면 결코 넘어가지 않았을 수에 걸려 재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대업을 맡겼고, 태종을 이은 고종은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에게 의지하면서 한 차례 왕조가 단절되는 사태를 초래한다.그리고 결정적으로 고구려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태종은 역사에 길이 체면을 구기고 자신의 명까지 재촉하고 만다. 태종으로서는 수양제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자신이 이룬다는 생각을 했겠고, 서, 남, 북으로 모두 ‘오랑캐’를 복속시켰는데 유독 고구려만 당나라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수양제 때에 비하면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더 충실하게 준비된 것이었다.평생 전쟁에 져 본 적이 없었던 당태종의 용병술도 다시 한 번 빛났다. 그러나 “성을 함락시키면 사내들은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불필요한 말로 안시성 의 항전 의지에 기름을 부었음을 보면 당태종은 왕년의 신중함과 치밀함을 많이 잃고 있었던 것이다.이 싸움에서 태종이 화살을 맞고 눈 하나를 잃었다는 것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데, 오래 떠돌던 풍문을 고려 말의 이색 등이 전하고 있다. 아무튼 그가 고구려에서 참패하고는 퇴각하면서 얻은 병에 오래 시달리다 649년 7월 10일, 5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것은 사실이다. 죽기 전 그는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는 방현령의 간언을 물리친 일을 후회하며, 태자에게 고구려 침공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어용 역사'와 신하들의 반격당태종이 중국사에, 아니 동양사에 남긴 영향 중 하나는 역사서를 국가적 사업 차원에서 편찬하는 관행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중국의 역사책은 사마천의 , 반고의 , 진수의 처럼 개인이 연구하여 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당태종은 학문 연구 기관인 홍문관에서 , , 등 여덟 권의 과거 왕조 역사서를 편찬하게 했으며(‘중국 24사’중 삼분의 일에 해당한다), 역사 기록의 주체를 개인에서 국가로 옮겼다. 이는 풍부한 자료를 활용하고 특정 개인의 사상에 치우치지 않은 역사가 나오게도 했지만, 한편으로 역사의 ‘어용화’ 경향도 나타났다. 사마천은 자신을 처벌한 한무제의 비리와 약점을 낱낱이 역사에 적는 등 서슴없이 ‘직필’을 휘둘렀다. 하지만 황제가 지휘하는 역사 기록 과정에서는 사관들이 꿈에라도 그런 비판을 시도할 수 없었고, 당나라의 개국 명분을 살리려고 수나라의 실정을 과장하거나, 당태종을 띄우기 위해 ‘현무문의 변’ 같은 사건 기록을 변조하는 등의 왜곡마저 저질러야 했다. 지금 전해지는 중국역사서와 그것을 본뜬 의 기록만으로 삼국시대의 실체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이렇게 황제와 왕조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을 할 수 없게 된 개인들, 즉 지식인들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역사 대신 정치론에서 제왕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다. 당태종의 정치의 요체를 담았다고 여겨져 온 이 책은 당태종 사후 50년쯤 뒤에 오긍이 저술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 ‘사치에 빠지지 말고 사사로운 욕심을 없앨 것’, ‘충신들을 곁에 두고 간신을 물리칠 것’ 등인데, 결국 요약하면 “(현명한)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야 좋은 임금”이라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정치론이고, 당태종의 실제 정치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임금은 아무것도 아니고 신하들이 얼마나 잘 하는지에 따라 좋은 정치가 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신하 입장에서만 정치를 보았다고 하겠다. 이런 정치론은 주자학의 시대가 되면서 더욱 강화된다. 주자로 불리는 주희는 “당태종이 한 일은 모두가 사리사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며 당태종을 잊고 고대의 신화적인 명군인 요, 순을 받들라고 했다. 이런 성향은 본고장 중국보다도 주자학에 충실했던 조선에서도 받아들여져, 조선왕조에서 정치를 논할 때 당태종이 거론되면 “유교를 장려한 점과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점은 훌륭했다” “그러나 형제를 죽이고 말년에는 사치를 일삼았으니 위대한 군주는 아니다”는 식의 평가가 늘 정답이었다. 용감한 무인이자 전략가였던 당태종, 유방과 조조의 재능을 가졌던 당태종의 진가를 평가하기에는 지나치게 인색한 게 아니었을까?
Q. 나폴레옹은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대 프랑스에서는 국가의 영웅이라는 찬사와 나라를 전쟁으로 이끈 전쟁광이라는 비난이 공존하고 있는 논란의 대상이다.허나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봉건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종식시킴과 동시에 프랑스 혁명 이후 극도로 불안정했던 프랑스의 정국을 안정시키고 근대 유럽의 시작을 알리며 시대의 흐름을 넘어 미래를 내다본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만든 《나폴레옹 법전》으로 현재도 《대륙법》체계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 프랑스 법률 체계는 고대 로마로부터 잔존한 《로마법》의 잔재를 기초로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는 《교회법》이나 지방의 《관습법》이 통용되고, 거기에다가 왕이 공표하는 칙령이 뒤섞인 아주 복잡한 구조였다. 단지 복잡하기만 한 게 아니라 너무나 방대하고 지방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걸 전부 다 《나폴레옹 법전》 한방으로 완전히 갈아엎어 버렸다. 또한 이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으로 절대왕정의 요람이던 유럽에 시민 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폴레옹 법전》은 현재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대왕의 《함무라비 법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편찬된 《로마법대전》과 더불어 세계 3대 법전으로 불리고 있으며 나폴레옹 본인도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에 걸친 전쟁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민법전을 말살할 수 없는 데 있다."며 한때 전 유럽을 군사적으로 제패한 것 보다《나폴레옹 법전》편찬을 더욱 자랑스러워 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의 구성과 기본 논리는 모두 《나폴레옹 법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그리고 가문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관료제를 확립하고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근대적 엘리트 육성 교육 제도인 그랑제콜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 지적법(Napoleon's Cadastre)을 제정하여 토지 측량 및 관리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근현대적인 지적 측량 및 부동산 등기 체제의 효시를 세웠다. 또한 현대 정치 체제의 근간인 정교분리 역시 나폴레옹 시대에 비로소 완전히 확립된 것이다.군사 면에서도 기동력을 중시하고 국민군의 전투력을 애국심의 고취로 끌어올리는 등 19세기 전쟁의 개념과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지금도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즉, 단순히 잘 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개념과 방식 자체를 바꿔 버린 인물이라는 것.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대륙 봉쇄령으로 물가를 최고점으로 끌어올리는 등의 결과로 당시 최강국으로 성장했던 영국을 얼어붙게 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영국의 경제력은 동원 가능한 재원 기준 나폴레옹 프랑스의 거의 10배에 가까웠다. 쇼미더머니를 치고 끝까지 나폴레옹을 잡으려고 든 영국의 경제력이 사기였다.그의 몰락을 기회삼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등 유럽의 구(舊) 세력들은 유럽을 프랑스를 혁명 이전의 구(舊) 체제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폴레옹 몰락으로부터 한 세기 만에 19세기 중후반 유럽은 각종 혁명이 발발하며 나폴레옹의 비전은 대부분 실현되고 유럽 대부분 국가의 왕정, 제정 체제는 붕괴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도입한 법률과 제도 역시 워낙 각 국가들의 사정에 잘 맞게 짜여져 있던 까닭에 나폴레옹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안달이던 그의 정적들조차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폴레옹이 근대 유럽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폴레옹의 역사적 위치는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에게 영향을 주어 영웅이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간다는 영웅사관을 창시할 정도였다. 즉, 한 사람의 어마어마한 존재감 때문에 역사를 보는 관점마저 영향을 받았다.나폴레옹은 백일천하 동안 불리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여 "자유 제국"을 약속했다. 짧은 지배기간 때문에 사실상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몰락 이후 "내가 그런 헌법 만든다고 시간이나 낭비했다니! 어차피 다시 유럽의 지배자가 되면 전부 없애버릴 의회였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그래도 이 약속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 황제"라는 하나의 환상을 추가했다. 특히 부르봉 왕조 복고 왕정의 무력함과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려는 퇴행성은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켰고 결국 군국주의와 내셔널리즘, 자유주의, 혁명과 일인 독재가 결합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프랑스 특유의 기묘한 정치사상을 만들게 된다.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보나파르티즘을 통해 권력을 획득했고, 나폴레옹 3세까지 몰락한 뒤에도 그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국가 내 계급과 출신 배경에 따른 봉건적 사회적 차별 관계를 시민 개병제를 통해 평등하게 만들고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회적 비전을 강력한 1인 군사 독재자의 권위를 통해 이룩하자는 얼핏 보면 진보적이면서도 그 방법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풍조는 19세기, 20세기 들어 유럽, 나아가 세계사 전반에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해왔다. 20세기 전간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군사정권, 내셔널리즘과 평등 사상이 기묘하게 결합된 파시즘, 박정희나 장제스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소위 스트롱맨 군사 독재자들, 극우적 내셔널리즘과 과격한 평등주의를 설파하며 하층 대중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21세기의 우파 포퓰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보나파르티즘의 영향을 받은 사상들은 근대 세계사 속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풍조로서 굳어졌음을 볼 수 있다. 사실상 현대의 독재자의 기준을 만든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후술하겠지만 독재자들에게 있어 나폴레옹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초기의 공화정이나 무기력하고 퇴행적인 부르봉 왕조의 복고 왕정과 비교해 보면 나폴레옹 시대는 문제도 많았지만 분명 영광과 번영이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번영은 무수한 전쟁을 통해 주위 나라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며 일구어낸 것인 만큼 무작정 칭송하기는 곤란하다. 나폴레옹이 법전의 완성을 위시하여 여러 선구자적 정책들을 도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사회의 난맥상은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것들이었다. 결국 정부 재정의 문제나 당대 사회의 혼란들을 해결한 것은 그런 선구자적 정책이나 제도 개혁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승리였다. 그 승리가 계속되었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지만 지속적인 전쟁은 착실히 국력의 소모를 불러왔고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너무나 쉽게 몰락했다.
Q. 조선시대때 한성부는 어떤 조직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의조선왕조 수도(首都)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내용따라서 한성부(漢城府)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392년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개경(開京)에서 한양부(漢陽府)로 수도를 옮기고 그 다음해인 1395년 한양부를 한성부라고 이름을 고쳤다.한성부는 1910년 경성부(京城府)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515년간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부분의 중심지였다.한반도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한성은 북쪽에는 백악산(白岳山), 남쪽에는 목멱산(木覓山), 동쪽에는 낙타산(駱駝山), 서쪽에는 인왕산(仁王山) 등의 내사산(內四山)과 저 멀리 북쪽에는 북한산(北漢山), 남쪽에는 관악산(冠岳山), 동쪽에는 수락산(水洛山), 서쪽에는 덕양산(德陽山)의 외사산(外四山)으로 겹겹이 둘러 싸여 있다.또한 금강산(金剛山)에서 발원하는 북한강(北漢江)과 오대산(五臺山)에서 발원하는 남한강(南漢江)이 유유히 흐르면서 한강을 이루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한성부는 국토의 중앙지요, 천연의 요새지일 뿐만 아니라 수륙(水陸)교통이 편리하여 한 국가의 수도가 갖추어야 할 자연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한편 1394년 11월 29일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한 이성계는 백악산(白岳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국왕이 거주하며 국가를 통치할 궁궐을 건설하고 궁궐 왼쪽에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宗廟), 오른쪽에는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건설하였다.종묘 동북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모시는 문묘(文廟)와 학생들을 교육하는 성균관을 건설하였고, 궁궐 앞에는 의정부를 비롯하여 이조 · 호조 · 예조 · 형조 · 병조 · 공조 등 육조와 한성부 및 그 밖의 각 관서를 좌우로 건설하였다.이어 백악산 · 인왕산 · 목멱산 · 낙타산을 연결하는 높이 약 8.5m, 둘레 59,500척(약 18㎞)의 도성(都城)을 건설하고 흥인지문(興仁之門) · 돈의문(敦義門) · 숭례문(崇禮門) · 숙청문(肅淸門: 뒤에 肅靜門으로 고침) 4개의 대문(大門)과 혜화문(惠化門) · 소의문(昭義門) · 동소문(東小門) · 창의문(彰義門) 4개의 소문(小門)을 건설하였다.그리고 오늘날 세종로 1번지를 기점으로 동 · 서 · 남 · 북으로 대로(大路)를 내고 도로의 좌 · 우 · 전 · 후에는 민가를 건설하였으며 5부(五部) 52방(坊)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수도의 면모를 갖춘 한성부에는 치안을 유지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종로 네거리에 종각(鐘閣)을 짓고 종을 달아 아침 4시 경에 파루(罷漏:33번 종을 침)를 쳐서 4대문과 4소문을 활짝 열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통행하게 하고 저녁 10시 경에 인정(人定:28번 종을 침)을 쳐서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였다.한성부의 관할구역은 도성에서부터 10리까지로 하였다. 관할구역의 한계를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으나 대체로 동쪽으로는 오늘날 우의동 · 번동 · 장위동 · 석관동 · 이문동 · 전농동 등으로 연결지어진 곳으로 하였다.남쪽으로는 중랑천에서 흐르는 물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한강을 경계선으로 하였으며, 서북쪽으로는 망원동 · 남가좌동 · 역촌동 · 대조동 · 북한산 비봉(碑峰)으로 연결되는 선으로 하였으며, 북쪽으로는 비봉에서 북한산 동쪽 능선으로 하였다.한성부 관할구역 내에는 조선 전기인 1428년(세종 10)경에는 109,372명(도성안 103,328, 도성밖 6,044)의 부민이 거주하였고, 조선 후기인 1780년(정조 4) 경에는 38,742호에 201,070명의 부민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350여 년 만에 인구는 거의 배가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한성부민을 관할하였던 한성부 관아의 규모는 172간이었고, 정규직 관원으로는 정2품의 한성판윤을 비롯하여 종2품의 윤(尹) 2인, 정4품의 소윤(小尹) 2인, 종5품의 판관(判官) 2인, 정7품의 참군(參軍) 2인 등 모두 9인의 관원이 있었다.1469년(예종 1)에는 종2품의 윤을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으로 분리하는 한편, 소윤 2인은 없애고 종4품의 서윤(庶尹) 1인을 새로 두고 참군 2인을 3인으로 증가시켰다. 따라서 한성부 관아 총관원수 9인에는 변동이 없었다.그러나 1686년(숙종 12)에는 참군 1인을 감원하여 2인이 되었고, 1725년(영조 원년)에는 주부(主簿) 1명을 새로 배치하는 대신 참군을 1명으로 감원하였다가 1764년(영조 40)에는 참군을 모두 없애고 주부가 1인 증가하여 2인으로 되었다.1395년부터 1686년까지 한성부 관원은 모두 9인이었고 1686년에서 1887년까지 200년 간 한성부 관원수는 모두 8인이었으나 1887년(고종 24)에 서윤을 폐지함으로써 한성부 관원은 7인이 되었다.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조선왕조의 모든 관제가 개편되고 관리의 명칭이 변경되면서 한성부의 최고책임자인 판윤은 부윤(府尹)이라고 하였다가 다음해인 1895년에는 관찰사(觀察使)라고 하였다.이후 윤(尹) · 부윤 등으로 불리어졌고 하급관원의 명칭도 주사(主事) · 참서관(參書官) · 사무관(事務官) · 기수(技手) 등의 명칭으로 불리어졌다.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기 직전의 한성부의 관원은 부윤 1인, 사무관(事務官) 2인, 주사(主事) 15인, 기수(技手) 10인 등 모두 33인이었다. 그리고 한성부 관아에는 정규직 관원 이외에 이속(吏屬)들이 있었다.서리(書吏) 41인, 호적서원(戶籍書員) 11인, 서사(書寫) 1인, 소차서리(疏箚書吏) 3인, 대령서리(待令書吏) 1인, 고직(庫直) 1인 등 58인의 이서(吏胥)와 사령(使令) 47명, 구종(驅從) 14명, 군사 7명 등 68명의 도예(徒隷)가 있었다.따라서 한성부 관아에는 대체로 판윤을 비롯한 정규직 관원 7∼9인과 이서 58인, 도예 68명 등 모두 130여 명이 있었다. 한성부 관아의 하부직제로는 육방제도(六房制度)가 있어 각기 담당 업무를 관할하였다.이방(吏房)은 주로 관원의 인사업무, 호방(戶房)은 가사업무(家舍業務)와 호적업무 · 재정업무, 예방(禮房)은 주로 간택과 산송업무, 형방(刑房)은 주로 시신(屍身)의 검안업무(檢案業務)와 여가(閭家) 침입 금지업무, 병방(兵房)은 궁성(宮城)과 도성을 순찰하는 좌경(坐更)업무와 금화(禁火:소방)업무, 공방(工房)은 도로관리와 보수, 개천과 교량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한성부의 관할구역은 크게 중부(中部) · 동부(東部) · 서부(西部) · 남부(南部) · 북부(北部)의 5부(五部)로 나누고 다시 동부는 연희방(燕禧坊) · 숭교방(崇敎坊) · 천달방(泉達坊) · 창선방(彰善坊) · 건덕방(建德坊) · 성덕방(聖德坊) · 서운방(瑞雲坊) · 연화방(蓮花坊) · 숭신방(崇信坊) · 인창방(仁昌坊) · 관덕방(觀德坊) · 흥성방(興盛坊) 등 12방이 있었다.서부는 영견방(永堅坊) · 인달방(仁達坊) · 적선방(積善坊) · 여경방(餘慶坊) · 인지방(仁智坊) · 황화방(皇華坊) · 취현방(聚賢坊) · 양생방(養生坊) · 신화방(神化坊) · 반석방(盤石坊) · 반송방(盤松坊) 등 11방이 있었다.남부는 광통방(廣通坊) · 호현방(好賢坊) · 명례방(明禮坊) · 대평방(大平坊) · 훈도방(薰陶坊) · 성명방(誠明坊) · 낙선방(樂善坊) · 정심방(貞心坊) · 명철방(明哲坊) · 성신방(誠身坊) · 예성방(禮成坊) 등 11방이 있다.북부는 광화방(廣化坊) · 양덕방(陽德坊) · 가회방(嘉會坊) · 안국방(安國坊) · 관광방(觀光坊) · 징청방(澄淸坊) · 순화방(順化坊) · 명통방(明通坊) · 준수방(俊秀坊) · 의통방(義通坊) 등 10방이 있다.중부는 정선방(貞善坊) · 경행방(慶幸坊) · 관인방(寬仁坊) · 수진방(壽進坊) · 진정방(鎭定방) · 장통방(長通坊) · 서린방(瑞麟坊) · 견평방(堅平坊) 등 8방으로 모두 52개의 방으로 나누어서 관할하였다.5부장으로 관령(官領)이 있고 대장(隊長) · 대부(隊副) · 체아(遆兒) 등의 이속(吏屬)이 있어 업무를 처리하였고 방에는 방장(坊長)이 있어 업무를 처리하였다.사법권과 행정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한성부 치안은 특별한 기관에서만 담당하였던 것이 아니고, 여러 기관에서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순군만호부를 비롯하여 한성부 · 의금부 등에서 담당하였고 포도청이 설치된 이후에는 포도청과 아울러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다.포도청은 좌포도청(左捕盜廳)과 우포도청(右捕盜廳)을 설치하였다. 좌포도청은 세종로(현 동아일보 자리)에 설치하였고, 우포도청은 종로 3가(현재 단성사 자리)에 설치하였다.포도청에는 포도대장을 비롯하여 포도군관 · 부장 · 군사 등 좌포도청 111인, 우포도청 111인 모두 222인의 인원이 있어 한성부 치안을 담당하였고 조선 말기 고종대에는 좌 · 우포도청의 인원이 286인이나 증가되었다.조선 전기에는 좌포도청이 한성부의 동부 · 남부 · 중부와 경기좌도 일원의 치안을 담당하였고, 우포도청에서는 한성부 서부 · 북부와 그리고 경기우도 일원의 치안을 담당하였다.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경기도 일원은 제외되고 한성부 관할구역의 치안만을 담당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 · 금위영(禁衛營) · 어영청(禦營廳)의 3군문(三軍門)이 한성부 치안의 일부를 담당하였다.3군문은 원래 도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도성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서 도성경비를 하였으나 뒤에 한성부 내 치안도 담당하였다. 각 군문에서는 주로 밤에 순찰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초관(哨官:장교) 한 사람이 대체로 2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찰하면서 주로 금도(禁盜: 도적을 미리 예방함) · 금화(禁火)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또한 한성부 치안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경수소(警守所)가 있었다. 경수소에서는 보병 2명이 부근 방리인(坊里人) 5명을 거느리고 궁(弓) · 검(劍) · 장(杖)을 휴대하고 숙직하였다. 이는 군과 민이 합동으로 치안을 담당하였던 것으로서 한성부 내에는 100여 개가 있었다.한성부 52방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세종 때에는 서부의 영견방 · 인지방 · 취현방의 3개 방이 폐지되어 49개 방으로 되었다.1751년(영조 27)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 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는 동부 12개 방에서 6개 방(연희방 · 천달방 · 덕성방 · 서운방 · 관덕방 · 흥성방)이 폐지되었고, 남부에는 3개 방(성신방 · 정심방 · 예성방)이 폐지되고 새로 3개 방(한강방 · 둔지방 · 두모방)이 신설되었으며, 서부에는 1개 방(신화방)을 폐지하고 2개 방(용산방 · 서강방)을 신설하여 8개 방에서 9개 방이 되었다.북부에는 명통방을 폐지하여 9개 방에서 8개 방이 되었다. 따라서 영조 때 한성부 5부의 방은 동부 6개 방, 남부 11개 방, 서부 9개 방, 북부 9개 방, 중부 8개 방 등 모두 43개 방이 되었다.1867년(고종 4)에 간행된 ≪육전조례 六典條例≫에는 동부에 경모궁방이 신설되고 북부에 상평방 · 연은방 · 연희방이 신설되어 4개 방이 증가되었고, 방 밑에는 340개의 계(契)가 설치되었다.1894년 갑오개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할 때 한성부 5부(五部)를 5서(五署)로 개칭하였고, 계를 288개로 줄이고 775개의 동(洞)을 설치하여 한성부는 5서 288계 775동으로 하였다.1895년 지방행정 개혁에 따라 8도(道)제도를 폐지하고 23부(府) 337군(郡) 제도를 시행하면서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부를 한성군(漢城郡)으로 격하하고 한성부는 양주군 · 광주군 · 적성군 · 포천군 · 영평군 · 가평군 · 연천군 · 고양군 · 파주군 · 교하군의 11개 군을 관할하게 하였다.따라서 종래의 한성부의 기능은 한성군이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1896년에는 23부 제도를 폐지하고 조선 13도 제도를 시행함에 따라서 1개 군으로 격하되었던 한성부는 조선왕조의 수도로서의 위치를 회복하였으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수도 한성부도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Q. 경제 대공황이 일어난 배경은?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쟁의 역사로 치닫는 암울한 시기는, 1929년 미국의 윌 스트리트에서 불어온 대공황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공황은 전 세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일본의 피해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컸다.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0여 년간 한 번도 호황이 없었다. 게다가 대공황이 일어나기 2년 전에는 금융 공황까지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경제 재건을 위해 철저한 긴축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그 여파로 일본의 거의 모든 산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세계 대공황의 쓰나미(津波)가 일본에 몰아닥친 것이다.대공황이 일어나기 직전, 1920년대는 일본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시기였다. 1928년 처음으로 25세 이상 남자라면 누구나 참여하는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대공황 당시 일본 정부는 보통선거로 선출된 다수당에 의해 내각을 결성했다. 이제 일본도 본격적인 정당 정부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본의 민주화는 막 첫발을 뗀 상태였다. 그래서 대공황의 거대한 위기 앞에서 정당 정부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정부는 대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만으로 급한 불을 끄려는 식의 미봉책을 취했다. 게다가 여전히 자본가와 대기업에 특혜를 주고 정치 자금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숙한 정당 정부는 대공황의 파산위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인간은 악취를 풍기는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그대로는 살 수 없다. 어떤 희망, 거짓일지라도 희망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이때 일본의 국가주의가 가공 희망을 앞세워 위기의 토양에 급속히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희망이란 건 바로 전쟁이었다. 국가주의는 현실의 모순을 증폭하고 진실을 호도하여 전쟁을 옹호했다. 그들의 시도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공황의 위기에서 본격화된 국가주의는 태평양전쟁까지 하나의 연결체로서 결합되었다.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일본에서 '학계의 천황'이라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권위를 얻은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는 패전 직후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과거 서양의 생활양식을 재빨리 흡수하고 서구의 전통에 밝았던 지식인들조차도 그토록 파멸적인 전쟁 속으로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질질 끌려갔을까? 아니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는가?"일본 국가주의가 가장 전면에 내세우는 상징과 명분은 천황이었다. 그들은 이를 '국체'라 표현했다. 즉 '신성불가침한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국'이었다. 국체, 즉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 국가는 1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절대적인 권위 그 자체였다. 일본에서는 국체를 넘어서는 다른 어떤 종교적 · 도덕적 가치도 없었다. 국체는 위기에 선 일본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우익청년에 의해 저격당한 하마구치 수상.일본의 국가주의자들은 "정치가, 자본가, 대지주 등 지배 계급이 자기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국가적 위기가 왔다"고 비난했다. 대표적인 국가주의 사상가 기타 이키(北一輝)는 고도로 집권화된 국가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전체가 하나로 되는 사회, 즉 계급 갈등이 없고 천황의 직접 지배 아래 아시아의 7억 형제들을 서양 열강의 식민지 굴레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통일된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일본의 국가주의는 국민들에게 천황에 대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며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동조자를 찾아 모았다. 특히 국가주의 사상은 총력전을 위해 새로운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믿고 있던 장교들 속으로 강력하게 파고들었다.국가주의자들은 폭력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1930년 11월 광신적인 우익 청년은 런던 해군군축조약에 항의하여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를 저격했다. 1931년 3월과 10월에는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었다. 즉 일부 장교들이 정당 정부를 몰아내고 군부 정권을 수립하려는 쿠데타였다. 경제대공황의 여파가 닥치면서 일본사회는 합법적인 틀 안에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채, 폭력행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외국 기자는 당시의 일본 정치를 '암살에 의한 정치'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Q. 조선 문신인 최명길은 어떠한 업적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이끈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조선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가장 암울한 시기에 활동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그의 주화론은 척화론(斥和論)의 대표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과 줄곧 비교되면서 조선후기 사회를 유지하는 지표 역할을 하였다.최명길이 살았던 시기의 조선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모든 방면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현실적이고도 개혁적인 이념은 퇴조하고 보수적인 사림정치가 무르익어가면서 명분론과 예론(禮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때였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국토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양반의 면세와 면역으로 국가재정은 궁핍해져 갔다. 신분 질서 또한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인조를 지지한 반정 1등 공신최명길은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를 국왕으로 추대한 1등 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것은 부친과도 관련이 있다. 부친인 최기남(崔起南, 1559~1619)은 광해군대에 영흥부사로 있다가 계축옥사에 연루되었고,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하여 경기도 가평에서 7년을 은둔하다가 병사하였다. 최기남은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정철의 건저문제(建儲問題- 선조 24년에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싼 동인과 서인간의 싸움)로 서인이 실각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과거시험을 볼 자격을 잃기도 했으나, 1600년(선조 33)에 벼슬길에 들어와 왕자들의 사부로 임명될 정도로 학식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최기남은 모두 5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인 몽길이 일찍 죽고 그 아래 둘째가 래길(來吉)이며 셋째가 명길이다. 그 밑으로 혜길(惠吉)과 만길(晩吉)이 있다.최명길의 묘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지만, 태어나기는 1586년(선조 19) 금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겸(子謙)이며,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지천(遲川)이다. 8세 때에 "오늘은 증자(曾子)가 되고 내일은 안자(晏子)가 되며, 또 그 다음 날엔 공자(孔子)가 되리라."라고 맹세해 부모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배웠고, 조익(趙翼)·장유(張維)·이시백(李時白)과는 절친한 사이였다.최명길은 20세 때인 1605년(선조 38) 한 해에 소과와 대과시험을 모두 통과해 내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중앙 정부에 진출하여 홍문관 전적이 되었지만, 북인의 권력독점이 심화되던 1614년(광해군 6)에 병조좌랑에서 삭직(削職-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명부에서 이름을 지움)되었다. 이후 선조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자 이귀(李貴)가 중심이 된 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인조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그 공이 인정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반정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이조좌랑에서 이조참판에까지 출세길을 달렸다.사류 배척을 받은 인물최명길은 병자호란이라는 전란만 없었다면 관료로서 뛰어난 업적을 칭송받았을 것이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관제개혁을 주장하였고, 병조참판 시절에는 백성들의 부세 및 군량미를 경감시키는 정책을 폈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던 중에는 인조의 친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조사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던 인조를 추대한 탓에 인조의 생모인 계운궁의 3년상과 생부 정원군의 별묘(別廟) 건립을 주도하여 두고두고 사류(士類)들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편찬자가 최명길의 졸기를 쓰면서 ‘소인(小人)’이라 지칭한 것도 이 일과 연관이 있다.그러나 사류들의 배척과 달리 인조의 여전한 신임으로 이조판서가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고 호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던 중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척화론에 맞서 적극적으로 화의를 주장하여 또 한 차례 사류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지만, 위기에 대처한 공로로 우의정 및 좌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조선시대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모두 정승 반열에 오른 인물로 15가문을 꼽을 수 있는데 최명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숙종대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 바로 그의 손자이다. 최석정은 영의정을 무려 8번 역임한 인물로 할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념적으로는 양명학적 경향을 띠었고, 수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다.최명길은 병조판서를 지냈고 인조조에 도원수를 지낸 장만(張晩, 1566~1629)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이후 허린(許璘)의 딸을 후처로 맞았다. 장만은 사위와 함께 인조반정을 도왔고, 이괄의 난을 진압한 문관 출신의 장군이다. 최명길은 후량(後亮)과 후상(後尙) 두 아들을 두었는데, 후량은 동생 혜길의 아들을 양자로 들인 것이고, 후상은 후처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손자인 최석정은 양자인 후량의 아들이다. [현종개수실록]에는 화친을 주장한 부친과 관련한 두 아들의 일화가 전하는데, 최후상은 과거에 급제한 뒤 그를 음해하고자 하는 자가 강화도 시절의 일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모함을 하자 원통한 마음을 품고 벼슬길에 나가려는 뜻을 끊어 버렸다. 최후량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장수를 찾아가 자신이 최명길의 아들임을 밝히고 가족의 안위를 지켰다고 한다.소인이라 지칭한 실록의 졸기최명길의 묘소(좌)와 신도비(우).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숙종 28년(1702)에 세워졌다. 비문은 박세당이 짓고 최창대가 글씨를 썼으며, 1980년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을 세웠다.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소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59호.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명길의 졸기를 보면, 그가 동시대에 선비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인물 됨됨이를 가리쳐 실록 찬자(撰者- 글을 지은 사람)는 “기민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다”고 했다. 더욱이 화의론을 주장하여 선비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내용까지 노골적으로 쓰고 있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청나라에 보냄으로써 개인감정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바르지 못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였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평가했다.최명길의 졸기는 척화론의 영수였던 김상헌의 졸기와 비교해 볼 때 초라하고 평가절하된 모습이 역력하다. 최명길은 인조반정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 묘정에 배향되지도 못했다. 세월이 흘러 숙종이 인조 묘정에 다시 배향하라고 했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끝끝내 배향되지 못했다. 반면, 김상헌의 척화론은 송시열의 숭명배청(崇明排淸) 이데올로기로 이어지면서 노론 정국 속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자손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주역이 된 반면, 최명길의 후손은 증손자대 이후로는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실록 찬자는 김상헌의 길고 긴 장문의 졸기 말미에 그를 가리켜 “문천상(文天祥)이 송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문천상 뒤로는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극찬했다.서인정권의 외교 실책과 병자호란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 중의 하나는 친명반청(親明反淸)이었다. 광해군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했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최명길은 이 시기부터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하였다.정묘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년) 중원을 장악한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조의 요구에 불쾌한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청과의 일전에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최명길은 인조가 강화도로 하루빨리 옮겨가기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 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이제 조선 정부는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청과 강화를 맺어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1637년 1월 23일 밤,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강화가 성립되어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는 수모를 겪었다.항복 문서를 쓰다최명길이 강화를 청하는 국서(國書)를 지은 날이 1637년 1월 18일이었다. 척화파인 김상헌이 그 글을 찢고 대성통곡하여 울음 소리가 임금의 거처까지 들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김상헌은 최명길을 향해 “그대의 아버지는 자못 명성이 사우(士友) 간에 자자하였는데, 공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라며 꾸짖었다. 최명길은 “어찌 대감을 옳지 않다 하겠소. 그러나 이는 곧 부득이한 것입니다.” 하고, 빙그레 웃으며 “대감은 찢었으나 나는 이것을 주워 붙여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청(淸)에 보내는 답서를 다시 주워 모았다.강화를 향한 최명길의 의지는 단호했다. 당시 항복 문서를 작성하는 최명길을 만난 김류는 “내 뜻은 그대와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선비들의 공론은 어찌하겠는가?”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들이 비록 만고의 죄인이 될지라도 차마 임금을 반드시 망할 땅에 둘 수는 없으니, 오늘의 화친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 답했다.최명길의 강화론은 간단했다. 청군에 대항해 봐야 힘이 미치지 않는데, 만약 싸우게 되면 나라가 절단난다는 것이다. 비록 비굴한 모양새를 취하더라도 나라만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후금의 사신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외침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싸우자는 소리만 외칠 뿐이었지 실제로는 아무런 방책도 없이 우왕좌왕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백성들의 시체가 산처럼 높아져만 갔다.심양에서 만난 척화파 김상헌과의 화해강화가 이루어 진 뒤 최명길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이 청과 강화를 한 것은 종묘 사직을 위하여 보존하기를 도모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의 자문(咨文- 외교문서)을 보내고자 했다. 요동을 지키는 청의 눈길을 피해 바닷길로 은밀하게 보내야했다. 1638년 가을에 강가에서 경비하던 군사가 독보(獨步)라는 이름의 중을 데리고 왔는데 최명길은 이 사람에게 명나라에 자문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자문은 마침내 명나라 황제에까지 전달 되었다.최명길은 1642년(인조 20)에 명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청국에 소환되었다. 최명길은 용골대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왕은 모르는 일이고 자기가 전적으로 한 일이라 했다. 이윽고 수갑과 쇠사슬이 채워진 상태로 심양 북관(北館)에 갇혔는데 북관은 사형수를 가두어두는 감방이었다.이듬해 4월 최명길은 북관에서 남관으로 이관되었는데, 당시 남관에는 김상헌이 수감되어 있었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표가 나라를 위하다가 청나라의 감옥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운명적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명예를 위하는 자라 판단하고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하였는데, 같이 구금된 상황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탄복하였다. 김상헌도 최명길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다름 없는 인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강화론이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사람은 서로 마음을 풀고 시를 지으며 우정을 나눴다.양대의 우정을 찾고 / 從尋兩世好백 년의 의심을 푼다 / 頓釋百年疑김상헌의 시를 받은 최명길이 답시를 주었다.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 君心如石終難轉나의 도는 둥근 꼬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네 / 吾道如環信所隨머나먼 타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한 것이다.마침내 최명길은 1645년(인조 23) 3월에 풀려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60세. 이제 병들고 늙은 몸만 남아 있는 노인이었다. 귀국한 지 2년 후 병으로 누운 뒤 인조가 직접 문병을 갔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5월 17일 62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후세의 평가경기도 광주 출신의 실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은 훗날 광주부지를 만들다가 남한산성의 일을 떠올리며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서 최명길을 가리켜 ‘나라 팔아 먹은 자’라 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조선시대 사류들이 어떤 평가를 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생각하면 그 옛날 최 승상은 / 憶昔崔丞相오랑캐 추장을 자주 가 만났는데 / 頻頻使虜酋초구 내린 황은이 중하다고 / 貂裘皇恩重절 세 번에 아홉 번 머리 조아렸네 / 三拜九叩頭(중략)오랑캐 세력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 虜勢雖云怕명 나라 은혜는 잊지 말았어야지 / 皇恩不可忘일단 군대를 모집하여 / 徵兵一段事힘으로 싸웠어야 할 것 아닌가 / 當以力爭防우리 나라가 삼백 년 동안 / 聖朝三百載선비 양성하여 어진 신하 있었건만 / 養士得賢臣마침내 지천(최명길) 같은 자는 / 到底遲川子결국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지 / 竟將國賣人최명길 만큼 후세의 논란이 많은 인물도 많지 않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조선사회는 더욱더 의리나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었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일 수 없었다.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은 할아버지의 묘지명을 남구만(南九萬, 1629~1711)에게 부탁하면서 ‘의리’라는 이름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의 행적을 변호하고자 했다. 최석정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남구만은 최명길의 묘지명을 쓰긴 했으나 끝내 ‘의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최석정은 남구만의 비문을 버리고 박세당(朴世堂, 1629~1703)에게 다시 묘지명을 써달라고 했다. 반면에 서포 김만중은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 하고 최명길을 ‘자기가 맡은 직분을 다한 자’라 평가했다. 그러나 현실은 조선후기 정치의 장에서 소외된 인물이었고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의 양명학적 사유나 상수학(象數學)은 그의 아들을 거쳐 손자인 최석정으로 계승되었지만, 조선후기 주류 사상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