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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① 임진왜란 당시 동아시아의 상황* 명 : 조선과 오랫동안 친선 관계를 맺어 왔던 명은 정치적 혼란으로 황제의 권위가 약해지고 나라가 흔들리고 있었음.* 조선 : 이웃 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조선은 군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음.* 일본- 일본을 통일하고 새로운 지배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규모 군대를 보내 조선을 침략하였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많은 수의 군사를 지닌 지방 세력가들의 힘을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침략하는 데 쓰려고 하였음.② 임진왜란의 발발 : 한반도와 중국을 정복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으로 가는 길을 내어 달라는 핑계로 16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부산으로 쳐들어왔습니다.(임진왜란, 1592년)
Q.  조선시대에서는 왜 종기로 매우 고생을 하고 종기로 죽은 일이 매우 많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대의학처럼 종기를 째고 위생을 지켜서 소독을 잘하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조선시대에는 째는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탕약 처방등이 주를 이뤄서 염증에 대한 후유증 등을 이기지 못해 간단한 종기 문제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경우들이 많다고 합니다.
Q.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싫어서 그가 한 여러 정책과 행동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선조가 요동 망명을 고집하자 신료들의 건의에 따라 분조(分朝)를 결정하였다. 세자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수개월 동안 평안도 · 강원도 · 함경도 등지를 오가며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독려하는 등, 국왕의 몽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규합하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명나라 황제의 칙서에 따라 무군사(撫軍司)를 이끌며 야전을 누볐다. 이에 민심은 선조를 떠나 광해군에게 크게 쏠렸다.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선조는 광해군을 심하게 견제하였다. 명나라 장수를 접견하는 자리에 임해군을 동석시키는가 하면, 젊은 계비에게서 끝내 영창대군을 낳는 등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심각하게 흔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내부 사정으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奏請)은 무려 다섯 차례나 거절당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은 어렵게 즉위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는 국왕 책봉을 또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장자 임해군의 병세가 과연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차관을 파견하는 등 새 국왕 광해군에게 씻기 힘든 수모를 주었다. 결국 책봉을 받기는 하였으나, 장자도 적자도 아니라는 출생 신분은 광해군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Q.  임진왜란당시 선조는 중국의 어느땅에서 정착하여 어떤 계획을 세웠던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선조가 중국까지 피난을 가진 않았습니다.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의정부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에 임명하고, 이전과 변언수(邊彦琇)를 수성좌위장(左衛將)과 경성우위장(右衛將)에[21], 신각(申恪)을, 중위대장(中衛大將)에, 박충간(朴忠侃)을 경성순검사(京城巡檢使)에 임명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도성을 방비하게 하였다. 선조는 한편으로 징병대를 구성해 징병 체찰사(徵兵體察使)에 이원익과 최흥원을 임명하고 징병대를 전국에 보내 15~60세 남성을 징집하게 했다.송상현, 정발 등이 전사하고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도원수 신립과 부원수 김여물이 이끄는 토벌대 1만 6천명이 몰살당하고 4월 말 일본군은 경기도로 들어왔다. 이에 선조는 파천, 천도를 결정한다. 이후 일본군이 개성까지 함락하고 황해도로 북진해 오자, 선조와 백관 일행은 또다시 도망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 4월 28일 선조는 대간을 불러 파천을 상의하고, 바로 조정에서는 파천을 논의하였다. 바로 정사가 소집되고 대신들은 모두 파천을 반대하였다. 이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혼자 울며 통곡하다가 정사가 끝난 뒤 승지 신잡(申磼)에게 과거에도 피신한 사례가 있었다며 설명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은 모두 이산해를 비판했다.혼란에 빠진 선조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에 도승지 이항복은 의주에 가서 어가를 멈추고 있다가 만약 어려운 상태에 빠져서 힘이 다 없어지고 팔도가 적에게 모두 함락된다면, 즉시 명나라 조정에 가서 사태의 위급함을 호소해야 한다면서 중국과 가까운 의주 쪽으로 피난할 것을 건의했다.[22]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 최흥원, 우부승지 신잡, 주서 조존세(趙存世), 가주서 김의원(金義元), 봉교 이광정(李光庭), 검열 김선여(金善餘) 등을 만나 파천을 선언한다. 바로 광해군을 세자로 정했는데, 세자 책봉은 평양성에 도착하여 임명한다. 한편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오는가 하면 4월 29일 해풍군 이기(海豊君 李耆) 등은 궐문을 두드리며 통곡했다. 이에 선조는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천도는 결정되었고 4월 30일 궁인들을 소집한 선조는 궐문을 나섰다.한양에서 백성을 두고 도망친 선조와 백관 일행은 임진강을 건너자 일본군의 추격을 늦추려고 나루터를 방해하고 배 여러 척을 침몰시켰다. 선조 일행은 일본군이 한강 이남까지 진격해 오자 다시 도망쳤으며,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서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당시 선조는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기는 천도를 계획했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592년 6월 22일 의주 행재소에서는 명나라로 망명을 계획하고 사신을 보내 6월 27일 망명 허락을 명나라로부터 받았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선조는 이런 굴욕 속에서 몽진에 성공하였다.도성의 사대부들의 계속된 환도 요청과 사헌부와 사간원이 여러 번 선조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 1593년(선조 26) 9월 21일에 출발하여 10월 3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의주까지 가서 명나라로 피신, 망명정부를 세울 것도 고려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속된 환도 요청에 선조는 1593년(선조 26) 9월 7일 양위 의사를 밝혔다가 승정원의 만류와 9월 21일 의정부좌의정 윤두수의 만류로 철회하였다. 1593년(선조 26) 8월 의주에서 몇차례 남하하여 평양성을 거쳐서 해주까지 왔다가 다시 의주 근처로 올라가는 일을 반복하였다.1593년 9월 20일 윤두수는 속히 환도할 것을 주청하였다. 선조는 갈팡질팡하다가 1593년(선조 26) 9월 22일 해주를 출발, 9월 23일 연안부에 도착, 2일간 머무르자는 비변사의 건의로 4일간 머무르다가 9월 27일 개성, 9월 28일 파주 동파역(東坡驛)을 거쳐 9월 29일 고양 벽제관을 거쳐 10월 1일 벽제관을 출발, 한성부 정릉동 행궁에 나타났다.
Q.  역사공부하다보니 한국전쟁이 일어난 배경이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한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하여[32] 발발한 전쟁이다.교전이 이어진 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사실상 3년 1개월(1,129일)간이며, 현재까지 명목상으로는 73년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역이용해, 극동아시아의 미소 냉전 사이에서 승기를 잡으려 한 의도가 있어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하는데[33] 때문에 6·25 전쟁은 전후 냉전의 시작을 대표하는 사건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6·25 전쟁에서 각각 통일에 실패한 대한민국과 북한은 이후 한반도의 정통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걸고 대립하게 되었고, 이는 국가 운영과 국민 여론 및 의식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연속된 한국의 암흑기를 연 사건인 이 전쟁은 오늘날까지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전쟁으로 굳어진 각 체제(體制)와 상호간 대치 상태는 정전 70년이 지난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6·25 전쟁의 평화협정(종전 및 강화 조약)은 아직 체결되지 않았으며, 남북통일이 아직도 안됐기 때문에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지만, 현재 남북 양측의 국민들에게는 전쟁 중이라는 인식은 드물다. 법적으로 볼 때 대법원의 판례는 지금이 '전시'인지 '평시'인지 명확하게 입장을 내린 적이 없으며 사안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국회 또한 그러한데,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과 남북 관계의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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