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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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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전문가
EBS
Q.  빈 소년 합창단에 역사에 대해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빈 소년 합창단(Wien 少年合唱團, 독일어: Wiener Sängerknaben, Vienna Boys' Choir)은 오스트리아 빈에 기반을 둔 보이 소프라노와 보이 알토의 합창단이다. 파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퇼처 소년 합창단과 함께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불린다.역사빈 소년합창단은 1498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칙령에 의해 설립된 궁정소년합창단이며, 최초에는 궁정예배당에 봉사하는 합창단이었으나, 차차 일반의 콘서트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 이후 민영체제로 전환되었다.구성단원은 대체로 7세부터 13세까지의 변성기 전의 100명 남짓한 소년으로 이루어졌으며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학문과 음악을 공부한다. 30명 정도로 편성된 4개의 그룹이 있는데, 그 중 3개는 해외에서 활동하며 나머지 하나가 Wiener Hofmusikkapelle의 예배나 콘서트 등에 출연한다.소년들은 개인 오디션을 통해서 뽑는다. 보통은 오스트리아에서 뽑지만, 스위스, 러시아, 페루, 슬로바키아, 독일, 헝가리, 캐나다, 미국,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 뽑는 경우도 있다. 2010년 6월에는 조윤상이 대한민국 국적으로는 최초로 빈 소년 합창단에 뽑혔고,[2] 2012년 9월부터 김보미가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1498년부터 지금까지 유니폼을 입는데 현재 유니폼은 세일러복 형태이다. 1948년부터 팔레 아우가르텐(Palais Augarten)이 주 연습장이다.곡목레퍼토리는 광범하여 종교음악, 독일가곡이나 민요, 빈 왈츠뿐만 아니라 가벼운 오페라 등을 노래하기도 하는데,[1] 성가곡, 성탄절 캐롤 등을 즐겨 부른다.평가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으로 평가되는 빈 소년 합창단은 파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과 함께 항상 '세계 3대 소년합창단' 안에 꼽힌다.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합창단이므로 이 합창단 출신의 대음악가도 많다. 하이든, 슈베르트, 클레멘스, 크라우스 등도 그러하다.이 합창단의 연주를 들은 비오 11세는 "마치 천사의 노래를 듣는 것 같다"고 격찬한 바 있어 그 이후로 이 합창단을 '천사의 소리'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비브라토(목소리를 떠는 창법)가 없는 맑고 깨끗한 소년 특유의 목소리 때문에 전세계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Q.  동화작가 권정생님의 작품들은 무엇이고 어떻게 평가받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 제국의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귀국했다. 조선인연맹에 가입해있던 친인척 둘은 나중에 뒤따라 오기로 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아 평생 생사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귀국 후에도 살림이 무척 어려워서 국민학교도 겨우 졸업했고, 또한 바로 나무 장수, 고구마 장수, 임노동자 등의 궂은 일을 하며 성장했다.19세 때 그는 폐병에 걸려서 항생제를 보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으나 공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허탕치는 날이 많았으며, 같이 폐병을 앓던 고향친구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폐결핵과 늑막염을 거쳐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인하여 온 몸이 망가져버려서 사람 구실을 못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평생 오줌통을 몸에 차고 살아야 했다.이런 상황에 부모님마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집도 없고 기댈 곳도 없어진 그는 1967년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일직교회 부속의 토담집에서 기거하며 종지기를 하게 되었다. 생활은 여전히 조악해서, 여름이면 소나기에 뚫린 창호지 문 구멍 사이로 개구리가 들어와 울고, 겨울이면 생쥐들이 들어와 발가락을 깨물거나 옷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엔 깜짝 놀라고 귀찮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고 나중에는 아랫목에 먹을 것을 두고 생쥐들을 기다릴만큼 정이 들었다고 한다.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교회 뒤편의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며 꾸준히 창작을 했다.1981년작 몽실 언니 등의 베스트셀러를 쓰면서 수억원에 이르는 인세를 매년 받았으나, 정작 산골의 흙집에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고, 옷도 단벌이어서, 이웃 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가난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사망 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과 그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알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실 여기엔 어두운 뒷 이야기가 있다. 출판사에서 지급한 권정생의 인세가 작가에게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 사라진 것. 출판사와 권정생 사이에 있던 아무개가 착복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 아무개는 "권정생은 워낙 순수한 사람이라 돈이 있어도 쓸 줄 몰라 주지 않았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금전에 무지한 권정생이 훗날 유언장에 유산에 관한 부분을 남기게 된 사연이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연 선생께서 정말로 모르셨을까?사망 2년 전에 작성한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3. 박연철 변호사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는 것이 무척이나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낭만적으로 삶을 마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췄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것은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에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그리고 타계 직전에 쓴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남북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중동, 아프리카, 티벳 어린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기도 많이 해주세요.마지막 유언은 "어머니… 어머니 아아, 어머니…"였다고 한다.(권정생 위인전 참고)현재 그의 재산은 유언에 따라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서 관리하며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기에 사용되고 있다.
Q.  청나라 건륭제는 어떻게 황제에 올랐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711년(강희 50년) 9월 25일, 자금성 인근 옹친왕부에서 당시 시첩이던 뉴호록씨와 옹친왕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력의 어머니 뉴호록씨는 만주족이었지만 출신이 미천하여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수녀(秀女)가 된 뒤 옹친왕부에 배속되어, 윤진의 후궁인 측복진(側福晉) 이씨[3]의 시녀로 있었다.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에 의하여 그다지 부각되지 않던 홍력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천자문과 사서오경을 꿰뚫어 암송하고 시를 잘 지어 1720년(강희 59년) 겨울에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특별히 궁정에서 기르기 시작하였다.황손인 홍력은 황자들만 교육받을 수 있던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하였는데 이곳에선 홍력 이외에도 자질이 남다른 여러 황손들과 홍력과 동갑인 숙부 윤희(胤禧)도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강희제에게는 20명의 황자와 100명 안팎의 손자가 있었는데 강희제는 손자들의 상당수를 알지도, 심지어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황손들 중 궁정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특별히 뽑힌 홍력이 문재에도 탁월하였고 사냥에서는 어린 나이에 곰을 두려워하지 않고 화살로 힘들이지 않고 잡자 이를 매우 기특하게 여긴 강희제는 어릴 때의 자신을 닮았다며 홍력에게 기본적인 제왕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특별히 자금성을 지키는 금군 무관에게 명해 홍력에게 무예를 전수해줄 것을 명하였다. 어떤 때에는 노구의 강희제가 직접 홍력의 무술을 보고 가르치고 같이 수련하였다. 궁정에서 살면서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자주 자신이 살던 옹친왕부로가 부왕인 옹친왕 윤진과 적모인 적복진 오라나랍씨, 그리고 어머니에게 문안드렸고 이러한 성실한 모습을 본 강희제가 더욱더 총애하였다.1722년(강희 61년) 12월, 홍력의 조부이자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가 노환으로 붕어하자, 당시 정국을 면밀히 관찰하던 홍력의 아버지 옹친왕 윤진이 군사들과 대신들을 이용하여 황위에 오르니 이가 옹정제이다. 강희제는 임종 직전, 윤진을 불러서 미래의 황제는 홍력이니 황위를 반드시 홍력에게 물려주라 명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에 따라 황위에 오른 옹정제는 미리 황태자로서 홍력의 이름을 써서 그 함을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올려놓았다.강희제와 같이 홍력의 재주를 귀히 여기던 옹정제는 상서방에 계속 보내어 공부를 시키게 하였고 홍력을 지도하였다. 이듬해인 1723년(옹정 원년) 옹정제는 13살의 홍력에게 자기 대신 선황제인 강희제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세간에서는 이미 옹정제가 홍력을 후계자로 눈여겨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홍력이 나이가 들수록 학식 또한 깊어지자 옹정제는 홍력의 제왕학을 손수 가르치고 홍력이 정치를 배우는 데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이를 바로 잡아주었다. 홍력은 오전에는 서화에 몰두하였고 정오에서 유시(酉時, 오후 6시)까지 정무에 매달리며 한편으로는 쉬운 국정을 처리하면서 정치를 배워갔다.그러나 옹정제의 셋째 아들이자 홍력의 이복형인 패륵 홍시(弘時)는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옹정제와 척을 지고 있던 숙부이자 강희제의 8남 염친왕 윤사(廉親王 胤禩)와 손을 잡았다. 윤사가 노골적으로 부추기자 홍시는 홍력을 모함하였으나, 옹정제는 오히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홍력을 몰아붙이는 홍시를 의심하였다. 1725년(옹정 3년), 홍시가 홍력을 암살하려던 일이 발생하자 진노한 옹정제는 홍시를 윤사의 아들로 입적시켜버렸고 1727년(옹정 5년)에는 윤사 일당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는 이유로 모두 잡아들여 하옥시키고 아들인 홍시마저도 잡아들인 후, 황실 대동보에서 그의 이름을 제명하였다.[ 이 때 잡힌 윤사, 윤당은 곧 옥에서 독살당하고 홍시 역시 얼마 안 가 감옥 안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에, 홍력은 부찰씨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더 이상 홍력에 맞서 황위를 노리는 경쟁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홍시가 죽고 난 후, 홍력이 당시 옹정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였기에, 대다수 대신들은 이변이 없는 한, 홍력이 황위를 승계할 것이라 믿었다. 1733년(옹정 11년), 홍력은 화석친왕(和碩親王) 직을 제수받고 보친왕(寶親王)이라 불렸고 이 때부터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군기처에서 지내며 아직 완전히 섬멸되지 않은 몽골의 준가르 부족에 관한 일을 도맡았다. 또한 태묘, 사직 대제나 공자와 관우의 제사 등 황제가 주관해야 할 국가의 중요 대사를 옹정제를 대신하여 주관하였다. 1734년(옹정 12년), 옹정제가 연로해져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때에는 홍력이 나서서 섭정으로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Q.  씨름의 유래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씨름은 이미 상고시대부터 시작된 운동 경기로, 형성 과정은 알 수 없으나 각종 기록을 통해 역사를 대강 알 수 있다. 씨름은 그 긴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이 있는데, 주로 각저(角抵)·각희(角戱)·상박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 15세기 이후로 '실훔'에서 '실홈'을 거쳐 '씨름'이 되었다.4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만주의 고구려 고분 각저총과 5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보는 장천 1호 무덤에는 씨름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따라서, 이미 고구려 때 씨름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다. 사서에 쓰여진 씨름에 관한 기록은 조선 세종 때 제작된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씨름에 대한 기록은 백제인이 남긴 기록이 거의 없어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쓴 사서를 참조하고 인용하여 쓴 삼국사기 등에서 기록을 찾아봐야 하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사신이 왜국에 갔을 때 일본 대왕(오오키미)가 연회를 열었고 백제 사신 앞에서 왜인 무술인 둘을 스모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백제에서도 씨름을 했던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1419년 6월 15일에는 태종과 세종이 각력희를 강변에 보았다고 전한다. 1430년 12월에는 상총이라는 스님이 씨름을 하다가 상대방이 죽게 되었는데, 나라에서는 관대하게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664년 5월에는 씨름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여 상대방을 칼로 찔러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씨름을 하거나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기산의 풍속도와 같은 씨름에 관한 그림도 많다. 특히,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가 그린 씨름도가 유명한데, 격렬하게 씨름을 하는 두 남자와 구경꾼이 둘러싼 그림이다. 김홍도의 씨름도는 당시 조선에서는 씨름이 매우 대중적인 경기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씨름은 때론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한 때 씨름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Q.  발해는 어떻게 세워졌고 어떻게 멸망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건국668년 당은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을 차지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은 고구려 유민을 통제하기 위해 영주(榮州)로 강제 이주하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해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당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으므로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696년 5월 마침내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봉기하였고 혼란한 틈을 타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사리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탈출해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동 도중 말갈인을 이끌던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대사리 걸걸중상이 전사하면서 대조영이 무리를 이어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와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에 위치한 읍루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을 차지하고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를 정복하여 도호부의 한족들을 노비로 강등시키면서 곧 진국(震國, 振國)을 건국하였고 말갈 촌장, 고구려 촌장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 고왕(高王) 대조영은 천통(天統)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다.당나라는 대조영의 발해 건국이 기정사실화 되고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를 발해에게 정복당하고 안동도호부도 멸망하자 발해인들을 달래기 위해 705년 책봉을 시도했지만 불발되었다.713년 대조영은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이 되었고 홀한주(忽汗州)[28]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벼슬을 추가했다. 당나라는 발해의 번성에 굴복하였다.안정과 성장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말갈족들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영토 확장의 편리성과 지방세력의 약화, 즉 왕권 강화를 위해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 현덕부로 옮긴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가령 발해 북쪽의 흑수부(흑수말갈)와 연합하여 대응해 나갔다. 발해는 당나라 지역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고 당나라인들은 발해를 두려워해 중국인 한족(漢族) 여성들을 발해에 상납하였다.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족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산둥(山東)의 등주(登州)를 급습하여 순식간에 점령, 자사 위준을 죽였다. 한편, 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였다. 이때 신라는 당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발해에 출병하였으나, 겨울에 공격하여 진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하여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 시기에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동북 방면의 말갈을 복속시켜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영토 확장과 발전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756년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발해의 수도가 상경으로 옮겨진 이후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발해는 당의 문물도 수용하여 3성(三省)[33]과 6부(六部)[34]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았다. 발해는 문왕 때부터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35]로 천도하였으나, 5대 성왕(成王) 때 다시 상경 용천부로 천도하였다.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대원의(大元義)·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지배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점점 약화되었다.9세기 전반,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으로 간왕의 삼종숙(三從叔)인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 당은 발해의 융성함을 일컬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발해는 선왕 시기에 중국 문헌에 따르면 바다 북쪽으로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다. 또 요동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 유역을 기습적으로 점령하고, 그 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영역을 형성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는데,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방의 주 밑에는 여러 현을 두었다.8세기 전반에서 9세기 후반기에 발해(혹은 속말)말갈이 남만주 지역에서 아무르 유역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빠르게 아무르 유역을 정복하며, 이후 아무르 강 상류를 따라 서아무르 평원의 북서쪽인 실카강까지 진출했다. 비트틱 산 성터, 류잔카 성터, 우스티-쵸르나야 성터 등과 같은 유적이 그러한데,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 주민들이 아무르 강을 따라 실카 강까지의 북서지역까지 장악한 결과로 파악한다.[36] 말갈 확장에 대한 지역민인 부르호토이 주민(실위)의 저항은 이주민으로 하여금 실카 강과 초르나야 강의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에 방어용 취락지를 건설하도록 강요하였다.쇠퇴와 멸망선왕 사후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38] 발해 멸망을 상세히 다룬 요사의 기록[39]을 고려하면 수도 급습설이 유력하다.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부족을 통일하고 대거란국(大契丹國)을 건국하였다. 이후 발해와 거란은 요충지인 요동(遼東)을 두고 10년간 쟁탈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발해가 소모전에서 패했다. 요동을 잃은 발해에선 당시 고구려인과 동맹 관계였던 말갈(靺鞨)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10년 간의 공방전으로 요동을 빼앗겼지만 발해는 924년 5월에 요동을 공격해서 탈환한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았다. 925년 4월 요군은 발해의 신주를 먼저 공격해서 요동 방어선으로 군사를 몰리게 만들었고 이는 12월까지 계속되었다. 요는 발해가 요동에 방어선을 다진 걸 틈타서 발해와의 무역로인 거란도를 통해 기습 공격하였고, 부여부(夫餘部)를 3일 만에 함락하였다. 이후 발해의 혼란을 틈타서 요의 군대는 수도 홀한성(상경용천부)으로 직진하여 함락시켰다.발해와 요의 전쟁은 무려 20여 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요동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는 요의 승리로 일단락되고 발해는 요동 지역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면서 경제, 군사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비록 발해는 요동 지역을 상실했지만, 아직 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국가였다. 919년 요동을 병합한 요의 침입을 격파하고 924년 5월 발해가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함락시킨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은 발해의 군사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의미했다.당시 국제적 환경은 몽골 초원의 위구르 제국의 해체, 토번 제국의 붕괴, 중원의 당나라의 몰락과 오대십국시대, 한반도가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란기였다. 이런 가운데 대인선(大仁善)은 군사적인 대응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적절히 요를 견제 하였는데, 주변 국가와 결속을 맺어 요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요사 본기에 '이심'이라는 표현대로, 924년 여름을 기점으로 하여 발해에 내부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발해가 멸망 전부터 고려(高麗)로 망명하는 발해인이 장군 등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귀화한 것이다.발해의 이런 내부적 상황을 파악한 요나라는 20여년간의 전쟁 경험을 통한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전술을 계획한 것이다. 즉 요동 방어선을 우회해서 공격해서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였다. 발해 유민들의 저항인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끈질기게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발해의 후예임을 칭하며 건국한 나라는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요나라와 금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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