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에 강간죄에 대해 어떻게 처벌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강간죄에 대한 법률은 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최고형인 교수형에 처했다. 특히 12세 이하의 어린 여아를 강간하였을 경우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강간범들을 교수형으로 다스렸다.태조 때 잉읍금이란 노비가 여아를 강간하여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세종 때 정경은 양인의 딸을 범하기 위해 밤새도록 폭력을 행사하여 살인을 저질렀는데, 정경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피해자인 처녀에게는 정려문을 세워 정절을 표창했다.강간 미수는 장형 100대와 3천리 유배형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이처럼 강간범을 엄하게 다스린 것은 피해 여성이 정절을 지키고자 할 경우헤 국한되었다. 유감동이나 어우동처럼 화간에 가까운 경우에는 장형에 불과했다.또한 신분 사회인지라 공신이나 양반이 저지른 강간 범죄는 묵인되거나 형식적인 처벌에 그쳤다. 세조 때 정4품인 유효반이 양인의 딸 영금을 유인하여 강간하였다. 사헌부에서 잡아다 취조한 뒤 교수형을 상신했으나, 세조는 유효반이 공신이라는 이유로 장형 100대와 3천리 유배로 감형해 주었고, 그나마 거의 초죽음에 이를 장형 100대도 보삭금으로 대체케 해 주었다.성종 때 청풍군 이원이 유배 당한 처지임에도 과부를 강간했지만, 왕실의 종친이란 이유로 유배지를 옮기는 것으로 무마했다.유학의 나라 조선은 여성의 정절을 중시하여 강간범죄를 엄히 다스렸다. 하지만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의 병폐는 떨치지 못하였다. 해서 이익은 ’여성이 거부하는데 남성이 강제로 겁탈하려 했다면 성관계 여부에 관계없이 강간죄에 해당한다‘며 성범죄를 더욱 엄벌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Q. 조선시대에 가장 컸던 전쟁은 어떤 전쟁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전국 시대가 끝난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두 차례의 침략 중 1597년의 제 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대명과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인구는 최소 100만 명 이상 감소했으며, 경작지의 2/3 이상이 황폐화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Q. 사망직전 한달전까지 건강했던 정조가 급하게 사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조는 조선왕 독살설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정조의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석연찮은 점과 정치적 논란 때문에 노론 지도부인 심환지와 정순왕후의 주도로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암살론이 제기되었으나 최근 심환지와 정조가 비밀리에 주고받은 서찰이 공개되어 수그러든 감이 있다. 사실 오회연교와 관련해서 전후 사정을 따져본다면 심환지를 측근이라기보다는 함께 해야 할 당파의 영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암살론 자체가 나오게 된 계기는 정조의 사후 정약용이 직접적으로 시상(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언급)한 것이 큰데 조선시대에 무고죄를 극형으로 다스린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정약용이 무슨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썼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이 부분 자체도 심환지와 당시 문제의 어의인 심인이 인척 관계인 점을 고려하면 나올 만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야음을 탄 독살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진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고 집권 기간에도 여러번의 독살 위험에 노출되었기에 정조 암살론이 단순한 억측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목소리가 있다. 문제는 다른 어의들과 달리 심인에 대해서는 꾸준히 공격적인 공세가 이어진다는 점과 심환지의 졸기 등에서 사관들이 심환지를 공격하는 부분 등이 암살설의 근거가 되는 것. 정순왕후의 경우에도 기록을 잘 보면 사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고, 죽기 직전 '수정전'을 언급해 정순왕후를 오게 한 것을 보면 서로의 신뢰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암살론의 여러 근거 때문에 《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 이덕일 등의 작가와 학자들은 계속하여 암살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암살설이 영향인지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독살된 걸로 진행된 편이라고 한다. 암살론자들은 오회연교 등 정치적으로 격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첫날에는 연훈방 처방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스스로 언급한 다음 이어서 연훈방을 처방했을 때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사실상 급사해버렸기 때문에 독살설 주장이 더욱 맹렬한 것.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정조가 단명한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애연가에 주당에 식사도 불규칙하게 했고 본인 스스로도 잦은 질병을 앓고 고통스러워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데다가 왕을 과로사로 몰고 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조선의 정치 체제를 충실히 따르다 못해 훨씬 과격하게 보낸 인물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로 인해 정조의 과격한 처방법을 두고 정조의 의술에 대한 논쟁도 발생했다. 여기서 《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정조의 성격도 요절설과 독살설에 의혹을 지핀 것이 아닌가 싶다. 정조는 매우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인지라 신하들과 갈등이 많았는데 재위 기간 24년 동안 《정조실록》에 기록된 신하들과 논쟁만 해도 5차례~6차례나 될 정도다. 조선 왕의 특성상 과로는 기본인데다 정조의 경우 스트레스와 잔병치레가 잦았고 술담배를 즐겼으며 한 사람이 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밀어붙인 점 등을 고려하면 49살에 죽은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당시에는 50세만 되어도 잘 살았다고 하던 때였고 60대까지 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5%도 되지 않던 때였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종기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또한 정조가 유별나게 조선 왕 가운데 급격하게 사망하거나 일찍 죽은 것이 아니다. 정조는 무려 24년을 재위했다. 조선 왕 가운데 절반 이상은 정조보다 짧게 살았고, 정조보다 짧게 재위했다. 나름대로 꽤 장기간 집권한 이미지가 있는 태종은 18년 재위하였으며, 북벌을 주창하며 의욕차게 일했던 효종은 11년도 재위하지 못하고 죽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듯한 세도정치를 겪었던 헌종도 15년을 간신히 넘겼으며, 굉장히 오래 재위했을 것 같은 세조는 14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사망했다. 게다가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영조의 발자취 덕분에 즉위한 직후부터 사실상의 실권을 틀어쥐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정조는 조선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히게 오랫동안 재위하면서 장기간 실권을 휘둘렀던 왕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망이 급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지만.1800년 5월 30일 정조는 대전에서 신하들과 또다시 한바탕 논쟁을 벌였고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오늘 부로 난 신하들과 일체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다.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다. 이 말인 즉슨 갈등의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는 점이며 정조가 정치적으로 단절을 선언한 셈이다. 그리고 약 4주 뒤인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끝내 승하하게 된다. 승하하기 직전에 벌어진 신하들과 논쟁에서 생겨난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질병인 종기를 악화시켜 1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역대 조선 왕들이 앓던 고질적인 지병인 종기를 앓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종기에 고름으로 굉장히 고생했다. 그 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열악한 의료 기술 탓에 종기를 어떻게 손 써보지도 못하고 인삼을 넣은 탕약만 마시다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Q. 조선시대에서는 종기를 어떤 방식으로 치료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침이나 칼로 외과적 시술을 하거나 민간요법으로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뱉거나 하는 식의 치료를 했다. 정조는 종기의 치료를 위해 신하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고, 인삼과 육화탕이 들어간 탕약을 먹었다고 한다. 정조 본인은 자신과 인삼이 맞지 않는다고 싫어했지만, 신하들은 기어이 인삼이 들어간 약을 먹였다. 많은 치료법이 있었겠지만, 당시 조선에는 소독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시술 도구의 살균처리는 고사하고 물론이고 환부의 처리도 현대 기준에서는 불완전했다. 그래서 외과적 치료를 시행해서 고름을 빼내도 재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치료법은 그저 종기의 고름만 제거할 뿐, 근원적으로 고름을 만드는 조직을 제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재발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